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2007 작업모음 () - 자연인식을 만나다>

 

1127일까지 북수동 소재 예술공간 봄 제1전시실에서 개인전을 열고 있는 박신혜 작가의 <2000~2007 작업모음 () - 자연인식을 만나다>바다라는 곳을 떠올리기에 부족함이 없다. 늘 바닷가를 찾아가 아름답게 지은 정자를 돌아보며 정자(亭子)기행을 연재로 썼던 나로서는 바닷가의 모습이 눈에 아련하기 때문이다.

 

박신혜 작가는 홍익대학교 대학원에서 서양화를 전공하고, 독일 Hessen주 주립대학에서 순수미술을 전공했다. 1991년 제1회 개인전(독일 Kassel 화재보험 기획전)을 시작으로, Broadway Gallery (NYC, U.S.A.), 스페인 주재 한국문화원 초대전 (Madrid, Spain) 등 지금까지 19번의 개인전을 가졌다.

 

다수의 국내외 그룹전에 참가한 박신혜 작가는, 2018G오픈스튜디오 _ 옆집예술가 프로젝트에 함께 했다. 아울러 독일 Kassel 시민대학 강사, 국립 한경대학교 디자인학부 겸임교수를 역임했고, 2000년 무렵부터 바다에 대한 사유란 주제로 작업을 해왔다. 지금은 신체화된 바다에 대해서 사고의 확장을 하고 있는 중이라고 한다.

 

 

예술은 자연을 알아가는 출발점이다.

 

그런 작가의 개인전이 열리고 있는 예술공간 봄의 제1 전시실. 며칠인가 날씨가 쌀쌀하다가 풀려서인가 주말의 거리는 사람들이 넘쳐난다. 남문시장을 거쳐 수원천을 따라 화홍문 방향으로 길을 걷다보니 수원천가에 늘어진 능수버들의 잎들이 가을색을 담고 있다. ‘저 잎들도 곧 떨어져 앙상한 가지만 남겨 놓겠지라고 생각하니 갑자기 쓸쓸해지는 듯하다.

 

<자연을 어떻게 알아 가는가 하는 것은 나의 예술에 출발점이다. 자연은 생명에 대한, 인간에 대한, 그 인간이 영위하는 삶에 대한 인식의 출발점이기 때문이다. 또한 신에 대한 관념적이 아닌, 경험적인 이해의 장이기도 하다. 자연은 나에게 신의 창조의 오묘함을 가슴 저리게 느끼게 하는 매개체로 존재해 왔다. 또한 생명에 대한 사색은 오묘한 창조의 질서 앞에 나 자신을 온통 내 맡기게 한다. 자연이 갖는 자연스러움은 신의 얼굴이자 본성이리라.>

 

박신혜 작가는 작가노트에서 자신의 예술에 출발점은 바로 자연은 알아가는 것이라고 했다. 그런 자연을 바라보면서 작가는 인간과 삶, 그리고 창조에 대한 오묘함까지 그 모든 것이 바로 예술에 대한 것을 알아가는 매개체라는 것이다. 그런 박신혜 작가의 개인전에서 만난 작품들을 보고 난 왜 바닷가가 생각난 것일까?

 

 

작가의 작품 안에서 보이는 자연

 

전시실에 걸린 박신혜 작가의 작품들은 어찌 보면 황량하다. 모래언덕에 마른 풀이 나 있고, 그 뒤편에 물이 보인다. 2000년부터 2007년까지 작가는 왜 이렇게 모래언덕과 마른풀을 그렸을까? 여기저기 걸려있는 작품들의 형태가 하나같이 흡사하다. 마치 삭막한 자연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하기 때문이다.

 

모래언덕은 해안이나 사막 따위에서, 세찬 바람이나 바닷물 따위에 의하여 모래가 운반되고 퇴적되어 이루어진 언덕을 말한다. 그렇다고 작가의 작품 속에 나타난 광경은 모래언덕만은 아니다. 강가일수도 있고, 바닷가일수도 있는 작품 속에는 퇴색하고 마른 풀들이 보인다. 그래서 바닷가에서 볼 수 있는 모래언덕과는 구별된다.

 

 

박신혜 작가는 작가노트에서 <자연은 생명에 대한, 인간에 대한, 그 인간이 영위하는 삶에 대한 인식의 출발점이기 때문이다.>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아마도 작가는 저 마르고 퇴색한 모래언덕과 마른 풀 등에서 새로운 인간의 생명과 삶에 대한 것을 그려내자는 의미는 아니었을까?

