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어느 마을에 의좋은 형제가 살고 있었습니다. 두 사람은 일 년 동안 땀 흘리며 열심히 농사를 지어 추수를 하고 서로가 벤 벼를 똑같이 나누어 가졌습니다. 그날 밤 동생은 형님을 걱정하면서 형님은 식구가 많으니 아무래도 나보다 들어가는 것이 많을 텐데 벼를 더 가져다주어야겠다.’고 생각을 하고 밤에 몰래 나가서 볏단을 형님의 낟가리로 옮겨 놓았습니다. 그런데 형님도 동생은 새로 살림을 차렸으니 아무래도 필요한 것이 많을 것이다.’라는 생각에 동생의 낟가리에 볏단을 져다가 옮겨 놓았습니다.

 

그런데 참 이상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두 형제가 아침에 일어나 들에 나가보니 낟가리는 하나도 줄지 않고 그대로 있는 것입니다. 두 형제는 속으로 참 이상한 일도 다 있다.’라며 그 날 밤 또 낟가리를 서로 옮겨 놓았습니다. 이번에는 형님이 먼저 낟가리를 옮겨 놓고, 뒤를 이어 동생이 나와 땀을 흘리며 자신의 낟가리에 쌓여있는 볏단을 형님의 낟가리로 옮겨 놓았습니다. 그러나 아침에 보니 또 그대로인 것을 알았습니다.

 

 

형제는 밤에 또 다시 들에 나가 서로 볏단을 옮기기 시작했는데 이 날은 둘이 서로 마주쳤습니다. 마침 구름 속에 가려져 있던 달이 얼굴을 내밀어 두 형제는 서로를 알아보게 되었습니다. 형제는 서로를 알아보고 볏단을 내던지고 한참을 부둥켜안고 울었습니다.19642학년 2학기 초등학교 국어책에 나오는 의좋은 형제의 이야기를 정리한 내용이다. 어릴 적 이 글을 읽으면서 나도 이다음에 크면 이런 의좋은 형제처럼 살아야지 하면서도 그저 단순히 옛날이야기요, 학생들에게 형제의 우애를 가르치기 위한 글이려니 생각을 했다.

 

그런 지어낸 줄로만 알았던 이야기가 실제 인물들의 이야기임을 알았을 때 조금은 부끄럽고, 한편으로는 몹시도 반가웠다. 예당저수지를 끼고 돌아 예산군 대흥면사무소 앞에 가면 <의좋은 형제공원>을 조성했다. 한편에는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102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이성만(李成萬) 형제 효제비(孝悌碑)가 서 있다. 1497(연산군 3)에 세워진 높이 142cm, 43.5cm, 두께 25cm의 화강암 석비인 이성만 형제 효제비는 두 형제의 우애가 얼마나 깊었는가를 알려준다.

 

 

이 비는 원래 가방교(佳芳橋) 앞에 서 있던 것을 예당저수지의 조성으로 물에 잠길 위기에 놓여있자 이곳으로 옮겨왔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보면 대흥호장(大興戶長) 이성만, 이순(李順) 형제가 모두 지극한 효자로서, 부모가 돌아가신 후에도 성만은 어머니의 묘소를 지키고 순은 아버지의 묘소를 지켰다. 3년의 복제(服制)를 마치고도 아침에는 형이 아우 집으로 가고, 저녁에는 아우가 형의 집을 찾았으며, 한 가지 음식이 생겨도 서로 만나지 않으면 먹지 않았다고 한다. 이에 1497년에 후세 사람들의 모범이 되게 하기 위하여 조정에서 이 비를 건립하였다.비는 비각을 세워 그 안에 있으며 의좋은 형제상이 우뚝 서 있다.

 

이곳저곳을 들러보느라고 오후에 도착한 공원에는 넘어가는 석양에 두 형제의 얼굴이 더욱 환한 웃음을 머금고 있다.  형은 지게에 볏단을 가득지고, 동생은 가슴에 볏단을 한 아름 안고 서로 마주 서있는 모습을 보면서 스스로를 반성해 본다. 어릴 적 그 내용을 보면서 우애 있게 살리라고 마음을 먹었지만 막상 세상을 살아가면서 참으로 바보 같은 생활을 해왔구나 하는 마음이다. 저 형제들처럼 저렇게 살아가지 못했다는 것도 미안한 생각이지만 이런 실제 인물들을 단순히 옛날 이야기로만 알았던 무지를 먼저 탓해야 할 것인지.

 

조각상 앞에 당시 2학년 2학기 국어책의 겉장과 11쪽에 달하는 책의 내용이 그대로 동판에 새겨져 있다. 하나하나를 읽어가면서 옛 기억들을 새삼 떠올리게 한다. 그 동안 전국의 많은 곳을 다녔지만 오늘처럼 가슴 뭉클한 감동을 받지는 않았던 것 같다. 한참이나 발길을 떼지 못하고 바라다보는 두 형제의 상 사이로 넘어가는 해가 더욱 밝은 빛을 비친다. 이제 만나는 사람들에게 반드시 아이들을 데리고 꼭 한번 이 곳을 들려 가보라고 권해야겠다.(사진 예산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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