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저마다 찾는 것이 있다. 같은 곳에 같이 가서 사진을 찍어도, 저마다 나름대로의 마음에 맞는 것을 선택한다. 물론 좋은 것을 찍으려는 마음은 동일하다고 하겠다. 그런 점에서 보면 내가 유별난 것인지도 모른다. 난 어디를 가나 꼭 열심히 찍는 것이 있다. 바로 담벼락이다. 그리고 집안을 기웃거리며 장독대를 찍다가 가끔 경을 치기도 한다.

날이 아침부터 꾸무럭하다. 바람도 선선한 것이 엉덩이가 들썩거려 못 견디겠다. 팔이 아프다는 핑계로 한 사흘 가만히 있었더니, 병이 도졌는가보다. 얼른 카메라를 둘러메고 한옥마을로 향했다, 초입서부터 내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다. 역시 오기를 잘했다는 생각이다. 오늘(2010, 9, 9) 전주 한옥마을에서 내가 만난 담벼락들이다. 담벼락을 만나는 전주 한옥마을의 길, 가을철에 어슬렁거리며 걷기 딱 좋은 길이다.


담벼락이 늘어선 길을 어슬렁거리다.

담벼락이 늘어선 길을 어슬렁거리며 걷고 있노라면, 마음이 텅 비어버리는 것만 같다. 주욱~ 늘어선 담벼락이 마치 시간을 초월해버린 것만 같기 때문이다. 집집마다 변하는 담벼락을 만나면서 이것은 누구네 집, 저것은 누구네 집을 꼽아본다. 손가락이 열개인데 그 손가락을 몇번이고 접었다 폈다를 반복해도, 담장은 끝없이 이어진다. 그래서 이길이 좋다.



  
난 늘 이 담장을 좋아하면서 살았다. 그것은 이 담장 하나가 그리도 포근하게 어린 나를 감싸고 있던 기억 때문이다. 어릴 적 말썽을 피우다가 정말 눈물이 날만큼 혼이나고, 방에서 강제로 추방을 당했던 기억이 있다. 밖에는 눈이 내리고 바람이 불었는데, 속옷 바람으로 밖으로 나왔으니 얼마나 추울 것인가? 아마 그 때는 지금보다 훨씬 추웠던 것만 같다.

그렇다고 우리 가족이 어린이를 학대하는 사람들로 오해는 하지 말기를 바란다. 그 당시에는 누구나 그런 경험이 다 있을 테니까. 그때 담벼락 위에 삐죽 얼굴을 내민 기왓장이 눈을 막아주고, 담장은 한 겨울의 거센 바람을 막아주었다. 그 담장 밑이 왜 그리도 포근하든지.

황토와 기와의 만남, 그 자체가 예술이네




황토와 기와, 그리고 돌이 만나면 찰떡궁합이다. 적어도 내가 보기에는 그렇다. 그것이 담장이 아니었어도 이렇게 궁합이 들어맞았을까? 천천히 걷는 한옥마을 길에는 이런 찰떡궁합이 늘어서 있다. 그래서 연인들이 전주 한옥마을 길을 걸으면, 잘 헤어지지 않는다는 믿지 못할 소문도 있다고 한다. 이런 소문이 헛소문이라도 좋고, 지금 내가 지어낸 소문이라도 좋다. 그저 좋다면 좋은 것이겠지 하는 생각만으로도, 기분 좋은 일이니까.


돌담 또한 운치가 있다. 돌을 그대로 척척 쌓아올리고 그 위를 기와를 얹어놓았다. 참 담벼락이란 것이 묘하기는 하다. 어떻게 만들어 놓던지, 그 모습이 그곳과 어울리기 때문이다. 왜 그래야만 하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그 담벼락이 거기에 있어야 하기 때문은 아닐까? 사람이 언제나 자신이 있어야 할 자리에 있어야 하듯 말이다.



