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기를 놓쳐 더 아쉬운 청심루 복원

 

“4대강 정비를 할 때 청심루를 복원했어야죠. 이제 시기를 놓쳐 힘들게 되었습니다. 4대강 개발을 하면서 건설회사 한 곳이 2억을 들여 정자를 하나 여강 가에 지었는데 도대체 그 이유를 모르겠어요. 복원을 해야 할 것은 관심도 없고 말입니다.”

 

여주문화원 조성문 사무국장은 기회를 놓친 청심루의 복원이 못내 아쉽다고 한다. 수많은 시인묵객들이 글을 써 청심루의 아름다운 절경을 읊었기 때문이다.

 

청심루가 언제 지어졌는지는 확실치 않다. 하지만 1200년대 초에 활동하던 이규보의 시에 강루가 나오고 있는 점이나, 1200년대 후반에 고려시대의 문인이자 지도첨의부사를 지낸 주열의 시에 청심루가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800여 년 전에 지어진 정자일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여주관아 안에 세운 청심루

 

청심루는 여주 관아 안에 있는 정자로 일반 백성들이 출입할 수 없었다. 그래서인지 시문에 남아 있는 수많은 청심루에 대한 글도 모두 선비들의 작품들이다.

 

8세기 중엽에 제작된 <해동지도> 여주목 청심루 부분에 보면 동헌의 경내 남한강 가에 청심루가 있고, 누각의 양편에는 커다란 나무가 그려져 있다. 주열의 시에도 큰 나무가 서 있었음을 밝히고 있다.

 

청심루의 운을 써서 짓다(주열 : ? ~ 1287. 번역 조성문)

 

동그랗게 밝은 달이 구름 가에 나타나니

거울 속에서 예부터 친한 얼굴을 만나는 것 같네

쌍으로 선 나무는 보개의 그림자가 드리운 것이고

사화산은 수미의 무리가 드러누운 듯 하네

잉어는 아득한 저 너머로 처소를 전하고

검은 용은 어두움 속에서 명주를 숨기네

오경에 이르도록 시를 읊어도 시 더욱 기절하니

풍물로 인해 잠시라도 한가롭지 못하게 하네

 

여기서 풍물이라 함은 경치를 말하는 것이다. 청심루에서 바라다 보이는 경치가 얼마나 좋았기에 청심루의 운을 써서 시를 짓는 일이 새벽녘 오경(오전 3~5)까지 이어졌을까? 결국 밤을 새워 청심루의 절경을 읊었다는 것이다. 청심루에서 보이는 절경에 매료되어 글을 지은 사람들 중에는 이름만 들어도 알 수 있는 역사의 인물들이 즐비하다.

 

 

 

수많은 명인들이 청심루를 시로 읊어

 

이규보, 이집, 이색, 정몽주, 이직, 서거정, 김종직, 성현, 김안국, 주세붕, 서산대사 등의 글에도 청심루의 경치를 노래했다. 가히 남한강 중 제일경이 아니라면, 200여 편이나 되는 청심루에 관한 시가 전해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러한 청심루는 도대체 어떤 모습으로 어디에 있었을까? 역사속의 자료에 남아 있는 청심루를 찾아보면 18세기 중엽에 제작한 해동지도여주목 부분에 청심루가 있다. 청심루는 강가에 자리하고 있으며, 동헌의 경내에 자리한다. 그리고 청심루의 양편에는 커다란 나무 두 그루가 있다. 주열의 시에 '쌍으로 선 나무'를 뒷받침하고 있다. 1796년 제작한 정수영의 한임강명승도에도 청심루가 그려져 있다.

 

 

 

조성문 여주문화원 사무국장은 그의 논문 팔대수와 청심루의 문화생태적 고찰에서 청심루가 지어진 시기를 1235 ~ 1236년으로 유추하고 있다.

