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는 ‘동동구루무’라는 것이 있었다. 여자들이 즐겨 쓰던 화장품이다. 지금으로 따진다면 ‘동동’은 그 제품의 명칭일 테고, ‘구루무’란 크림을 말하는 것이란 생각이다. 이 동동구루무에 대한 그리움은, 아마 지금 70~80대 정도의 아르신이라면 한두 가지 재미난 일화쯤은 기억하고 있을 것이란 생각이다.

이제는 내 나이도 60이 지났지만, 어릴 적 어머니의 화장대 앞에 놓인 동동구루무를 본 기억이 난다. 그러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그 구루무 통이 자취를 감추고, 당시 말로 꼬부랑글씨가 쓰인 화장품이 떡하니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러고 보면 이 동동구루무가 사라진지도 꽤 오래되었다는 생각이다.

2004, 9 용인 한국민속촌에서

영화 속에서나 나올만한 장면

동동구루무 한 통만 사면
온 동네가 곱던 어머니
지금은 잊혀진 추억의 이름
어머님의 동동구루무
바람이 문풍지에 울고가는 밤이면
내 언 손을 호호불면서
눈시을 적시며 서러웠던 어머니
아~ 동동구루무

김용임이라는 가수가 부르는 ‘추억의 동동구루무’라는 노래의 가사이다. 예전에는 이 동동구루무가 여성들에게는 꽤나 호사스런 품목이었던 것만 같다. 가끔은 퇴색한 영화 속에서 장에 나갔던 돌쇠녀석이, 세경을 받은 돈으로 동동구루무 한 통을 사오는 모습이 그려진다. 물론 그 동동구루무는 돌쇠가 연모하던 마을 양반집의 여종인 옥분이에게 건너갔을 테고.


인터넷검색으로 찾아낸 이미지

동동구루무 한 통을 받은 옥분이는 그동안 벌처럼 돌쇠만 보면 쏘아대던 말투가, 얼굴에는 가득 미소를 띠면서 고분고분해졌을 것이다. 이런 추억을 가진 동동구루무는 꽤 오랜 시간동안 여성들에게 인기가 있었던 것 같다. 동동구무루란 명칭도 아마 화장품을 팔고 다니던 장사꾼의 모습 때문에 나온 이름인 듯하다.

등 뒤에 짊어진 북소리 ‘둥둥’

어릴 적에 마을로 돌아다니면서 동동구루무를 파는 장사를 본 적이 있다. 1950년대야 지금처럼 대형 슈퍼마켓 등 종합적인 물건을 파는 곳이 없었다. 그저 마을마다 몇 개씩 있는 ‘○○상회’ 혹은 ‘○○상점’이라는 간판을 단 구멍가게들이 다였으니까 말이다. 이때는 간장과 같은 찬거리며, 이것저것을 팔러 다니는 장사들이 연신 마을을 돌아칠 때다.



아마 당시에는 이 동동구루무만큼 인기가 있었던 상품도 그리 흔하지가 않았다. 등 뒤에는 대북을 메고, 손에는 작은 북이나 하모니카 등을 들고 다닌다. 북소리가 나면 여기저기 흩어져 놀고 있던 아이들이 쫒아와, 그 뒤를 졸졸 따라다니기도 했다. 마을의 아낙네들이 몰려나오면, 용기에다가 듬뿍 큰 통에 든 구루무를 퍼 담아 주기도 했다. 벌써 그런 모습을 본 것이 50여년이 훌쩍 지나버렸으니, 이도 당시의 신풍속도였다는 생각이다.

어머니의 정이 그리운 동동구루무

한 겨울에 찬바람이라도 나가서 쏘이고 들어오면, 어머니는 당신이 아끼시던 동동구루무를 듬뿍 손에 발라 비벼주시고는 했다. 그 냄새가 그때는 왜 그리도 좋았는지 모른다. 아마 그 냄새는 당시 일을 하느라 땀에 절어버린 어머니의 냄새와 함께, 지금도 기억을 할 만한 나름의 포근한 어머니의 냄새를 만들어 냈던 것 같다.


요즈음 여인들은 동동구루무라고 하면 싸구려 화장품으로 생각을 하겠지만, 당시의 동동구루무는 아무나 쓸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는 생각이다. 그 구루무 한 통에 수많은 사연이 담겨있었기 때문이다. 구루무 한 통으로 사랑을 얻기도 하고, 많은 눈물도 흘렸기 때문이다. 연일 영하로 떨어져 올라갈 줄 모르는 날이 계속돼서인가? 어머니의 동동구루무가 그리운 날이다.


