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소리를 하는 명창들의 이야기는 참 우리로서는 상상을 초월하게 만든다. 소리를 얻는 것을 ‘득음(得音)’이라 하지만, 그 득음을 이루기 위해서 하는 노력은 가히 인간의 한계를 넘나드는 것이기 때문이다. 짧게는 3~4년 길게는 10년 이상을 혼자 소리공부를 하기 때문에, 그 과정을 우리는 ‘독공(獨功)’이라고 한다.

 독공의 과정은 정말 이야기만 들어도 아찔하다. 전공을 국악을 했기 때문에 고 박동진 명창을 스승으로 모셨었다. 그리고 방송국에서 생활을 하면서, 박동진 명창과 몇 날을 함께 방송제작을 하느라 여기저기 돌아다닌 적이 있다. 그러면서 들은 이야기가 바로 명창들의 득음 과정에 대한 이야기였다.

이동백 명창이 득음을 했다는 동굴이 있는 흐리산

‘독공(獨功)’은 ‘독공(毒恐)’이라니.

대개 독공을 하고자 하는 소리꾼들은 동굴이나 폭포를 찾아간다. 동굴 속에 들어가면 2~3년을 동굴을 막아버리고, 겨우 음식물이나 변기 정도가 드나들 구멍 하나만 남겨놓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안에서 소리를 얻어, 그 동굴을 막아 놓은 것이 무너져야 나온다는 것이다. 실제로 그렇게 하는 명창들이 있었다는 이야기다.

폭포 독공 역시 어렵기는 마찬가지다. 권삼득 명창이 콩 서 말을 들고 남원 용담폭포로 가서, 소리 한 바탕을 할 때마다 콩알 하나씩을 폭포의 소에 던졌다는 이야기도 맥락을 같이한다.

“독공이란 것은 스스로 독을 마시는 것과 같아. 그래서 목에서 피가 넘어오지. 터진목에 예닐곱 번은 그렇게 터지고 아물어야 혀”

얼마나 그 독공이란 것이 힘이 들었을까? 그렇게 십년 가까이 소리공부를 마친 후에, 사람들이 많이 모인 곳에 가서 소리 한 대목을 한다는 것이다. 요즘 말로하면 ‘귀명창’들에게 시험을 보는 과정이다. 그 소리판에서 명창 반열에 들지 못하면, 다시 독공을 시작해야 한다니. 독공이란 것이 과연 독을 마시는 것과 같은 두려움이 있을 만도 하다.



흐리산 중턱에서 소리가 들려

이동백 명창은 ‘전무후무한 대명창’이라는 칭호를 받았다. 생긴 것이 준수하고 소리의 성음이 남들이 따라올 수 없을 정도였다는 것이다.

“이동백 선생님이 소리를 할 때면 객석에서 난리가 나지. 서로 조금이라도 가까이 보려고. 그래서 소리를 할 때 선생님은 항상 맨 뒤에 순서를 맡았어. 선생님이 일찍 순서를 마치고 나면, 사람들이 다 가버렸거든.”

얼마나 그 생김새가 준수했는지, 지금의 인터넷 등에서 검색을 할 수 있는 자료를 보아도 알만하다. 이동백 명창은 어렸을 때는 한문공부를 하였다. 그러나 공부에는 취미가 없고 소리에만 전념을 하다가, 서천 장항 빗금내에 있는 김문의 소리꾼인 김정근 문하로 들어간다. 무숙이타령의 대가라고 하는 김정근 명창은, 김창룡 명창과 김창진 명창의 부친이다. 정노식은 『조선창극사』에서 ‘조선의 소리는 김문에서 되다시피 했다’고 적고 있다.


그 후 김세종 문하로 들어간 이동백 명창은 고향인 서천군 종천면 도만리로 돌아온다. 그곳 흐리산(희이산) 중턱의 동굴 앞에 나무를 엮어 초가를 짓는다. 멀리 장항으로 나가는 길목이 보이는 이곳에서 2년간 동굴독공을 한다. ‘그 2년 동안 북채가 10다발은 끊어졌다’고 후세 사람들은 즐겨 이야기를 한다.

