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0년 이상 묵은 소나무와 석실 안 성황지신 민속적 가치 높아

 

흡사 벅수처럼 석주형 돌기둥 안면을 돌을 쪼아내듯 조각을 했다. 복판에는 흐릿하게 성황지신(城隍)이라고 음각을 해 놓았다. 네모난 돌에 벅수형태로 조형을 한 성황지신의 얼굴에는 흡사 면사포를 씌우듯 한지로 가려놓았다. 이 돌 성황을 석실 안에 모셔놓고 매년 정월 초정일(初丁日)에 마을주민들이 정성을 다해 음식을 차리고 마을의 안녕을 빌었다.

 

강원도 고성군 현내면 산학리. 마을회관 뒷산에는 수령 400년이 지났다는 커다란 소나무 두 그루가 서 있다. 이 마을에서는 매년 정월 초정일이 되면 음식을 마련해 이 나무에 정성으로 치성을 드렸다고 한다. 이 두 그루의 소나무가 바로 성황나무인 것이다. 그러던 것을 70여 년 전에 주민들이 석실을 마련하고 그 안에 석주로 된 성황신을 모셨다고 한다.

 

 

13일 오후, 고성군 현내면 산학리에 수백 년이 지난 석실이 있다는 제보를 받고 산학리로 향했다. 마침 그곳에 도공 김원주(, 54)가 작업을 하고 있어서 함께 동행하여 나지막한 신을 올랐다. 기온이 35도에 육박하는 무더운 날씨지만 사진으로 보내준 석실의 정확한 용도를 알아보기 위해서이다.

 

날이 워낙 덥다보니 사람을 만날 수가 없다. 마을회관 뒤편 소로를 이용해 산을 오르니 커다란 소나무 두 그루가 서 있고, 그 옆에 돌을 쌓아 만든 석실이 보인다. 얼핏 예전의 고분인 석실을 연상케 하지만 아무리 보아도 돌의 재질이 옛 것이 아니다. 석실 안으로 들어가니 석주에 성황지신의 안면을 새겨 놓았다.

 

이런 형태의 조각은 처음예요. 투박하긴 하지만 우리 정서를 그대로 갖고 있는 듯합니다. 정성을 드린 흔적도 넘어있고요

 

도공 김원주는 지리산 삼성궁에서 수년 째 돌 작업을 해왔기 때문에 석실 안에 놓인 석주형 성황지신을 보고 투박하지만 우리의 전통을 잘 지키고 있다고 한다. 그렇게 석실이 궁금해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있는데 마을 어르신 한분이 밭을 지나가다가 무엇을 하느냐고 묻는다.

 

 

70여 년 전에 석실을 조성했다는 증언

 

마을 어르신은 자신이 산학리 마을에서 가장 연세가 많다고 하신다. 올해 79세라는 것이다. 다행히 어르신은 이 성황에 대해서 자세히 알고 계셨다.

 

그 소나무는 400년이 지났다고 어른들이 말씀하셨어요, 매년 정월 초정일에 그 나무아래서 성황 제사를 모셨는데 내가 어릴 적 저 석실을 마련하고 그 안에 성황신을 모시는 작업을 한 것을 내가 본 것을 기억해요

 

마을어르신이 증언대로라면 이 석실을 조성한 것은 70년이 조금 지났다. 하지만 성황목인 소나무에서 성황제를 지낸 것은 이미 400년이 지났다는 것이다. 그렇게 긴 시간 이곳 산학리는 성황지신이 지켜온 마을이라는 것이다. 한 마을의 구심점인 공동체가 형성되어 온 이유는 바로 산학리 선황지신이라고 볼 수 있다.

 

 

단절된 위기에 있는 400년 전통의 성황제

 

우리 마을 건너편 산학산성 마루턱에 서 있는 소나무 아래도 성황이 있어요. 그곳도 이곳처럼 성황이 있는데 석굴은 없어졌죠. 그리고 이 산 너머에도 이목나무라는 부르는 성황나무가 있어요

 

마을 어르신이 증언해 준 이곳의 성황제는 온 주변에서 다 함께 치러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종 제대로 된 모습을 지키고 있는 것이 바로 산학리의 성황제 당산이다. 이런 정도의 역사를 지키고 있는 성황제 당산이라면 향토유적으로라도 지정하여 지켜가야 할 것이란 생각이다. 더욱 요즈음 들어 마을에서는 이 성황지신 터를 지켜갈 수 있을까를 걱정하고 있다.

