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천 청풍문화재단지 안을 돌아보면, 가장 눈에 띄는 전각이 있다. 밑으로 흐르는 물을 굽어보며 아름다운 모습으로 서 있는 정자 한벽루. 정자를 보지 않고도 '한벽루'란 말 한 마디로도, 이 정자의 아름다움을 그려낼 수 있다.

 

고려 충숙왕 4년인 1317년에 처음으로 지어졌으니, 그 역사는 700년 가까이 되었다. 당시 청풍현이 군으로 승격이 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관아의 부속건물이다. 1972년 대홍수로 무너져 내린 것을, 1975년 원래의 양식대로 복원을 하였다. 현재는 보물 제528호로 지정이 되어있다.

 

익랑을 달고 있는 한벽루

 

 

한벽루가 특이한 것은 정자의 오른편에 익랑을 달고 있다는 것이다. 익랑은 대문간에 달아 만든 방을 말한다. 이 계단식 익랑을 통해서 한벽루에 오를 수가 있다. 익랑은 정면 3칸 측면 1칸으로 지어졌다. 익랑 하나만 갖고도 충분한 아름다움을 나타낼 수가 있다. 거기에 한벽루가 더하여 그 아름다움을 배가시켰다.

 

단지 안편을 바라보고 있는 현판

 

강쪽을 바라보고 있는 현판

 

익랑은 뒤로 가면서 한 단계를 높였다. 누마루를 깐 익랑은 난간을 놓고, 한벽루에 오르기 전 주변을 돌아볼 수 있는 여유로움을 맛 볼 수 있는 예비 공간이다. 익랑의 주추는 1단의 주추 위에, 또 다시 밑이 넓고 위가 좁은 마름모꼴의 석축을 사용했다. 주추가 이단으로 되어있는 익랑은 보기가 힘들다. 그 모습 하나만으로도 특이함을 보이는 것이 한벽루의 축조형태다.

 

한벽루는 익랑을 달고 있다. 익랑은 대문간에 덧내어 들인 방이다.

 

익랑의 주추는 특이하다. 일단의 주추 위에 마름모꼴 주추를 더 올렸다.

 

자연적 주초석 위에 서 있는 배부른 기둥

 

한벽루는 자연석으로 쌓은 기단 위에 자연석 주초를 놓았다. 그리고 그 위에 배가 부른 기둥을 세워 운치를 더했다. 누마루를 깐 정자는 정면 4칸, 축면 3칸이다. 멀리서보면 마치 하늘 위에 떠 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밑의 기둥을 지나면서 마루를 올려다보면, 참으로 꼼꼼히도 지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다시 복원을 했다고 하지만 기존의 자재를 그대로 이용한다는 것을 생각하면, 한벽루의 가치를 새삼 느낄 수가 있다. 하나의 전각이 제 가치를 지니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소중히 지켜내는 것이 중요하다. 그 아름다운 정자가 한 번의 아픔을 당했다는 것이 조금은 아쉽다. 만일 홍수로 인해 무너지지만 않았다면, 지금보다도 더 아름다운 한벽루의 모습을 볼 수 있었을 텐데.

 

자연석 주추 위에 배가 부른 기둥을 놓고 그 위에 마루를 놓았다

 

사방이 트인 아름다운 정자

 

한벽루는 모두 3단으로 보인다. 앞에서 바라보면 익랑이 2단으로 차이 있게 만들었으며, 본 정자는 조금 더 높게 난간이 설치가 되어있다. 돌계단을 올라 익랑을 들어서면, 조금 높아진 익랑의 마루가 있다. 그리고 한벽루의 마루는 익랑보다 한 계단 높게 만들어졌다.

 

한벽루에 올라 사방을 둘러본다. 밑으로 흐르는 물줄기의 도도함과, 저 멀리 보이는 산 능선들이 아름답다. 이러한 곳에 서 있는 한벽루는 그 자체만으로도 가히 일경이라 할만하다. 육각형의 기둥들이 나란히 줄을 맞추고 있다. 이곳에서 쉽사리 발길을 떼지 못하는 것은 이 아름다운 주변 경관 때문이다. 아마 우리 선조들도 이곳에 올라 이렇게 눈길을 딴 곳으로 돌리지 못했을 것이다.