“정말 잘났지. 새색시 때도 힐금거리며 보았으니까?”

벌써 20년이 지났다. 다큐멘터리를 제작하기 위해 이동백 명창의 생가마을을 찾았었다. 그곳에서 평소 이동백 명창을 보았다는 김부월 할머니(당시 93세였던 것 같다)는 이동백 명창을 이렇게 소개했다.

“정말 잘났지. 논둑길을 걸어오면서 소리를 하는 것을 보면 대장부였어. 새색시였었는데 옆에 시아주버님도 계셨지만 곁눈질로 보았으니까”

아마도 당시로 치면 지금의 인기가수 뺨칠 정도였는가 보다. 그렇게 흐리산 중턱 동굴에서 독공을 마친 이동백 명창은, 어전에 나아가 소리 한 대목으로 벼슬을 얻는다. 당상관인 통정대부를 제수 받았다고 하니 참으로 대단한 소리였나 보다. 신재효의 ‘광대가’의 첫 머리는 바로 이동백 명창을 기준으로 삼았을 정도라는 소문이다.

인간의 한계를 넘어야 한다는 동굴독공. KBS 다큐멘터리 '중고제'장면 캡쳐

흉내 낼 수 없는 소리 ‘새타령’

이동백 명창의 소리는 일본 빅타레코드사에서 취입을 한 것을, ‘서울음반’에서 CD로 복각을 하였다. 그래서 많은 소리를 들을 수가 있다. 그 중 압권은 당연 새타령이다. 뻐꾸기 울음소리 대목으로 가면, 정말로 뻐꾸기가 우는 듯한 착각을 할 정도이다. 오랜 독공에서 얻은 명창이라는 칭호가 명불허전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이제는 소리로만 기억할 수 있는 이동백 명창. 1993년에 들려본 후 15년 만인 2008년 9월 9일 생가터를 찾아갔을 때는, 예전의 집이 아닌 잘 지어진 가옥이 그 자리에 있었다. 마당에는 철을 알리는 코스모스가 한껏 자태를 자랑하고. 저 뒤편에 보이는 흐리산 자락에서는, 금방이라도 새타령 한 대목을 부르며 논둑길을 걸어오는 명창의 모습이 눈에 보일 듯하다.


허난설헌(1563~1589)은 조선 중기의 여류시인이다. 본명은 ‘초희’이며, 호는 ‘난설헌(蘭雪軒)’, 자는 ‘경번(景樊)’이다. 선조 22년인 1589년 27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난설헌은 명종 18년인 1563년에 강릉 초당 생가에서, 당대의 석학인 초당 허엽의 셋째 딸로 태어났다.

허난설헌은 그 재주가 비범하여 오빠가 글을 가르쳤다고 한다. 얼마나 재능이 뛰어났는지 선조 3년인 1570년에는, 불과 나이가 8세 밖에 안 되었지만 '광한전백옥루 상량문'을 지었다고 한다. 15세 때 안동 김씨인 김성립에게로 출가를 한 허난설헌은, 참으로 파란만장한 짧은 생을 마치게 된다. 19세에는 딸을 잃고, 20세에는 아들 희윤을 먼저 저 세상으로 보낸다. 이런데다가 아버지는 상주에서, 난설헌을 가장 아끼던 둘째 오빠 허봉은 금강산에서 객사를 한다.


목포시립무용단 정기공연 창작무용인 '허난설헌'에서 안무자 정란이 허난설헌의 삶을 춤으로 표현하고 있다.

비운의 여인, 그러나 풍류 속에서 살다간 여인

그런 주변의 아픔 때문일까? 허난설헌은 1589년인 선조 22년, 27세의 나이로 세상을 마쳤다. 허난설헌은 경기도 광주시 초월면 지월리 경수산에 묻혀있다. 이러한 허난설헌이 죽음을 담보로 자유를 갈망한 조선의 여인으로 다시 조명이 되어 환생을 하였다. 당시의 기구한 삶과 오늘날의 슈퍼우먼을 요구하는 사회적인 풍조가, ‘워킹맘’이라는 현 시대를 살아가는 여인들의 기우뚱거림으로 이어진다.