 

마을어르신들이 말씀을 하시는데 이제 성황제를 모시는 것을 더 이상 계속할 수 없을 것 같다고 하시네요. 젊은이들이 어르신들 대까지 모시고 나면 더 이상 성황제를 모실 것을 강요하지 말라고 이야기를 했다고 합니다. 어르신들이 걱정을 하시는 것도 마을의 전통이 자꾸 사라지고 있다는 것이 안타까운 모양입니다

 

 

 

마을의 한 주민이 전해 준 이야기에 찾아간 산학리 성황지신 터. 커다란 소나무 두 그루에서부터 전해진 성황제가 이미 400년을 넘었다. 현 시대에 그런 제가 무슨 필요 있느냐고 하지만 그 제로 인해 마을주민들을 하나로 묶을 수 있는 공동체가 형성되었던 것이다. 시대가 바뀌고 사람들이 모두 나만 생각하는 이기주의에 팽배해 있을 때 유일하게 공동체를 버텨낼 수 있는 매개체가 바로 400년을 이어 온 성황제이다.

 

전통은 지켜지면서 세월의 흐름에 따라 자연스럽게 변화하는 것이다. 산학리의 성황제는 그렇게 주민들을 하나로 결속시키는 역할을 하면서 오랜 세월을 지켜냈다. 고성군에서는 이 성황지신의 석실과 석주형 성황, 그리고 소나무 등을 좀 더 정밀하게 조사한 뒤 향토유적이라도 지정을 해 보존하는 것이 마땅하다. 한번 사라진 전통을 다시 되살린다는 것은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경기도기념물 노송지대 소나무가 위험하다

 

경기도 기념물 제19호로 1973년 7월 10일에 지정된 파장동 노송지대. 이곳 노송지대에 식재되어 있는 소나무들은 정조의 효심이 가득 담고 있다. 요즈음 이 노송지대 소나무들이 주변이 더럽혀지고 많은 차량들로 인해 몸살을 앓고 있다. 파장동에서 길게 지지대비로 향하는 약 5km 정도의 이 길은 예전 정조대왕이 능침에 잠들어 있는 아버지인 장헌세자(사도세자)를 만나러 다니는 길목이었다.

 

정조대왕은 아버지 장헌세자의 원침인 현릉원 식목관에게 내탕금 1천량을 하사하여 이 길에 소나무 500주와 능수버들 40주를 심었다는 기록이 보인다. 수령 200여년을 넘는 소나무들이 줄을 지어 있는 노송지대는 정조대왕의 효행의 길이다. 2차선 도로를 따라 자라고 있는 소나무들은 하나같이 오랜 수령을 자랑하 듯 기묘한 형상을 하고 있다.

 

 

 

하지만 정조대왕 당시에 료심으로 심은 소나무들은 대개가 고사하고 지지대고개에서 약 5km에 걸쳐 식재되어 있던 소나무 중 현재 38주 정도가 남아 있을 뿐이다. 효행기념관 부근에 9주, 삼풍가든 부근에 21주, 그리고 송정초등학교 부근에 8주 정도의 소나무만이 남아 있다.

 

노송지대는 경기도 지정 기념물이다. 이는 이 지역일대가 문화재로 지정이 되어있다는 것을 뜻한다. 문화재보호법에서 규정하는 문화재란 인위적이거나 자연적으로 형성된 유산을 말하며, 역사적이나 예술적, 혹은 학술적 가치가 큰 것으로 유형문화재, 무형문화재, 기념물 및 민속자료 등을 포함한다.

