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 한강[冽水]가의 삶과 꿈” - 남양주 실학박물관 특별전

 

다산 정약용은 북한강과 남한강이 만나 한강을 이루는 ‘두미’ 혹은 ․‘두물머리’라고 하는 곳에서 태어났다. 남한강과 북한강이 합수쳐 큰물로 아우러지는 이곳은, 향후 실학의 회합이라는 그의 운명과 이어지고 있었다.

 

다산은 30여년 넘는 서울과 강진 등의 타지 생활에서도, 다산의 마음은 항상 고향에 남아 있었다. 순조 1년인 1801년 강진으로의 유배생활, 기약 없는 해배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던 18년 세월. 다산은 그곳에서 연구와 저술에 열정을 태우면서도, 그는 아득하게 먼 한강만을 그리워했다. 그곳은 부모형제와 처자식이, 그리고 님이 계신 곳이었다.

 

다산은 한강을 열수(洌水)로 불렀다. 1818년 강진에서 돌아온 그는, 한강에 사는 사람임을 자처했다. 그리고 18년을 고향에서 살다가 한강으로 돌아갔다. 다산은 늘 유유히 흐르는 강물 위로 무수히 자신의 모습을 비춰보고, 한강을 통해 사람과 세상을 발견한다. 평생의 고민이자 꿈은 민생을 위한 경세치용과 이용후생의 종합을 통한 부국강병이었다.

 

그가 태어난 지 250년이 지난 오늘, 우리는 한강을 바라보며 또다시 다산 정약용을 떠올려본다. 한강에서 품었던 다산의 삶과 꿈을.

 

소내[苕川]에서의 생활

 

다산에게 소내는 마음의 고향이었다. 그곳에서의 그물치기와 낚시는 그의 일상이었고, 집 뒤의 철마산, 운길산과 수종사, 강 너머의 천진암 등은 부친을 모시고, 형제들과 함께, 어느 때는 벗들과, 때론 홀로 즐겨 찾았던 곳이었다.

 

광주부(1872년 지방지도)(위) 와 소내(정선의 《경교명승첩》중에서)(아래)

 

다산은 평소 “나의 정신이나 외모 대부분은 외가에서 받았다”고 밝혔다. 그의 모습이 어떠했는지 알 수 없다. 다만 그가 말 한대로 외탁을 한 그 모습은 외증조부인 윤두서(1668∼1715)에서 조금은 상상해볼 수 있을 것이다.

 

강진으로 떠나 홀로 생활을 한지 6년, 결혼 30년을 맞은 부인 홍씨에게서 온 치맛자락, 다산은 거기에 자신의 마음을 다시 담는다. 그리고 몇 년 후 이를 자식들에게 전한다. 그것이 바로 ‘하피첩(霞帔帖)’이다. 두 아들에게는 사대부로서의 행동과 마음가짐을 훈계했고, 시집가는 딸에게는 집안의 화락을 기원했으며, 막내딸에게는 위로의 마음을 매화가지에 앉은 새로 담아냈다.

 

1786년(정조 10) 다산이 고향 소내의 풍경에 대해 읊은 12수의 시이다. 이른바 “소천 12경”이다. 25세 때였다. 이후 그는 유배지 강진에서 이 시들을 이성화에게 써 주었다. 고향에 대한 자신의 마음이 이성화를 통해 고향까지 전해지기를 바랐던 것일까?

 

 다산의 외증조부, 윤두서 자화상(좌) 와 다산 정약용(1935년 동아일보 삽화)(우)

 

한강에 돌아와, 후세의 기약

 

18년의 세월, 그것은 결코 짧은 세월이 아니었다. 강진에서 다산의 저술은 경세학의 체계화라는데 특징이 있다. 조선후기의 사회현실을 변혁하기 위한 변법적 개혁론의 전개였다. 그중에서도 《경세유표》, 《목민심서》, 《흠흠심서》의 ‘일표이서一表二書’는 다산 사상의 핵심이다.

 

그는 “나는 조선 사람이다. 기꺼이 조선의 시를 쓰겠다”고 선언하였다. 또 조선은 중화문화에 부속되어 있는 나라가 아니고, 고유의 전통과 문화를 가지고 있었음을 체득하였다. ‘조선인’에 대한 주체적 인식이 바탕이었다.

