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산성은 경기도 광주시 중부면 산성리 산1 번지에 소재하며 사적 제57호로 지정이 되어있다. 현재 남한산성의 행정구역으로는 광주시, 하남시, 성남시에 걸쳐 있으며, 성 내부는 광주시 중부면 산성리에 속한다. 남한산성이 위치한 광주시는 약 80%가 산이며 나머지 20% 정도가 평야부에 속하는 경작지이다.

 

신라 문무왕 13년인 673년에 한산주에 주장성(일명 일장성)을 쌓았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 주장성이 현재의 남한산성으로 보인다. 고려시대의 기록은 없으나, 조선조 세종실록지리지에 일장산성이라 기록되어 있다.

 

 

남한산성은 한강과 더불어 삼국의 패권을 결정짓는 주요 거점이었다. 백제가 하남 위례성에 도읍을 정한 이후, 백제는 남한산성은 성스러운 대상이자 진산으로 여겼다. 남한산성 안에는 숭열전이 자리하고 있는데, 이곳은 백제의 시조인 온조대왕을 모신 사당이다.

 

치욕의 장소이기도 한 남한산성

 

조선왕조 시대의 남한산성은 선조 임금에서 순조 임금에 이르기까지, 국방의 보루로서 그 역할을 유감없이 발휘한 장소였다. 그 중에서 특히 조선 그 중에서 특히 조선 왕조 16대 임금인 인조는 남한산성의 축성과 몽진, 항전이라는 역사의 회오리를 이곳 산성에서 맞고 보낸 바 있다.

 

남한산성이 현재의 모습으로 갖춘 것은, 후금의 위협이 고조되고 이괄의 난을 겪고 난 인조 2년인 1624년이다. 인조 14년인 1636년에는 병자호란 때 왕이 이곳으로 피신하였는데, 강화가 함락되고 양식이 부족하여 인조는 세자와 함께 성문을 열고 삼전도에서 치욕적인 항복을 하였다. 아픈 역사를 갖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인조 2년인 1624년부터 오늘의 남한산성 축성 공사가 시작되어, 인조4년인 1626년에 완공한 남한산성. 산성 내에는 행궁을 비롯한 인화관, 연무관 등이 차례로 들어서 수백 년의 역사를 갖고 있는 문화유산이기도 하다. 이러한 문화유산은 1894년에 산성 승번제도가 폐지되고, 일본군에 의하여 화약과 무기가 많다는 이유로 19078월 초하루 아침에 잿더미로 변하고 말았다.

 

현재 남아있는 시설은 동, , 남문루와 장대, 돈대, 보 등의 방어시설 등이 있다. 또한 비밀통로인 암문과 우물, 관아, 군사훈련시설 등도 볼 수 있다. 남한산성은 백제 전기의 유적이 많이 있어, 일찍부터 백제 온조왕 때의 성으로도 알려져 왔다. 이 남한산성의 행궁 앞편 산 중턱에 서 있는 정자가 바로 침괘정이다.

 

무기제작소로 잘못 알려진 침괘정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5호인 침괘정은 세운 시기를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조선 영조 27년인 1751년애 광주유수 이기진이 다시 지은 후에 이름을 침과정이라고 지었다고 한다. 이 일대는 예로부터 백제 온조왕의 궁궐터였다는 이야기가 전하고 있으며, 침괘정의 오른쪽에는 무기를 보관하던 무기고나 무기를 만들던 무기제작소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정면 7, 측면 3칸 규모로 지붕은 팔작지붕이다. 침괘정의 안쪽에는 온돌이 설치되어 있고, 회랑과 툇마루를 길게 놓았다. 뒤편에는 연도를 빼 건물에서 떨어져 굴뚝을 세웠다. 이 침괘정의 주변에 있던 무기창고를 명나라 사신 정룡이 총융무고라고 한 것을 보면 그 이전부터 있었던 전각으로 보인다.