 

 

 

노송지대 소나무 관리해야

 

3월 2일 이른 시간에 노송지대를 찾아가보았다. 노송지대 사이로는 2차선 도로가 개설되어 있다. 우리나라의 소나무들은 자동차 매연에 약하다고 한다. 그래서인가 이곳 노송지대 소나무들은 상태는 그리 좋은 편은 아니다. 정조대왕 당시 식재를 했다고 하면 벌써 200년 이상의 수령을 갖고 있는 소중한 나무들이다.

 

이곳 소나무들은 그 의미가 깊다. 노송지대의 소나무를 보호해야 한다고 그동안 입이 닿도록 주장을 했다. 이 소나무들이 갖고 있는 뜻이 남다르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이곳에 번호표를 달고 있는 소나무들은 정조대왕의 효심의 발로이다. 하기에 이 나무들은 교육적으로 상당한 가치를 갖는다.

 

시에서는 이곳 기존의 차선 옆으로 다시 도로를 개설했다. 아직 개통은 하지 않았지만 모든 공사가 마무리 작업을 서두르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기존의 도로인 노송지대 사이를 통과하는 차량들은 이 소나무의 가치를 아는지 모르는지 그저 속도를 줄일 생각도 하지 않고 달린다. 차에서 뿜어내는 매연 또한 적지 않다. 이 길은 근처 소나무와 숲에서 발생하는 피톤치드로 인해 걸으면 상쾌해야 할 텐데 매캐하기만 하다.

 

 

노송지대 공원으로 조성해야

 

지금 노송지대의 소나무들은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 이 나무들을 관리해야 하는 방법 중 하나는 이곳을 공원화 하는 방법이다. 노송지대 사이로 난 아스팔트를 모두 걷어내고 사람들이 맨발로 걸을 수 있는 길로 만들어야 한다. 길 좌우에 지저분한 건물들을 모두 철거하고 쾌적한 길로 조성해야 한다.

 

그리고 공원에는 정조대왕의 효심을 알릴 수 있는 시설물이나 간단한 교육을 시킬 수 있는 공간도 마련해야 한다. 2일 돌아본 노송지대 입구 한편에는 축대 위에 쓰레기들이 너저분하게 깔려있다. 한편에는 중고차매장이 있어 문화재보호구역의 의미를 퇴색하게 만든다. 이러한 것이 우선 정리되어야 한다.

 

걸으면서 정조의 효심을 기억하고 우리 문화재의 중요성과 건강을 생각할 수 있는 노송지대 소나무길. 지금 가장 시급한 것은 이곳을 문화재공원이나 소나무공원 등으로 지정하고 주변 정리를 먼저 해야 한다는 점이다. 의미 있는 문화재구역을 나 몰라라 한다면 세계문화유산인 화성이 소재하고 있는 수원시로서는 명성에 누가되는 일이기 때문이다.

 

 

궐리사 은행나무가 주는 교훈

 

경기도 기념물 제147호인 오산 궐리사는 오산시 궐1147에 소재한 조선 후기의 사당이다. 궐리사는 공서린(孔瑞麟) 선생의 사당으로, 원래 조선 중종 때의 문신으로 경기도관찰사 등을 지낸 공서린 선생이 서재를 세우고 후학들에게 강의를 하였던 곳으로 전해지고 있다.

 

공서린 선생은 당시 뜰 안 은행나무에 북을 달아놓고 문하 제자들에게 공부를 게을리 하지 않도록 깨우치며 교수하였는데, 그가 죽은 뒤 그 나무가 자연 고사하였다고 한다. 그 뒤 정조대왕이 화산에서 남쪽 멀리 바라보니 많은 새들이 슬피 울며 모여들므로, 괴이하게 여겨 그곳에 행차해 보니 죽었던 늙은 은행나무에 싹이 트고 있었다.

 

정조 16년인 1792년 이 곳에 사당을 짓게 하고, 이곳의 지명을 궐리로 고치게 하였다. 또한 공자의 영정을 봉안하게 하고 궐리사(闕里祠)’라는 사액을 내렸다. 궐리는 노나라의 곡부(曲阜)에 공자가 살던 곳을 본떠 지은 이름이다.