 

돌계단을 올라 익랑을 들어서면 계단식으로 된 마루가 있다

 

익랑에서 본 정자로 오르는 마루는 또 다시 계단으로 되어있어 운치를 더한다

 

봄에서 겨울까지 한벽루의 아름다움은 어느 계절에도 빠지지 않는다. 누안에서 바라보는 경치가 일품인 한벽루. 예전 같으면 이곳에 올라 글 한자 남기든지, 아니면 거나하게 취하도록 술잔을 기울였을 것이다. 그런 풍취에 젖어 찬바람을 느끼지 못한다. 그것이 한벽루의 또 다른 흥취려니.

옥 같이 맑은 물이 흐르는 바위 위에 정자를 짓고, 그 이름을 <옥류각>이라 붙였다.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다운 정자가 있다. 대전 대덕구 비래동 산 1-11에 소재한 옥류각은 대전시 유형문화재 제7호로 지정이 되어 있다. 옥류각은 바위 위에 지어진 아름다운 정자다. '옥 같이 맑은 물이 흐른다'는 뜻으로 당호를 붙인 옥류각은 동춘당 송준길(1606∼1672)이 학문을 연구하던 2층 누각 형태의 건물이다.

 

조선조 인조 17년인 1639년에 계곡의 바위 위에 지은 건물이다. 이곳에서 송준길은 우암 송시열, 송애 김경여, 창주 김익희 등 당시의 훌륭한 학자들과 함께 학문을 토론하였다. 옥류각은 전면 3칸, 측면 2칸 규모이며 지붕은 팔작지붕이다. 계곡 사이의 바위를 의지하여 서로 다른 높이의 기둥을 세우고 마루를 짠, 특이한 하부구조를 가지고 있다.

 

 

이것이 바로 자연사랑이란다.

 

자연 그대로의 바위를 살려 다른 높이의 기둥을 세운 정자. 정자를 지은 송준길의 자연사랑을 알 것 같다. 정자는 앞면이 계곡 쪽으로 향하기 때문에 옆면으로 출입하도록 하였으며, 입구 쪽부터 2칸은 마루, 1칸은 온돌방이다. 현재 건물 위쪽에는 현재 비래암이라는 절이 자리하고 있다.

 

대전 고속버스터미널에서 가까운 곳이라, 일부러 여행길에 송준길 선생의 흔적을 찾아 동춘당이며, 이곳저곳을 돌아보고 싶어 여정을 그쪽으로 잡았다. 좁은 시멘트 포장길을 따라 비래사라는 이정표를 따라 들어간다.

 

 

송준길 선생의 마음을 만나러 가다

 

마을을 지나 산으로 오르면서 하산을 하는 사람들에게 물어본다. 절집이 어디쯤 있느냐고. 걸어가기는 좀 멀고, 차를 타고가면 절집 마당까지도 차가 들어간다고 한다. 하지만 어떻게 차를 몰고 절집까지 갈 수가 있으랴. 천천히 산행도 즐길 겸 걸어 올라가기로 했다.

 

딴 곳이라면 몰라도 현장을 돌아보면서 나름대로 지키는 것이 있다. 절집과 정자는 가까운 곳에서부터 걷는 것으로 정한 바가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그 정취를 더 음미하고자 함이다. 절집과 정자는 여느 문화재가 있는 곳과는 다르게 풍광이 뛰어난 곳에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저만큼 건물 한 채가 눈에 들어온다. 앞에는 커다란 고목이 한그루 서 있다. 보기에도 풍치가 있어 보인다. 걸음을 재촉해 가까이 다가갔다. 옥류각이라는 현판이 보인다. 찬찬히 주변을 돌면서 살펴본다. 어찌 이리 흐르는 계곡 위에 누각을 지었을까? 자연 그대로를 살려지은 정자가 더욱 멋이 있다고 느낀다.

