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의 선구자라고 하는 정월 나혜석. 나혜석에 대한 평가는 상반된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나혜석은 화가이면서 문인이요, 여성해방운동가이기도 했다. 나혜석은 남편 김우영을 따라 중국 산동으로 가서 6년간을 생활했다. 나혜석은 6년간 산동에서 무슨 일을 하며 지냈을까? 수원시가 주최하고 나혜석 학회가 주관한 나혜석의 만주시대에 대한 학술대회가 열렸다.

 

나혜석학회 제5회 학술대회인 나혜석의 만주시대6일 오후 2시부터 화성박물관 강당에서 열렸다. 수원박물관 한동민 학예팀장의 사회로 열린 이날 학술대회에는, 4명의 주제발표자와 4명의 토론자가 나혜석에 대해 여러 가지 사실을 알려주는 시간이 되었다.

 

1발표는 독립기념관의 선임연구위원인 김주용이 만주 안동지역 한인사회와 나혜석에 대해서 발표를 했고, 2발표는 카이스트대 이상경 교수가 만주에서 나혜석의 글쓰기 -경계(境界)와 경계(警戒)’라는 주제로 발표를 했다. 3발표는 가천대 윤범모 교수가 나혜석과 만주체험 혹은 주체의식의 확장이라는 주제로, 4발표는 연변대 이홍석이 안동 일본 영사관과 부영사 김우영에 대해서 발표를 했다.

 

이날 토론은 발표가 끝난 후 한꺼번에 이루어졌으며, 토론자로는 숭실대 황민호, 한국여성연구소 정영훈, 성신여대 이재은, 동국대 서민교 등이 맡았다.

 

 

 

만주에서의 나혜석과 한인사회

 

1발표에서 독립기념관 선임연구원인 김주용은 한국의 탐방단들이 압록강을 보러가는 곳이 탄동시이다. 이곳을 거쳐 통화 및 집안과 백두산을 경유하는 경우가 많다면서 중국 입장에서 단동은 한반도를 잇는 중요한 가교 역할을 한다. 단동의 경제력은 현재 하루가 다르게 변모하고 있다고 서두를 열었다.

 

한인들의 만주이주는 자율기, 방임기, 통제기로 구분한다. 1860년 함경도 지방의 큰 가뭄으로 인해 한인들의 만주이주가 본격화되었다. 거주와 정착을 위해 만주로 이주한 한인들은 황무지를 개간하기 시작했다. 같은 시기에 평안도 지역의 한인들은 압록강을 건너 북간도에 정착해 황무지를 개간하기 시작했다. 이때 청국은 만주를 효율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1887년 훈춘에 초간국을 건설하였다.

 

안동의 한인이주는 1910년을 기준으로 점차 늘어나는 추세였다. 하지만 다른 지역에 비해 안동으로 이주한 한인들의 숫자는 그리 많은 편이 아니었다. 19229월 봉천 일본 총영사관에서 발표한 한인들은, 안동현에 1,332호에 인구는 6,431명이었다. 그에 비해 집안현에는 4,734호에 23,395명이라는 많은 사람들이 이주를 했다.

 

 

 

안동현에 여자 야학을 설립한 나혜석

 

우리 조선여자를 위하여 일심전력하는 나혜석 여사는 금번 당지 팔번통 태성의원 내에 여자 야학을 설립하고 매주 3일간 오후 7시부터 10시까지 열성으로 지도하여 입학지원자가 날로 많다더라

 

19223월경 신문에 난 기사의 일부이다. 나혜석은 안동에 도착한 후 이주한인사회와 연동된 사업을 시작하였다. 그 가운데 하나가 바로 야학이었다. 1922년 한인 이주자가 2,000명에 근접한 상황에서 취학 아동들의 절대 다수가 정식 학교에 입학을 할 수 없는 상태였다. 나혜석은 야학을 설립하여 학생들의 교육에 대한 갈증을 풀어주었다.

 

안동은 나혜석에게 있어 인생의 제2막을 활짝 열게 한 곳이다. 남편 김우영이 일본영사관 부영사로 부임했다. 나혜석도 약 6년간을 안동에서 정착하면서 독립운동을 지원하고, 한인사회를 보듬으면서 화가로서의 창작활동도 활발하게 이어나갔다. 나혜석은 안동의 생활을 한 마디로 이렇게 말했다.

 

 

 

사회상으로 사업을 해본데도 여기요. 개인적으로 남을 도와본대도 여기요. 인심에 대한 짠맛 단맛을 본대도 여기요.”라고. 나혜석은 6년여 동안 안동에 거주하면서 남편 김우영이 일본영사관 부영사라는 직함을 이용해 한인사회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앞으로 더 많은 나혜석에 관한 연구가 이루어져야 하는 이유는, 아직 나혜석에 대한 많은 사실들이 밝혀지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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