 

전시실을 쉽게 벗어나지 못하고 몇 번이고 돌아본 박신혜 작가의 개인전. 그 안에서 난 작품 속에 숨겨진 작가의 마음을 찾기 위해 애쓴다. 작품을 돌아보면서 가장 오래, 가장 많은 고민을 했던 박신혜 작가의 <2000~2007 작업모음 () - 자연인식을 만나다>27일까지 전시된다.

 

우리는 흔히 판소리라고 하면 전라도를 먼저 생각한다. 그 곳에 많은 소리꾼이 있고, 섬진강을 경계로 동편제와 서편제가 구분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경기충청간의 소리인 중고제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은 흔치 않다. 중고제는 한수이남과 금강이북인 경기도와 충청도에 전해지던 소리를 말한다.

 

그 중 경기도 소리는 경제(京制)’라고 하여서 여주 벽절이라는 신륵사에서 명창 염계달이 의해 전해진 소리를 말한다. 예전 판소리의 명창들은 스스로의 소리를 만들어 내기 위해 피나는 노력을 하였다. 흔히 <독공>이라 하는 이 소리공부는 동굴 속이나, 혹은 폭포에서 수년에서 10년이란 긴 시간을 소리에만 전념한 것이다.

 

17세에 길에서 장끼전을 주워 벽절 신륵사를 향한 염계달. 낮에는 절에서 불목하니 노릇을 하면서 밤이 되면 소리공부를 시작했다. 얼마나 힘들고 고통스런 날들이었을까? 그렇게 하기를 10. 당당히 명창의 반열에 오른 염계달 명창. 염계달 명창은 조선조 정종 때부터 철종 때까지 활동한 명창이다. 판소리에 경기도 소리조인 경드름을 새롭게 창출해냈다. 판소리 명창들이 '추천목'으로 지목하는 곡도 바로 염계달 명창에 의해 만들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소리꾼들이 몰려들었던 화성행궁

 

평양 능라도에서 덜미소리 한번을 내어 10리 밖에서도 그 소리가 들렸다고 하는 평택 진위출신 모흥갑의 앞에서는 그 누구도 적벽가를 부르지 못했다고 하니 당시 모흥갑의 명성이 어느 정도인가를 알 수 있다. 중고제(中高制)는 판소리에서, 조선 헌종 때의 명창 모흥갑(牟興甲염계달(廉季達김성옥(金成玉)의 법제(法制)를 이어받은 유파를 말한다.

 

이른 시기의 판소리 명창 중에서 모흥갑은 기록이 가장 많이 남아 있는 소리꾼 중의 한 사람이다. 신위의 관극시, 송만재의 관우희, 윤달선의 광한루악부, 이유원의 임하필기, 이건창의 이관잡지, 신재효의 광대가등에 모흥갑의 이름이 등장하고 있다. 그 외에도 춘향가무숙이타령등에도 모흥갑의 이름이 등장한다. 기록이 많이 남아 있다는 것은 그만큼 모흥갑이라는 명창이 당대에 명성을 떨쳤음을 나타내는 증거이다.

 

 

모흥갑은 소리하는 모습이 그림으로 남아 있는 유일한 소리꾼이기도 하다. 서울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여덟 폭 짜리 <평양감사부임도> 중에는 능라도에서 많은 구경꾼이 모인 가운데 소리하는 광경을 그린 것이 있는데, 여기에 소리하는 소리꾼이 모흥갑이라고 기재되어 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수원은 판소리꾼들이 무대를 이어갔다. 그런 수원은 예부터 수원 화령전 옆 건물인 풍화당에서 제자들을 가르치던 발탈의 예능보유자 고 이동안 선생이 기거할 때 전국의 소리꾼과 춤꾼들이 이곳에 모여 소리를 하고 춤을 추었다고 한다. 그런 맥이 흐르고 있는 수원이기에 판소리를 제대로 감상할 수 있는 무대가 만들어지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아쉽기만 하다.

 

 

서울 성수아트홀 무대에 올린 남도소릿길

 

19일 이른 시간에 서울로 향했다. 그동안 문하생들과 함께 수원의 곳곳에서 남도소리를 들려준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흥부가와 적벽가의 이수자인 소리꾼 강승의 선생이 이끄는 무대가 열린다는 소식을 접했기 때문이다. 서울 성동구에 소재하고 있는 성수아트홀 무대에 오후 7시부터 열린 무대에는 경기안택굿 고성주 명인의 살풀이춤까지 오른다고 하니 일부러 찾아간 것이다.

