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문화유산 화성(華城)을 걷다(12)] 동장대

  
▲ 동장대 화성에 주둔하는 병사들을 조련하고, 유사시 군사들을 지휘하는 곳인 동장대 전경
ⓒ 하주성
동장대

 화성에는 두 곳의 장대가 있다. 동문인 창룡문 가까이 있는 동장대와 팔달산의 정상부근에 위치한 서장대이다. 동장대의 현판에는 '연무대(鍊武臺)'라고 적혀있다. 연무란 군사들을 조련한다는 뜻이다. 현재 동장대 담장 안에는 연무대 건물과 앞쪽 우측으로 솟을삼문, 그리고 좌측으로는 네 칸의 창고인 듯한 전각이 자리한다.

현재 동장대의 모습은 <화성성역의궤>에 나타나고 있는 <동장대도>와 다르지 않다. 오랜 시간 형태를 보존하고 있는 화성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가 될 수 있었던 것도, 알고 보면 성역의궤에 따른 보수 및 복원 때문이다. 2012년 임진년 1월 4일, 칼바람 속에서 동장대를 찾았다.  

 

  
▲ 동장대도 화성성역의궤에 나타난 동장대도
ⓒ 하주성
동장대도


완벽한 독립공간 동장대

동장대가 자리하고 있는 곳은 지형상 높은 곳은 아니다. 하지만 사방이 트여 있고 등성이가 험한데다, 높이 솟아 있다. 더구나 앞으로는 평평한 너른 평지가 있어, 군사들이 훈련을 하기에 적당하다. 장용외영 군사들을 조련하던 지휘소인 동장대는 정조 19년인 1795년 7월 15일 공사를 시작하여 8월 25일에 완공을 하였다.

동장대인 연무대가 자리한 곳은 3단으로 쌓은 대를 조성하였다. 한가운데에는 좌우에 와장대를 설치하고 흙을 평평하게 하였으며, 바닥엔 네모난 벽돌을 깔아 놓았다. 장대의 건물은 정면 5칸, 측면 3칸의 단층 합각기와지붕이다. 건물 앞으로는 터를 넓게 잡아 동서 80보, 남북 240보 규모의 조련장을 만들었다.

 

  
▲ 연무대 동장대의 정면에는 연무대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군사들을 조련하는 곳이란 뜻이다
ⓒ 하주성
동장대

  
▲ 연무대 연무대는 장대석으로 쌓은석축 위에 지었다
ⓒ 하주성
연무대

동장대는 독립공간이다. 아마도 화성에 들른 정조는 이곳에서 장용영 군사들이 조련하는 모습을 보면서 늘 마음속으로 다짐을 했을 것이다. 이곳 화성으로 도성을 옮기고, 북벌을 위한 커다란 이상을 꿈꾸었을지도 모른다. 동장대는 그런 이산 정조의 꿈을 현실로 만들기 위한 독립적인 공간임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왕을 보호하기 위한 영롱담

동장대에는 딴 곳에서는 볼 수 없는 것이 있다. 바로 연무대 뒤편 담장이다. 이 담장은 '영롱담'이라고 하는데, 이 담장을 두른 이유는 연무대에서 군사들의 조련 모습을 관망하는 왕을 보호하기 위해서다. 기와를 이용해 조성한 영롱담은 마치 꽃 모양을 닮았다. 구슬이 울리는 듯하다고 하여 담장 이름을 영롱담이라고 한다는데, 밑에는 문석대로 기단을 놓았다.

 

  
▲ 대 대 안에는 3단으로 조성을 하였으며 그 중 1단과 2단은 네모난 전돌로 바닥을 조성했다. 말을 타고 오를 수 있도록 한 것이다
ⓒ 하주성

  
▲ 마루 뒤편 3단에는 누마루를 깔았으며, 왕이 이곳에서 군사들의 조련모습을 지켜보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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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마루

뒤편을 막은 담장을 지나 성 쪽으로 나가면 총안 앞에 놓여진 작은 '불랑기'를 볼 수 있다. 불랑기는 조선시대 대표적인 휴대용 화포이다. '불랑기포(佛郞機砲)'는 중국 명나라 시대에 도입한 서양식 박격포로, 마카오의 포르투갈인들에 의해 전해졌다. 불랑기는 <프랑크(Frank)>라는 유럽인의 이름을 뜻하는 것으로, 몸체길이는 72cm이며, 총구멍은 9.5cm이다.

이 불랑기는 몸체가 큰 1호서부터, 작은 5호까지로 구분이 된다. 불랑기포는 발사 틀의 구실을 하는 모포의 실탄을 장전하여, 모포에 삽입해 발사하는 자포로 이루어졌다. 조선시대에는 육전은 물론 해전에서도 사용하였으며, 불랑기포의 시용법은 당시 귀화한 박연(벨테브레)이 서양식 포술을 지도했다고 한다.

 

  
▲ 영롱담 동장대에만 보이는 기와를 꾸민 영롱담
ⓒ 하주성
영롱담

  
▲ 영롱담 영롱담은 연무대 뒤편에 마련하였다. 왕을 보호하기 위한 시설물이다
ⓒ 하주성
영롱담

  
▲ 불랑기포 서양에서 전래된 개인용 화기인 불랑기포
ⓒ 하주성
불랑기포

 정조의 웃음소리가 들리는 듯하네

성의 담장 안쪽으로는 커다란 철로 만든 함에 돌들이 가득 담겨 있다. 이 돌들은 전쟁이 나면 실제로 사용을 하기도 했던 '투석(投石)'이다. 지금 생각하면 돌이 무슨 전쟁무기일까? 하는 생각을 갖게 하지만, 당시에는 이 투석만큼 손 쇱게 구할 수 있는 무기는 흔치 않았을 것이다. 실제로 임진왜란 때는 이 투석이 무기로써 상당히 유용하게 사용이 되었기 때문이다.

흔히 돌이 날아다닌다고 하며 '비석(飛石)'이라고도 부르는 이 투석에 사용하는 돌은, <화성성역의궤>에는, 타마다 크고 작은 돌멩이 100개씩, 10타마다 큰 돌 200근(120kg)이나 150근(90kg)짜리 3개씩을 두도록 하였다.

 

  
▲ 투석 투석은 가장 손쉽게 구할 수 있는 당시의 무기였다
ⓒ 하주성
투석

작은 돌로는 적을 향해 돌팔매질을 하였으며, 큰 돌은 성벽을 타고 오르는 적을 향해 굴렸을 것이다. 이렇게 완벽한 공성을 할 수 있는 화성. 손이 떨어져 나갈 듯한 찬바람 속에 찾아간 동장대. 바람을 따라 연무대가 떠나갈 듯 웃는 이산 정조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아마도 이산 정조의 그 꿈이 아직도 후손들의 가슴 속에 남아있기 때문은 아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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