사람들도 그렇다. 다 같은 사람이 아니라고 한다. 사람에 따라 격이 있다고도 한다. 누구는 부자고, 누구는 가난하다. 누구는 잘났고, 누구는 못났다. 누구는 똑똑하고, 누구는 멍청하다. 누구는 착하고, 누구는 나쁘다. 이렇게 누구는 타령을 하다가 보면 석 삼일을 밤낮으로 해보아도 다 못할 것만 같다.

그런데 담벼락은 그런 것이 없다. 그저 담벼락일 뿐이다. 그 담벼락이 돈을 많이 들여서 조성을 했건, 아니면 그저 집에 있는 진흙덩이 조금에 이웃집에 있는 버린 기와 몇 장을 얻어다가 했건 그냥 담벼락일 뿐이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이, 사람보다도 훨씬 좋단 생각이다.



담벼락 길을 따라 어슬렁거리다가 발견한 두 곳의 담벼락. 하나는 돌담 위에 수세미가 열려 나뭇가지로 기어오르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고, 하나는 언제나 거기 붙어 있었다는 듯 그렇게 담벼락에 붙어있는 도판담장이다. 이렇게 볼 것이 많은 길을 걸으면서, 왜 우리는 이런 것에 인색하게 굴까? 그것은 바로 소통을 할 수 있는 마음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오늘 전주 한옥마을을 어슬렁거리며 글 소재 하나는 괜찮은 것으로 얻었다.

길은 어디나 있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 길을 이용한다. 지금이야 차를 갖고 다니기 때문에, 차를 타고 휑하니 달려가 볼일을 보고는 한다. 그러나 예전에는 걷거나 말을 타지 않으면 다닐 수가 없었다. 그렇게 다니던 길이 이제는 나름대로 멋진 이름을 붙여 다시 태어나고 있다. 그 길을 걷는 재미에 빠지면, 길이 다시 보인다.

전주 이목대는 조선 태조 이성계의 4대조인 목조 이안사가 살던 곳이다. 시조인 이한 때부터 누대에 걸쳐 살던 곳으로, 조선개국을 칭송한 「용비어천가」에 이에 대한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고려 우왕 6년인 1380년 금강으로 침입한 왜구는 군선 5백 척을 진포(군산)에 대놓고 백성들을 괴롭혔다. 우왕은 수군을 총지휘하던 최영에게 명하여 이를 무찌르게 하였는데, 패전한 왜군은 퇴로를 찾아 남원으로 내려왔다. 이성계는 이들을 맞아 운봉싸움에서 대승을 거두고 돌아오는 길에, 오목대에서 개선 잔치를 베풀었다고 전한다.


조선개국의 뜻을 품은 길

한옥마을에서 오목대를 오르는 길은 나무계단으로 조성을 하였다. 오목대길은 가끔 산책을 나가기도 하는 곳이지만, 하필 가장 찜통이라는 날을 골랐다. 그래도 나선 길이니 어찌하랴 천천히 계단을 오르면서 돌아보니, 한옥마을의 지붕들이 줄을 지어 보인다. 사람들은 연신 한옥마을을 촬영하느라 카메라를 들이대고 있다. 마을을 찍기 좋은 장소를 골라, 사진촬영을 할 수 있도록 한 마음이 따듯하다.




이목대로 오르는 길은 나무계단이다. 위로 오르면 한옥마을을 내려다볼 수 있다.
한옥마을이 옛날 이야기의 한 장면처럼 펼쳐진다.

낮은 야산이지만 숲이 좋은 길이다. 여기저기 산책로를 만들어 놓아, 사람들이 다닐 수 있도록 배려를 해놓았다. 오목대로 오른다. 그 옛날 이성계가 운봉으로 출동하여 황산에 진을 치고 적과 싸우다가, 왜장 ‘아지발도’를 죽이는 전과를 올렸다. 이성계는 승전을 하고 귀경 도중 전주에 있는 종친들을 모시고 승전축하연을 이 오목대에서 베풀었다는 것이다. 이성계는 이 자리에서 한고조가 불렀다는 ‘대풍가’를 불렀다. 대풍가는 유방이 항우를 물리치고, 고향에서 종친을 모시고 읊은 시가 아니던가. 바로 한나라를 세우겠다는 마음을 은연중 내비친 시이다.