 

주인을 그대로 닮은 옥류각

 

방 밑으로 흐르는 계곡물은 맑기만 하다. 지금은 비록 퇴락한 주인 잃은 누각이지만, 한 때는 이곳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수많은 이야기로 밤을 지새웠을까? 선생은 이 옥류각을 짓고 사람들에게 세상을 멀리하라고 가르쳤다. 그것은 험한 세상에서 스스로를 지키기 위한 자구책이었는지도 모른다.

 

 

오늘 이 계곡 물 위에 지어놓은 누각 하나가 참으로 많은 것을 느끼게 해준다. 그리고 송준길 선생의 앞을 내다보고, 후손들에게 당부를 하고 싶은 마음을 느끼게 해준다. 그래서 우리 문화재를 찾는 일을 계속하는 것도, 그 안에 많은 깨달음이 있기 때문이다. 세상이 어떻게 변하든지, 그 안에는 변하지 않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옥류각 밑으로 흐르는 물소리가 유난히 청아하게 들리는 것도, 오늘 또 작은 깨달음 하나를 얻었기 때문인가 보다.

 

벌써 옥류각을 다녀온 지가 꽤나 많은 시간이 흘렀다. 지금쯤은 어떤 모습으로 나그네를 반길 것인지. 시간을 내어 옥류각의 녹음을 보고 와야겠다.

충청북도 괴산군 문광면 광덕리 327에 소재한, 충청북도 기념물 제7호인 칠충사. 순창 조씨 가문에서 배출된 충신 가운데 『괴산삼강록(槐山三綱錄)』에 등재되어 있는 조신, 조종, 조복, 조반, 조덕공, 조덕용, 조은 등 7명의 충절인을 뽑아 그들의 행적을 기리기 위하여 세워진 사당이다.

 

괴산읍에서 문광면 방향으로 길을 가다가 보면, 삼거리가 나오고 그 앞에는 문광초등학교가 있어 찾기가 수월하다. 삼거리 이정표에는 ‘문광삼거리’라고 표시가 되어있다. 도로변에서도 눈에 띠는 곳이라, 초행길이라고 해도 어렵지 않게 찾을 수가 있다.

 

 

충절의 상징, 칠충각과 칠충사

 

칠충사는 순창 조씨 문중의 7명의 충신들을 기리기 위해 세운 사당이다. 이 사당은 목조기와집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집이다. 1975년에 순창 조씨의 문중에서 건립하였다. 사당 아래에는 1973년에 건립한 정면 7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 목조기와집인 순창조문(淳昌趙門) 칠충각이 자리하고 있다.

 

칠충사로 오르기 전에 먼저 만나게 되는 칠충각은 평지에 길게 7칸으로 지었는데, 전각 안에는 각각 7명의 정려 현판이 자리하고 있다. 현판에는 「忠節 高麗國子進士麗亡不事二君大明洪武二十五年壬申七月避世遯于槐山松坪隱逸 趙紳 之閭」, 「忠臣 精忠出氣布義敵愾參原從功臣行通政大夫中樞府僉知出東 萊別中營穩城都護府使 趙 悰 之閭」등의 문구가 보인다.

 

 

순창 조씨 7명의 충절인의 충신정려가 걸려있는 칠충각과 정려(아래)

 

5월이라고는 해도 올해는 날이 일찍 더위가 찾아와서인가. 여기저기 잡풀이 널려있고, 그 한편에는 제초제를 뿌린 듯한 흔적도 보인다. 벌써 안내판을 가릴 정더로 자란 풀들이니, 곧 안내판을 가릴 듯하다. 조금은 바쁘다고 하지만, 큰길가에 서 있는 문화재이니 조금 더 신경을 써 주었으면 좋으련만.

 

난세를 피한다는 정자 ‘피세정(避世亭)’

 

칠충사로 들어가는 홍살문 옆으로 작은 안내판 하나가 산으로 화살표가 나 있다. ‘피세정’으로 오르는 길이라고 한다. 이곳은 이번 답사가 세 번째이다. 그동안 달라진 것은 없을까? 궁금하여 천천히 산길을 따라 올라본다. 그리 높지 않은 곳에 자리했지만, 한 낮에 오르다가보면 조금은 땀방울이 맺히기도 하는 곳이다.