 

이날 공연은 객석을 메운 사람들로부터 많은 환호를 받았으며 판소리 중 심청가와 흥부가 등을 각색해 관객들이 보기 좋은 무대를 만들었다. 그냥 소리만 들려주는 것이 아니라 적당히 연출된 무대로 인해 소리극을 보는 것 같아 관객 누구나 좋아할 만한 무대였다. ‘ 남도소릿길 - 풍월을 싣고무대를 감상하면서 수원에서 무대에 올랐던 많은 소리꾼들이 생각난다.

 

이날 남도소릿길에는 많은 인원이 무대에 올랐다. 강승의 선생의 문하생들이 보여준 2시간의 공연. 물론 그들이 모두 소리의 멋을 안 것은 아니다. 이제 소리를 갓 시작한 문하생들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두 시간 가까이 무대를 지켜보면서 이제 수원도 옛 영화를 되찾아야 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수많은 재인들이 거쳐 간 수원. 우리 전통을 지키고 찾아가는 것은 곧 우리의 정체성을 찾는 길이기 때문이다.

 

화성 풍경을 작가의 그림으로 만날 수 있는 전시회

 

정월행궁나라 갤러리는 팔달구 행궁동 행정복지센터 1층 민원실에 소재하고 있는 갤러리이다. 정월행궁나라 갤러리는 이곳 출신인 정월 나혜석을 기리는 곳으로, 행궁동 주민들과 행궁동을 찾아오는 관광객들을 위한 전시공간이다. 정월행궁나라 갤러리는 매달 2명의 작가 작품을 전시하고 있다.

 

작가 중 한 명은 화가나 사진작가들이 초청된다. 이들의 전시공간은 민원실을 들어서면 좌측 벽면과 2층으로 오르는 계단입구 벽면에 작품을 전시한다. 그리고 민원실 좌측 유리전시관 안에는 공예작품을 전시한다. 한 달에 한 번 작가들의 작품이 교체되지만 11월 정월행궁나라 갤러리 초대전 공예작가는 인두화작가인 우송연의 인두화 작품이 지난달에 이어 계속 전시되어 있고, 벽면 화가 초대작가는 유화를 그리는 민병순 작가의 작품이 전시되어 있다.

 

인두화 작가인 우송연 작가의 작품이 지난달에 이어 11월에도 전시되어 있는 것은, 공예작가의 섭외가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으로 보인다. 화가만 교체가 되어 민병순 초대전으로 바뀌었다. 정월행궁나라 갤러리의 전시는 매달 1일에 시작하여 한 달 동안 전시를 하고 작가들을 교체하는 것이 원칙이다.

 

 

행정복지센터에서 화성을 만날 수 있는 정월 행궁나라 갤러리

 

15, 가을비가 추적거리고 내린다. 비가내리는 날은 취재를 한다는 것이 만만치가 않다 특히 비가내리는 날 야외로 카메라를 휴대하고 다니기가 불편하기 때문이다. 물론 휴대폰을 이용하기도 하지만, 가급적이면 카메라로 촬영하는 것이 자료를 오래도록 보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정월행궁나라 갤러리를 찾아갔다. 민병순 작가의 작품을 만나기 위함이다. 민병순 작가는 현재 연홍회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그동안 청도국제미술제 출품(한국미술창작협회), 홍익 화우회 38주년 전(정 갤러리), 연홍 미술관 개관 가념전(연홍미술관), 연홍회 전기 전시에 다수 출품했으며, 대한민국 에로티즘미술작품 공모대전에서 특선을 한 바 있다.

 

성안마을 행궁동에 살아가며 만나는 수원화성의 아름다움을, 골목의 소박함을, 시간의 흐름에 따라 그리고 계절의 변화에 따라 붓으로 천천히 담아보았습니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그때의 그 장소처럼 소중한 순간들을 그림을 통해 느껴보시기 바랍니다’. 작가노트에서 민병순 작가는 성안마을에서 살아가고 있다고 했다. 그리고 그 성안마을에서 화성의 모습을 작품으로 그려냈다. 전시된 작품들이 수원화성과 연관이 있다.

