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립장군의 한이 서렸다는 바위에 전하는 전설하나

 

곤지암(昆池岩)’은 광주시 곤지암읍 곤지암로 72 2필지에 소재한 경기도문화재자료 제63호로 지정되어 있는 바위 한 기를 말한다. 원래 이 바위 주변엔 연못이 있었다고 하며 그 연못도 이 바위가 생긴 내력과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소하천과 연결되었었다는 이 바위는 현재 주변이 복개되어 학교 담장과 주변 주택가로 변하였다. 바위 위에는 수령 400년도 된향나무 한 그루가 자라고 있어 신비함을 더해준다.

 

지난 2일 비가 온 뒤 습한 날. 무던히도 찌는 듯한 더위에 찾아간 광주시 곤지암읍. 도척면 추곡리 태화산에 소재한 백련암 부도를 돌아보고 찾아간 곳이 바로 곤지암이었다. 옛 전설을 간직하고 있는 곤지암은 광주시 실촌읍 곤지암리였는데 현재는 곤지암읍으로 바뀌었다. 옛 전설을 간직하고 있는 바위이기에 인근을 지날 때마다 한번 씩 들리고는 하는 곳이다. 전설만큼이나 기묘한 향나무의 안위가 궁금해서이기도 하다.

 

경기도는 이 바위를 문화재자료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다. 곤지암의 주변은 보호철책을 둘러놓았고, 화강암의 큰 바위와 작은 바위 두 기가 조금 떨어져 있는 곤지암의 큰 바위는 높이 3.6m에 폭이 5.9m이고, 작은 바위는 높이 2m에 폭 4m 크기다. 큰 바위 중간에 뿌리를 내리고 자란 향나무가 이 바위가 예사롭지 않음을 알려주고 있다.

 

명장 신립과 임진왜란

 

곤지암은 조선 선조 때 원통하게 죽은 명장 신립(15461592)장군에 얽힌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신립은 여진족을 물리치는데 큰 공을 세운 명장으로 선조 즉위년인 1567년에 무과에 급제하여 여러 관직을 두루 거쳤다. 선조 16년인 1583, 그는 두만강을 넘어온 여진족을 적은 수의 군사를 이끌고 나가 격퇴해 육진을 지킨 명장이다.

 

 

 

여진족의 장수 니탕개는 선조 16년인 15831월에 인근의 여진족을 모아 진장의 대우가 좋지 않다는 이유를 들어 경원부로 침입했다. 조정에서는 신립을 시켜 니탕개를 토벌할 것을 명했고, 신립은 기병 500명을 이끌고 첨사 신상절과 함께 토벌에 나서 적을 격파했다. 이 전투에서 니탕개가 이끄는 여진족 반란군의 수는 1만여 명이나 되었다.

 

선조 25년인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 일본의 20만 병력이 부산진에 도착했고 무방비였던 부산은 조총으로 무장한 일본군에 초토화되었다. 조정에서는 이일을 순변사로 상주에 내려 보낸 뒤 여진족과의 실전 경험이 있는 신립을 삼도순변사에 임명했다. 왕은 신립에게 직접 보검을 하사한 뒤 충주로 파견했다. 충주는 한양으로 향하는 길목이었기 때문에 그만큼 중요한 요충지였다.

 

 

 

<새벽에 적병이 길을 나누어 대진은 곧바로 충주성으로 들어가고, 좌군은 달천 강변을 따라 내려오고, 우군은 산을 따라 동쪽으로 가서 상류를 따라 강을 건넜다. 적의 병기가 햇빛에 번쩍이고 포성이 천지를 진동시키니 이를 본 신립이 어찌할 바를 모르고 곧장 말을 달려 주성으로 나아가니 군사들이 대열을 이루지 못하고 점점 흩어져버렸다. 성중의 적이 나각 소리를 세 번 발하자 적이 일시에 나와서 공격하니 신립의 군사가 크게 패했으며 적이 사면으로 포위하므로 신립이 말을 돌려 진을 친 곳으로 달려갔는데 사람들이 다투어 물에 빠져 흘러가는 시체가 강을 덮을 정도였다. - 선조실록 권 26>

 

왜적의 침략을 대수롭지 않게 여긴 선조로부터 왜군을 물리치고 오라는 명을 받고 김여물과 함께 싸움터로 향한 신립은 충주 달천평야에서 고니시 유키나가가 지휘하는 수만 명의 왜군과 싸우다 참패를 당한 것으로 실록은 기록하고 있다. 흔히 탄금대 전투라고 알려진 이 전투는 달천평야에서 벌어진 전투였다.

 

 

 

신립의 한이 서린 곤지암

 

곤지암에 전하는 전설은 달천평야의 전투에서 살아남은 병사들이 물에서 신립 장군의 시신을 건졌을 때 장군은 두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고 한다. 얼마나 원통하고 분했으면 눈을 뜨고 죽은 시신이 당장이라도 호령을 할 것 같았다는 것이다. 병사들이 장군의 시체를 이곳 광주로 옮겨 장사를 지냈는데 그 후로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는 것이다.

 

신립장군의 묘는 경기도기념물 제95호로 지정이 되었는데 곤지암에서 멀지 않은 곤지암읍 곤지암리 산1-1에 소재한다. 신립장군의 묘가 있는 곳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고양이처럼 생긴 바위가 하나 있는데 누구든지 이 앞을 말을 타고 지나려고 하면 말발굽이 땅에 붙어 움직이지 않으므로 말에서 내려 걸어가야 했다고 한다.

 

 

 

그런 일이 계속되자 한 장수가 이 앞을 지나다가 왜 오가는 행인을 괴롭히느냐고 소리를 쳐 핀잔을 주었다고 한다. 그러자 갑자기 뇌성벽력이 치면서 벼락이 때려 바위를 내리쳐서 바위의 윗부분이 땅에 떨어지고 두 쪽으로 갈라지면서 그 옆에 큰 연못이 생겼다고 한다. 그 후로는 괴이한 일이 일어나지 않았고 사람들은 이 바위를 '곤지암'이라고 불렀다는 것이다.

 

충주 달천 전투에서 패해 죽은 신립을 광주 곤지암에 묘를 쓰게 되었는데, 충주에는 신립이 탄금대에서 패하게 된 이유가 한 처녀의 원혼 때문이라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신립이 어느 민가에 묵었다가 우연한 기회에 그 집 처녀를 도와준 일이 있었다. 그러자 그 처녀가 신립에게 자신을 배필로 삼아 달라고 부탁을 했는데 신립이 이를 거절했다. 총혼을 거절당한 처녀는 부끄러움을 이기지 못해 자살을 해서 귀신이 되었는데, 그 처녀 귀신이 신립의 꿈에 나타나 탄금대로 가라고 했다>

 

 

 

사후에 영의정에 추증되어 충장(忠將)’이라는 시호까지 하사받은 신립. 탄금대전설이나 곤지암전설이나 어찌 보면 당대를 풍미하던 한 장군의 죽음이 안타까워 만들어진 이야기들은 아니었을까? 언젠가는 한 낮 뜨거운 뙤약볕 아래 바위틈에 뿌리를 내리고 400여년을 지키고 있는 저 향나무에 대한 전설이 생겨나지는 않을까? 곤지암을 떠나면서 괜한 생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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