 

들어갈 수 없어 밖에서 촬영한 칠충사. 마당에 잡풀이 가득하다. 관리를 좀 잘했으면

누군가 오르는 길의 풀을 잘라놓아 발을 감지는 않는다. 천천히 오르는 숲은, 백년 이상이 되었을 것 같은 소나무들이 서 있다. 숲에서만 맡을 수 있는 숲내가 코를 간질인다. 산에 오를 때는 조금 힘이 들기도 하지만, 이렇게 숲속 냄새가 좋아 산을 오른다.

 

원래 피세정이란 정자 이름은 ‘피세 조신’의 호를 따서 붙인 이름이다. 피세 조신은 고려 때의 충신이다. 1392년 고려가 망하자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다며, 송평으로 낙향하여 오마산 깊은 골에 ‘피세정’이란 정자를 지었다. 그야말로 세상을 등진 정자라는 뜻이다.

 

 

좁은 산으로 오르는 오솔길과 그 위에 자리하고 있는 피세정(아래)

 

피세정은 한 때 터만 남기도 하였지만, 1506년 중종반정 이후 단경왕후가 죄도 없이 폐비가 되고 나라에 간신배들이 들끓자, 14세손인 송제 조세구가 다시 피세정 터에 정자를 세우고, 이름을 피세정이라 불렀다. 나라에서는 성격이 곧은 조세구에게 군자감 봉사를 제수하였으나, 부정한 조정에서는 벼슬을 하지 않겠다고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았다.

 

소박한 정자, 주인의 심성을 그대로 담아내

 

구불거리는 산길을 따라 오르다가 보면, 정자 하나가 서 있다. 피세정이다. 한 눈에 보아도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던 정자와는 다르다. 그저 꾸밈새 하나 없이 수수한 정자를 만나게 된다. 이 정자에 얽힌 의미를 모른다고 한다면, 신경조차 쓰지 않고 뒤돌아설만한 그런 정자이다.

 

 

 

피세정 현판과 정자 안에 가득한 게판들(가운데와 아래) 

 

그러나 이 정자의 주인들은 모두 난세가 싫어 피한 사람들이다. 굳이 세상 사람들과 같이 화려한 정자를 지어야 할 이유가 없다. 정자 위에 올라 사방을 돌아본다. 저 밑으로 보은으로 나가는 길이 보인다. 넓은 들판이 보이는 이곳, 피세정에서 정자의 주인들은 아마도 또 다른 벗을 기다리고 있었을 것이다.

 

정자 안에 걸린 현판들이 그런 좋은 벗들이 있었음을 알려준다. 지금도 외진 피세정이다. 그 당시에는 이곳이 얼마나 외진 곳이었을까? 이곳까지 찾아와 글을 남겨줄 수 있는 좋은 벗들을 주변에 둔 주인들이다. 주변으로 자라나기 시작한 잡초들 틈에서, 다듬지 않아도 고결한 품성을 느낄 수 있는 피세정이다.

 

피세정에서 내려다 본 들판. 보은으로 나가는 길이 보인다

 

사람들이 이곳을 찾아 신을 신고 마루에 올라갔는가 보다. 더럽혀진 마루에 털석 주저앉아 숨을 고른다. 노송 가지에서 ‘푸드덕’ 새 한 마리가 날아간다. 갑자기 찾아든 나그네가 반갑지 않은 모양이다. 피세정을 뒤로하면서 생각을 한다. 그래도 이 정자의 주인들은 행복한 사람들이라고. 그나마 우리는 이런 난세를 피할 장소조차 없음을 탄한다.

충북 괴산군 괴산읍 제월리, 괴강이 흐르는 곳에 바위 암벽이 솟아오른 곳이 있다. 조선 시대의 경승지인 제월대에는 조선조 선조 때의 유근이 충청도관찰사로 있을 때, 이곳의 아름다운 풍광을 보고 정자와 고산정사를 지었다. 선조 29년인 1596년에 만송정(萬松亭)이라는 정자를 지어, 광해군 때에는 이곳으로 낙향하여 은거를 하였다는 것.