농촌에서는 곡식이나 과일이 익어갈 때가 되면, 골치 아픈 것들이 바로 새떼들이다. 곡식의 낱알은 물론 과일까지도 가리지 않고 먹어치우기 때문이다. 적게는 몇 마리, 많게는 수십마리 씩 떼를 지어 날아다니면서, 농작물에 해를 입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새떼를 막기위해 하수아비를 논에 세워보기도 하지만, 역부족일 때가 많다고 한다.

이제는 새떼들도 그만큼 머리가 좋아진 것인지, 도대체 하수아비를 무서워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느 분은 새들이 허수아비 머리 위에 앉아있더라면서 웃음을 흘리시기도 한다. 이런 새떼를 쫒아내기 위해 방포를 쏘기도 하고, 깡통을 철사에 매달아 소리를 내기도 한다. 또는 허수아비를 같은 연을 줄에 매달아, 논을 가로질러 줄을 매 바람에 돌아다니게도 한다.


짚으로 만든 탈구를 말앗을 때(위)와 풀었을 때

새를 쫒는 짚공예품 '탈구'

농촌에서는 아무래도 이런저런 것을 만들기가 쉽지가 않다, 그런 시간적 여유를 갖지를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연구를 해낸 것이, 바로 짚으로 꼬아 만든 탈구이다. 탈구는 짚을 머리를 땋듯이 따아 만든다. 길이는 4~5m 정도에, 손잡이 쪽은 두텁고 끝은 뾰죽하고 가늘게 꼬아 나간다. 탈구는 밤 시간을 이용해 새끼를 꼬면서 만들 수가 있어, 시간을 별도로 낼 필요가 없다는 점이 이 탈구를 만들게 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탈구를 만들면 손잡이를 잡고 머리 위로 줄을 돌리다가, 손잡이 부분에 힘을 주어 줄을 꺾는다. 그러면 "탕" 소리가 난다. 그 소리에 새들이 놀라 달아난다는 것이다. 돈을 들이지 않고도 만들어 사용할 수 있기 때문에, 농촌에서 많이 사용을 한 새를 쫒는 도구의 하나이다. 

탈구의 시연





  
탈구를 길게 뻗쳐 힘을 주어 위로 끌어 올린다.(맨위) 줄을 머리 위로 올려 힘을 가한다(두번 째) 줄을 가슴 높이로 수평이 되게하여 힘을 많이 받게 한다(세번 째) 손목에 힘을 주어 줄을 낚아채듯이 꺾는다(네번 째) 그러면 탕소리와 함께 줄이 떨어진다(맨 아래)

이렇게 시골에서 흔히 쓰이는 짚을 이용해 만들어 사용하는 탈구는, 우리 생활속에서 얻어지는 지혜이다. 지금은 볼 수가 없는 것이지만. 우리 선조들의 지혜의 깊이에 그저 감탄을 할 수 밖에 없다.

짚은 우리 생활에 아주 오래 전부터 요긴하게 쓰였다. 우선 짚을 가장 많이 사용하는 것은 초가집의 이엉 엮기이다. 추수가 끝나는 가을이 되면 초가지붕을 새로 덮는데, 짚을 엮어 씌우고 맨 위에는 용마름을 얹는다. 그 외에도 소의 사료로 사용하는가 하면, 각종 도구 등을 만들기도 했다. 새끼를 꼬는가 하면 광주리, 짚신, 삼태기, 망태기, 다래끼, 채반, 멍석 등 일상생활에 필요한 것들을 짚으로 제작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짚을 사용하는 것은 제작하는데 시간이 많이 걸리고 사용을 하는 기간이 짧아 여러 가지 불편한 점이 없지도 않아, 점차 짚을 이용해 제작한 도구 등이 사라지게 되었다. 또한 짚을 이용해 도구 등을 제작하려면 일일이 수공예품으로 만들어야 하기 때문에, 짚공예를 할 수 있는 어르신들이 세상을 떠나자 자연쇠퇴 되기도 했다.


‘호랑이 한 마리 사가시려우’

전주 경기전 안 서재마루. 열심히 짚을 이용해 무엇인가를 만들고 계시는 분들이 계시다. 한 분은 연신 판소리 한 대목을 불러가며 손을 놀린다. 그 옆에는 직접 만들었다는 짚공예품들이 나열이 되어있다. 일반적인 소품이 아니라 멧돼지, 호랑이 같은 동물들이다. 그 짚으로 만든 동물들을 보다가 그만 웃음을 터트렸다.

그 모습이 우스워서 웃은 것이 아니고, 짚으로 만든 호랑이의 표현력 때문이다. 코털을 세우고 입을 쩍 벌린 호랑이는, 금방이라도 포효를 할 것만 같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 이빨이 날카롭고 혓바닥까지 있다. 외국인들은 신기한 듯 들여다보다가 연신 카메라에 담아낸다. 어린 아이 하나가 호랑이가 무섭다고 칭얼댄다. 옛날이야기라도 들은 것일까?



