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이다. 올해 그토록 폭염으로 인해 많은 고통을 당했지만 그래도 계절은 어김없이 지나가고 아침저녁으로 제법 시원한 바람이 불어온다. 아제 얼마 안 있으면 산과 들의 단풍이 멋에 겨워 넘실거릴 계절이다. 이런 계절에 떠나는 가을여행. 역시 가을은 여행의 계절이다. 이 풍족한 계절에 찾아가는 문화역사기행은 우리를 또 다른 세계로 안내한다.

 

풍요의 계절 가을. 사람들은 가을은 여행하기 좋은 계절이라고 한다. 그저 가방 하나 둘러메고 길을 떠나도 좋은 계절이 아닌가? 이 가을에 어디론가 떠나고 싶다. 그렇게 찾아가고 싶은 많은 곳 중, 그레도 역사가 있고 문화가 함께 한다면 이보다 더 좋은 곳이 어디 있겠는가? 고찰(古刹)이라도 좋고 고택(古宅)인들 관계있으랴. 역사가 있고 문화가 있고, 이야기가 있으면 그 이상 무엇을 바라겠는가? 계절을 따라 찾아가는 가을문화역사기행, 그 첫 번째는 여주시 신륵사로 정했다.

 

경기도 여주시에 소재한 고찰 신륵사를 사람들은 벽절이라고 부른다. 신륵사를 이렇게 부르는 것은 경내에 보물로 지정되어 있는 전탑이 있기 때문이다. 신륵사는 많은 문화재를 소유하고 있는 고찰로도 유명하지만, 판소리 중고제의 발원지이기도 하다. 명창 염계달이 이곳에서 득음을 하고 경기도 판소리인 경제를 시작했기 때문이다.

 

신륵사 경내에는 전탑 외에도 많은 문화재들이 자리하고 있다. 그 중 남한강을 굽어보고 있는 바위 위에 심하게 마모가 된 체 서 있는 석탑 한기가 있다. 옆에는 강월헌이 자리하고 있어 남한강과 함께 아름다운 풍광을 연출한다. 이 삼층석탑은 고려 후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한다.

 

나옹화상을 화장한 자리

 

기록에는 고려 말에 나옹화상을 신륵사 경내 남한강 가에서 화장했다고 한다. 이 삼층석탑이 서 있는 곳이 바로 나옹화상을 화장한 자리로 추정하고 있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석탑은 대웅전 앞에 많이 세우는데, 이렇게 동떨어진 강가에 서 있기 때문에 기록에 보이는 화장을 한 장소로 보고 있는 것이다.

 

석탑은 비바람에 심하게 마모되었다. 화강암을 깎아 조성한 이 삼층석탑은 현재 3층의 몸돌은 멸실된 상태이다.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133호로 지정되어 있는 이 탑은 기단부를 한 장의 넓적한 돌로 조성하고, 그 밑으로는 자연 암반이 자리하고 있다. 아마도 이런 강가의 암반에서 나옹화상을 떠나보냈는가 보다.

 

나옹화상 혜근(13201376)은 고려 말의 고승이다. 성은 아()씨였으며. 속명은 원혜이다. 호는 나옹, 또는 강월헌(江月軒)이다. 이곳 신륵사에서 강월헌(원래의 강월헌은 수해로 인해 사라졌다)에 기거하였다. 여주 신륵사 앞을 흐르는 남한강에는 용이 살았는데, 나옹화상이 그 용을 굴레를 씌워 제압하였다고 하여 신륵이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신륵사에서 나옹화상이 설법을 하면 귀신도 참여를 하였다고, 정두경의 고시 신륵사에 적고 있다. 그 정도로 나옹화상은 뛰어난 법력을 지녔는가 보다. 유명한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하네라는 글도 나옹화상이 지은 것이다. 이렇듯 고려 말의 고승인 나옹화상이 입적 한 후 화장을 한 장소에 세웠을 것으로 추정하는 삼층석탑이다.

 

아마도 그 탑의 화려하지 않은 모습이 나옹화상의 성정을 닮은 것은 아니었을까? 4대강 개발이라는 허명아래 파헤쳐진 남한강을 보면서, 나옹화상이 살아있었다면 어떤 글을 지었을까? 라는 생각을 한다. 9월에 찾아간 신륵사 삼층석탑 앞에서 깊은 상념에 잠긴다. 아름답던 남한강이 몸살을 앓고 있기 때문이다.

 

여주 신륵사. 봉미산 신륵사라고 이름을 붙인 이 고찰은 신륵사라는 이름보다 벽절이라는 이름으로 더 유명한 곳이다. 남한강 변에 자리 잡은 신륵사 일주문에는 '봉미산 신륵사'라는 현판이 걸려있는데, 이는 이 고찰이 자리한 절이 봉의 꼬리라는 것이다. 그 봉의 머리는 바로 강원도 오대산이다.

 

여강 · 금모래은모래. 이젠 다 옛 이름이 되다

 

신륵사 조사전 뒤에 보면 산으로 오르는 계단이 있다. 신륵사 서북쪽으로 난 이 계단을 오르면 보물인 보제존자의 석종과 석등, 비 등이 자리하고 있다. 이 세 가지 모두가 보물로 지정이 되어있다. 철책으로 조성된 보호대 안에 자리한 보물 제231호인 <신륵사 보제존자 석종 앞 석등>이란 명칭을 갖고 있는 석등은 조각기법이 뛰어나고 보존상태가 양호하다. 석등은 대개 절의 전각 앞이나 부도탑 등의 앞에 세운다. 아마 두 곳 모두 불을 밝힌다는 뜻을 갖고 있나보다. 더욱 보제존자의 사리를 모신 석종 앞에 있는 이 석등은 영원한 안식처로서의 부처의 세계로 가는 길을 밝힌다는 뜻으로도 볼 수 있다.