숙종조에 편찬된 <괴산군읍지>에는 '孤山精舍 在君東八里 乙亥年 位火燒盡'이라고 적고 있다. 즉 '괴산군의 동쪽 8리에 있는 고산정사가 을해 년에 불로 인해 소실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후의 기록에 고산정사가 나타나지 않고 있는 점이나, 만송정이 불타 버렸다는 기록 등이 없는 것으로 보아, 만송정을 '고산정(孤山亭)'이라 고쳐 부른 것으로 보인다.



괴강을 내려다보고 있는 고산정

고산정을 찾아 길을 나섰다. 중부내륙고속도로를 타고 괴산IC를 벗어나 괴산읍을 향해 가다가 보면 제월리가 나온다. 그곳서 괴강을 굽어보고 있는 고산정을 찾기란 그리 어렵지가 않다. 고산정을 오르는 산 길 앞에는 주차장이 있고, 그 한편에 제월대의 내력을 적은 석비가 서 있다. 눈이 덮인 산길을 천천히 걸어 올라간다.

눈이 쌓인 계단을 올라 괴산정 가까이 가니, 2월의 찬바람이 옷깃을 여미게 한다. 정자에 오르면 많은 현판들이 빼곡히 걸려있다. 정면 두 칸, 측면 두 칸으로 지어진 고산정은 사방을 개방하고 낮은 난간을 둘렀다. 기단위에 주추는 원형으로 다듬어 기둥을 받쳤는데, 툇돌 하나가 큼지막하게 놓여있다.



위에 오르니 이원이 썼다는 고산정이라는 현판과, 명나라 사신 주지번이 선조 39년인 1606년에 쓴 '湖山勝集'이라는 편액이 걸려있다. 강과 산이 뛰어나게 아름답다는 뜻이다. 한편에는 명나라 사신 웅화가 광해군 1년인 1609년에 쓴 '고산정사기'도 보인다.

400년 역사의 고산정의 주인이 되어보다

고산정에서 아래를 내려다본다. 밑을 흐르는 괴강이 아름답다. 봄철이 되면 저 물속을 다니며 올갱이를 잡는 아낙네들을 그려본다. 그 또한 아름다운 정경이 아닐까? 양편으로는 괴강이 보이고, 반대편으로는 참나무와 소나무들이 울창하다. 편액의 글씨를 보아도 이 고산정의 역사는 이미 400년이 지났다는 이야기다.




이곳에서 풍류를 즐겼을 많은 사람들. 편액과 기문을 쓴 사신 주지번과 웅화도, 그리고 이 정자를 지은 유근도 모두 이 경계의 주인이다. 그리고 그 후에 이곳을 찾아 든 많은 시인묵객들도 모두 주인이다. 지금 이 자리에 선 나 역시, 오늘은 이곳의 주인이다. 이런 자연의 아름다움을 만끽할 수 있어 좋다는 것은 인간 누구나가 느끼는 생각이 아닐는지. 오늘 난 고산정의 주인이 되어 말없이 흐르는 괴강을 내려다본다.

'이 곳의 참나무들이 참 이상해요'

한참을 괴강을 굽어보며 혼자 상상 속으로 빠져 절경을 느끼고 있는데, 답사에 동행을 한 아우 녀석이 흥을 깬다. 주변에 선 참나무들이 아상하다는 것이다. 무슨 소리냐고 물었더니, 고산정 주변에 있는 참나무들이 모두 구멍이 뚫려있단 이야기다. 그 말에 주변의 참나무들을 돌아보았다. 그런데 정말로 모든 나무들이 한 곳씩 깊게 파인 홈이 있다. 이것도 특별한 사유가 있지나 않을까?



아마 이 나무들이 여자들인가 보다. 이 제월대와 고산정의 뛰어난 경치에 반한 수많은 남정네들이 찾아왔으니, 그 남정네들을 사랑한 근동 여인들의 마음이 이리 되지나 않았을까? 괜한 말을 해놓고도 멋쩍어 키득거리고 웃는다.