 

수세가 당당한 궐리사 은행나무

 

무덥던 날 찾아간 궐리사. 솟을삼문을 들어서면 좌측으로 하늘 높게 솟은 은행나무 한 그루가 서 있는 것을 볼 수있다. 보기에도 당당한 것이 나무의 생김새로 보아 수령이 꽤 되었을 것만 같다. 공서린 선생이 식재했다고 하는 이 은행나무는, 공서린 선생이 세상을 떠나자 중종 36년인 1541년에 함께 고사했다고 한다.

 

은행나무를 심고, 이곳에 북을 매달아 놓고 제자들에게 공부를 게을리 하지 말 것을 당부했다는 공서린 선생. 그가 죽은 후 200여년이 지나 옛 은행나무 그루터기에서 새싹이 돋아나, 일 년에 수 길씩 자라났다는 것이다. 이미 500여 년 전에 심었던 은행나무가 죽고 살기를 반복한 것이다.

 

 

 

사람들을 일깨워주는 은행나무

 

날이 무덥다. 잠시 나무 옆에 마련한 의자에 걸터앉는다. 땀을 닦고 있으려니 어디선가 바람 한 점이 불어온다. 이런 바람 한 점도 고마운데, 은행나무 그늘이야 더욱 고맙지 아니한가? 잠시 은행나무의 푸른 잎들을 바라보다가 피식 웃고 만다. 은행나무를 보면서 인간이 참 간사하다는 것을 느낀다.

 

이 잠시의 더위를 참지 못해 나무그늘로 찾아들고, 그리고 바람 한 점과 그늘에게 다시 감사를 한다는 것이 참으로 표리부동한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매사에 감사를 한 뒤에도 언젠가는 돌변하기도 한다. 그래서 은행나무보다 못한 인간들이 세상천지에 깔려 있는 모양이다.

 

요즈음 세 살 돌아가는 모습을 보면 참으로 한심하기 짝이 없다. 서로 마주하고 웃던 사람들이 어느 순간엔가 얼굴을 붉히고 으르렁댄다. 자신에게 득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 가차 없이 내민 손도 거절해버린다. 이것이 요즈음 세상 사람들이 사는 방법이다. 주변에 들리는 이야기마다 한심한 사람들 이야기뿐이다.

 

 

 

 

하지만 궐리사 은행나무는 달랐다. 공사린 선생이 세상을 떠나자 함께 고사했다. 말 못하는 한 그루 나무에 불과하지만, 선생에 대한 예의를 다한 것이다. 그리고 200년이 지난 후 다시 소생을 했다. 그 나무는 지금 사람들에게 그늘을 만들어주고 있다. 죽고 살기를 반복했지만 나무 본연의 책무를 다하고 있는 것이다.

 

궐리사 은행나무 옆 비문에 적혀있는 글을 읽으면서 괜히 낯이 뜨거워진다. 부끄러운 것이다. 나무보다 못한 인간이기 때문이다. 남을 폄훼하고 말을 만들기 전에, 먼저 궐리사 은행나무를 찾아보기를 권한다. 그곳에 가서 사람답게 사는 도리가 무엇인가를 먼저 깨달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영통에는 위험을 알려주는 느티나무가 있다

 

우리나라 전역에는 신령한 나무들이 상당히 많다. 짧게는 500, 갈게는 천년 이상을 한 자리에 서 있는 고목(古木)들이다. 나무마다 전하는 설화도 다양해서 어느 나무는 나무껍질이 뱀 허물을 닮았는데, 그 나무껍질을 벗긴 사람이 온 몸에 마치 비늘처럼 이상한 피부병이 걸렸다고도 한다.

 

그런가하면 천년 이상이 된 은행나무 가지를 주어다가 땐 사람이 벌을 받기도 했단다. 대개 지역마다 천연기념물이나 기념물, 혹은 보호수로 지정이 되어있는 나무들은 대개 이런 설화 한 마디씩은 꼭 전하는 법이다. 하기에 근처에 사는 사람들은 이런 나무들을 신령한 나무로 여기고 나무를 해하려 하지 않는다. 물론 정성을 다해 섬기는 마을도 있다.