오목대를 비켜서면 이목대가 있다. 보호책을 둘러놓은 이목대 전각 양편으로는 배롱나무 두 그루가 문지기라도 된 양 꽃을 피우고 있다. 전각 안에 비석은 바로 고종황제가 친필로 썼다는 「태조고황제주필유지」라 쓰여 있다. 결국 이곳 이목대와 오목대는 조선이라는 한 나라가 출발하는데 있어, 그 뜻이 모인 곳이다.




오목대와 이목대. 오목대는 이성계가 승전을 하고 잔치를 벌인 곳이며,
이목대는 이곳이 이씨들이 살던 곳임을 알려주는 표지이다.

매미소리 시원한 당산 길

이목대를 지나면 아래로 내려가는 길이 있다. 나무계단을 따라 내려가면 시원한 숲길에서 매미소리가 시끄럽다. 아마 마지막 더위를 아쉬워하는 듯하다. 내리막길에 커다란 당산나무 한 그루가 보인다. 500년 동안 전주 한옥마을의 안녕을 기원해 온 나무이다. 매년 음력 정월 보름에 이곳에서 정결하게 제를 올린다는 것이다.



마을의 안녕을 비는 제를 올리는 당산나무

다시 한옥마을 들어가기 전에 양산재 길로 향한다. 여기저기 목책의자들이 정겹게 놓여있다. 이 찜통더위에 잠시라도 숨을 돌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자리에 않는다. 여기도 역시 낙서는 빠지지 않는다. ‘윤진아 사랑해 - 남편’이란 글이 시야에 가득찬다. 얼마나 사랑하고 있을까? 이런데 낙서를 하면 그 사랑이 깊어지는 것일까? 괜한 헛웃음만 허공에 날리고 있는데, 더위에 날기를 지친 나비 한 마리 나뭇잎에 숨을 고른다.



쉴수 있도록 마련된 나무의자. 이 길에는 나무의자들이 많이 있다.
누군가 한 낙서와 따라오던 나비 한 마리가 같이 날개를 쉰다.


요즈음 사람들은 길을 걷기를 좋아한다. 길은 어디나 있다. 하지만 길이라고 해서 다 같은 것은 아니다. 건강을 위한 길도 있지만, 역사와 문화적인 뜻을 가진 길도 있다. 그런가 하면 경치가 아름다운 곳도 있고, 때로는 걷기조차 마음이 편치 않은 길도 있을 수가 있다.

그 많은 길 중에서 그래도 가장 마음에 드는 길은 역시 경치도 좋고, 역사와 문화적으로 가치가 있는 길이라면 더욱 좋다. 난 길을 걸을 때마다 생각을 한다. 왜 사람들은 이렇게 건강과 문화를 함께 누릴 수 있는 길을 두고, 악다구니 같이 답답한 도심으로 몰려드는지 모르겠다고.


꼬부랑 소나무와 고깔바위들이 널린 길

전주시 완산구 교동 산 9-1에 소재한 견훤왕궁지는, 전주 동남쪽에 위치한 해발 306m의 승암산 동편에 있는 동고산성에 위치해 있다. 이 왕궁터에서 서쪽으로 난 길을 따라 걸으면, 어느 곳에서도 보기 힘든 아름다운 길을 만날 수가 있다.

꼬부랑 소나무길. 아마 동화 속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곳이다. 높이 10m 정도의 소나무들이 하나같이 꼬부라졌다. 흡사 춤을 추듯 제멋대로 휘어진 소나무들은 200여 평 정도에 멋스럽게 자리를 하고 있다. 왜 이곳의 소나무들만 이렇게 휘어진 것일까? 나야 나무에 대해서는 문외한이니, 왜 이런 나무들이 집단으로 서 있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50여m 떨어진 곳이 후백제 견훤의 왕궁지가 있고 보면, 무슨 사연이라도 있을 것만 같다.


요술할매가 요술이라도 부린 것일까? 소나무들이 모두 휘어져 있다.