지난 11월 11일(목) 목포시민문화체육센터 소공연장에서는 오후 7시 30분부터 목포시립무용단의 제28회 공연이 있었다. 1, 2부로 나누어진 이 공연은 창작과 전통이 만나는 그런 무대였다. 1부는 ‘풍류녀 허난설헌’이라는 제목으로 예술 감독인 안무자 정란의 안무로 무대에 올려졌다.



목포시립무용단의 창작무용 '허난설헌'
 
허난설헌의 슬픔이 가득한 일생이 몸으로 다시 환생을 하는 그런 무대였다. 모두 5장으로 나누어진 40분간의 무대는, 연신 바뀌어가는 허난설헌의 삶이 다시 그려지고 있었다. 숱한 군상들 속의 난설헌, 그리고 홀로 그 많은 고통을 이겨내야만 하는 길고 어두운 시간. 몸부림을 칠수록 더 깊은 고통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삶. 멈추고 싶지도 않고, 멈추어지지도 않는 토해버리고 싶은 가슴속의 응어리.

그러한 허난설헌의 모든 것을 40분이라는 한정된 시간에 농축하여 보여준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안무자 정란은 몇 년 전인가 이번 무대보다 짧은 ‘새하곡’이라는 춤을 갖고 무대에 오른 적이 있다. 그때도 보았지만, 무대에 오를 때는 이미 ‘정란’이 아닌 ‘허난설헌’ 이 되어 있었다.

정란은 이번 무대에서 ‘전폐, 희문’이라는 종묘제례악을 사용을 했다. 기존의 음악을 탈피해 허난설헌 일가의 삶과 죽음, 그리고 자식들의 죽음과 부모와 형제들의 죽음을 조금 더 승화시켰다. 그런 속에서 무대에 오른 정란은 허난설헌의 고통스런 일생을 풀어내 듯, 한풀이와 같은 춤을 춘다. 마치 살풀이를 현대화시킨 듯한 느낌이다.



목포시립무용단 '풍류녀 허난설헌'

춤은 몸을 필요로 한다. 몸은 마음의 춤이 있어야 함께 움직일 수가 있다. 마음과 몸이 하나가 되어 무대에 서면, 관객들도 그 몸짓에 동화를 할 수가 있다. 이번 무대에서 정란은 스스로 허난설헌이 되어 관객들에게 자신의 마음을 몸을 빌려 이야기를 했다. 앞으로 더 보완을 해 허난설헌의 일대기를 무용극화 시키겠다는 포부를 밝힌다. 그 무대가 기대되는 까닭이다.


전북 남원시 주천면 호경리 지리산 기슭에 있는 춘향묘. 그 앞을 흐르는 냇가에는 정자가 하나 서 있다. 육모정이라 부르는 이 정자는 최근에 새로 지었지만, 원래는 400년 전에 처음으로 지어졌다고 한다. 현재의 육모정 뒤로는 용소라 불리는 소가 있다. 이 소에는 아홉 마리의 용이 노닐던 곳이라 하였으며, 이곳에 넓은 바위가 있어 정자를 지었다고 한다.

이 넓은 바위 위에 6각형의 정자를 지어 육모정이라 이름을 붙이고 선비들이 모여 시를 읊었다. 1960년 큰 비로 인해 정자가 유실 된 것을 현재의 자리로 옮겨 복원을 한 것이다. 육모정 뒤편으로 흐르는 물은 맑기만 하다. 그 물이 맑은 것에 반해서일까? 한 사람의 명창이 이곳에서 목을 트였다고 한다.



명창 권삼득의 설렁제가 만들어진 곳

명창 권삼득. 명창들이 득음을 할 때는 동굴독공이나 폭포독공을 한다. 동굴독공은 동굴 안에 들어가 소리를 얻을 때까지 혼자 외로운 소리공부를 하는 것이고, 폭포독공이란 폭포가 있는 곳으로 가서 소리를 얻는 것이다. 그 폭포 독공이라는 것은 목에서 피를 몇 말을 쏟아야 얻을 수 있다고 하니, 그 득음이란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 가늠이 되질 않는다.

