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안양시. ‘안양(安養)’이라는 말은 안양사(安養寺)라는 절에서 기인한 이름이라고 한다. 안양사는 신라 효공왕 3(900)에 고려 태조 왕건이 남쪽을 정벌하러 지나다 삼성산에 오색구름이 채색을 이루자 이를 이상히 여겨 가보던 중 능정이란 스님을 만나 세워진 사찰이 안양사로 전해진다.

 

안양이란 불가에서 아미타불이 상주하는 청정한 극락정토의 세계를 말하며 현세의 서쪽으로 10만억 불토를 지나 있다는 즐거움만 있고 자유로운 이상향의 안양세계를 말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고려 때 최영장군이 7층 전탑을 세우고 왕이 내시를 시켜 향을 보냈으며 승려 천명이 불사를 올렸다는 기록이 있어 옛 안양사의 규모를 짐작케 하여준다.

 

 

 

이렇게 볼 때 안양사는 불국정토를 상징하는 곳이다. 그런 안양시는 이제 인구 60만인 도시이다. 숱하게 많은 종교건물들이 여기저기 들어차 있는 안양시 만안구 석수동 산32번지에는 마애종이라는 바위벽에 범종을 양각해 놓은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92호가 자리하고 있다. 우리나라에 마애불은 상당수가 있지만, 마애종은 석수동 마애종이 유일한 것이다.

 

이 안양의 마애종은 고려 초기에 새겨진 것으로 추정된다. 마애종을 보면 종을 걸 수 있도록 고리 구실을 하는 용뉴와 음통을 포함한 높이가 126, 종 몸통의 높이는 101정도이다. 종을 양각한 왼편에는 당목을 잡고 종을 치는 스님의 모습이 조각되어 있다.

 

 

 

 

 

상단의 보 중앙에 쇠사슬을 달아 종을 걸어 둔 모양을 새겨 표현하였는데, 용뉴와 음통이 확연하게 조각되었다. 상단에는 장방형 유곽을 2개소에 배치하고 그 안에 각각 9개의 원형 유두가 양각되어 있다. 우리가 범종에서 만날 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다. 종신의 중단에는 연화문이 새겨진 당좌를 표현하고 하단에는 음각선으로 하대를 표시하였다. 종의 양편에는 기둥을 세우고, 보를 가로질러 종을 매달아 놓은 모습을 형상화 한 형태로 새겨놓았다.

 

그런데 이 마애종은 도대체 왜 이곳에 있는 것일까? 안양이라는 불국정토를 마련하고, 아마 많은 중생들이 고통에서 벗어나기를 바라는 염원이 아닌지 모르겠다. 1,000년 세월을 그렇게 묵묵히 바위에 새겨져 소리 없는 종소리를 낸 마애종. 그리고 당목에 힘을 주어 종을 울리는 스님.

 

 

 

언젠가 이 마애종의 소리가 이 땅에 울려 퍼질 때 정녕 이 땅의 고통이 사라지는 것은 아닐까? 이제는 오랜 풍상에 마모되어가는 마애종에 숨은 깊은 뜻은 도대체 무엇인지. 어지러운 세상에 그 종소리가 울려 퍼지기를 간구한다. 병신년 새해 마애종을 울릴 수만 있다면 이 땅이 바로 불국정토일 것이다.

 

오늘 2015년의 끝날. 디시는 돌아올 수 없는 이 해에 안양 석수동 마애종을 소개하는 것은 이 곳을 들리시는 모든 분들이 이 땅에 사는 동안 어떠한 작은 아픔과 고통도 당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리고 모두가 다 마애종의 소리를 마음으로 듣고 2016년 병신년에는 더 좋은 일들만 있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이다.

 

 

며칠간 계속되는 연휴를 맞아 몸이 좋지 않다고 해서 답사를 멈출 수는 없다는 생각을 한다. 하지만 극도로 불편해진 몸을 이끌고 며칠을 보냈더니 몸살, 감기 기운까지 겹쳐 이틀이나 고열로 움직일 수 없을 정도다. 그래도 이왕 답사를 나섰으니 무엇인가 하나 정도는 소중한 우리 문화재를 보고가야 할 것만 같아 몸을 추스르고 길을 나섰다.