 

침괘정은 네모난 기둥을 쓰고 있으며, 툇마루는 앞과 뒤, 그리고 측면에도 놓았다. 주초는 커다란 돌을 네모나게 다듬어 사용을 하고 있으며, 7칸 중 두 칸은 전체를 문으로 돌렸다. 이를 보아 이곳이 온돌방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런 면으로 볼 때 침괘정은 무기고나 무기제작소가 아닌 하나의 정자의 역할을 담당했을 것으로 보인다.

 

속초시 동명동 속초등대 밑의 바닷가에 크고 넓은 바위들이 깔려있는 곳이 영금정(靈琴亭)이다. 영금정이라 부르게 된 이유는 파도가 바위에 부딪치면서 신묘한 소리가 들리는데, 이 소리가 마치 거문고를 타는 소리와 같다고 하여 영금정이라 불렀다고 했다.

 

또 하나의 다른 이야기도 전한다. 선녀들이 밤이면 내려와 목욕을 하면서, 신비한 곡조를 읊으며 즐기는 곳이라 하여 비선대(飛仙臺)라고 불렀다고 한다. 김정호의 대동여지도에는 비선대라 기록하였고,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다음과 같이 소개를 하고 있다.

 

 

비선대는 부 북쪽 50리 쌍성호(현재의 청초호) 동쪽에 있다. 돌 봉우리가 가파르게 빼어났고 위에 노송이 두어 그루가 있어서 바라보면 그림같이 아름답다. 그 위는 앉을 만하여 실같은 길이 육지와 통하는데, 바닷물이 사나워지면 건널 수 없다. 영금정의 또 다른 이름으로 화험정(火驗亭)이 있다.

 

영금정이라 불리던 바위, 일제가 훼파해

 

동해안에 흩어진 바위를 보고 부르던 영금정이 바로 첫 번째 정자다. 영금정은 지금보다는 높은 바위산이 있던 자리라고 한다. 바위산의 모양이 정자 같아 보였고, 또 파도가 이 바위산에 부딪치는 소리가 신비해 마치 거문고를 타는 소리 같다고 하여 영금정(靈琴亭)이라 불리었다고 한다. 그러나 일제 때에 속초항을 개발할 때 이 바위산을 부숴 이 돌로 방파제를 쌓아서, 바위산은 없어지고 현재의 널찍한 바위들로 형태가 바뀌었다.

 

바위들을 부르던 명칭이었던 영금정을 따서 속초시에서 영금정 일대를 관광지로 개발하여, 남쪽 방파제 부근에 정자를 하나 만들어 영금정이라 이름하였다이 정자는 영금정 바위 위에 세워진 해상 정자로 50m 정도의 다리를 건너 들어갈 수 있다.

 

 

해상 정자에서 바라를 바라보는 느낌은 방파제와는 또 다른 시원한 느낌을 주지만, 정자 자체는 콘크리트 정자여서 아쉬움이 남는다. 이 영금정을 해돋이 정자라고 부르는데, 정자 현판에는 영금정(靈琴亭)이라는 글을 써 놓았다. 이 영금정이 바로 두 번째 정자다.

 

두 번째 영금정이 비록 바위 위에 볼품없이 지어진 시멘트 건물이라고는 하나 영금정에 올라 동해의 파도소리를 들으면 막혔던 가슴이 뻥 뚫리는 느낌을 받는다. 파도가 밀려와 바위에 부딪치는 소리를 들으면 옛 이야기가 허구가 아님을 알게 된다. 오죽하면 거문고를 타는 소리와 비교를 했을까? 눈을 감고 소리를 들으면 그 안에 오묘한 갖가지 소리들이 사람을 현혹케 한다. 저 소리를 우리 선인들은 거문고를 타는 소리라고 표현을 한 것은 아닌지. 멀리 지나가는 배 한척이 낮은 파도에 모습을 드러내고 감추고를 반복하면서 떠간다.