 

남한강이 흐르면서 여주를 지나면 이름을 여강이라고 했다. ‘()’란 곱다는 뜻이다. 그만큼 여주를 가로 질러 흐르는 남한강은 아름다운 강이다. 그 강을 정비를 한다고 꽤나 자연스럽지 못하게 만들어 놓았다. 직강으로 조성을 하면서 한편에는 돌 축대를 쌓아 놓았다. 그런다고 밑에서 오르지 못하는 물고기들이 올라와 산란을 할 수 있을까?

 

도대체 강은 흐르고 싶은 데로 흐른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는 것일까? 그리고 그 많은 생명들은 다 이 혼란함 속에서 어디로 간 것일까? 생명이 살 수 없는 강에서 우리 후손들은 무엇을 얻을 수 있을까? 강의 속살을 파내 산더미처럼 쌓아놓은 골재들이 눈앞에 거대한 공룡처럼 보인다.

 

 

명창 염계달이 피를 토하던 강월헌

 

예전 판소리의 명창들은 스스로의 소리를 만들어 내기 위해 피나는 노력을 하였다. 흔히 <독공>이라 하는 이 소리공부는 동굴 속이나, 혹은 폭포에서 수년에서 10년이란 긴 시간을 소리에만 전념하는 것이다. 때로는 피를 토하고 병이 걸리기도 하지만, 오직 명창의 반열에 들겠다는 의지 하나만으로 갖은 고생을 다하면서도 노력을 했다고 한다. 고 박동진 명창은 생전에 "여주 벽절이란 곳에서 염계달 선생님이 득음을 하셨는데, 잠이 오면 대들보와 상투를 끈으로 연결하고 소리를 했지. 명창은 그렇게 노력을 하지 않으면 태어나지가 않아"라는 이야길 하셨다.

 

17세에 길에서 장끼전을 주워 벽절 신륵사를 향한 염계달. 낮에는 절에서 불목하니 노릇을 하면서 밤이 되면 소리공부를 시작했다. 얼마나 힘들고 고통스런 날들이었을까? 그렇게 하기를 10. 당당히 명창의 반열에 오른 염계달 명창. 남한강이 내려다보이는 곳에 자리한 강월헌. 그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예전의 정자는 아니다. 홍수로 무너져 내린 것을 다시 지었다. 신륵사 경내 남한강가, 그리고 벽절이란 이름을 만들어 낸 보물 다층전탑 아래 자리를 잡고 있다.

 

염계달 명창은 조선조 정종 때부터 철종 때까지 활동을 한 명창이다. 판소리에 경기도 소리조인 경드름을 새롭게 창출해냈다. 판소리 명창들이 '추천목'으로 지목하는 곡도 바로 염계달 명창에 의해 만들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염계달 명창은 바로 경기 충청의 소리제인 중고제 중에서 경제중고제의 시조가 되는 셈이다.

 

이러한 염계달 명창이 하루 일과를 끝내고, 홀로 소리공부를 했을 것으로 보이는 강월헌. 그 위에 오르면 남한강의 물살에 해가 비추인다.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고 했는데, 10년 세월 피를 토하는 독공으로 득음을 한 것이다.

 

"염계달 선생은 낮에는 일을 하고 밤이면 소리공부를 했기 때문에 10년이 걸렸을 것이여. 부여 무량사에서 득음을 하신 우리 선생님 김창진 명창도 10년 만에 득음을 했거든."

고 박동진 선생님의 생전 말씀이 귓가에 맴돈다. 강월헌에 올라 남한강을 내려다본다. 지난 역사를 가장 많이 알고 있다는 강. 그 강이 좋은 것은 슬픈 역사나 기쁜 역사가 모든 것을 다 알고도 말이 없다는 것이다.

 

 

왜 소리는 강을 끼고 만들어질까? 문화는 왜 강을 중심으로 창출이 될까? 그저 학자들의 논리만으로는 그 속 깊은 해답이 나오지는 않을 것이다. 사람들은 강을 중심으로 마을을 형성하고, 그 강으로 인해 아픔을 당하면서도 강과 함께 살았다. 자연을 거스르는 것이 아닌, 자연과 동화되는 법을 배웠다.

 

판소리는 자연이라고 한다. 자연이 아니면 인간의 신체적 조건만 갖고는 그 해답이 나오질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강으로 산으로, 그리고 동굴로, 폭포로 찾아다니면서 스스로 자연이 되었던 것은 아닐까? 전설처럼만 여겨지는 소리꾼들의 그 득음과정이 그렇다.

 

이곳이 염계달이란 명창이 있었던 곳이라는 사실도, 그리고 판소리의 한 류파가 생겨난 곳이라는 아무런 표시 하나가 없다. 강월헌은 그저 벽절 신륵사 경내 전탑 아래에 남한강을 굽어보며 언제나 그랬듯이 그렇게 서 있다. 나옹선사의 당호에서 따온 명칭인 강월헌(江月軒). 그리고 조선조의 명창 염계달이 소리를 하던 곳. 그 곳을 눈여겨본다. 역사가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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