 

하남시 교산동 55 -1에 소재한 선법사 경내에 소재한 태평2년명 마애약사불 좌상을 찾아 하남으로 향했다. 날씨도 쌀쌀하고 고열로 인해 몸은 움직이기가 버거울 정도이다. 길에는 어제 밤 내린 눈이 녹지 않아 미끄럽기도 하다. 그래도 숨을 몰아쉬며 선법사로 향했다. 계단을 올라가니 경내 좌측에 삼각형으로 솟은 바위가 보인다. 그리고 그 바위 면에 정교하게 조각한 마애약사불 좌상이 새겨져 있다.

 

 

 

고려 경종 2년인 977년에 조성한 마애불

 

약사불은 질병에서 모든 중생을 구제해 준다는 부처이다. 이 약사불을 형상화한 마애불은 바위 남쪽 면에 전체 높이 93정도로 새겨져 있다. 태평 2년 정축 729이라는 글을 통해, 이 마애약사불 좌상을 조성한 시기가 고려 경종 2년인 977년임을 알 수 있다.

 

마애약사불은 세모난 바위에 그 윗부분 돌을 쪼듯이 파내면서 양각을 한 형태로 조성이 되었다. 높이가 1m도 채 안 되는 크지 않은 이 마애약사불 좌상, 광배와 대좌를 갖추고 있으며 조각수법이 정교하고 비례가 뛰어나다. 신체는 비교적 장대하고 얼굴은 부드러운 편이다. 오른쪽 어깨를 드러낸 우견편단의 법의를 왼쪽 어깨에만 걸쳐 입고 있으며 옷 주름의 표현은 가지런함이 엿보인다.

 

 

 

 

 

뛰어난 조형기법에 빠져들다

 

몸 뒤편에 있는 광배는 머리광배와 몸광배를 계단식의 3중 원으로 새기고 있으며, 주위에는 불꽃무늬인 화염문이 둘러져 있다. 대좌의 하대석에는 연꽃잎이 아래로 향한 복련의 모양이 하대석 위에 4개의 짧은 기둥으로 이루어진 중대석이 있다. 상대석은 다섯 잎의 활짝 핀 앙련이 마애여래불의 무릎을 감싸듯 조각이 되어 있다.

 

마애여래 좌상의 우측에는 태평 2(고려 경종 2, 977) 729일 옛 석불을 중수하며, 황제의 만세를 기원한다.(太平 二年 丁丑 七月 二十九日 古石佛在如賜之重修爲今上皇帝萬歲願)이라고 음각을 해 놓았다. 그러나 이 마애약사불 좌상에는 새로 고친 부분이 없는 듯하다. 그런 점으로 보면 불감이나 가구 등을 새로 조성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돌을 쪼아낸 듯한 조형기법

 

이 하남 교산동 마애약사불 좌상은 현재 보물 제981호로 지정이 되어 있다. 크지 않은 이 마애불은 손바닥을 위로 한 왼손에는 약그릇이 놓여있으며, 오른손은 손바닥이 정면을 향하고 손가락을 위로 하고 있다. 그런데 이 마애약사불을 조성한 모습을 보면 특이하다. 아주 정교한 쇠꼬챙이 같은 것으로 무수히 돌을 찍어내어 안으로 파들어 가면서, 좌상의 형태를 돋을새김한 것 같이 보인다.

 

마애약사불이 크지가 않아, 이렇게 쇠꼬챙이 같은 것으로 쪼아내 듯 조각을 한 것일까? 전체적으로 보아도 무수하게 쪼아낸 듯한 형태를 볼 수가 있다. 교산동 마애약사불 좌상은 비교적 보존 상태가 좋다. 더욱 이 마애불 좌상은 만들어진 연대에 대한 확실한 기록이 남아 있어 고려 초기 불상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평가 받고 있다. 이 마애불의 옆에는 조금 더 큰 바위가 있는데, 그 바위면도 칼로 잘라낸 듯 말끔히 정리가 되어 있다. 이곳에도 또 하나의 마애불을 조성하기 위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교산동 마애약사불 좌상 앞에 서서 두 손을 모은다. 추위에 떨다가 생긴 몸살, 감기라도 얼른 나아 훌훌 털고 답사를 할 수 있기를 서원한다고 마음속으로 간구한다. 그리고 새해에는 모든 민초들이 다리 뻗고 살 수 있도록 해달라고 간구를 한다. 없는 사람들이 살기가 버거워 점점 초췌해져만 가는 모습이 마음 아프기 때문이다.

 

 

충주시 가금면 창동에 있는 충북유형문화재 제76호 중원 창동마애불. 남한강을 바라다보고 있는 마애불을 찾아갔다. 마애불 이정표가 있는 곳에서 마애불을 찾으러 들어가면, 문을 열고 계단을 올라야 한다. 2차선 지방도로 곁에 이정표가 있어 찾아가기는 그리 어렵지가 않다.

