대방선출은 승계가 아닌 권점이라는 직선제로 선출

 

지난 23일까지 수원문화재단 특별전시실에서는 2015 근현대예술인 조망 사업 전시로 운학 이동안선생에 대한 전시가 열렸었다. 재인청은 경기도를 비롯해 충청도와 전라도 삼도에 있었으며 도 재인청 밑에는 군 재인청이 있었다. 이들의 직제는 엄격하고 까다로워서 스스로를 천민이라고 했지만 나름대로 엄격한 규약을 갖고 있었다.

 

각 도 재인청의 수장을 대방(‘도대방이란 각 도의 대방을 일컫는 말로 여겨진다)이라고 하고, 군 재인청의 수장은 장령이라고 불렀다. 재인청에서는 선생 밑에 제자들을 두어 학습을 하게 하였으며 전국에 산재한 많은 예인들이 이 재인청에서 학습을 하거나 재인청에 적을 두고 있었다고 전해진다.

 

아키바 다카시의 <조선 무속의 연구>에 의히면 대방의 선출은 재인청 인원 중에서 3명을 추천하고, 그 이름 밑에 권점이라는 점을 찍어 다수표를 얻은 사람이 맡아보는 직선제 선출을 하였다고 적고 있다. 당시에도 상당히 민주적인 방식의 선거를 했음을 알 수 있다.

 

 

경기도는 화랭이들의 가계가 즐비해

 

오산 부산동의 이용우 가계가 12대 째 대를 물린 전형적인 산이계열의 집안으로 무의식과 화랭이 춤을 지켜 온 집안이라고 한다면, 화성 남양의 이동안 가계는 4대째(일설에는 그 이상이라고 한다) 재주를 지켜온 집안이다. 고 운학 이동안 선생은 경기재인청이 폐청이 되고 난 뒤 재인청 춤 교사인 용인 김인호 선생에게 재인청 춤을 전수받았다.

 

재인청 계열의 춤은 경기도를 비롯한 충청도와 전라도 지역에도 전승이 되고 있다. 삼도에 있던 재인청은 그만큼 다양한 전통문화예술을 지역적 특성이 있는 각종 연희종목으로 남겨놓은 것이다. 경기도에서 연희되고 있는 재인청 계열의 춤은 이용우의 진쇠춤과 터벌림춤(경기도당굿 보존회로 전승)을 비롯해 이동안의 진쇠춤과 엇중몰이 신칼대신무, 태평무, 승무와 살풀이(경기도 무형문화재), 안성의 김숙자 가계로 전해진 도살풀이(중요무형문화재 지정)와 충남 의 재인 한성준으로 전해진 태평무(중요무형문화재 지정)와 살풀이춤 등 많은 춤들이 있다.

 

고 이동안 선생은 1906년 경기도 화성군 향남면 송곡리에서 재인청의 세습광대 후손인 이재학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할아버지(이화실)는 단가와 피리의 명인이었고, 작은할아버지(이창실)도 줄타기의 명수였다. 이런 광대의 가문으로 맥을 이어온 그의 집안이었지만 그의 아버지는 그가 어렸을 때부터 사물이나 젓대(대금), 피리를 잡히는 대신 서방에 보내 글공부를 시켰다.

 

 

어려서부터 기예능에 눈 돌려

 

12게때까지 통권을 마친 이동안 선생은 마을에 들어 온 남사당패를 따라 황해도 황주땅까지 갔다. 그렇게 무작정 가출한 이동안 선생은 황해도 한 장터에서 부친에게 이끌려 집으로 돌아왔지만 이미 재인의 끼를 주체할 수 없었던 모양이다. 아버지 이재학에 이끌려 화성집으로 끌려온 그는 두 살 위인 최연화라는 처녀와 결혼을 하였다. 그때 그의 나이가 14세였는데 신부보다 소리와 줄타기, 땅재주 넘는 모습만 눈앞에 어른거려 결혼 4년 만에 집을 다시 뛰쳐나와 버렸다

 

그는 무작정 서울로 올라가 방황 끝에 황금정에 있는 광무대에 취직을 하게 된다. 여기서 앞으로 가기, 장단줄, 허궁잽이, 화장사위 등 17가지에 달하는 본격적인 어름타기를 배웠으며 장단에 맞춰 줄 위에서 살판(공중회전)을 하는 법도 배웠다. 이곳에서 춤선생 김인호(일명 복돌)와 경기 잡가와 발탈의 명인 박춘재를 만나게 됐다.

 

김인호로 부터는 전통무용의 장단(젓대, 해금, 꽹과리, )과 춤을 익혔으며 박춘재로 부터는 발탈의 연희를, 김관보에게서는 줄타기를 전수받게 되었다. 그가 김인호로 부터 전수받은 춤이 <태평무>, <승무>, <진쇠무>, <검무>, <살풀이>, <엇중모리 신칼대신무>, <한량무>, <승전무>, <정진무>, <학무>, <화랑무>, <무녀도>, <극우>, <장고무>, <기본무>, <노장춤>, <신선춤> 30여 종에 이른다

 

 

이동안 선생의 4대 세습 도대방 근거없다

 

1920년대 재인청이 폐청 될 당시 전국에는 4만 여명이 넘는 재인청 소속의 재인들이 활동을 했다고 하니 당시 재인청의 위상이 얼마나 대단했는가를 알 수 있다. 이동안 선생은 경기도의 한 일간지 기자와 인터뷰를 하면서 본인이 4대째 도대방으로 이어진 집안의 마지막 도대방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짚고 넘어갈 것이 있다. 오산 부산리 이용우 선생의 집에는 경기도 재인청에 관한 4책이 전해지고 있었으며 이 책 내용에는 대방들의 명칭이 보인다. 하지만 폐청 될 당시 아키바다까시가 쓴 <조선무속의 연구>에도 도대방이라는 칭호는 보이지 않는다. 이런 점을 볼 때 도대방이란 각 도의 대방을 일컫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또한 재인청의 폐청 될 당시 이동안 선생을 불과 14세에 지나지 않았다. 폐청 당시 3도 재인청에 속한 인원이 4만여명이나 된다고 기록한 것으로 보아 당시 내로라하는 재인들이 속해있었던 예능집단이 바로 재인청이다. 그런 재인청에서 어떻게 14새의 어린 소년이 도대방이 될 수 있었겠는가?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맞지 않는 말이다.

 

더욱 재인청의 대방선출은 3명을 먼저 선정한 후 권점이라는 점을 찍어 선출하는 직선제를 택했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어떻게 4대째 도대방으로 계승을 한 것일까? 결국 이동안 선생의 ‘4대 도대방설은 신뢰성이 없다. 선생의 기예능은 누구보다 뛰어나다. 그렇다고 사실과 다르거나 확인이 안된 도대방설을 글을 쓰는 사람마다 인용해 ‘4대 도대방이라는 설은 사용하는 것은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일이다. 예능집단이었던 거대한 조직인 재인청이 자칫 이 확인되지 않은 사살 하나만으로 14세짜리 어린소년이 수장이 되어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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