 

 

늘 보아오던 정겨운 모습이라 더 반가워

 

그동안 정월행궁나라 갤러리에 작품이 바뀔 때마다 찾아가보았다. 다수의 작가들의 작품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11월 초청작가인 민병순 작가의 작품은 늘 보아오던 모습을 작품을 그려냈다는 점에서 친근감이 인다. <서북각루의 가을>이라는 작품은 가을이 되면 서북각루 밖으로 억새들이 장관을 이루고 있는 모습이다.

 

성벽을 따라 흐드러지게 핀 벚꽃, 수원화성의 북문인 장안문, 북수문인, 서포루의 한 낮과 화홍문 등도 만날 수 있다. 민병순 작가는 그렇게 화성의 모습을 그려냈다. 늘 수원화성을 다니면서 만날 수 있는 모습이다. 그림만 보아도 어느 계절인지, 어디인지 일 수 있다. 눈에 악은 낯익은 모습이라 더 정겹다.

 

행궁동 행정복지센터 정월행궁나라 갤러리에서 만날 수 있는 정겨운 모습. 정월행궁나라 갤러리를 찾아가는 것은 화가들의 작품과 공예작가들의 작품을 한 곳에서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가을비가 추적거리고 내리는 을씨년스러운 날. 정월행궁나라 갤러리를 찾아가보면 유화 민병순 작가의 화성을 만날 수 있다. 그런 작가의 작품을 만나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다.

 

사진작가 이미경, 그녀가 전시기획자가 된 까닭은?

 

독립운동가이자 사학자, 언론인이었던 단재 신채호 선생은 역사를 잊은 민족은 미래가 없다라고 했다. 선생은 우리나라에 부처가 들어오면, 한국의 부처가 되지 못하고 부처의 한국이 된다. 우리나라에 공자가 들어오면, 한국을 위한 공자가 되지 못하고 공자를 위한 한국이 된다. 우리나라에 기독교가 들어오면, 한국을 위한 예수가 아니고 예수를 위한 한국이 되니 이것이 어쩐 일이냐. 이것도 정신이라면 정신인데 이것은 노예정신이다. 자신의 나라를 사랑하려거든 역사를 읽을 것이며, 다른 사람에게 나라를 사랑하게 하려거든 역사를 읽게 할 것이다.”라고 했다.

 

선생은 <독사신론>에서 내가 지금의 각 학교에서 교과서를 쓰는 역사를 보건대, 가치 있는 역사가 거의 없도다.”라고 해 역사를 바로 세워야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다. 역사의 중요성을 강조한 신채호 선생의 명언처럼 아픔의 역사를 잊지 않기 위한 의미있는 전시가 열린다. 광복회 경기도지부(지부장 황의형)이 마련한 ‘3·1운동 및 임시정부수립 조선의열단 백년을 말하다 - 그날의 기억 1919’1126일부터 121일까지 경기도문화의 전당 빛나는 갤러리에서 열린다.

 

그런 그날의 기억 1919’의 공동기획자인 이미경씨를 13일 오후, 영동시장 2층 청년몰 한편 카페에서 만났다. 지난해(2018) 115일 행궁동에 소재한 대안공간 눈에서 이미경 개인전 상처가 아물지 읺았다전을 열고 난후 1년 만의 만남이다. 당시 이미경씨의 전시는 지인의 갑작스런 죽음이 몰고 온 공포를 그대로 사진으로 옮겨 놓았던 상징적 전시였다.

 

 

1년 만에 기획자가 되어 나타난 이미경씨

 

그 전에도 이미경 작가의 전시를 찾아보고 기사화 한 적이 있어 낯이 익은 사람이다. 그런데 뜬금없이 기획자가 되어 나타났다. 그것도 3·1운동, 임시정부수립 100년이라는 의미있는 해(1919)그날의 기억 1919’라는 전시제목을 갖고 전시를 한다는 것이다. 올해는 3·1운동과 임시정부수립 100주년이 되는 해이기 때문에 전국적으로 수많은 관련행사가 열렸다.

 

그런 행사가 한 해의 막바지에 들기 시작한 11월 말에 또 다시 ‘3·1온동 및 임시정부수립 조선의열단 백년을 말하다라는 제목으로 전시를 갖는다는 것이다. 그것도 사진작가가 아닌 전시기획자로 나타났다. 도대체 그녀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그리고 왜 1919년을 기억하고 싶은 것일까?