 

고려시대 누정은 기념할 만한 일이 있을 때 해당지역 관아나 사찰부근에 세워지기도 했었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여주사람 김약선의 딸이 태자비(뒤에 순경태후)로 뽑히던 1235년이나, 그 다음해인 1236년 충렬왕을 낳았을 때 축하의 의미로 청심루가 세워졌을 가능성이 높다. 그만큼 청심루는 여주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누각이었던 것이다.

 

청심루와 관련이 있는 시는 200여 수가 넘게 전해지고 있다. 그 수많은 시 중에는 팔대장림, 신륵사, 마암, 동대, 양섬, 제비여울, 이릉 등 주변의 절경을 함께 그리고 있다. 이러한 청심루는 8.15 광복을 맞이하여 성난 민중들이 일본인 군수의 관사에 불을 놓았을 때, 곁에 있던 청심루까지 소실이 되고 말았다. 남한강 제일경이 사라져버린 것이다.

 

여주 남한강 가에 자리한 청심루 터를 알리는 비. 그리고 주변에 보이는 과거 속의 아름다움. 그런 것들이 다 사라지고 말았다. 고려 때부터 조선조에 이르기까지 많은 문인들은 맑은 물 위를 한가롭게 노니는 돛배, 아름다운 여강의 낙조, 새벽 물안개 속의 모래톱, 동대의 휘영청 밝은 달, 배안에 떨어지는 신륵사의 종소리. 이런 아름다운 모습들을 읊으면서 저절로 시름이 가라앉는다고 했다. 이곳에 다시 청심루를 지을 수만 있다면. 또 얼마나 많은 시인들이 찾아들 것인가? 청심루 터를 떠나는 귓전에 서산대사의 시문이 울린다.

 

 

 

해질 무렵 여강에 배를 대다(서산대사 : 1520 ~ 1604)

 

落雁下長沙 낙안이 장사에 내리고

樓中人起舞 누 가운데 사람이 춤을 추네

淸秋一葉飛 청추에 한 잎 낙엽이 날리는데

客宿西江雨 객숙 서강엔 비가 내리네

 

남한강의 긴 모래밭에 겨울 철새들이 내려앉고, 청심루에는 어느 사람이 춤을 추고 있다고 했다. 맑게 갠 가을에 낙엽이 날리는데, 나그네가 묵을 여강 서쪽에는 비가 내린다는 이야기다. 청심루와 남한강의 어우러짐을 그리고 있다. 사라져버린 남한강의 절경 청심루, 그 모습을 다시 볼 수는 없는 것일까?

 

 

공주 금강가에 소재한 공산성은 백제시대의 산성이다. 총 길이 2,200m의 공산성은 포곡형 산성으로 백제 문주왕이 475년에 웅진(공주)으로 천도하여 64년 동안 백제의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인 공주를 보호하기 위해 쌓은 성이다.

 

공산성을 한 바퀴 돌다가 보면 금강 가에 접한 가파른 산성 길을 걷게 된다. 금강 쪽이나 성 안쪽 모두가 급격한 경사로 이루어져, 이곳의 성곽은 1m 남짓하게 쌓아올렸다. 금강을 이용해 적이 침입을 한다고 해도, 이렇게 험한 곳으로는 범접하지 않을 것이란 생각이다.

 

 

 

아름다운 경치를 볼 수 있는 만하루

 

그 가파른 성 길을 따라 내려오면 밑에 정자가 보인다. 만하루는 공산성을 방비하는 군사적 시설과 경승을 관람하는 누각의 구실을 겸하고 있는 정자이다. 만하루를 지나면 다시 경사가 진 곳을 오르게 되기 때문에, 이 정자가 더 돋보이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만하루는 조선 후기인 영조 때 지어진 것이라고 한다. 1982년에 홍수로 매몰되었던 터를 발견하면서 1984년에 측면 2, 정면 3칸의 건물로 복원하였다. 8각으로 다듬어진 초석이나 기단석, 디딤돌 등은 당시의 것을 그대로 사용하였다는 만하루. 성을 한 바퀴 돌아 흐르는 땀을 주체할 수 없는데, 정자에 오르니 시원한 강바람이 불어온다. 때마침 주변에서 작업이라도 하는 것인지, 인부 10여명이 정자에 올라 휴식을 취하고 있다.

