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사를 많이 다니는 나로서는 장거리 여행이 기본이다. 버스를 많이 탈 때는 5~6시간 정도가 기본이기 때문에, 차로 이동을 하기 전에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곳이 바로 터미널에 있는 공중화장실이다. 일단 속을 비워야 장거리 여행을 해도 안심을 하게 되니까.

버스는 대개 출발을 하고나서 2시간 정도가 지나야 휴게소에 들린다. 하기에 2시간 정도 참을 만큼은 속을 비우는 것이 편하다. 8월 29일 일요일, 대전에 가서 일을 좀 보고 천안으로 향했다. 버스를 이용해 답사를 하다가 보면 시간이 곧 돈이다. 버스를 자주 갈아타다가 보면 기다리는 시간이 아깝기 때문이다.

답사를 하느라 29일 오전 9시 반에 길을 나서 대전을 거쳐, 천안지역을 답사한 후 돌아왔다.

공중화장실에서 옷을 갈아입는 사람

어제따라 천안지방은 국지성 호우가 줄기차게 쏟아졌다. 그래도 나선 길이 아니던가. 몇 곳의 답사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기 위해 천안시외버스 터미널로 들어섰다. 표를 사놓고 보니 시간이 20분 정도 여유가 생긴다. 늘 하던 버릇대로 공중화장실로 들어섰다. 그런데 그 순간 한 젊은이가 옷매무새를 정리하며 나온다.

마침 그 칸만 비어있는지라, 방금 나간 칸이지만 들어섰다. 그런데 웬 봉지가 하나있다. 안을 보니 신발이 들었다. 찬찬히 들여다보니 그 밑으로는 옷도 있다. 한 마디로 이곳에서 옷을 갈아입고, 입었던 것은 버리고 가 버린 것이다. 왜 그랬을까? 이유를 알 수는 없다. 멀쩡한 신발과 옷이다. 그런데 왜 새 옷으로 갈아입고, 입었던 것을 버리고 간 것일까?

옷 보따리를 들고 따라 나가 보았지만, 이미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버려진 옷가지가 아깝기도 하거니와, 도대체 왜 이런 행동을 하는 것인지 알고 싶어서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우리야 검정고무신을 신고 학교를 다닐 때 사람이다. 흰 운동화 한 켤레를 사면 밤새 잠을 자지 못했다.


도착지의 공중화장실에서도 신발이 든 봉투가 있었다.

하기야 그때와 지금은 세상이 다르다. 하지만 멀쩡한 옷가지를 공중화장실에서 갈아입고, 입었던 것을 버리고 가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그 옷을 들고나가 분리수거함에라도 넣으려고 하니, 한 분이 그냥 버리란다.

“아깝지 않으세요?”
“하루에도 그런 옷가지 수도 없이 나와요”
“옷가지가 왜 나와요?”
“낸들 알겠소. 갈아입고 그냥 버리고 가요. 돈이 남아돌아가는지”

할 말이 없다. 그냥 놓아두고 나오면서도 영 마음이 편하지가 않다. 힘들여 번 돈일 텐데. 그리고 이렇게 멀쩡한 것인데. 목적지에 도착을 해 일부러 공중화장실을 한번 열어보았다. 그런데 이건 또 무엇이람? 봉지가 있어 열어보니 그곳에도 운동화가 하나 들어있다. 이것 역시 멀쩡하다. 세상이 어찌 이렇게 변했을까? 공중화장실이 이렇게 변장을 하는 곳으로 변하다니. 이곳에서 변신을 하고 이성친구라도 만나러 가는 것일까? 그래서 벗은 옷가지를 갖고 다닐 수 없으니 버린 것은 아닐까? 별 생각이 다 든다.

굽이 조금 닳았지만 멀쩡한 신발이다.

세상이 아무리 달라졌다고 하지만, 멀쩡한 옷가지를 공중화장실에서 바꾸어 입고 버리고 가는 사람들. 앞으로는 시외버스터미널에는 헌옷 수거함과, 신발 수거함이라도 비치를 해야 할 것만 같다.