꼬부랑 소나무 길을 지나 서쪽으로 조금 길을 걸으면 나무계단이 나온다. 이 산 꼭대기에 무슨 나무계단이냐고 투덜거려보지만, 위로 올라가면 언제 그랬냐는 듯 걸음을 재촉하게 된다. 조금 앞으로 보이는 바위들과,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전주 시가지 때문이다.

마치 중이 고깔을 쓰고 있는 것 같다는 승암산. 높지 않은 산이지만, 승암산에는 역사와 슬픔이 함께 한다. 동고사를 비롯해 동고산성과 세계 유일한 동정부부 순교자가 묻혔다는 치명자천주교성지 등이 있다. 그래서 이산의 명칭은 승암산이지만 중바위산, 치명자산이라고도 한다. 치명자성지로 인해 치명자산이라고 한다지만, 그보다는 제 이름을 부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산은 언제나 그곳에 있었고, 그 이름 또한 이유가 있어 붙여진 것이기 때문이다.




바위 꽃이 아름다운 중바위

정상에 오르면 마치 고깔을 엎어놓은 듯한 바위들이 줄을 지어 서있다. 산마루에 칼끝처럼 뾰족한 바위들이 등성이를 따라 솟아나 있다. 바위에는 꽃이 핀 것처럼 화려한 문양이 돋아나 있다. ‘석화(石花)’라고 한다는 바위 꽃이다. 자세히 살펴보면 그 하나하나가 꽃처럼 아름답다.


중바위에 피어난 석화가 아름다운 문양을 자랑한다.

중바위의 앞으로는 전주시가지를 내려다 볼 수 있는 전망대가 설치되어 있다. 한 눈에 전주 시가지와 전주천, 한옥마을 등이 시야에 가득 들어온다. 땀을 흘리면서 이곳까지 걸었지만, 그 시간이 오히려 즐거운 것은 이런 경치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전주에 있는 아름다운 길 중 가장 걷고 싶은 길이다.

무더위로 인해 흐른 땀을 산봉우리에 부는 바람에 식히며 다시 길을 걷는다. 동고사 방향으로 길을 내려가면, 가파르기는 해도 운치가 있다. 흡사 예전 꿈속에서나 보던 숲속의 요정이 다니던 길과 같은 곳을 지나야 한다. 조금은 미끄럽기도 하고, 돌부리에 걸리기도 하지만 그것이 오히려 즐겁다. 산이 높지가 않아 천천히 걸어도 한 시간이면 충분히 돌아올 수 있는 승암산길. 산이 있어 산에 오른다고 하지만, 난 길이 있어 길을 걷는다.


전망대에서 바라본 전주 시가지와 견훤왕궁지로 가는 길.

경기도 여주군 북내면에 가면 단종임금이 지나갔다는 마을이 있다. 여주군 북내면에 있는 상구리와 상교리, 그리고 주암과 서원리 등이다. 1457년 단종은 숙부인 수양대군에 의해 노산군으로 강봉이 되어, 의금부 도사 왕방연과 중추부사 어득해가 이끄는 군졸 50여명의 호송을 받으며 유배 길에 올랐다.

1457년 6월 22일, 단종은 한양을 출발하여 일주일만인 6월 28일 영월 청령포에 도착했다. 어린 단종은 상왕이 되었다가 다시 노산군이 되어 한양을 출발해 뱃길로 한강을 거슬려 이포나루에 도착을 했을 것이다. 이곳에서 어린 단종은 어디로 길을 택해 영월로 향했을까?

눈물어린 길을 따라가 보다

여주군 상구리 블루헤런 골프장 안에 있는 단종이 물을 마셨다는 어수정

파사산성이 보이는 강길을 따라 걷기 시작한 단종 일행은 여주군 대신면 보통리 위안골을 지나 무촌리 -옥촌리-장풍리를 거쳐 현재 골프장인 블루헤런 안에 있는 어수정에 도달했을 것이다. 어수정은 단종임금이 이곳에서 마른 목을 축였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그 당시에야 길인들 제대로 있었을까? 겨우 사람 하나 지날만한 숲길을 헤치고 일행은 더딘 걸음으로 움직였을 것이다. 어수정에서 목을 축인 일행은 혜목산을 넘어 고달사지에 도착한다. 고달사는 경기도 여주군 북내면 상교리에 있던 절로 , 신라 경덕왕 23년인 764년에 창건된 절이다. 고려 시대에는 동봉원. 희양원과 함께 삼원의 하나로 역대 왕들이 비호를 하던 사찰이다.