 

만하루에 오르면 금강이 한 눈에 내려다보인다. 양편 성벽을 자리 잡아 고목 한 그루가 서 있다. 아마 이런 절경에서 금강을 바라보면서 수많은 시인묵객들이 글이라도 한 자 남겼을 터인데, 정작 정자 안에는 그러한 글 한귀를 찾아볼 수가 없음이 아쉽기만 하다.

 

 

 

 

금강의 물을 이용한 연지(蓮池)

 

만하루와 성내의 절인 영은사 사이에는 연지라는 못이 있다. 이 연지는 금강 가까이에서 물을 확보할 수 있는 지형상의 조건을 이용한 것이다. 연지를 보면 이 연못이 남다르다는 것을 느낀다. 붕괴를 막기 위해 돌로 계단식의 축대를 쌓아 올렸다. 깊은 연못에 연꽃이라도 만개했었을까? 그 이름을 연지(蓮池)라고 부른 것을 보면.

 

연못의 북쪽과 남쪽에 계단을 놓아 수면으로 내려갈 수 있도록 한 것도 알고 보면 이 연못에 연꽃이 있었음을 그려 볼 수 있다. 만하루에서 내려다보는 연꽃이 조금은 아쉬워 직접 연못 수면으로 내려가 연꽃을 관람하였을 것이다.

 

 

 

요즈음 사람들은 아름다운 것을 눈으로만 보는 것은 아닐까? 문화재 답사를 하다가보면 괜히 그런 생각이 든다. 아름다운 것은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다. 마음으로 보는 것이다. 그래서 지금은 텅 빈 연못이지만, 옛 모습을 그려보면 절로 흥이 난다.

 

날도 더운데 땀 흘리며 왜 길을 나서느냐고 묻기도 한다. 그러나 마음으로 보는 문화재는 그 아름다움을 글로는 표현하기가 힘들다. 그래서 조금은 답답하기도 하지만. 하지만 마음의 눈을 열고 보면 그 문화재의 이름다움을 보고, 그 소중함을 깨닫기 때문에 길을 나서게 되는가보다.

 

 

8, 벌써 며칠째 국민안전처에서 경기도 일대에 폭염특보가 내렸다는 문자가 들어온다. 아침 일찍 이천시 백사면 도립리로 향했다. 이천시 백사면 도립리는 산수유축제로 유명세를 타고 있는 곳이다. 산수유축제를 열 때 찾아갔던 이천시 향토유적 제13호인 육괴정은 백사면 도립리 735번지에 소재하고 있다. 한 여름 녹음이 짙은 육괴정의 모습이 궁금해 그곳으로 향했다.

 

육괴정은 처음 지었을 때가 500년 전이라고 전하는 정자이다. 육괴정 주변에는 거대한 느티나무가 서 있다. 이 나무들이 바로 처음 육괴정에 모였던 명현들이 뜻을 모아 심어놓은 나무라고 한다. ‘육괴정이라는 정자의 명칭 또한 이 나무들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란 생각이다. 앞에 작은 연못은 새로 조성한 것이지만, 연못 안에 가득자란 각종 풀들로 인해 볼썽사납다. 장마가 그치고 난 뒤 이렇게 무성하게 자란 풀들을 제거했으면 좋았으련만.

 

 

 

 

명현들이 육괴정에 모인 뜻은?

 

지난 427일 찾았던 육괴정이다. 산수유축제를 시작하기 전에 찾아갂던 육괴정 앞에 서있는 보호수인 나무들은 가지들만 앙상하니 내보이고 있었다. 당시 이곳을 찾았던 것도 바로 육괴정을 돌아보기 위해서였다. 몇 달 전 보았던 육괴정과 지금의 육괴정은 얼마나 달라져 있을까? 무성한 잎을 달고 있는 나무들이 시야에 들어온다.