경술국치일, 1910년 8월 29일은 한일합방이라는 역사에 부끄러운 일을 당한 날이다. 이제 2010년 8월 29일은 국치를 당한지 꼭 100년이 되는 날이다. 전주 경기전 앞에서는 다시는 이러한 치욕적인 일을 당하지 않기 위해 국치일을 되새기기 전시회가 열려 눈길을 끌고 있다.
 
‘국치 100년 특별전. ’거대한 감옥, 식민지에 살다‘라는 타이틀로 8월 20일부터 29일까지 전시가 되는 이 특별전은 민족문제연구소 전북지부에서 주최를 한다. ’전주이기 때문에 이런 전시도 하네‘라는 관람자의 말대로, 전주는 바로 경기전이 있는 곳이다. 조선이라는 나라를 개국한 태조 이성계의 초상화를 모신 어용전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성계의 조상들이 이곳 전주 이목대에서 살았기 때문이다.



경술국치 100주년을 맞아 당시를 그릴 수 있는 뜻 깊은 전시가 열리고 있다

항일과 반일을 캐리캐처로 그려

이 전시회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바로 캐리캐처로 그려진 사람들이다. ‘한 시대의 다른 삶, 항일과 친일’이라는 제목을 붙인 이 그림들은 각계의 사람들 중 친일인사와 항일운동을 한 사람들을 소개하고 있다. 물론 이 인물들은 역사적인 사실에 근거해서 친일과 항일을 구별한 것이다.



항일을 한 사람과 친일을 한 사람들이 캐리캐처로 그려져 있다

경기전을 관람하러 온 사람들이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차분하게 들여다본다. 우리가 잘 아는 역사적 인물이지만 그들이 새삼 일본에 협조를 한 친일인사라는 것에 입맛이 씁쓰레해진다. 이 외에도 수탈의 현장, 항일운동을 한 의병들의 공개처형 장면 등 당시를 생각할 수 있는 사진들이 전시가 되어있다. 그 뒤 한편에는 한국의 대표언론이라는 신문사가 일장기를 제호 위에 달고 전쟁을 성전이라고 독려하는 사진도 보인다.



경기전 벽에 붙은 대형현수막 앞에서 사람들은 걸음을 멈춘다. ‘지금은 곤란하다. 기다려 달라’는 일본 후쿠다 총리와 이명박 대통령의 회담 내용의 진실을 알려달라는 것이다. 일본의 언론들도 그 말이 사실이라고 보도를 했다는 내용도 함께 전시가 되어있다. 사람들은 ‘설마’라는 말로 위안을 삼아보지만, 그 진실은 오직 당사자만이 알 일이다.


과연 무엇이 진실일까를 묻고 있다

돌아보던 어린이 ‘정말 나쁜놈들이예요’

‘해방,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라고 외친다. 과연 우리는 완전한 해방을 맞기는 했을까? 의문을 갖게 만든다. 일본의 대기업인 미쓰비시가 10만 명이나 되는 한국인들을 강제노역에 동원하고, 65년이나 밀린 임금을 후생연금이란 명목으로 고작 99엔(한화 1,300원)을 지불하겠다고 했다는 내용에 격분하고 있다. 그 한편에는 ‘성노예로 끌려간 소녀들’, ‘총알받이로 끌려간 조선 청년들’의 이야기와 창씨개명 등 조선말살정책을 편 일본의 만행을 적고 있다.





한편에는 나라를 일본에 팔아넘긴 을사오적(이완용, 이근택, 이지용, 박제순, 권중현), 정미칠적(이완용, 송병준, 이병무, 고영희, 조중응, 이재곤, 임선준)과 한일병합 조약인 경술국적(이완용, 윤덕영, 민병석, 고영희, 박제순, 조중응, 이병무, 조민희) 등이 조선을 넘겨주고 일본에서 받은 상금과 직위 등을 소개하고 있다.

아직도 끝나지 않은 국치의 잔재. 과연 완전한 해방은 무엇인가를 스스로 질문을 하게 만드는 이 전시를 보면서 마음 한편이 착잡하다. 언제라야 정신대 할머니들의 응어리진 속이 조금이나마 풀리려나? 하는 생각에서.