이곳에 구룡폭포가 있어 권삼득이 소리를 얻었다고 한다. 지금은 물이 줄어 예전의 모습이 상상이 되질 않는다. 하지만 용소로 떨어지는 물이 상당한 소리를 냈을 것이다. 권삼득 명창은 전라북도 완주에서 태어났으며 원래 양반가의 사람이다. 예전에는 양반이 소리를 하지 않았으니, 권삼득 명창의 소리공부는 당연히 집안에서 쫓겨 날만한 일이다.


육모정 앞에 있는 춘향묘와(위) 물가에 서있는 권삼득 명창의 득음장소를 알리는 비
 
권삼득 명창은 판소리의 효시로 알려진 하한담에게서 소리를 배웠다고 했으니 판소리 초기의 명창이다. 조선조 영조 47년인 1771년에 완주의 양반가에서 태어나, 소리에 재질을 보였다. 혼자 이곳 용소 앞 넓은 바위를 찾은 권삼득 명창은, 이곳에서 소리를 얻기까지 얼마나 많은 날을 보냈을까? 지금은 작은 비 하나가 그때의 상황을 이야기하지만, 칠이 벗겨져 알아 볼 수도 없다.

설렁제를 만들어 낸 권삼득 명창

더늠이란 소리의 명창들이 오랫동안 소리공부를 하다가 자신만의 독특한 창법을 만들어 내는데, 그 소리를 말한다. 권삼득 명창의 설렁제는 흥보가의 ‘제비 후리러 나가는 대목’과 춘향가의 ‘군노사령 나가는 대목’ 등이 바로 이 설렁제이다. 지금도 이 대목은 권삼득 명창의 설렁제로 부른다는 것을 말하고 설렁제로 소리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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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정자가 서 있었다는 바위와 물길

설렁제는 높은 소리를 길게 질러 씩씩하고 경쾌하다. 듣기에도 시원한 창법이라 신재효는 광대가에서, 그의 호탕하고 씩씩한 가조를 ‘절벽에서 떨어지는 폭포’에 비유했다. 그렇기에 권삼득을 '가중호걸'이라 불렀다. 육모정 뒤편 물이 흐르는 곳에 있는 용소, 바위틈으로 물이 얼마나 오랜 시간 흐른 것일까? 암반이 파여 있다. 그 아래 소가 푸른색을 띠고 맑은 물을 받아들인다.

선비들이 지었다는 육모정. 그리고 그 곳에서 소리를 하여 득음을 한 권삼득 명창. 양반가의 자손이니 이곳 정자에 와 그 경치에 반해 소리공부를 했을 것으로 보인다. 용소로 떨어지는 물소리가 왠지 소리 한 대목으로 들리는 것도, 이곳에서 소리를 한 한 명창의 이야기가 전해지기 때문은 아닌지. 그렇게 무심한 세월만 흘러버렸다.

아홉마리의 용이 놀았다는 용소


전북 남원시 운봉읍 화수리 비전마을은 명창의 마을이다. 일찍 우리 판소리사에 한 획을 그은 가왕(歌王) 송흥록 선생이 이 마을 출신이며, 여류 국창이라는 박초월 선생이 바로 이웃집에서 태어나셨다. 이 마을에는 현재 명창의 생가라는 두 채의 집이 10여 m도 안 되는 거리에 남아 있다.

운봉을 찾아 간 것은 바로 이 명창들의 삶을 보기 위해서이다. 도대체 이곳에서 어떻게 일세를 풍미하는 명창들이 태어난 것일까? 그리고 그들은 도대체 얼마나 노력을 하였기에, 우리 판소리사에 없어서는 안 될 귀한 인물들로 많은 사람들의 칭송을 받는 것일까? 운봉읍 화수리 비전마을을 찾아가 본다.



이웃하고 있는 두 분의 명창 생가

지금은 밖으로 초가대문을 내어놓았다. 안으로 들어가니 소리가 끊이지 않고 울려나온다. 소리를 하는 동상이 서 잇다. 한 사람의 소리꾼과 한 사람의 고수의 형태이다. 이 뒤편으로 가왕 송흥록의 생가가 있다. 송흥록의 집은 정면 세 칸에 측면은 한 칸 반의 초가집이다. 한 칸은 부엌이고 가운데 한 칸은 사랑으로 사용을 한 듯하다. 그리고 맨 끝에 있는 방이 바로 안방이 된다. 박초월의 집은 그 앞에 좌측에 자리하고 있으며, 송흥록의 집과는 역으로 꾸며졌다.