주차장으로 내려와 괴강 쪽으로 발길을 돌린다. 낙엽 위에 쌓인 눈이 미끄럽다. 강 쪽으로 내려가 제월대를 바라보니, 위쪽 까마득하게 고산정이 보인다. 위에서 괴강을 내려다보아도 장관이요, 아래서 제월대를 바라보아도 장관이다. 그래서 이곳에 고산정을 짓고, 시심을 일깨운 것이 아닐까? 흰 눈이 쌓인 겨울 경치는 또 다른 정자의 풍취를 느끼게 만든다.

논산시 노성면 병사리 95-1번지에 소재한 종학당(宗學堂)은 충남 유형문화재 제152호이다. 윤순거가 파평윤씨 문중의 자녀들을 위하여 인조 21년인 1627년에 종학당을 짓고, 이듬해인 1628년에는 숙사인 백록당과, 시를 쓰고 난세를 논할 수 있는 정자인 정수루(淨水樓)를 지었다.

계단이 없는 누각 정수루

정수루는 이층으로 지어진 누각이다. 중층 누각의 경우 이층으로 오를 수 있는 계단을 이층 마루 한편을 열어 내는 것이 일반적인 형태이다. 하지만 정수루는 이층으로 오르는 계단이 없다. 그 대신 정수루 뒤편에 있는 종학당의 숙사인 백록당으로 오르는 비스듬한 축대를 이용해, 직접 정수루로 오를 수 있도록 하였다. 정수루는 정면 6칸의 팔작집이다. 그 중 정수루를 보면서 우측 한 칸 뒤편은 꺾이어 ㄱ 자형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 꺾인 부분을 통해 누각으로 들어올 수가 있다.


정수루의 앞에는 연못을 파고, 잘 다듬은 장대석으로 축대를 쌓고 그 위에 누정을 지었다. 기둥 밑을 받치는 주초는 자연석을 그대로 이용해 자연의 미를 벗어나지 않고 있다. 누마루를 받치는 기둥은 보수를 한 자국이 여기저기 있다. 오랜 세월 낡고 퇴락한 것을 보수를 한 것이다. 기둥은 둥근기둥을 사용했으며, 전면에는 일곱 개의 기둥을 배치하였다.

누정에 오르면 가슴이 트여



ㄱ자 형으로 꺾인 입구를 통해 누정으로 오르면, 앞으로 펼쳐지는 전망이 마치 한 폭의 그림 같다. 좌측 밑으로는 종학당의 뒤편이 보인다. 배롱나무가 꽃이 필 때쯤이면 더 아름다운 모습을 드러낼 것만 같다. 그 앞으로 펼쳐진 병사저수지 또한 정수루의 멋을 더하고 있다. 어찌 저 앞에 이런 저수지가 생길 것을 미리 안 것일까? 예전 조상님들의 땅 이름을 짓는 선견지명에는 그저 놀라움이 더할 뿐이다.

길게 여섯 칸으로 지어진 누정 정수루. 삼면은 모두 개방을 하고, 입구 맞은편에는 판자벽으로 마감을 하고 문을 내었다. 아마 바람이 저곳으로 들어오기 때문인가 보다. 다 열면 허전하기라도 했던 것일까? 아니면 그 방향을 보는 것이 조금은 탁해보였을까? 굳이 한곳만 판자벽으로 마감한 이유를 생각해 보지만, 쉽게 해답을 얻지 못한다.



윤순거 선생은 이곳에서 얼마나 많은 시심을 불러 일깨운 것일까? 난간을 × 자형으로 둘러 멋을 더한 정수루 마루에 털썩 주저앉아 본다. 어디 한 곳 아름답지 않은 곳이 없다. 그리고 주변의 바라다 보이는 곳 모두가 그대로 그림이 된다. 그렇게 보이는 주변 정경에 막혔던 가슴이 탁 트인다. 그래서 이곳에 누정을 짓고, 그 누정에 올라 오랜 시간을 보냈던 것일까?




난세가 싫어지면 오르고 싶은 누정 정수루. 그 위에 올라 정자 이름 그대로, 맑은 물 같이 깨끗한 마음을 만들 수가 있을까? 정수루 위에 올라 멀리 병사저수지를 내려다보면서 심호흡을 해본다. 초봄의 조금은 찬바람과 함께 아직 영글지 않은 봄내음이 함께 맡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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