모악산은 자연이 살아있는 산이다. 산을 오르다가 보면 바위 틈을  흘러내리는 맑은 물과, 계곡을 끼고 흐르는 길의 정취가 일품이다. 정상까지 걸어서 1시간 30분 정도가 소요되기 때문에 수 많은 사람들이 찾아온다. 주말과 휴일이 되면 모악산 주차장은 만차가 된다. 그만큼 많은 사람들이 모악산을 즐겨 찾는다.  

요즈음은 방학도 끝나고 평일에는 그리 많지 않은 사람들이 오기 때문에 주차장이 많이 비어있는 형편이다. 사시사철 아름다운 풍광을 느낄 수가 있는 모악산. 어머니의 산이라는 모악산 주차장에는 많은 차들이 정차를 할 수 있는 주차장이 마련되어 있다. 이렇게 어느 곳보다도 주차장이 넓게 마련이 되어있는 것은, 모악산에 김씨 시조묘가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아마 남북이 화해모드로 갈 때 답방에 대비한 것이라고도 한다. 

주차장이 있는데 왜 이렇게 주차를

모악산을 일주일이면 한 번쯤 꼭 오르는 나로서는 늘 불만이 있다. 바로 주차장에 차를 주차시키지 않고, 차를 순환하기 위해 만든 로터리나 길가에 주차를 하는 얌체족들 때문이다. 모악산 입구에 있는 로터리는 하루에도 많은 차량들이 이곳을 돌아나간다. 그런데 이곳이 언제부터인가 산을 오르는 사람들 중 얌체족들의 단골 주차장이 되어 버렸다. 많을 때는 산을 오르는 길목을 막아 놓기도 한다.

산으로 오르려면 걸어야 한다. 그런데 주차장에서 불과 200m 정도 떨어져 있는 이곳에 굳이 차를 대야만 할까? 길을 막아서 차를 대놓는 양심불량인 사람들 때문에 그 위에 차를 댄 사람들이 나가지 못해 발을 구르는 일도 생긴다. 양편 상가 앞에도 주차를 해 놓아 차들이 중앙선을 넘나드는 곡예를 하기도 한다. 그러다가 맞은편에서 차가오면 본의 아니게 욕을 먹어야 할 수도 있다. 이렇게 무법천지인 모악산 입구. 관리사무소에서도 이젠 지쳐 말을 하기가 싫다고 할 정도이다. 산을 오르는 사람들이 주차장에서 입구까지 걸어오기가 싫다면, 산은 왜 오르는 것일까?

차를 돌려 나가야 하는 모악산 입구 로터리에 주차를 해 놓은 얌체주차족들. 이들은 모악산을 오르기 위해 이곳에다가 주차를 해 놓는다. 200m 정도를 내려가면 넓은 주차장이 있다.



  
상가 양편에 주차를 해 놓은 사람들. 이들 때문에 위로 가야하는 차들은 중앙선을 넘어야만 한다. 그렇게 다니는 차들로 인해 중앙분리대의 표지가 다 망가져 버렸다. 관리소에서는 아무리 이야기를 해도 막무가내라고 한다. 하루 속히 이런 주차를 하는 차량들은 강제견인을 할 수 있는 법이 만들어져야 할 것이다.



평일이라서 그런지 주차장은 빈 자리가 많이 보인다. 그런데도 이 곳에 주차를 하지 않고, 상가 양편이나 로터리에 차를 대 놓는 사람들이 양식이 있는 것일까? 산을 오르기 위해 이곳에 온 사람들이, 조금 덜 걷겠다고 주차장을 마다하고 차도에 주차를 하는 행위. 아마 이런 사람들. 남들이 자신의 집 앞에 주차를 해놓으면 길길이 뛸 사람들이다.


