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수원뉴스 시민기자들이 워크숍을 떠났다. 매년 10월 수원화성문화제가 끝난 다음에 실행하던 워크숍이 올해는 8월 말에 실행에 들어갔다. 애초 30명 정도가 워크숍에 참가 할 것으로 이야기가 되었다. 그리고 그 정도 인원이 선정이 된 것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출발 하루 전날에 갈 수가 없다고 한 사람도 있다고 한다.

 

그렇게 우여곡절을 겪으면서도 28일 오전 830분에 시청 인근에 모인 시민기자들은, 9시경에 출발을 하여 제일 먼저 해미읍성으로 향했다. 적 제116호인 해미읍성은 이번에 한국을 방문한 교황의 순방지로도 유명하다, 이렇게 교황이 이곳을 순방한 것은 해미읍성이 성지이기 때문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은 곳이다.

 

 

해미읍성은 고려 말부터 왜구의 침입을 방어하기 위해 덕산에 있던 충청병마도절제사영을 해미로 옮기기로 하면서, 조선 태종 17년인 1417년부터 세종 3년인 1421년까지 축성, 충청도의 전군을 지휘하던 병마절도사영성이다.

 

천주교의 순교지로 많은 사람이 죽임을 당해

 

해미읍성 순교의 아픔은 곳곳에서 만날 수가 있다.

첫째는 수령 3백년 경의 회화나무 한 그루이다. 이 나무는 현재 기념물 제172호로 지정이 되어있으며, 1790년부터 1880년에 이르기까지 옥사에 수감된 천주교 신자들을 끌어내 동쪽으로 뻗어난 가지에 철사 줄로 머리채를 매달아 고문을 한 현장이다.

 

 

오래 전 해미읍성을 찾았을 때는 볼 수 없었던 옥사. 천주교도들을 투옥하고 문초하였던 옥사는 터만 남아있던 것을 발굴 작업 뒤 복원한 것이라고 한다. 1935년에 간행 된 '해미 순교자 약사'의 기록을 토대로 복원한 옥사는 내옥과 외옥이 있었으며 각각 정면 3칸 건물로 남녀 옥사가 구분이 되어 있었다고 한다.

 

자리개질을 했던 돌다리

 

자리개란 곡식을 타작할 때 사용하던 방법이다. 짚으로 만든 굵은 줄인 자리개로 곡식 단을 묶어서 타작하는 것이다. 즉 곡식 단을 굵게 묵어서 어깨 위로 올렸다가 힘차게 내리쳐 단에 묶인 곡식들을 기구에 내리쳐 낱알을 털어내는 방법을 말한다. 그런데 해미읍성 서문밖에 이런 자리개돌이 있다.

 

 

그런데 이 자리개돌은 자리개질로 사람들을 죽이던 순교의 형장이다. 서문 밖 수구위에 놓여있던 돌다리로 이 돌다리위에서 자리개질로 많은 생명을 앗아갔다는 것이다.

이 자리개 돌은 서문 밖 순교지에 보관중이던 것을, 생매장 순교 성지인 여숫골로 옮겨 보관하고 있고 현재 볼 수 았는 자리개 돌은 모조품이다.

 

시민기자들이 워크숍 첫발로 내딛은 해미읍성. 교황의 방문지이기도 했던 해미읍성은 많은 사람들이 찾아들고 있었다. 평일인데도 불구하고 이곳의 순교지를 돌아보고 있는 사람들. 옥사 안을 돌아보던 한 관람객은 아이들의 손을 잡고 한마디 한다.

 

 

이곳이 교황님이 다녀가신 곳이란다. 옛날에 이 성 안에서 많은 분들이 천주를 믿는다는 이유로 죽임을 당했거든. 저 옥사에 칼을 쓰고 있는 사람들처럼 저렇게 고통을 받다가 죽은 것이지. 그런 많은 분들의 순교가 있어 우리가 편하게 종교의 자유를 갖는 것이란다.”

 

e수원뉴스 시민기자들이 23일의 워크숍 일정 중 가장 먼저 만난 해미읍성과 순교지. 그 안엔 '왜 교황이 굳이 이곳을 찾아왔을까'라는 해답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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