 

바닷가 바위 위에 세 번째 영금정을 지어

 

그리고 2008년 새롭게 조성한 또 하나의 영금정이 있다. 두 번째의 영금정 정자가 서 있는 옆 산봉우리에 새로 또 하나의 영금정을 세웠다. 계단을 통해 오를 수 있는 이 정자에 오르면, 시원한 동해바다와 동명항, 그리고 설악산의 울산바위가 돌아가면서 보인다. 절경이란 생각이 들만큼 아름답다.

 

 

두 번째의 영금정이 저 아래편에 아름답게 보인다. 한 가지 욕심을 내자면 영금정이라는 이름보다는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소개된 또 하나의 이름인 화엄정이란 명칭은 어떠했을까? 모두 세 개의 영금정을 갖게 된 동명항은, 이제 새로운 해맞이 장소로 명성을 얻을 수 있을 듯 하다.

 

바닷가 바위 위에 올라선 영금정. 이 정자를 난 마음속으로 화엄정이라 부르기로 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 밝혔듯 동해에서 떠오르는 해가 마치 불이 붙는 듯해서 붙인 이름일 것이라는 생각에서이다. 일제가 훼파한 아름다운 바위 영금정이 더 없이 그리운 날이다.

환벽당 일원 항공사진/ 광주북구청 제공

 

문화재청(청장 변영섭)은 광주광역시 북구 충효동에 위치한 광주 환벽당 일원을 국가지정문화재인 명승 제107호로 지정하였다고 고지를 했다. 환벽당은 사촌 김윤제(송강 정철과 서하당 김성원 등을 제자로 둠, 1501~1572)가 노년에 후학양성을 목적으로 무등산 원효계곡에서 흘러나온 아름다운 증암천 옆에 건립한, 남도지방의 전형적인 유실형 정자이다.

 

정자와 연못을 비롯하여 전후좌우로 송림과 죽림, 그리고 주변의 산들이 그림처럼 두르고 있어 환벽(環碧)’이란 뜻 그대로 모두 푸른빛으로 둘러싸여 청록색의 아름다운 경관을 형성하고 있어 자연경관 또한 빼어난 곳이다. 이런 고지를 만나면 즐거움이 두 배가 된다. 30년 간의 문화재 답사 때 들린 곳이기 때문이다. 이럴 때는 흡사 집 나간 며느리가 돌아온 듯하다.

 

 

또한 환벽당을 중심으로 당대 최고의 석학과 시인 묵객들이 이곳을 방문하여 수려한 자연경관을 감상하고 시문과 가사를 지은 조선시대 별서원림(別墅園林, 사방의 주변 경관을 조망할 수 있게 만든 정자와 정원)으로서 호남의 대표적인 누정문화(樓亭文化)를 보여주는 역사 문화적 가치가 높은 곳이다.

 

이번에 명승으로 지정한 구역은 기존 환벽당 정자와 연못, 가사문학의 대가 송강 정철(1493~1583)과 사촌 김윤제가 처음 만난 곳이라는 전설이 깃든 조대와 용소, 송림이 아름다운 뒷동산을 포함함으로써 소쇄원(瀟灑園, 명승 제40), 식영정(息影亭, 명승 제57)과 더불어 옛 일동삼승(一洞三勝, 한 지역 안에 3개의 명승이 있음)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호남문학의 찬연한 꽃을 피운 광주 환벽당

 

충효동에 자리하고 있는 광주광역시 지정 기념물 제1호인 환벽당. 환벽당을 오르기 위해 숲길로 들어서면, 이 길이 무등산 역사 길의 정점이 된다. 가사문학관에서 자미탄 다리를 건너면, 왼편으로 난 작은 오솔길을 만날 수 있다. 이 오솔길은 내를 옆에 두고 있어, 무더운 계절에 시원함을 느낄 수가 있는 곳이다.