 

 

 

 

수령 530년의 단오공원 느티나무

 

수원시 영통구 영통동 1047-3에는 수령 530년이 지난 느티나무가 한 그루 서 있다. 영통 단오 어린이 공원에 자리하고 있는 이 느티나무는, 19821015일 수원-11 보호수로 지정이 되었다. 넓은 차도를 지나면서 바라다 보이는 이 나무는 멀리서보아도 그 나무의 모습에 위압감을 느낄 정도이다.

 

가슴높이의 둘레는 5.1m에 높이가 19.3m에 달하는 이 느티나무는 지역에서 자랑을 하는 나무이기도 하다. 매년 단오 때를 맞아 이 나무 앞에서는 단오청명제를 지내기도 한다. 이 느티나무에서 예전에는 마을굿을 열기도 했다고 국가지정중요무형문화재 제98호 경기도도당굿 예능보유자였던 고 오수복 선생은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그만큼 이 나무는 모양이 좋고 잘 자라고 있다. 가끔은 이렇게 생육이 좋은 나무가 왜 도 지정 기념물이나 국가지정 천연기념물로 지정을 받지 못했는지 안타까울 때가 있다. 이렇게 잘 생긴 나무를 보기도 힘들지만, 이 나무보다 못한 나무들도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것이 있기 때문이다.

 

 

 

 

이 느티나무가 소리를 내지 않았다.

 

16일 오후 찾아간 영통 느티나무. 이 나무는 위험을 알려주는 나무라고 한다. 예로부터 이 느티나무는 전쟁처럼 나라에 큰 위험이 닥치면 구렁이 울음소리를 내어 위급함을 알려주었다고 한다. 사람들은 이 나무가 구렁이 울음소리를 내면 사전에 미리 방비를 했기 때문에, 큰 화를 당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정조대왕은 화성을 축성할 때 이 나무의 가지를 잘라 서까래로 사용했다고 전하는데, 이 나무 어디를 보아도 가지를 자른 것 같은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다만 이 나무가 나라에 위급한 일이 있으면 소리를 냈다고 하니, 궁금해서 찾아간 것이다. 무슨 이야기라도 들을 수가 있을까 해서가 아니다.

 

 

그런 나무라면 요즈음처럼 힘든 시기에 나무가 이상 징후라도 보이는 것은 아닐까 하는 걱정 때문이다. 하지만 느티나무는 아무런 이상도 없이 굳건히 서 있다. 나무주변이 어린이 공원이기 때문에 찾아갈 때마다 많은 어린이들과 부모님들을 볼 수 있었는데 조용한 것이 사람들이 보이질 않을 뿐이다.

 

주변에 사람들이 없으니 혹 이 나무에서 무슨 소리라도 났는지 알아볼 길이 없다. 길 건너 상가에 가서 저 나무에서 이상한 소리 나지 않았어요?”라고 물으니, 나를 정신병자 바라본다. 그렇게 바라보는 것을 보니 나무에서 소리가 나지 않았다는 것인 듯하다. 수원은 메르스 방역이 워낙 잘 된 곳이다.

 

 

 

 

가는 곳마다 사람들이 힘들다고 한다. 하지만 위험을 알려주는 느티나무가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았다는 것은, 수원은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 아닐까? 괜히 멋쩍게 웃으면 뒤돌아서면서도 속으로는 쾌재를 부른.

 

 

노송지대 도로 양편 말끔히 정리해야

 

노송지대는 경기도 기념물 제9호로 지정되어 있는 우리나라에서 흔치 않은 소나무 길이다. 이 노송지대는 수원에서는 각별한 의미를 품고 있는 곳이다. 정조대왕은 아버지 장헌세자의 원침인 현릉원의 식목관에게 내탕금 1천량을 하사하여, 이곳에 소나무 500주와 능수버들 40주를 심게 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지지대고개에서 약 5km에 걸쳐 식재되어 있던 노송지대의 소나무들은 대개가 고사 하고, 현재는 정조대왕 당시에 심은 소나무들은 38주 정도가 남아 있을 뿐이다. 효행기념관 부근에 9, 삼풍가든 부근에 21, 그리고 송정초등학교 부근에 8주 정도의 소나무만이 남아 있다.