주차장이 있는대도 불구하고 차들이 다니지 못하도록 얌체주차를 해 놓은 사람들. 이런 얌체족들을 방지하기 위해서라도 강제견인을 할 수 있는 지자체의 조속한 법 제정이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비가 오기에 다시 가보았다. 오늘은 얌체주차족들이 더 많이 눈에 보인다. 넓은 주차공간을 마련해 놓고, 그곳에 주차하기를 계도하고 있다지만, 막무가내식의 이런 사람들에게는 보다 적극적인 대응책이 필요한 것이 아닐까? 

빙의란 ‘죽은 생명의 원혼이 살아있는 생명에 붙는 것’을 말한다. 요즈음 드라마 ‘여우누이뎐’인가의 막바지에 빙의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 듯하다. 나야 원래 드라마하고는 담을 쌓은 사람이니 여우누이뎐이란 드라마가 어떻게 전개가 되었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우리가 ‘빙의현상’이라고 하는 것은 단순히 원혼이 붙는 현상이 아니다.

요즈음 들어 빙의현상을 체험하는 사람들도 있고, 사람에게 붙은 원귀를 떼어준다는 이야기도 많이 듣는다. 그러나 그동안 우리가 알고 있는 빙의와는 달리, 빙의에 접한 사람의 입을 통해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단순히 ‘귀신들림’ 혹은 ‘귀신접함’이란 형태의 빙의의 실체는 무엇일까?

망자의 넋을 위로하는 지전춤(기사의 특정사실과는 무관합니다 

한 몸에 두 영혼이 존재할 수 있는가?

우선 빙의의 형태는 일반적으로 한 사람의 몸에 두 개의 영혼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 말은 틀린 것은 아니다. 빙의에 걸린 사람은 때로는 본인으로, 때로는 몸에 붙은 귀신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 두 개의 영혼이 어떻게 한 몸에 공존을 하는 것일까? 흔히 ‘귀신 들린 사람’들의 형태를 보면, 때로는 정신이 멀쩡했다가 때로는 미친 것 같아 보인다. 이런 형태를 우리는 흔히 ‘반미치광이’라는 표현으로 대신할 수가 있다.

그렇다면 왜 빙의가 들린 사람들이 이렇게 반은 자신으로 반은 원혼으로 살아갈 수가 있는 것일까? 오래도록 굿판을 다니면서 ‘귀신 쫒는 굿’, 흔히 ‘ 귀(逐鬼)굿’ 혹은 ‘축사(逐邪)굿’이라고 하는 굿을 수도 없이 보았다. 엎어놓고 소금을 뿌리고 불로 위협하고, 무검(巫劍)을 갖고 찌르는 시늉을 한다. 그럴 때마다 몸에 붙은 귀신은 앙탈을 부리기도 한다. 이런 형태를 흔히 ‘귀신이 집을 짓는다’라고 이야기 한다.


굿을 할 때는 무격(巫覡 - 여자무당은 巫, 남자무당은 覡이라 표현한다)들과 몸에 붙은 귀신들이 협상을 벌이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영혼만 있는 귀신이 자신의 뜻을 전하기 위해서는 살아있는 사람을 택해야 하는데, 그것을 바로 집을 짓는다라고 하는 것이다. 하지만 빙에 걸린 사람들은 그렇게 쉽게 풀려나지는 않는다.

“제가 저를 바라다보고 있어요”

이런 빙의에 걸린 여자가 굿을 했다. 23살인 여자는 8살짜리 남자 아이가 빙의가 되었다고 한다. 굿판에서 여자는 어린아이 목소리를 내면서 안 나간다고 울고불고 한다. 그러다가 학용품과 옷을 사다주면 나가겠다는 것이다. 사람을 시켜 가방이며 옷 등을 사다가 주었더니, 나가겠다고 이야기를 한다. 어떻게 들어왔느냐고 물으니, 길에 있다가(후에 들은 이야기로는 이 아이는 교통사고로 생명을 잃었다고 한다) 마음 좋은 누나가 지나가 길래, 얼른 따라갔다는 것이다.

어쨌거나 6시간이 넘게 실랑이를 벌리다가 아이가 간다고 인사를 하고 나갔다. 눈에 보이는 실체는 물론 없다. 하지만 그 순간 여자가 한숨을 토하더니 일어난다. 그리고 제 정신이 돌아왔다. 놀라운 이야기는 그다음에 벌어졌다.