짚을 만지면 손이 거칠어진다. 그러나 예전에는 이렇게 직접 제작을 했다. 멧돼지와 돼지의 표현이 재미있다.

‘호랑이 한 마리 사가시려우?’농으로 하는 이야기지만 가격이 만만치 않을 듯하다. 일일이 새끼를 꼬아, 그것으로 제작한 호랑이다. 몇 날을 저 호랑이 한 마리를 만들기 위해 소일을 했을 것이다. 그런 것을 가격으로 따질 수는 없다. 그저 그 호랑이의 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한다.

어르신의 미투리는 신어도 좋을 듯

그 옆에는 연세가 지긋하신 어르신 한 분이 연신 손을 놀리고 계시다. 앞에 보니 <김형철 할아버지의 수공예작품>이라고 쓰여 있다. 짚신이며 미투리, 소쿠리 등이 보인다. 비닐과 짚을 섞어 손수 제작하신 미투리가 눈길을 끈다. 당장 신어도 좋을 듯하다.


전주 경기전 안 서재마르에서 짚공예를 하시는 김형철 어르신과 수공예품인 미투리

짚공예의 역사는 상당히 길다. 『고려도경』에 보면 짚신을 만들 때는 삼이나 왕골 등을 섞어서 만들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고려도경은 전 40권으로 송나라 사신 서긍이 고려 인종 1년인 1123년에 고려를 방문하여, 당대의 정치, 사회, 경제, 문화, 군사, 풍속, 예술, 기술, 복식 등을 정리한 책이다.

누구나 주변에서 쉽게 구할 수 있어 많은 실생활에 도움을 주는 짚공예. 이제는 실생활에 사용하기 보다는, 집안을 장식하는데 더 많이 사용하고 있다. 그만큼 짚공예가 점차 사양길에 접어들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경기전 서재 마루에서 입을 벌리고 있는 호랑이도, 어쩌면 너무 많은 것을 잃어가고 있는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이야기하려는 것은 아니었을까? 그 호랑이의 떡 벌린 입이 자꾸만 눈에 밟힌다.



옹기는 언제부터 우리가 사용을 했을까? 『삼국지 위지 동이전(三國誌 魏志 東夷傳)』 고구려조에 보면 「집집마다 작은 창고를 갖추고 있는데, 이를 부경(浮京)이라 했다. 고구려 사람들은 매우 청결하여 저장을 잘하며, 발효된 음식을 먹기를 즐겨한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신라의 경우에는 제31대 신문왕조에 왕이 왕비를 맞이하는데, 왕비의 집에 보내는 예물품목이 쌀, 술, 기름, 간장, 포와 젓갈 등이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이미 삼국통일 이전부터 저장구인 옹기를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

고려시대에 『선화봉사 고려도경』에는 수옹도기라는 단어가 나오며, 규모가 높이 6자 너비 4자 5치, 용량이 3섬 2되가 든다고 했다. 이는 고려시대에는 이미 옹기를 식수를 담아두는 용기로 사용했다는 것이다.


하늘에 걸린 <조선옹기 특별전시장>의 간판과 옹기를 둘러보는 사람들

서민들과 함께 한 옹기

조선시대에 들어서는 많은 기록에서 옹기가 나타나고 있다. 『세종실록 지리지』에는 경상도 초계군과 진주목 세 곳에서 황옹을 굽는 가마가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경국대전』공정 외공장조에 보면 충청도 임주에 황옹장이 한 사람이 있으며, 공전 경공장조에는 본조 봉상시 등 14개 기관에 옹장이 104명에 각각 뒷일꾼 2명씩을 배치했다는 기록이 보인다.

이와 같이 아주 오랜 옛날부터 전해진 옹기는, 시대가 지나면서 더 많은 종류의 옹기들이 나타나게 되고, 그것은 서민 생활에서 꼭 필요한 그릇으로 자리를 잡았다. 전주 한옥마을 경기전 건너편으로 30m 정도를 이목대 쪽으로 가면 팔도 옹기전을 열고 있다. 여기저기 널린 다양한 옹기들을 관람 할 수가 있으며, 필요에 따라서는 매매도 이루어진다. 팔도옹기전에 보이는 옹기들은 과연 어떤 것들이 있을까? 그 옹기들을 둘러본다.



다양한 형태의 옹기들


'술독'이다. 술을 빚은 날짜와 몇번 째 슬독인지, 누가 담구었는지를 적게 되어있다. 높이는 5자 정도이며 길고 위가 불룩하게 생긴 것이 특징이다. 