 

다산이 그린 매화 그림, 매화병제도(좌) 와  매조도(우)

근대의 길에 대한 모색, 조선학의 발전

 

18년 강진에서의 학문에 대한 열정은 이후 자연 다산을 중심으로 제자들이 모여들게 했다. 양반 자제뿐만 아니라 강진의 아전과 승려까지 포함되어 있다. 이 시기 다산의 방대한 저작 과정은 제자들과 분업화된 공정을 거쳤다. 이를 ‘다산학茶山學’으로 규정할 수 있다.

 

다산의 거대한 담론은 한강에서 출발하여 거기서 완성되었다. 평생 자신의 학문성과에 대해 “알아주는 사람이 적고 꾸짖는 사람만 많다면, 천명이 허락해주지 않는 것으로 여겨 한 무더기 불속에 처넣어 태워버려도 괜찮다”고 했던 그였다. 하지만 다산은 현실과 이상의 간극에서 그 꿈을 제대로 펴지 못했다. 회갑을 넘어 스스로를 ‘사암俟菴’이라 불렀듯이 그는 후세를 기약할 수밖에 없었다.

 

《상서지원록》과 《매씨서평》의 마무리, 다산의 고민

그가 서거한 지 100년 후, 우리는 국권을 상실한 질곡의 역사를 겪고 있었지만, 그의 학문은 조선학운동의 중심에 있었다. 이후 또 80여년이 흘러 탄신 250년을 맞았다. 그가 염원했던 민생과 부국강병은 현재진행형이다. 두 물이 합쳐져 큰물이 되었듯 다산의 거대한 사유를 마음에 담아내야할 때이다.

 

 

매달마다 농가의 모습을 읊은 농가월령가와(위) 수종사 가는 길(아래)

다산의 생

본관 나주羅州, 자는 미용美鏞·송보頌甫, 시호는 문도文度

1762년(영조38) 광주 초부면 마현리(남양주 조안면 능내리)에서 정재원과 해남윤씨의 3남으로 출생

1765년(4세) 천자문을 배움. 2세 때 앓은 천연두로 오른쪽 눈썹이 셋으로 갈라져 흔적이 남게 되어 삼미자三眉子로 불림.

1776년(15세) 관례를 치르고 약용若鏞이라는 관명冠名을 얻음.

호조좌랑 홍화보의 딸 혜완惠婉과 혼인. 서울 남촌으로 이사.

1777년(정조1) 이가환李家煥과 매형 이승훈李承薰을 쫒아 이익李瀷의 유고를 읽고 사숙.

1779년 형 약전과 성균관 승보시陞補試에 합격.

1783년(22세) 초시와 회시에 합격, 진사가 되어 선정전宣政殿에서 정조를 처음 만남

1784년 두물머리의 배에서 이벽에게 서교西敎에 대한 이야기를 들음.

1789년(정조13) 주교사舟橋司에 배속되어 주교 설치 공사의 규제를 만듬.

1791년 호남에서 천주교도 박해로 진산珍山 사건이 일어나 천주교와 절교.

1792년(31세) 화성의 설계를 명령받고 거중기를 설계하여 공사비 4만냥 절약.

1794년(정조18) 경기도암행어사로 나가 연천, 파주, 장단 등을 감찰

1800년(39세) 정조 승하로 고향으로 돌아와 초천에서 강학, 여유당與猶堂의 편액을 달음.

1801년(순조1) 신유사옥으로 투옥되었다가 강진으로 유배.

1805년(44세) 백련사에서 혜장惠藏과 교유. 고성사의 보은산방寶恩山房으로 이사.

1806년 강진 읍내 이학래李學來 집으로 이사.

1808년(47세) 만덕사 서쪽의 다산茶山으로 이사.

1809년 초의선사와 교유

1818년(순조18) 유배지에서 풀려나 고향 마현으로 귀향. 호를 ‘열수洌水’라고 함.

1822년(61세) 회갑을 맞아 스스로 묘지명墓誌銘을 지음. 호를 ‘사암俟菴’이라고 함.

1836년(순조36) 부인 홍씨와 회혼일에 고향 마현에서 별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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