“언제 아이가 몸에 들어온 것 같아요”
“두 달 전인가 직장에 갔다가 집에 오는데 갑자기 몸이 섬뜩했어요. 그때인 것 같아요”
“나이가 있어서 본인이 정신을 차리면 괜찮을 듯도 한데”
“그럴 수가 없어요. 그 아이가 내 몸을 뺐으면 저는 몸에서 쫓겨나요. 그리고 그 아이가 마음대로 하죠”
“그걸 어떻게 알아요?”
“제가 저를 보고 있어요. 제가 들어가려고 해도 그 아이가 나가지 않으면 들어갈 수가 없어요”

세상에 어째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결국 빙의란 한 사람의 몸을 두 개의 영혼이 공유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공유가 자신이 있고, 귀신이 접하는 것이 아니라, 몸은 하나를 갖고 서로 번갈아가면서 몸을 지배한다는 것이다. 결국 ‘여우누이뎐’에서도 자식의 병을 고치려고 딴 아이를 죽여 간을 먹은 초옥에게, 죽은 연이의 원혼이 씌었다는 것이다. 결국 초옥이의 몸을 초옥이와 연이가 공유를 했다는 것이다.


드라마의 설정은 초옥이 연이가 되어 구산댁과 모녀사이가 된다고 하지만, 이런 설정의 경우 설득력이 부족하다. 몸의 주인인 초옥이가 없는 연이는 그 몸을 지탱할 수 없는 것이다. 즉 몸의 주인이 살아있을 때라야 귀신도 그 몸을 함께 공유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앞에서 보인 경우와 같이 귀신이 씌었다고 해도, 언제나 연이일 수는 없는 것이다.

‘여우뉴이뎐’이 방영되면서 여러 사람이 빙의가 무엇이냐는 질문을 해오기에, 굿판에서 본 내용을 정리를 해본다. 결국 빙의란 우리가 알고 있듯 의지가 약해 들린다는 것은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흔히 무속에서 이야기를 하듯 ‘남녀노소 빈부귀천’을 막론하고 누구나 무당이 될 수 있듯, 누구나 빙의에 접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인사동, 참으로 오랜만에 들려본 곳이다. 고향이 서울이고 더구나 본적은 창덕궁 뒤편에 있는 재동이다. 학교를 운니동에서 다녔으니 인사동과는 길 하나 차이이다. 그런데도 서울을 떠난 뒤로는 인사동이라는 곳을 몇 번 밖에는 가 본 기억이 없다. 아마 그곳에 문화재가 많이 있었다고 하면 자주도 찾아갔을 텐데 말이다.

모처럼 출장길에 들리게 된 인사동은 예전에 내가 알고 있던 곳이 아니었다. 한국적 냄새가 물씬 풍기던 곳, 그리고 어디를 가나 고집 센 문화예술인들을 쉽게 만날 수 있는 곳. 난 인사동을 그런 곳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하지만 10여년 만에 찾아간 인사동은 왠지 감칠맛이 없어 보인다. 무엇인가 달라지긴 했는데 딱히 그것이 무엇인지는 모르겠다. 그저 예전보다 인사동다운 맛이 떨어졌다고나 할까.


오랜만에 막걸리 집을 찾아들다.

알다시피 인사동은 한옥촌이다. 뒷길로 들어가면 즐비한 한옥들이 붙어있다. 아마 인사동만의 그런 모습 때문에 늘 기억을 하는 것이고, 그 한옥의 정겨움에 익숙해져 있는 터라 스스럼없이 발길을 향했을 것이다. 출장길에 나섰으나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는 바람에 어차피 출장길을 재촉한다는 것도 무리일 것만 같아, 자연스럽게 도예인들과 동행을 하게 되었다.