부엌은 방보다 앞으로 돌출이 되어있고, 뒤편에도 문을 내었다. 가운에 방은 앞으로 툇마루를 놓고, 끝 방은 한편에 아궁이를 들였다. 경국 방의 넓이는 정면과 측면 모두 한 칸인 셈이다. 이 비좁은 집에서 가왕 송흥록이 태어난 것이다. 송흥록은 조선조 정조 초기인 1780년경에, 명창 권삼득의 고수인 송첨지의 아들로 태어났다.



가왕 송흥록의 생가. 세칸으로 된 초가에서 태어났다.

귀곡성의 대가 가왕 송흥록

12세에 백운산 월광선사에게 공부를 했다는 송흥록명창. 중고제의 시조인 김성옥과는 처남 매부 사이이다. 김성옥이 여산 동굴로 들어가 동굴독공을 하다가 만들어진 진양조를, 송흥록에게 전해주고 찬 굴에서 얻은 관절염의 일종인 학슬풍으로 인해 세상을 떠났다. 송흥록은 그 소리를 판소리에 접목을 시켜 소리를 윤택하게 만들었다. 조선말기 우리 판소리에 소리의 극치라는 계면조와 진양조가 송흥록에게서 완성이 된 것이다.

박초월은 이곳에서 태어나 12세 때에 김정문에게 흥부가를 익히고, 송만갑에게서 춘향가, 심청가, 수궁가를 익혔다. 김정문은 남원 출신의 명창이며, 일제 강점기에 전국을 다니면서 소리로 청중을 울리고 웃긴 명창이다. 송만갑은 송흥록, 그의 동생 송광록과 광록의 아들 우룡, 우룡의 아들인 송만갑으로 이어지는 소리꾼의 집안이다.



명창 박초월의 생가. 송흥록명창 생가 앞에 있다.

결국 박초월은 송흥록과 같은 소리의 맥을 이어왔다고 볼 수 있다. 박초월은 (사) 한국국악협회 초대이사장을 역임했으며, 한국국악예술학교를 설립하였다. 1967년에는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인 수궁가의 예능보유자로 인정을 받았다. 시대를 거슬려 두 명의 명창이 태어난 이곳. 사람들은 그 내력을 잘 모르고, 이런 집에서 어떻게 살았을까를 걱정을 한다.

사는 집이 중요한 것일까? 그 좁은 초가 삼 칸 집에서 일세를 풍미하는 두 명의 명창들이 태어났던 것이다. 그리고 그 소리들은 우리 판소리사에 영원히 남아있을 것이다. 운봉을 떠나면서 뒤로 들리는 소리가 발길을 붙들고 있다. 언제 또 이곳을 찾을 수 있으려나. 이동백 명창이 세상을 떠날 즈음에 한 야산에 올라 북을 치면서 했다는 말이 생각이 난다.



‘이제 소리를 알만하니 세상을 떠날 때가 되었다‘ 라는 말이. 그렇게 전국을 20년이 넘는 세월을 돌아다니면서, 우리 문화제를 알만하니 기운이 달린다는 마음이 들어서다.

부여군 외산면 만수리에 소재한 무량사. 신라 문무왕 때 범일국사가 창건했다고 전해지는 고찰이다. 이 무량사 뒤편 고즈넉한 곳에 자리 잡고 있는 산신각. 이 산신각에는 명창가문에서 태어난 피를 토한 한 소리꾼의 이야기가 전한다. 3대 명창 가문은 바로 명창 김창룡의 가문이다. 정노식의 『조선창극사』에는 ‘조선의 소리는 김문에서 되다시피 했다’고 적고 있다.

김문은 바로 중고제의 명창이자 판소리 진양조를 창시한 김성옥으로부터, 무숙이 타령으로 유명한 그의 아들 김정근. 그리고 정근의 아들인 김창룡으로 이어지는 3대 명창집안을 말한다. 이 3대 명창 집안에서 이름을 떨치지 못하고 쓸쓸히 서천 판교(너더리)에서일생을 마친 비운의 명창이 있다. 김창진 명창이 바로 그이다.