 

날이 쌀쌀해서인가 주변 영업집들도 한적하다. 계단을 오르니 여기저기 집이 몇 채 보인다. 무슨 집인가 해서 보니 문이 다 걸려있다. 안을 들여다보니 집집마다 방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인근 식당에서 손님을 받는 집인 듯 하다. 남한강으로 내려가는 계단 위에는 낙엽이 수북하게 쌓였다. 낙엽 밑에는 얼음이 언 곳도 있어 자칫 발이라도 헛디디면, 가파른 계단을 굴러 떨어질 것만 같다.

 

 

 

가파른 계단 밑으로 내려가는 길

 

밑으로 조심스럽게 내려갔다. 절벽에 새겨진 마애불.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76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창동마애불은 그렇게 절벽에 붙어 남한강을 내려다보고 있다. 높이가 630cm 정도라니 하니 적은 것이 아니다. 바위 전면을 꽉 채워 새겨진 마애불을 찬찬히 훑어본다. 크고 길게 찢어진 눈꼬리가 근엄함을 나타낸다. 툭 불거진 코와, 큰 늘어진 귀가 어찌 보면 부처님의 형상이라기보다는 어디 가까운 이웃에서 보았음직한 상이다.

 

마을에서 전해지는 전설에 의하면 임진왜란 때 신립장군이 자화상을 새겨 놓은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상호나 옷, 새겨진 연꽃모양으로 보아 고려시대의 마애불로 보인다. 이 마애불이 있는 곳 가까운 곳에는 석탑과 또 다른 마애불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이 근처에 사지(寺地)가 있었던 것은 아닐까 생각이 든다. 안내판에는 이곳에서 가까운 곳에 가흥창 및 목계나루가 있어 당시 조운제도와 민간신앙을 엿볼 수 있는 문화재라고 기록하고 있다.

 

 

 

주변 정리를 해야 할 듯

 

마애불을 보고 올라오는 길에 보니 언덕 밑 식당과 이곳 언덕이 다리로 연결이 되어있다. 그리고 그 언덕 위에 집들이 장사를 하는 집에서 손님을 받기 위한 집이라고 한다. 중요한 문화재가 있는 입구에 장사치들이 진을 치고 있는 곳은 이곳 뿐은 아니다. 그러나 요즈음 문화재에 대한 인식이 각별해지고 있는 시기에, 지방문화재라고 해도 소중한 문화유산의 주변을 정리하는 것은 어떨까 하는 생각이다.

 

남한강 변 가파른 계단을 내려가 만날 수 있는 창동마애불. 강을 내려다보고 있는 커다란 암벽에 이렇게 마애불을 조성해 놓았다는 것이 놀랍기만 하다. 도대체 아래는 물결이 굽이치는 남한강이고 위로는 솟아있는 둔덕인데, 이런 곳에 어떻게 마애불을 조성할 수가 있었을까?

 

 

 

 

전국을 다니면서 많은 마애불을 만났다. 그런데 정말 모를 일은 그 위험한 절벽에 어떻게 마애불을 조성했을까 하는 점이다. 지금처럼 장비가 있었던 것도 아니다. 단지 망치에 정 하나만을 갖고 조성을 했을 텐데, 그 절벽을 어떻게 타고 내려오면서 저렇게 넓은 돌에 조각을 한 것일까?

 

마애불을 볼 때마다 드는 궁금증이지만 아직도 정확한 답을 내릴 수가 없다. 창동마애불을 돌아보면서 또 한 번 이는 궁금증이다. 언제나 그 해답을 얻을 수 있을까?

 

서산시 부석면 취평리 160에 소재한 서산 조비산 부석사(浮石寺). 우리는 흔히 부석사라고 하면 경상북도 영주시에 소재한 부석사를 먼저 생각한다. 하지만 서산 부석사도 영주 부석사와 같이 한자로도 사찰명이 일치한다. 서산 부석사는 신라 때 의상대사가 창건 한 절로 전해진다.

 

부석시 일원은 도비산의 강무지로 알려져 있다. 강무지란 임금이 직접 참여하여 군사훈련을 한 곳임을 말한다. 조선조 제3대 태종이 14162163남인 충령대군(후 세종)과 함께 군사 7,000명을 이끌고 이곳에서 사냥몰이를 하였다. 임금이 직접 참여한 이러한 군사훈련을 강무(講武)’라 칭한다.