 

안양에서 사진전을 여는데 독립운동가의 후손들과, 지금은 생존해 계시지 않는 독립운동가를 모티브로 사진전을 열었어요. 그들의 마음을 담아내는 사진작업을 하다가 우리가 그날(191931)의 역사나 독립운동가 들에게 너무 홀대를 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갖고 있는데, 광복회 경기도지부에서 조선의열단 백년을 말하다라는 제목으로 전시계획을 갖고 있는데 기획을 맡아달라고 했어요

 

그런 전시라면 힘들어도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전시기획을 맡았다고 한다. 그동안 3·1운동 관련자료를 찾기 위해 화성 제암리, 천안 유관순 열사 생가지 등을 찾아다니면서 많은 것을 보고 들었다고 한다. 기획을 한 것이 얼마 되지 않아 힘들지만, 나름 최선을 다해 1919년의 역사를 조명하고 싶다는 것이 이미경씨의 말이다.

 

 

앞으로 우리의 역사를 기록으로 남기는 작업하고 싶어

 

이미경씨가 기획을 하게 된 것은 8,15 광복절을 맞이해 아이들이 그린 태극기를 한 곳 지하도에 전시회를 열고, 그곳에 커다란 태극기를 걸어놓은 후 지나는 사람들이 자신이 느낀 바를 글로 적는 전시를 연 것이 기획의 시작이라고 한다. 전시는 생각 밖으로 많은 사람들이 동참했고, 그 전시를 통해 기획에 대한 자신감을 얻었다는 것이다.

 

저는 중앙대학교 평생교육원 사진학과를 졸업한 후, 국립한경대학교 일반대학원 시각디자인학과에 재학하고 있어요. 이번에 석사논문이 나왔는데 논문제목이 <내면심리의 사진적형상화를 통한 불안극복 - ’상처가 아물지 않았다를 중심으로> 였죠. 개인적인 불안의 문제를 예술활동으로 극복할 수 있는지에 대한 정신분석학의 이론과 선행작가를 기반으로 살펴본 작품 논문예요

 

이미경씨가 건네주는 석사학위 논문집을 받아들고 사진작가가 기획을 할 수 있다면 우리가 모르고 있던 내면의 세계까지 사진으로 담아낼 수 있기 때문에 기대가 된다고 그동안의 용기를 격려해주었다. 이미경씨는 기획을 하다보니 그동안 사진작가로서 모르고 있었던 더 많은 것을 알게 되었고. 더 많은 공부를 해야 한다는 것도 깨달았다면서 이번 그날의 기억 1919’9명의 작가가 동참했으며(깅동우, 김희곤, 류엘리, 염동균, 이혜정, 조정호, 최순옥, 한영숙, 한희준) 작가들은 모두 경기도에서 활동하고 있다고 한다. 이번 전시의 기획은 이미경씨와 장기택씨가 공동 전시기획을 맡았다.

 

 

기획자는 단순히 나에게 주어진 모티브만을 갖고 전시를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그 모티브가 만들어지기까지의 과정도 고민해야 참다운 기획자가 될 수 있다라는 말로 전시를 하는 이미경씨에게 도움을 주었다. “앞으로는 우리 문화재에 대해 더 많은 것을 공부하고 그 문화재에 얽힌 이야기와 국가, 그리고 민초들의 이야기까지 찾아보겠다고 하는 이미경씨. 이번 그녀가 기획한 그날의 기억 1919’전이 기대되는 것은 사진작가로 활동하던 기획자가 얼마나 다른 모습을 보여줄 수 있을지가 궁금하기 때문이다. 또한 참여작가들이 생각하는 조선의열단 백년은 어떤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올지가 궁금하기 때문이다.

 

113, 수원시 팔달구 지동 271~124에 소재한 경기안택굿보존회. 이 집에 거주하는 경기안택굿 고성주 명인은 18세에 내림을 받은 후 이곳에서 45년을 거주하고 있다. 그동안 한 해도 거르지 않고 일 년에 봄·가을 두 차례씩 맞이굿을 올리고 있다. 힘들어도 봄 가을에 열리는 맞이굿은 거르지 않는다.

 

맞이굿이란 무격이 자신이 모시고 있는 무속신들과 자신을 믿고 따르는 수양부리들의 안녕을 위해 행해지는 가장 큰 굿판이다. 흔히 맞이굿을 진적굿이라고도 한다. 맞이굿이라 부르는 것은 굿거리 제차 중에서 천궁맞이라고 하여 모든 신령들을 굿판으로 청배하기 때문에 맞이한다는 뜻이다.