 

육괴정은 처음에 초당으로 지은 정자였다고 한다. 조선조 중종 14년인 1519년 기묘사화로 인해 조광조를 중심으로 한 이상정치를 추구하던 세력이 크게 몰락하면서, 난을 피해 엄용순이 이곳 도립리로 낙향해 육괴정을 지었다고 전한다.

 

500여 년 전 엄용순이 육괴정을 지었을 때는 초가였으나, 그 후 여러 차례 중건을 거쳐 지금과 같은 모습으로 되었다. 육괴정은 당대의 명현인 모재 김안국, 규정 가은, 계산 오경, 퇴휴 임내신, 성두문, 남당 엄용순 등 여섯 선비가 우의를 기리기 위해 정자 앞에 못을 파고 주변에 6그루의 느티나무를 심었다고 전한다.

 

 

 

 

 

세월이 흘러도 그 뜻은 느티나무들과 함께 남아

 

폭염이 33도를 웃도는 날 찾아간 육괴정. 이렇게 더운 날 누가 이곳을 찾아올 것인가? 이곳에는 연인길이라고 하는 산책로가 있지만 그곳을 걸어 볼 엄두도 나지 않는 찜통더위다. 매미소리마저 끊긴 육괴정을 돌아본다. 주변에 당대의 명현들이 심었다는 보호수들이 그나마 그늘을 만들어주고 있다,

 

시원하게 그늘을 만들어주고 있는 커다란 느티나무들. 엄용순은 기묘사화를 피해 선친의 묘가 있는 이곳 도립리로 낙향한 후, 이곳을 찾아 온 선비들과 함께 학문을 연마하고 시를 짓기도 했단다. 이 느티나무들은 엄용순을 비롯한 6명의 선비가 우의를 다지기 위해 정자 주변에 각각 한 그루씩 심었는데, 그 중 세 그루가 아직도 나아 보호수로 지정이 되었다.

 

현재 보호수로 지정된 이 느티나무들의 수령은 500년 정도로 추정하고 있으니, 엄용순이 정자를 짓고 느티나무를 심었다고 전하는 시기와 같은 시기이다. 돌로 기단을 쌓은 위에 마련한 육괴정은 지금은 팔작지붕으로 정면 네 칸, 측면 두 칸의 사당형 정자이다. 가운에 두 칸은 누마루를 깔고 양편으로는 온돌방을 들였다.

 

 

 

 

 

한 겨울에도 이곳에서 생활을 할 수 있도록 꾸민 집이다. 계단을 오르면 대문 위에 임진왜란 때 순절한 엄용순의 손()인 엄유윤의 충신정려가 걸려있다. 단출하니 지어진 육괴정, 그리고 수고가 15m나 되는 당대의 이곳에 머물었던 명현들이 심었다고 하는 느티나무. 세월은 흘렀어도 그들이 마음은 이렇게 남아있다.

 

느티나무 곁에 마련한 쉼터에서 잠시 다리를 쉰다. 무더위에 지쳐 울음소리도 내지 않던 매미 한 마리가 시원하게 소리를 낸다. 아마 500년 전 이곳에 모였던 여섯 분의 선인들도 이런 여름철을 즐기지 않았을까? 또 다른 육괴정의 모습을 본다.

 

 

조양루는 6, 25 동란 개전 초기(1950, 6, 25 ~ 6, 28) 국군 제 2사단의 창설모체 부대인 제6사단 장병들이 춘천시민들과 함께, 인해전술로 파상공격을 가해오는 북괴군을 섬멸함으로써 한국전쟁 초기에 유일하게 승전보를 올린 유서 깊은 곳이다. 이 우두산 충렬탑이 있는 곳 숲속에 정자 하나가 서 있다.