 

훈련이 끝난 후 태종과 충령은 해미현에서 숙박을 한다. 원래 이 강무일정은 28일에 서산에 도착하였으나, 비가 내리는 바람에 210일까지 서산에서 머물고, 11일에 태안 순성에 이르러 15일까지 굴포의 개착상황과 여러 곳을 거쳐 도비산에서 강무를 연 것이다. 태종이 이곳을 강무지로 택한 곳은 도비산 일원이 왜구의 침입이 잦았기 때문이다.

 

 

큰 돌이 허공에 떴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 부석(浮石)

 

신라 제28대 진덕여왕 4년인 650년에 복흥사라는 절에 의상이라는 승려가 있었다. 의상은 큰 뜻을 품고 당으로 가서 지엄법사 밑에서 공부를 했다. 의상이 있던 지장사 아랫마을에는 젊고 예쁜 <선묘낭자>가 살고 있었는데, 이 낭자가 의상스님에게 반하고 만 것. 그래서 문무왕 1년인 661년에 의상이 신라로 돌아가려하자, 선묘낭자는 자신의 마음을 의상에게 밝혔다. 하지만 의상은 스님이기 때문에 허락을 할 수 없다고 거절했다는 것이다.

 

의상이 배를 타고 떠나려하자 선묘낭자는 스님의 복색을 하고 의상을 따라가 평생 시종을 들 것이라고 부탁을 했다. 하지만 그도 물리치자 선묘낭자는 바다에 뛰어들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것이다. 그 뒤 선묘낭자는 용이 되어 의상을 따라 해동 조선으로 나왔다고 한다. 의상은 자신 때문에 스스로 목숨을 끊은 선묘낭자를 위해, 절을 세워주기로 하고 절터를 찾던 중 서산 도비산 중턱에 절을 짓기로 하였다.

 

 

문무왕 10년인 670년에 도비산 중턱에 절을 짓기 시작하자 마을 사람들이 심하게 반대를 했다. 마을 사람들이 반대를 하는 것도 무릅쓰고 절을 계속 짓자, 마을 사람들이 몰려와 절에 불을 지르려고 하였다. 그 때 큰 바위 하나가 허공에 둥둥 떠 오더니 공중에서 큰 소리가 났다. “너희들이 절 짓는 것을 방해한다면 이 큰 바위로 너희들의 머리를 다 부수어놓겠다. 지금 당장 물러가라고 꾸짖었다. 사람들은 혼비백산 달아나버렸다.

 

이렇게 허공에서 소리를 친 것은 바로 선묘낭자의 화신인 용이었다는 것이다. 그때부터 이 절 이름은 도비산 부석사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바로 부석이라는 이름을 붙이게 된 이유이다. 결국 이 부석사는 큰 바위가 하늘에 둥둥 떠 있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임을 알 수 있다.

 

 

새로 조성한 마애불, 장관입니다

 

법당 좌측으로 올라가면 산신각이 자리하고 있다. 산신각에는 중앙에 산신님, 우측에 선묘낭자. 좌측에 용왕을 모셨다. 산신각의 좌측으로 돌아가면 산신각이 올라가도 남을 만큼 큰 바위가 있는데 이 바위를 거북바위라고 부른다. 그런데 이 바위에 전에는 보지 못하던 마애불이 조성되어 있다.

 

높이가 7m 정도는 될 만한 큰 바위의 면에 조성한 이 마애불은 기계를 이용해 조각을 한 듯하다. 널찍한 바위 면에 부조로 조성한 마애불은 두광을 파고 그 안에 조성하였다. 얼굴은 네모나게 조형했는데 귀가 어깨까지 느려져 있다. 입은 두툼하고 목에는 삼도가 뚜렷하게 표현되어 있다.

 

수인은 오른손은 어깨까지 들어 올렸으며, 왼손은 가슴께로 올렸다. 법의는 양편으로 걸쳤으며 가슴에는 U자 주름이 접혀있다. 발가락은 모두 법의 밑으로 나와 있으며, 연화대는 겹 앙화를 조각했다. 요즈음에 들어 조성한 마애불치고는 상당히 균형감이 있게 조성을 하였다.

 

마애불을 조성한 앞은 시원하게 트여있어 멀리 아래쪽 길가를 지나는 차들이 조그맣게 보인다. 천혜의 조건에 조성한 부석사 마애불. 언젠가는 이 마애불도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서원을 하지 않을까? 새로 조성한 마애불 앞에서 머리를 조아린다.