한 곳을 찾아 들어가니 ‘푸른별 주막’이란다. 이름부터가 마음에 든다. 고택기행을 하고 있는 중이라 한옥만 보면 우선 그 구조부터 살피는 것이 습관처럼 되어있다. 대문을 들어서면 우측에 문간채가 있는데, 이곳은 광으로 사용을 한다. 인사동의 한옥들은 넓지 않은 터에 집을 지어서인가 공간을 최대로 활용을 한다. 집은 ㄱ 자 구조로 사랑방과 대청, 안방이 나란히 있고, 꺾인 부분에 부엌과 건넌방이 있다.

좁은 집을 이용하려다 보니 입구부터 복잡하다

처마에 부연을 단 것으로 보아 꽤 잘 지어진 한옥이다

좁은 공간을 이용하기 위해 화장실 위에 장독대를 올렸다. 그 앞에는 장승도 서 있다. 

앞에는 타일로 바른 목욕탕 겸 화장실을 두고 그 위에 장독대를 올렸다. 처마에 부연을 댄 것으로 보아서는 좁기는 하지만 나름 충실한 집이다. 집을 지은 부재도 단단해 보인다. 지금은 건넌방 하나만을 신을 벗고 들어가기 만들고, 나머지는 모두 신을 신고 들어가는 방으로 만들었다.

개성 있는 막걸리집서 사진으로 만난 스승

자리를 잡고 벽을 둘러보니 낯익은 것들이 보인다. 어릴 적 나도 그랬을 캐캐묵은 사진들이 걸려있다. 강에서 발가벗고 수영을 하는 아이들. 운동회 날 달리기 준비를 하는 아이들. 한 쪽 벽에 기대고 머리를 처박고 하는 말타기. 또 한 장은 아마 즐거운 소풍날일게다. 그 옆으로 이 집의 메뉴가 주욱 나열이 되어있다. 딴 것은 눈에 들어오지 않는데, 단 한 가지가 마음에 든다. ‘푸른별에서는 화학조미료와 수입 식자재를 쓰지 않습니다’ 라는.

옛날을 그립게 만드는 사진들

벽에 가득한 이 집의 메뉴판이다.

망자의 넋을 올린다는 지전으로 된 넋전

마당에는 종이배와 넋전들이 허공에 매달려 음산하기도 하다.

작은 마당에는 장독대 앞에 장승이며 넋전, 그리고 종이배들이 공중에 떠 있다. 한 많은 사람들이 저 배를 타고 극락으로 떠났을까? 그 배에 저 넋전에 붙은 혼백이라도 띄워 보낸 것일까? 밝지 않은 종이등 불빛에 흐늘거리는 넋전이 묘한 분위기를 낸다. 그래서 인사동일게다. 무엇이라도 수용을 할 수 있는 곳이니.

집을 돌아보다가 그만 얼음이 되고 말았다. 한편 벽에는 어느 작가의 작품인 듯 ‘그 때 그 사람들’이라는 제목이 달렸는데 김수환 추기경, 정당인 김근태 등이 보인다. 그런데 그 끝에 아주 낯익은 여자 분이 눈에 띤다. 바로 채희아 선생님이다. 반가운 얼굴이다. 개인적으로 채희아 선생님은 내가 중학생일 때 나의 스승이기 때문이다.

사진작가의 작품인 듯. 그 안에 채희아 선생의 모습이 보인다.(아래 좌측)

오랜 시간은 아니지만 남다른 스승이다.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가 다시 돌아오셔서 황해도 내림굿을 받고 만신의 길을 걷기도 했다. 당시 채희아 선생님의 이야기는 두고두고 많은 사람들에게 회자가 되었다. 서울대 출신에 미모의 여인이 내림굿을 받는다고 했으니 말이다. 사진 속이나마 바라보자니 눈물이 난다. 겉으로는 웃고 마시지만, 아주 어릴 적 스승의 대한 기억이 많아서인가 보다.

인사동. 그래서 인사동은 추억의 거리라고 한다. 이곳에서 많은 사람들은 추억을 찾고 싶어 한다. 까맣게 잊고 살던 옛날을 기억하고 싶어 한다. 그러나 이제 인사동이 그 기억을 지워버리고 있는 듯해 마음이 아프다. 그것이 비록 아름답지가 않고, 아픈 기억이긴 하지만 오래도록 남았으면 하는 기억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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