 

6, 25 한국전쟁 당시 일부가 파손이 되었으나, 1969년에 수리를 한 조양루. 이 정자는 원래 이곳에 있던 것은 아니다. 조선 인조 24년인 1646년 춘천부사 엄황이 문소각을 세울 때 위봉문과 함께 지은 문루이다. 지금 있는 건물은 순종 융희 2년인 1908년에 현 위치인 우두산으로 옮겨 세운 것이다.

 

 

 

누각으로 꾸민 조양루

 

조양루는 정면 3, 측면 2칸의 2층 누각이다.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자 모양을 한 겹처마 팔작지붕이다. 1층은 긴 돌 위에 나무 기둥을 세워 매우 높게 꾸몄으며 간결한 구조를 이루고 있다. 중앙부의 두 기둥은 사각형의 기둥으로 사각형의 주춧돌 위에 세워져, 이층 바닥의 보를 받치게 하였다.

 

후면 좌측에는 계단을 놓아 누각 위로 오를 수 있도록 하였으며, 양 측면은 만룻보에서 초석 상면까지 2단의 띠방을 두고 판장벽으로 막았다. 초익공 형태의 건물로 소박하게 지어진 조양루는 현재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2호로 지정이 되어있다.

 

강원도 전 지역을 다니면서 정자를 찾아보고 있는 나로서는 동해안 바닷길에서 만나는 정자는 그 나름대로의 풍광을 자랑하고 있고, 내륙 깊숙이 자리하고 있는 정자들로 나름대로의 멋을 풍긴다. 조양루도 그 중 한 곳이다. 소박하면서도 단아한 멋을 풍기고 있는 조양루. 전쟁의 상흔을 입었으면서도, 그저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이 고맙기만 하다.

 

 

 

다시 찾아가보고 싶은 조양루

 

춘천시 우두동에 자리하고 있는 조양루는 전형적인 조선시대 누각의 형태를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 현판의 글씨는 민형식이 썼다고 전하는데, 글을 쓴 이의 휘호 등이 남아있지 않아 적확한 것은 알기 어렵다. 민형식은 일제 강점기의 조선 귀족이다.

 

민형식은 여흥 민씨 척족 세력을 대표하는 인물 중 하나이며, 소문난 갑부였던 민영휘에게 정실 자손이 없자 양자로 들어갔다. 1891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뒤 평안도 관찰사를 역임하였고, 1904년 일본을 시찰하기도 했다. 귀국 후 법부와 학부에서 협판을 지냈다. 1907년 학부협판으로 재직할 때 나철이 주모한 을사오적 암살 미수 사건에 연루되기도 했다.

 

 

 

민형식은 이때 나철과 오기호 등에게 거액의 자금을 대어 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사실이 적발되어 유배되었다가 특사로 풀려났다. 조선총독부 중추원의 참의를 지냈고, 1936715일 자신의 아버지였던 민영휘가 받은 자작 작위를 물려받았다. 그러나 신민회 회원으로 활동하고 민족운동에 기부금을 희사하는 양면적인 모습도 보였다.

 

양아버지 민영휘와는 기질이 매우 달라, 어려운 사람 돕기를 좋아하며 의를 숭상하는 인물이었다는 평이 있다. 조양루라는 글씨를 쓴 민영식은 김정희의 필법을 이어받은 글씨에도 능하여, 손꼽히는 서화가로 불렸다고 전한다. 녹음이 욱어질 때 다시 한 번 조양루를 찾아 보리라 마음을 먹는 것은 그 주변의 풍광이 아름답기 때문이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경관이 아름다운 곳에 지은 건물을 일컬어 정자라 표현을 한다. 그러나 엄밀히 따지면 정자의 종류는 정(停)과 누(樓) 그리고 대(臺) 등으로 구분이 된다. 정은 단층으로 지어지고 방을 마련하는 건물들을 흔히 말한다. 이와는 달리 누(樓)란 사방을 시원하게 트고 마루를 한층 높여 자연과 어우러져 쉴 수 있도록 경치 좋은 곳에 지은 건물을 말한다.