 

27일 오후 노송지대로 접어들었다. 번호를 단 소나무 사이에 커다랗게 자란 영산홍이 아름답게 꽃을 피웠다. 어느 나무는 벌써 잎이 무성하게 자라 그 틈으로 꽃 몇 송이가 겨우 보일정도이다. 노송지대에 소나무들도 잎을 촘촘히 달고 있는 모습으로 서 있어, 이 계절에 소나무의 정취를 느끼며 걷기 좋은 길이다.

 

 

 

 

지난해보다 생육이 좋은 노송지대 소나무들

 

장안구 장안로 368에 소재한 한우마을 앞을 지나 노송지대로 접어들었다. 높다랗게 가지를 뻗고 있는 노송들이 그늘을 만들고 있다. 4월인데도 불구하고 낮의 날씨는 벌써 땀이 흐르게 만든다. 천천히 걸으면서 노송들의 생육상태를 살펴본다. 지난해보다는 잎들도 진한 초록빛을 띠고 있어 안심이 된다.

 

삼풍가든 앞까지 천천히 아름다운 길을 마음껏 즐기며 걷는다. 갑자기 차 한 대가 지나가면서 경적을 울린다. 차도 별로 없고 사람들도 지나지 않는 이 길에서 꼭 저렇게 듣기 싫은 소리를 내야할까? 그 소리에 괜한 짜증이 난다. 꼭 이 거리에서 저렇게 시끄럽게 해야만 할까? 정말 문화재를 몰라도 너무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이다.

 

도로변에 보기 흉한 모습이 보인다. 누군가 이곳에서 밭농사를 지었는지 도로 쪽에 칸막이를 해놓았다. 그리고 그 안쪽으로는 정리되지 않은 지저분한 것들이 쌓여있다. 무슨 종이가 붙어있어 길을 건너가보니, 수원시 공원녹지사업소에서 녹지공간 조성 예정지니 시설물 적치를 금지하고 시설물을 신속히 철거하라는 문구가 적혀있다.

 

 

 

 

문화재보호구역 정리 확대해야

 

노송지대는 경기도 지정 기념물이다. 이는 이 지역일대가 문화재로 지정이 되어있다는 것을 뜻한다. 문화재보호법에서 규정하는 문화재란 인위적이거나 자연적으로 형성된 유산을 말하며, 역사적이나 예술적, 혹은 학술적 가치가 큰 것으로 유형문화재, 무형문화재, 기념물 및 민속자료 등을 포함한다.

 

기념물에는 절터, 성곽 등 사적지뿐만 아니라, 경치 좋은 곳과 동물의 서식지와 번식지, 도래지 등이며, 식물과 그 자생지 등을 두루 포함하고 있다. 이 외에도 광물, 동굴, 지질, 생물학적 생성물 및 특별한 자연현상 등도 포함한다. 노송지대는 역사적인 소나무들의 식재구역으로 기념물로 보호를 받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기념물인 노송지대가 주변이 정리가 되지 않아 볼썽사납다. 여기저기 흉하게 널브러진 지저분한 것들이 아름다운 노송 길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옥에 티기 되고 있다. 노송지대와 같이 기념물은 특별시장광역시장도지사 또는 특별자치도지사가 문화재보호법 제71조 제1항에 따라 지정한 문화재를 말한다.

 

지정 문화재를 보호하기 위한 문화재보호구역의 지정범위는 문화재보호법에 따라 각 시, 도 등 지자체에 위임되어 있으며, 각 지자체는 조례에 의하여 그 지정범위를 달리 규정할 수 있다. 이런 점으로 볼 때 노송지대를 문화재보호구역으로 확대, 정리하여야 한다. 500주의 소나무 중에서 이제 남은 것은 고작 38. 화성과 함께 정조대왕의 의미를 재해석할 수 있는 노송들의 보존에 각별히 신경을 써야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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