 

칠보산(七寶山), 수원의 서쪽에 위치하고 있는 239m의 높지 않은 산이다. 조선시대에는 치악산으로 불렸다고 하며, 화성지에는 칠보산을 화산의 주맥으로 기술하고 있다. 칠보산은 원래 여덟 가지 보물이 있다고 하여 팔보산이었으며, 그 여덟 가지의 보물은 산삼, 맷돌, 잣나무, 황계수탉, 범절, 장사, , 황금 닭이 있었다고 한다.

 

그 여덟 가지 보물 중에 하나인 황금 닭을 가져가버려 칠보산으로 변한 것이라고. 이 칠보산에는 용화사라는 크지 않은 절이 자리하고 있다. 칠보산을 오르는 등산로 중 제2코스인 용화사 길은 산중의 정취를 마음껏 느낄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수원시 권선구 호매실동 905에 자리한 용화사는 대한불교 조계종 용주사의 말사이다.

 

 

용화사는 절이 언제부터 이곳에 자리하고 있었는지, 또 누가 중창을 한 것인지에 대한 기록은 없다고 한다. 다만 구전에 의하면 용화사는 조선조 후기에 세워진 절이라는 것이다. 이 절의 대웅전에는 마애불을 주물로 모시고 있는데, 그 마애불의 형태나 가장 오래된 전각인 대웅전을 보면 200년 정도 지난 절로 추정된다.

 

지방 장인의 솜씨로 보이는 투박한 마애불

 

17, 칠보산으로 길을 잡았다. 칠보산 등산로를 몇 곳 돌아보고 난 뒤 당수동 시민주말농장도 함께 돌아볼 생각으로 길을 나선 것이다. 용화사는 칠보맷돌화장실에서 천천히 걸음을 옮겨도 채 10분이 걸리지 않는다. 절 입구는 공사를 하느라 부산한데 그곳을 피해 대웅전으로 향했다.

 

 

대웅전은 처마가 약간 뒤틀린 듯하다. 주초를 보니 잘 다듬어진 원형 주초를 사용하고 있다. 이러한 주초의 형태로 보아 이 대웅전이 지어진 것은 100년이 조금 지났을 듯하다. 이 대웅전 안을 들여다보니 정면에 마애불 한 기가 놓여있다. 선주형으로 다듬은 돌에 마애불을 선각했는데 조금은 투박한 형태이다.

 

이런 형태로 보아 이 마애불도 조선조 후기에 지방 장인에 의해서 조성한 것으로 보인다. 선각이 된 마애불은 육계가 크고 귀는 어깨까지 늘어져 있다. 눈은 좁고 길게 표현했으며 입이 작은 편이다. 전제적으로 보면 잘 조형되지는 않았지만 깊게 판 선각으로 인해 무게가 있어 보인다.

 

 

전문가에게 의뢰하여 제작연대 알아보았으면

 

마애불을 조성한 바위는 우측으로 약간 기울어져 있다. 법의는 양 어깨에서 흘러내렸는데 가슴이 깊게 파여 있다. 하반신은 가려져 있어 정확한 형태를 알아볼 수가 없어 조금은 아쉬움이 남는다. 다만 마애불을 조성한 바위의 크기로 보아 좌상으로 조성을 한 것으로 보인다. 머리 주변에 두광은 후에 누군가에 의해 다시 조성된 듯 둥그렇게 파 놓았다.

 

목에는 삼도를 표현했는데 삼도치고는 그 간격이 너무 넓어 이상하게 보인다. 오른 손은 가슴께로 들어 올렸으며 왼손은 정확하게 알아볼 수가 없다. 용화사 종무소에 들려 혹 연대를 알아볼 수 있을까 해서 물어보았지만 알 수가 없다는 대답이다.

 

 

비지정문화재이긴 하지만 현재 대웅전에 모셔진 마애불이고 보면 전문가에게 의뢰하여 조성연대라도 알아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투박하게 조성은 되었지만 나름 힘이 있어 보이고 아직은 형태를 그대로 보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방으로 답사를 다니다가 보면 가끔은 이런 비지정 문화재를 만나는 일이 생긴다. 전문가가 아니기 때문에 그런 내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면 답답하기 일쑤이다. 조금 더 자세하게 소개를 하고 싶지만, 알고 있는 식견이 짧은 것을 어찌하랴. 그저 답답한 마음을 털어버리려고 그 앞에 머리를 조아려 무능함을 다시 탓할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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