 

  
▲ 광한루 보물 제281호 남원시에 있는 호남제일루

  
▲ 오작교 광한루 앞에 인공 호수에 걸려있는 다리

전북 남원시 천거동에 소재한 보물 제281호 광한루가 처음 지어진 것은 조선시대 이름난 황희 정승이 남원에 유배되었을 때 지은 것이다. 처음에는 광통루(廣通樓)라 불렀다고 한다. 왜 하필이면 남원에 유배가 되었을 때 이러한 정자를 지었을까? 그리고 광한루(廣寒樓)라는 이름은 세종 16년(1434) 정인지가 고쳐 세운 뒤 바꾼 이름이다.

 

황희 정승이나 정인지가 광통루나 광한루라는 이름을 붙인 것을 보면 그 안에 속내를 간직하고 있었을 것만 같다. 즉 임금을 그리는 마음을 님을 향한 춘향이의 마음에 비유한 것은 아니었을까?. 지금 있는 건물은 정유재란 때 불에 탄 것을 인조 16년(1638) 다시 지은 것이며, 부속건물은 정조 때 세운 것이다.

 

  
▲ 광한루 호남제일루라는 명성답게 아름다움의 극치를 보인다

광한루 앞에는 연못이 있다. 연못을 면해 남향으로 지어진 광한루는 그 위에 오르기만 해도 춘향이나 이몽룡의 마음을 조금은 읽을 수가 있을 듯하다. 광한루의 규모는 정면 5칸, 측면 4칸이며 지붕은 팔작지붕이다. 누마루 주변에는 난간을 둘렀고 기둥 사이에는 4면 모두 문을 달아 놓았는데, 여름에는 사방이 트이게끔 안쪽으로 걸 수 있도록 해 놓았다.

 

호남제일루라 칭한 광한루에는 정조 때 붙여지은 건물이 있어 멋을 더하고 있다. 누의 동쪽에 있는 정면 2칸, 측면 1칸의 부속건물은 주위로 툇마루와 난간을 둘렀고, 안쪽은 온돌방으로 만들어 놓았다. 뒷면 가운데 칸에 있는 계단은 조선 후기에 만든 것이다.

 

  
▲ 호남제일루 보물인 광한루. 황희정승이 짓고 정인지가 광한루라 호칭했다

  
▲ 광한루 보물인 광한루는 전국의 많은 누정 중애서도 으뜸이다

춘향전의 무대로도 널리 알려진 광한루. 넓은 인공 정원이 주변 경치를 한층 돋우고 있어 한국 누정의 대표가 되는 문화재 중 하나로 손꼽히고 있는 이 광한루를 돌아보다가 괜한 생각을 해본다. 황희 정승(1363(공민왕 12)~1452(문종 2))은 역대 가장 뛰어난 재상으로 손꼽힌다. 조선 초기 국가의 기틀을 마련하는 데 노력한 유능한 정치가일 뿐만 아니라 청백리의 전형으로 알려졌다. 1416년 세자 양녕대군의 폐위에 반대했으며, 1418년에는 세자의 폐위가 결정된 후 태종의 미움을 사서 서인으로 교하에 유배되었다가 곧 남원으로 이배되었다.

 

광한루라는 명칭은 정인지가 붙였다고 했으니 춘향전이라는 소설이 그 뒤에 만들어진 것이란 생각이다. 광한루를 지은 황희 정승이나 광한루라는 이름을 붙인 정인지나 조선시대의 문인이자 정치가다. 이런 광한루에서 이몽룡이라는 걸출한 인물 하나가 나온 것은 당연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정자를 찾아다니다가 보면 괜한 생각에 사로잡혀 시간을 보내고는 한다. 그러면서 혼자 비실거리면 웃는다. 참 '내가 생각해도 내 속을 모르겠다'고.

최신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