어수정에서 물을 마신 단종은 안개가 자욱한 이 산을 넘어 고달사지에 도착한다.

고달사는 임진왜란 때에 소실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으니, 당시는 고달사가 존재했다는 이야기다. 아마 많은 사람들이 단종 일행이 지나갈 때 바라보지 않았을까? 그 중에는 억울한 단종의 유배길에 눈물을 훔치는 백성들도 있엇을 것이다.

고달사에서 논둑 길을 따라 걷다가보면 좁은 산길이 나온다. 산길이라야 그저 낮은 마을 뒤 언덕이다. 이 길을 따라 걷던 일행은 서낭나무에 도착을 한다. 서낭나무는 지금은 옆으로 쓸어져 모진 생명을 연장하고 있다. 아마 당시 이곳을 지나던 단종일행의 아픔을, 아직도 다 전하지 못했음을 아쉬워 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좁은 길을 따라 걷다가 보면 하늘이 트인 곳이 나오고, 그 낮은 고개 위에는 서낭나무가 서 있다.

서낭나무 앞에서 잠시 숨을 들이쉰다. 서낭나무에서 20여m 앞에는 예전 서낭할머니가 살던 집이 있다. 이 곳에서 논길을 따라 걷던 일행은 서원리로 향했을 것이다. 서원리는 원이 있었던 곳으로 현 서원1리를 '원골'이라 부른다. 이곳은 공무를 보러 여행 길에 나선 관리들이 묵어가던 곳이다. 지금도 서원리에는 예전 원이 있던 집터가 있고, 마을주민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집채만한 주추들이 있었다고 한다.
 
서원리 원골에서 하루를 묵은 단종일행은 북내면 석우리 선돌 앞을 지나 내룡리, 북내면 외룡리를 지나갔을 것으로 추측한다. 마을이름이 내룔이나 외룡이라는 지명은 이곳이 왕과 관련된 지명이고, 단종이 지나갔기 때문에 '용'이란 명칭을 붙인 것으로 보인다. 


고목이 되어버린 서낭나무와 그 앞 들판인 점말 고래들. 그리고 원골로 넘어가는 길

고달사지부터 길을 시작해 논길을 걸어 숲으로 접어든다. 한 여름 뙤약볕에도 숲길은 시원하다. 발밑에서는 비가 온후 자라난 풀들이 밟히는 소리가 난다. 그러나 그 당시에는 이런 마음조차 갖지 못했을 것이다. 아마 나이 어린 폐왕은 사랑하는 사람들과 떨어져 혼자 먼 길을 떠나 유배길에 올라야 한다는 것이, 두렵고 또 두려웠을 것이다.

얼마나 많은 피눈물을 흘렸을까? 단 한 시간여를 걸어본 길도 힘이든대, 700리 길을 걸어 영월 청령포로 향한 어린 단종. 지금 이 길을 따라 걸으면서 그 아픔을 느끼기에는 너무나 먼 세월이 가로막고 있다. 여름 무더위를 식히는 시원한 바람 한 줄기가 이마를 스치고 지나간다. 그 때도 이렇게 바람이 불었을까?    
 



전주시 덕진구 덕진동 1가 산 1 - 1에는 <소리문화의 전당>이 있다. 소리문화의 전당 뒤편 숲은 전북대학교의 학술림이다. 이곳은 더위를 피해 찾아드는 사람들로 여름이면 사람들이 찾아들어 꽃을 피운다.

이 학술림은 1964년 3월 5일 지정이 되었으며, 면적은 총 138,19ha이다. 전주시 덕진동, 송천동, 금암동, 인후동 일부를 포함하고 있으며, 주요 수종으로는 느티나무, 단풍나무, 상수리, 편백, 히말라야시다 등이 자라고 있다.