한 명창이 10년간이나 득음을 위해 피를 토하는 독공을 한 산신각

명창의 수행고수 노릇을 하던 김창진

김창룡의 아버지인 김정근은 장항 빗금내로 두 아들을 데리고 들어왔다. 그곳에서 창룡에게는 소리를, 창진에게는 북을 가르쳤다고 한다. 예전에 명창들은 수행고수라 하여 자신의 소리를 전문으로 장단을 맞추는 고수와 동행을 했다. 그러나 그 대접은 판이했다. 명창은 대우를 받지만, 고수는 밥을 먹을 때조차 댓돌 아래서 먹었다는 것이다.

형의 뒤를 따라다니면서 수행고수 노릇을 하던 김창진. 그는 고수의 한을 풀기 위해 부여 무량사로 들어갔다. 그곳 산신각에서 10년간이라는 긴 세월을 소리공부에 전념하였다. 형 창진의 수행고수였던 김창진은 자연스럽게 당시 5명창의 소리반주를 하는 일이 잦다보니 5명창의 특징을 잘 알고 있었기에, 그들의 장점만 찾아내 자신만의 독특한 소리를 만들었을 것이다.

당시 형인 김창룡의 인기는 하늘을 찔렀다. 같은 서천 출신 명창 이동백과 쌍벽을 이루던 김창룡. 7세 때부터 아버지인 김정근에게서 소리공부를 시작해, 10살이 되던 해에는 이날치에게서 1년간 공부를 한다. 이날치는 진주 촉석루에 올라 새타령을 할 때, 새가 어깨에 날아와 앉을 만큼 뛰어난 명창이다. 근세 5명창 중 한사람인 김창룡은 수많은 일화를 남긴 명창이다. 당시 관서지방에서는 창룡의 이름이 없으면 극장 대관을 해주지 않을 정도였다고 하니, 그의 인기를 실감할 수 있다.

비운의 명창 김창진. 마지막 제자 박동진 명창에게 소리 전수를 하고 쓸쓸히 세상을 떠났다(인터넷 검색자료)

피를 토하는 독공 10년으로 일군 득음

부여 무량사 산신각에서 10년간 독공으로 득음을 이룬 김창진 명창. 10년을 사는 동안 입고 있는 옷이 다 떨어져, 거적을 뒤집어쓰고 소리를 했다고 한다. 밑이 다 드러날 것만 같은 그런 꼴이 안타까워 무량사의 주지스님이 옷을 한 벌 주었는데, 그 옷을 입으니 사문 밖으로 나가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는 것이다. 당연히 그랬을 것이다. 당시에는 소리만 잘해도 어딜 가나 대우를 받던 때였으니. 그런 마음이 들자 옷을 벗어버리고 다시 거적을 쓰고 소리에만 전념했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했던가. 스스로 독공으로 득음을 한 김창진 명창은 서울로 올라와 소리판에 뛰어들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로부터 명창으로 인정을 받았다고 한다. 소리꾼의 세계는 비정한 것인지. 형에게서 조차 시기를 당한 김창진은 쓸쓸히 서천 너더리로 낙향을 하였다. 일설에는 이동백의 여인을 빼앗아가 피신을 했다고도 한다.

10년 피를 토하는 독공으로 얻어낸 득음. 그러나 너더리로 내려 온 김창진 명창은 그 아픔을 아편으로 이겨보려 하였고, 당시 소리를 하고 싶어 찾아 온 박동진 명창을 소리제자로 만나게 된다. 심청가를 박동진 명창에게 전수를 한 김창진 명창은 그렇게 쓸쓸히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한편의 드라마와도 같은 김창진 명창의 일생은 제자 박동진 명창으로부터 세상에 전해졌다. 무량사 한편에 자리 잡은 산신각. 그런 깊은 사연이 있다는 것을 알리 없는 무심한 사람들의 발길만이 거쳐 간다.(이 이야기는 스승이신 고 박동진 명창으로부터 전해진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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