 

환벽당의 주변은 담장으로 둘러쳐져 있다. 정자 뒤편으로는 대밭이 들어서 있고, 축대 앞으로는 속이 빈 배롱나무가 서 있다. 예전에는 주변이 온통 대숲이었다고 한다. 주변에는 수백 년은 족히 살아왔을 성 싶은 노송 몇 그루가, 더위에 지친 나그네를 반긴다. 아마도 나주 목사를 지내고 향리로 돌아 온 사촌 김윤제가, 후일 길을 찾는 나그네들을 위한 배려는 아니었을까?

 

 

푸름을 사방에 두른 환벽당

 

아름다운 풍광, 그리고 시원한 바람과 함께 댓잎이 바스락거리는 소리. 환벽당은 풍광이 이름다운 곳이다. 환벽당 안에 걸려있는 임억령의 시가 환벽당의 아름다움을 전하고 있다.

 

안개에다 구름 기운 겹쳐졌는데

거문고와 물소리 섞여 들리네

노을 사양길에 취객 태워 돌아가는지

모래가의 죽여 소리 울리고 있네

 

16세기인 조선조에 사화와 당쟁의 극한 상황 절의를 고집했거나, 정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유배를 당한 인물들. 그들은 이곳 환벽당 주변으로 모여들어 조선시대 가사문학의 중심을 이루었다.

 

 

당대 최고의 문인들이 모여들었던 환벽당

 

환벽당은 사촌 김윤재(1501 ~ 1572)와 더불어 송강 정철도 이곳에서 벼슬길에 나아가기 전까지 머물렀다고 한다. 당대의 문인들이 환벽당을 중심으로 호남 문학을 꽃피운 것이다. 아마도 당대의 문인들이 이곳에 모여 술잔을 서로 기울이면서, 시문을 논하고 소리 한 자락에 목을 가다듬지 않았을까? 댓잎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그 옛 정취를 이야기하는 듯하다.

 

사촌 김윤제는 이곳에 환벽당을 짓고 후학을 양성하는 일에 게을리 하지 않았다. 송강 정철이나 서하당 김성원 같은 제자를 낳았으니, 가히 가사문학의 산실로도 환벽당은 손색이 없다.

 

짝 맞은 늘근 솔란 조대에 세워두고

그 아래 배를 띄워 갈대로 던져두니

홍료화 백빈주 어느 사이 지났는지

환벽당 용의 소히 배 앞에 닿았더라

 

 

정철의 시 한수를 읊어본다. 환벽당을 지은 김윤제는 이곳에서 정철을 만났다. 김윤제가 환벽당 누마루에서 낮잠을 자다가, 조대 앞에서 한 마리의 용이 승천하는 꿈을 꾸었다. 낮에 꾼 꿈치고는 예사롭지 않다는 생각에 조대로 내려가 보니, 용모가 단정한 한 소년이 멱을 감고 있었다. 소년은 화순 동복에 있는 누이를 찾아가는 소년 정철이었다. 그렇게 김윤제와 정철의 만남이 이루어졌다.

 

사촌 김윤제와의 인연으로 정철은 과거에 나아갈 때까지, 십여 년간을 이곳에서 보냈다. 정철은 환벽당에서 김윤제를 비롯한 하서 김인후, 고봉 기대승, 송촌 양응정 같은 당대의 기라성 같은 문인과 학자들을 스승으로 만난다. 그들에게서 학문과 시를 배운 송강 정철, 그런 연유로 가사문학을 대표하게 된다.

 

 

한적한 환벽당, 아직도 옛 풍취는 그대로

 

정면 세 칸, 측면 두 칸의 환벽당은 선비의 고고한 자태가 배어있다. 비탈진 곳에 높은 축대를 쌓고 그 위에 정자를 지었다. 정자는 정면에서 바라보면 우측 한 칸은 누마루를 두고, 좌측 두 칸은 방을 드렸다. 문은 모두 걷어 올려 천정에 매달 수 있게 하였다. 방 앞으로는 측면 반 칸을 앞마루를 깔아 마루와 연결이 된다.