맨위는 '청수단지'다. 청수단지란 이른 아침에 주부들이 깨끗한 물을 길어 부어놓고, 집안의 안과태평을 빌 때 사용을 하는 옹기이다. 가운데 것은 '좀도리'라고 하는 옹기이다. 좀도리란 매일 밥을 할 때마다 조금씩 쌀을 모아, 어려운 이웃을 돕기 위해 사용하는 옹기항아리다. 우리 민족의 살아있는 공동체를 볼 수 있는 그릇이다. 아래 항아리는 '물두멍'으로 물을 많이 담아주기 위한 항아리다. 물두멍은 키는 낮고 배가 불룩하며 주둥이가 넓어 편하게 물을 퍼담을 수 있다.




위에 것은 '시루'라고 부른다. 흔히 떡을 찔 때 사용하는 것이다. 가운데는 '자배기'라고 하며 물건을 담아두거나 물을 담아 두기도 한다. 장독을 덮을 때도 사용을 했으며, 집안에서 가장 보편적으로 쓰이는 옹기 중 하나이다. 맨 아랫 것은 '달항아리'라고 부른다. 높이는 85cm, 둘레는 295cm로 곡식, 물, 김치 등을 담아둔다. 전라도 지방에서 많이 사용했으며, 배둘레가 크고 키가 작아 사용하기에 편리하다.




맨 위에 것은 '간장통'이다. 중간에 꼭지가 있어 간장을 따르기에 편리하도록 되어 있다. 가운데는 '소줏고리'라고 부른다. 좌측은 경상도 소줏고리이며 우측은 전라도 소줏고리이다. 소줏고리는 증류식 소주를 만드는 용기이다. 아랫것은 조선조 말에 만들어진 '똥 항아리'이다. 높이는 135cm, 둘레는 395cm이다. 화장실에서 사용하는 똥통으로 땅에 묻어 사용을 했다.




위에 것은 '앵병'이라 부르는 옹기이다. 짠지를 담아두기도 하고 청주나 막걸리를 담아 두기도 한다. 가운데는 '씨앗항아리'다. 각종 씨앗을 담아두는 용기로 사용을 했다. 맨 아래는 '장군'이라 부르며, 누여 사용하고 보관은 세워둔다. 어떤 액체를 담느냐에 따라서 물장군, 술장군, 오줌장군, 똥장군 등으로 부른다.


이 옹기는 '귀때단지'라고 부르는 물을 담는 용기이다. 둘레의 한편에 주둥이가 달려 물을 따르는데 편리하도록 되어 있다.

이 외에도 수많은 옹기들이 전시되어 있다. 예전부터 민초들이 즐겨 사용하던 옹기. 옹기는 숨을 쉰다고 하여 음식을 담아 놓으면 오래도록 상하지가 않는다고 한다. 선조들이 어떤 그릇을 사용했는지 알아보는 것도 그래서 재미있다.
 

절에 가면 명부전 옆에 작은 조형물이 하나씩 있다. 흔히 절에서는 이를 두고 '소대'라고 부른다. 여러가지를 태우는 곳이다. 그러나 이 소대는 쓰레기 등을 태우는 곳이 아니다. 절에서 망자의 극락왕생을 비는 천도제를 마친 후에, 그 때 사용한 각종 번이나 망자의 옷가지, 천더제에서 사용한 각종 기물 등을 사르는 곳이다.

소대의 모습은 각양각색이다. 절마다 나름대로 특색이 있는 모습으로 꾸민다. 대개는 벽돌을 이용하거나 황토 등을 이용해 웅장하게 꾸며 놓은 곳도 상당히 많다. 그러나 그렇게 불을 많이 피우지 않는곳은 아담하게 꾸민다. 얼핏보면 아름다운 조형물과도 흡사하다.
 

   

울산 도솔암 소대의 아름다움

울산시 북구 회봉동 30번지에 소재한 도솔암. 넓지 않은 경내에는 대웅전과 삼성각, 요사 등이 자리하고 대웅전 앞에는 석탑이 자리한다. 도솔암을 들어가기 전에 이 작은 절이 색다르다는 것을 느낀다. 우선 일주문인 불이문은 사람이 겨우 한 사람 비집고 들어가야 할만큼 작다. 그리고 그 우측에 새롭게 조성한 소대가 보인다.

소대는 기와와 황토로 꾸몄으며 앞에는 기대석을 하나 놓았다. 아마 제상으로 사용하는 듯하다. 암기와와 숫기와를 이용해 문양을 넣은 소대. 그리고 지붕은 이층으로 만들어 맨 위에는 옹기굴뚝을 올렸다.




소대의 변신은 무죄

절마다 있는 소대. 각양각색으로 꾸며진 소대는 그 하나만으로도 훌륭한 조형물이 된다. 요즈음 절을 찾아다니면서 보면 이렇게 아름답게 꾸며진 소대가 많이 눈에 띤다. '소대의 변신은 무죄'라서 일까? 조금은 답답하기만한 절을 찾아 가노라면 이렇게 작은 소대 하나가 사람을 편안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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