한 여름 최고의 피서지 편백나무 숲

소리문화의 전당을 뒤로하고 숲길로 접어들었다. 흙길을 밟으며 조금 걸어가니 삼거리에 이정표가 보인다. 장덕사 860m, 대지마을 430m, 오송제 360m 라는 푯말이 보인다. 운동을 하느라 숲길을 걷는 분들에게 길을 물어 편백나무 숲으로 향했다. 오송제(오송지)라 쓴 푯말을 따라 조금 걸어가니 사람들이 숲속에 앉아 더위를 피하고 있다. 편백나무 숲이다.



한 여름에도 더위를 느낄 수 없는 편백나무 숲

이곳은 하늘 높게 자라고 있는 편백나무가 빼곡 들어차 있다. 여기저기 사람들이 앉아 담소를 나누고 있고, 숲 안쪽에는 누구인가 텐트를 쳐 놓았다. 한편에는 자리를 펴고 책을 읽는 모습도 보인다. 다람쥐 한 마리가 사람들도 두려워하지 않고 뛰어다닌다. 길을 바꿔 작은 소로로 접어들었다. 풀 냄새가 싱그럽다. 발에 밟히는 땅의 감촉이 좋다. 맨발을 벗고 땅을 밟으니 축축하게 물기를 머금고 있다. 고운 흙이 발가락 사이를 비집고 올라온다.


음산한 플라타너스나무 숲

흙이 고운 길을 걸어 숲길을 벗어나니 차가 다니는 큰 도로가 나온다. 건너편을 보니 플라타너스나무들이 줄지어 서 있다. 길을 건너 플라타너스나무 숲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영 기분이 안 좋다. 시내에 있던 가로수를 딴 수종으로 교체하면서 이곳으로 플라타너스나무들을 옮겨왔다고 한다. 촘촘히 심어 놓은 나무들은 성한 것이 별로 없다.

그 중에는 죽어 썩어진 것들도 있고, 아랫부분만 남기고 뭉텅 잘라진 것들도 있다. 거기다가 나무들을 너무 가깝게 심다보니, 가지들이 옆으로 뻗지를 못하고 위로만 자라났다. 한 마디로 음산한 풍경이다. 아마 비라도 추적거리고 내리는 날이면 아무도 이곳을 들어오지 않을 것만 같다. 동행을 한 분이 한 마디 하신다.


음산한 분위가가 나 대낮에도 사람들이 피하는 플라타너스 숲

“이 곳은 정말 기분 나빠요. 대낮에도 무엇인가가 자꾸 뒤를 따라오는 것 같아서요” 그럴 만하다. 어떻게 나무를 이렇게 만들어 놓았을까? 그래도 한 때는 전주시의 가로수 길을 시원하게 그늘을 만들었던 나무인데.

온갖 수종을 느끼면서 걸을 수 있는 길

숲을 한 바퀴 돌아 원점으로 돌아왔다. 대지마을 쪽으로 돌아와 반대편인 장덕사 방향으로 길을 잡았다. 더위에 이미 몸은 땀으로 흠뻑 젖었지만, 숲속의 향에 취해, 그런 것은 잊은 지가 오래이다. 편백나무 숲이 앉아 쉬는 사람들이 많다면, 이 길은 걷기 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많다. 작은 꽃들이 여기저기 피어 지나는 사람들의 눈길을 끌어 다닌다.




걷다가 보니 하늘이 보이지 않는 컴컴한 숲길이 나타나기도 한다. 길은 어디나 있다. 숲길 역시 마찬가지이다. 어디나 펼쳐진 숲길은 나름 제멋을 지니고 있다. 그래서 숲길은 늘 신선하다. 소리의 전당 뒤편 전북대학교 학술림. 1시간여를 땀을 흘리며 돌아본 길. 다양한 모습으로 다가오는 전주 소리의 전당 주변의 숲길에는 참 많은 이야기꺼리를 만들어준다. 그래서 길을 걷는 것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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