 

앞으로는 시원한 바람을 맞고, 측면으로 흐르는 내의 물소리를 들으면서 이곳에서 살았을 많은 문인들. 그들은 속을 비워냈을 것이다. 세상의 풍파에 휩싸이지 않은 방법은, 그렇게 속을 비우고 초야에 묻혀 시를 읊고 술 한 잔을 기울이는 일이 아니었을까? 속이 다 비어버린 배롱나무 한 그루가, 당시 이곳에 찾은 든 많은 문인들의 속을 보여주는 듯하다.

 

이번에 환벽당이 명승으로 지정이 되었다는 고지를 보면서 왈칵 눈물이 난다지난 30년 동안 얼마나 많은 곳을 찾아 다녔는지. 누가 돈을 주면서 시킨 것도 아니지만, 미친 듯 돌아보았다고 해야 할까? 이렇게 지나친 곳을 다시 만나는 즐거움이 있어, 아마도 내 바람따라 걷는 행보는 계속될 것만 같다.



 아름다운 정자. 벼랑 밑 연못에 연꽃이 아름다움을 자랑하고, 병풍처럼 깎아내린 암벽 위에는 정자가 서 있다. 병암정, 황진이가 노닐던 곳이다. 드라마 황진이의 촬영장이 될만큼 아름다운 정자다.

 

병암정 앞 연못에 핀 연꽃들

 

병암정은 경북 예천군 용문면 성현리에 소재한 정자이다. 현재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453호로 지정이 되어 있다. 병암정은 예천지역의 대표적인 독립운동가인 권원하 선생이 지었다고 한다. 병암정이 유명한 것은 드라마 <황진이> 때문이다.

 

 
 드라마 황진이의 촬영지다

 

병암정에 오르면 앞으로 들판이 시원하게 보인다. 정자는 이외로 단출하다. 가운데는 마루를 놓고 양편으로 방을 만들었다. 그리고 전체적으로 전면에 길게 마루를 두었다. 이 정자를 지은 권원하 선생은 이 마루에서, 너른 들판을 내려다 보면서 나라의 안위를 걱정했을 것이다.

 


 경북 문화재자료이다

 병암정에 걸린 현판

경관이 뛰어나 드라마 촬영장이 되기도 했던 병암정. 그러나 정작 이 병암정은 나라의 독립을 걱정하는 곳이었다. 권원하 선생이 이 정자를 짓고 멀리 들판을 바라보며 내 나라를 생각하고, 떠가는 구름을 보고 나라를 위해 불철주야 달렸을 것이다.


 

우리는 가끔 정자를 찾아다니면서 그 경관만을 본다. 하지만 그 정자 안에는 많은 이야기가 숨겨져 있다. 왜 정자를 지었을까? 단순히 시를 짓고 경관을 감상하기 위해서만은 아니다. 정자는 그 안에 숱한 이야기를 간직한다. 그래서 그 이야기를 찾아내기 위해 주변을 다니면서 이야기를 듣는다.    

 


병암정은 단순한 정자가 아닌 나라를 걱정하는 독립운동의 산실이었을 것이다

 

세월의 무상함을 느끼게 하는 병암정. 세월이 지나면 그 본래의 뜻이 퇴색해 버린다. 병암정은 독립운동의 숭고한 뜻을 가진 정자에서, 명기 황진이가 거닐던 드라마의 촬영지로 바뀌었다. 하지만 세월은 흐르고 사람들의 사고도 바뀌는 것이 아닌가. 그렇게라도 병암정이 사람들에게 잊혀지지 않고 발길이 이어진다면, 권원하 선생의 뜻도 함께 알려질 것이다. 멀리 들판 위를 떠가는 구름 한 점이 숨을 고른다. 

