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북 증평군 도안면 석곡리 555번지에 소재한 충청북도 기념물 제122호 연병호 생가, 독립운동으로 집안을 제대로 돌보지 못한 연병호 선생은, 오직 나라의 앞날만을 생각하다가 일생을 마친 분이다.

 

제헌과 2대 국회의원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남들이 이런저런 재산을 마련할 때도, 태어난 생가 한 채만을 남긴 채 세상을 떠났다. 도대체 연병호 선생이 태어나고, 말년에 다시 돌아와 살았다는 생가는 어떠한 모습일까? 이렇게 선거 때가 되면 선생의 그 초가집이 다 그리운 것은 아직도 나라와 백성을 생각하는 참다운 의원이 단 한 사람도 없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증평군 석곡리 마을 길 한편에 자리 잡은 연병호 생가. 돌로 쌓은 축대 위에 담장을 두르고 계단으로 오르면 싸리문이 손을 맞이한다. 안에는 모두 네 칸으로 마련된 초가가 한 채 있을 뿐이다. 지금은 마당 앞에 연병호 선생의 생가임을 알리는 석비가 서 있지만, 이렇게 생가지가 정비되기 전에는 정말로 초라한 민초의 집이었을 것이다.

 

 

정남향으로 서 있는 초가는 네 칸이다. 좌측 세 칸은 방으로 드리고, 우측의 한 칸은 부엌이다. 정면 네 칸, 측면 한 칸 반으로 꾸며진 집은, 그저 어느 깊은 산골 외딴집을 보는 듯하다. 꾸미지도 않은 초가는 사람이 겨우 살아 갈만하다. 말이 집이라고는 하나, 이 집이 제헌국회의원을 지낸 분의 집이라고 하기에는 어이가 없다. 이 집에 나라와 국만은 위해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살았다니, 지금의 내 신세를 탓하기 전에 선생의 그 살아오신 일생이 눈앞에 보이는 듯하다.

 

어떻게 이런 곳에서 부인과 자녀들이 함께 생활을 했을까? 초라한 집을 생각하기 전에, 먼저 부인과 자녀들의 마음 씀씀이가 어떠했는지를 생각해 본다. 아마 선생의 나라만을 생각하는 마음을 그 가족들 역시 함께 느꼈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이런 집에서 한 가족이 함께 생활을 할 수 있었을까?

 

 

평생을 나라 위한 마음으로 산 연병호 선생

 

연병호 선생은 독립운동가이자 정치인이다. 자는 순서이며 호는 원명이다. 나라를 일제에 빼앗기자 맏형인 병환을 뒤따라 망명길에 올랐다. 1919년 상해임시 정부 수립 후 조국에 돌아 온 후에는, 임시정부의 후원과 국제외교를 위해 청년외교단을 조직하였다. 1921년 다시 중국으로 망명길에 올라 북경에서 독립혁명당을 조직했으며, 이듬해 상해임시정부 의정원 의원에 피선됐다.

 

1937년에는 일본 관헌에게 체포돼 조선총독부로 인계된 후, 8년형을 선고받고 대전과 공주 감옥 등에서 옥고를 치렀다. 조국이 광복되고 난 후에는 정치활동을 하면서, 1948년 제헌국회의원과 1950년 제2대 국회의원을 지냈다. 제헌의원 시절에는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할 것을 주장하여 관철시켰다. 말년에는 석곡리 집으로 돌아와, 1963년 생가에서 세상을 떠났는데, 남긴 재산이라고는 현재의 생가 한 채가 전부였다

 

 

증펑 석곡리 선생의 생가는 네 칸 중 세 칸의 방을 드린 초가이다. 칸마 좁은 문이 앞으로 나 있다. 겨우 어른 한 사람이 고개를 숙이고 들어갈 수 있을 정도의 문이다. 그 중 부엌과 붙은 우측의 방 앞에는 툇마루를 놓았는데, 그것도 쉽게 구할 수 있는 판자로 꾸며졌다. 방 안으로 들어가니 우측의 두 칸은 하나로 만들어진 큰 방이다.

 

좌측 끝 방과 연결하는 문은 문짝이 없이, 그냥 토굴의 구멍처럼 만들어졌다. 옛 모습 그대로 복원을 하였다는 생가의 형태는 바라볼수록 마음이 아프다. 큰 방의 천정 아래에는 시렁이 걸려있다. 집이라고 너무 좁아 어디 한 군데도 마음 편하게 사용할 수가 없다.

 

방을 나와 부엌으로 들어가니 부엌문도 없다. 벽은 짚을 엮어 바람을 막았다. 부엌 안은 아궁이와 진흙으로 다져놓은 것이 다이다. 뒤편으로 나가도 문이 없다. 뒤편 부엌 반대편에는 벽을 일부 담을 둘러 광으로 사용을 한 듯하다. 세상에 이런 곳에서 살면서도 나라를 위한 생각만을 하셨다니.

 

 

의원 하겠다고 기를 써 파당 일삼는 인간들에게 묻고싶다

 

집을 돌아보고 나오면서 요즈음 사람들을 생각해 본다. 과연 선생과 같은 입장에 있다면, 그들도 이런 집에서 살 수가 있었을까? 당연히 한 사람도 없을 것이란 것이 내 생각이다. 혹 모르겠다. 그 시절이라면 가능했을 것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그건 구실일 뿐이다. 호의호식하며 살아온 것들이 어찌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을까?

 

요즘 돌아가는 꼴을 보면 알 수 있지 않은가? 위성정당까지 만들어 자신들아 유리한 곳에 서겠다는 대가리에 국민이나 나라는 없고 배때기에 기름 채울 궁리만 하는 작자들. 그리고 그들과 부화뇌동해 자신의 자리를 단단하게 집으려는 인간들. 나라는 온통 상처투성이 인데 이들은 과연 언 선생과 닮은 마음이 조금이라도 있었을까 그들에게 묻고싶다.

이 집에서 살다 가신 연병호 선생처럼 모든 것 다 버리고 오직 나라와 국민들만을 생각할 수 있는가?”라고. 답이야 뻔하지만.

최신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