 

이를 진적굿이라 하는 것은 맞이굿을 하는 날은 일반적인 굿보다 더 많은 제물을 진설하고 굿거리 제차 중에서 무격이 용사슬이라고 하여 물동이 위에 오르거나. 각종 제물을 이용해 사슬세우기를 하는데 이는 신령에게 온전히 받친다고 하여 진적굿이란 용어를 사용한다. 즉 모든 것을 신에게 받친다는 뜻이다.

 

 

110년을 가게로 전승된 경기안택굿

 

흔히 우리는 한양굿이란 용어를 사용한다. 하지만 현재는 서울에 많은 무격들이 거주하고 있지만 고려 때는 도성 밖으로 50회나 무격들을 축줄했으며, 조선조 때도 무격들을 한양 성밖으로 내보냈다. 이들이 한양에서 쫓겨나면 만신들은 노량진인근 한강을 벗어나야 했기 때문에 노들만신이라는 용어까지 생겨났다.

 

결국 한양굿이란 용어는 근대에 들어 생겨난 것으로 보아야하며, 이들이 도성에서 축줄당해 주로 자리를 잡은 곳이 경기도 수원을 비롯해, 화성, 오산, 안성, 시흥, 안산, 이천 등지였다. 이들은 이곳에서 나름대로 가계를 형성해 자신의 굿을 전승시켰기 때문에 경기도 일대의 굿은 나름 지역적 특색을 지니면서 오랜 시간 이어져 내려왔다.

 

이중 고성주 명인은 유일하게 강신무이면서도 가계(家系)로 굿이 전승된 특별한 경우이다. 고성주 명인은 할머니를 거쳐 고모, 그리고 고모의 신딸인 최영옥 만신- 고성주로 이어지는 110년의 세월을 집안으로 경기도 전통굿이 전승된 유일한 인물이다, 그가 일 년에 두 차례씩 맞이굿을 열고 있는 것도 가계로 전해진 굿의 법제를 지켜가야 하기 때문이다.

 

 

질펀한 안택굿판, 모든 사람이 즐기는 축제

 

고성주 명인의 경기안택굿은 남다르다. 굿을 열린 축제라고 한다. 열린 축제의 현장을 볼 수 있는 굿판이 바로 고성주 명인의 맞이굿판이다. 맞이굿을 열기 1주일 전부터 각종 기물을 정비하고 닦는다. 그리고 굿에 필요한 제물을 직접 집에서 준비한다. 맞이굿에 모이는 수백 명의 인원이 먹을 음식도 집에서 일일이 준비한다.

 

고성주 명인은 경기도에서 유일하게 <>을 지켜가고 있는 무격이다. 판이란 무격과 수양부리들이 부모·자식으로 연결되는 고리를 말한다. 즉 무격이 부모가 되고 수양부리들은 자식이 되는 정신적은 부모와 자식의 관계가 형성되는 것이다. 하기에 고성주 명인의 신도들은 나이가 고성주 명인보다 더 많아도 모두가 아버님이라고 고성주 명인을 호칭하고, 고성주 명인은 자신보다 나이가 많은 수양부리들에게도 아들이나 며느리라고 부른다. 하기에 고성주 명인의 수양부리들은 대개 할머니 - 고모 - 신어머니 때부터 전해지는 대물린 신도들이다.

 

 

3일 오전부터 시작된 ‘2019 경기안택굿 가을맞이’. 열린축제답게 꼭 수양부리가 아니라고 해도 누구나 굿판에 참여할 수 있다. 가장 두드러진 것은 누가와도 먹을 것을 한상 차려준디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수양부리가 아니라고 해도 굿판에 참여하면 누구에게나 똑 같이 복과 굿에서 사용한 제물을 나누어준다.

 

그리고 굿판 내내 먹을 것을 차린다. 더 달라고 해서 노여워하지 않는다. “집에 오는 이는 무조건 복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 고성주 명인의 철학이다. 하루 종일 굿이 열리고 중간에는 소리꾼과 춤꾼도 한 몫 거든다. 그야말로 종합적인 축제의 모습이다. 그리고 막판에는 모두가 전복을 입고 한바탕 뛰어논다. 이집이 아니면 볼 수 없는 광경이다. 누구나 찾아와 먹고, 마시고 함께 즐기는 열린 축제의 장 경기안택굿. 하루빨리 경기도 무형문화재로 지정해 온전한 전승이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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