포천시 창수면 오가리 546에 소재한 포천 향토유적 제17호인 금수정(金水亭), 1989년 복원한 정자로 영평 8중 제 2경으로 창수면 오가리 영평천 가에 자리하고 있다. 앞으로 영평천 맑은 물이 흐르며, 주변은 숲으로 쌓여 가히 절경에 자리하고 있는 정자이다. 원래 이 금수정은 400년의 역사를 갖고 있는 정자였다.

 

1608년경에 이곳에 김씨 성을 가진 사람이 우두정이라는 정자를 지었는데, 이 정자를 사위인 봉래 양사언(1517(중종 12)~1584(선조 17)에게 주었다고 한다. 봉래 양사언 선생은 정자이름을 금수정이라 하고, 편액도 갈아 붙였다는 것이다.

 

 

어머니의 정성이 대문호를 만들다

태산이 높다하되 하늘아래 뫼이로다

오르고 또 오르면 못 오를리 없건만은

사람이 제 아니 오르고 뫼만 높다 하더라

 

양사언은 돈녕주부 희수(希洙)의 아들이다. 어머니가 소실로 양민에게 시집을 사는 바람에 서자(庶子)로 태어났다. 어머니가 부친인 양민에게서 어릴 적 부채인 채단을 선물로 받고 끝까지 딴 곳으로는 시집을 가지 않겠다고 우겨, 나중에 정실부인이 있는 양민에게 후처로 들어가게 된다. 양민이 죽던 날 양사언의 모친은 정실부인의 소생인 양사준에게 부탁을 한다. 자신이 남편과 같은 날 자결을 해 죽으려고 하니, 자신이 낳은 아들들에게 서자라 부르지 말 것을 부탁하고, 스스로 비수로 찔러 목숨을 끊었다는 것이다.

 

 

이런 어머니의 정성이 있어 양사언은 명종 1년인 1546년 식년문과에 급제했다. 양사언은 금강산을 자주 들리고는 했는데, 그의 호를 봉래(蓬萊)’라 한 것을 보아도, 양사언이 금강산에 남다른 마음을 썼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양사언은 1556년을 전후로 대동현감을 지냈으며, 그 이후 삼등·함흥·평창·회양 등지를 다니며 직임을 맡았다. 회양에 나간 것은 금강산을 따라 스스로 택한 것으로, 이때 금강산에 관한 시를 많이 남겼다. 1564년에 고성군의 구선봉 밑 감호가에 정자 비래정(飛來亭)’을 짓고 풍류를 벗 삼으며 은거했다.

 

 

선조 15년인 1582년 다시 안변군수로 나갔으나, 다음해 번호 변란을 당해 수사의 책임을 지고 해서에 귀양 가서 1584년인 68세에 세상을 하직했다. 양사언은 점복에도 능하여 임진왜란을 예고했다고 하며, 조선 전기 4대가로 일컬어질 만큼 서예를 잘해 초서와 해서에 능했다.

 

양사언의 숨결을 낚다

 

금수정은 울창한 숲속에 자리 잡고 있어, 앞으로 흐르는 영평천의 맑은 물과 숲이 아름답게 어울리는 곳이다. 안동김씨의 소유로 전해오면서 몇 차례 중수되었으며, 6.25때 완전 소실된 것은 1989년에 현재 모습으로 복원하였다. 정자의 현판은 봉래 양사언 선생의 글씨이며, 정자 옆에는 선생의 시조비인 태산이 높다하되가 서 있다.

 

 

정자는 팔작지붕으로 지어졌으며 정면 2, 측면 2칸이다. 정방형의 주추를 놓고 그 위에 둥근 기둥을 올렸다. 기둥의 밑동 위에 마루를 놓고 난간을 둘러, 멋진 정자로 지었다. 크지 않은 정자가 숲과 영평천과 잘 어울린다는 느낌이 든다. 과거 봉래선생도 이곳에서 이런 아름다운 절경에 취해 시 한 수 짓지 않았을까? 떠가는 구름조차 아름답다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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