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자를 찾아다니다가 보면, 참 있어야 할 곳에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어찌 우리 선대들은 그렇게 자연을 잘 아셨단 말인가?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이 시대를 사는 우리들은 너무나도 자연에 대해 무지하다는 생각이다.  

 

전북 무주에서 19번 국도를 타고 장수방향으로 가다가 만난 정자. 장수 IC 진입로 1km 전방쯤에 정자가 서 있다. 얼핏 그냥 지나치다가 발견을 했기에, 다시 차를 돌려야만 했다. 도로변에 있는 작은 언덕에 올라앉은 정자. 계단을 오르니 밑에서는 느끼지 못한 바람이 불어댄다. 정자 이름이 풍욕정이다. 바람으로 목욕을 하는 정자라는 뜻이다.

 


  
호남의 마지막 선비라고 칭하는 서예가 강암 송성용 선생의 글씨다.

 

장수군 계남면 호덕리. 장계면과 계남면을 잇는 곳이다. 이 정자는 장계와 계남면의 유지 15명이 친목을 도모하고, 시와 학문을 강론하기 위해 1962년 건립했다고 한다. 지어진지는 얼마 되지 않았으나 정자 안에는 10여 개가 훨씬 넘는 게판이 걸려있다. 풍욕정이란 현판의 글씨는 강암 송성용 선생이 썼다고 한다.

 

강암(剛菴) 송성용(宋成鏞:1913~1999)선생은 20세기 호남을 대표하는 서예가이다. 겉과 속이 모두 선비라는 말이 누구보다도 잘 어울리는 대쪽이라는 표현이, 강암 선생을 평하는 가장 좋은 말이라고 한다. 그러한 분이 풍욕정의 현판을 썼다고 하니, 선생도 이 풍욕정에 대한 마음이 남다른 것이었나 보다.

 

  
정자 안에 걸린 게판. 15개 정도의 게판이 걸려있었다.

정자 안을 가득 메운 게판들. 아마 게원들이 쓴 글인듯 했다

 

계남면에는 예전부터 반상을 가리는 유교사상을 가진 어른들이 많았다고 한다. 그런 분위기가 이 정자를 짓게 했을 것이다. 친목도모와 학문을 강론하기 위한 정자로 지었다는 것만 보아도, 그러한 마음을 읽을 수가 있다. 정자에 오르면 밑으로 흐르는 내가 한 눈에 내려다  보인다. 장안산과 싸리재에서 발원한 유천이 계남들의 복판을 가로 지른다. 멀리 뻗은 도로가 시원한 바람을 일구어 오는 길목으로 자리를 잡았나보다.

 

금계포란형의 명당이라고 일컫는 계남면의 도로변에 우뚝 솟은 둔덕에 올라앉은 풍욕정이, 그러한 명당의 정점인지도 모르겠다. 정자 앞에는 15명의 계원명단이 적힌 비가 서 있다. 그리고 정자 안을 가득 채운 게판들이 걸려있어, 풍욕정이 오래 된 정자인양 보인다.

 

정자가 제 기능을 갖기 위해서는 많은 사람들이 찾아야 한다. 그리고 바람이 이는 정자에 올라, 그 정자를 사랑해야만 한다. 수도 없이 퇴락해져 가는 정자들을 볼 때마다 마음이 아팠다. 그런 시기에 만난 풍욕정은 정자에 대한 희망이었다. 예전에는 양반들의 상징으로 정자가 보였다. 하지만 단지 양반들만이 정자를 지었을까? 논두렁에 떡하니 앉아있는 모정은 바로 민초들의 정자였다. 산간벽지에 작은 통나무로 지은 정자는 산사람들의 정자였다. 여러 형태로 만들어지고 퇴락했지만, 우리 민족의 정자는 계층에 관계없이 다양하게 표현이 되어왔다. 다만 양반가의 정자들이 그 기능을 다하고, 보존이 잘 되었다는 것뿐이다.  

 


  
해가 설핏 서산에 걸렸을 때 찾은 정자. 마치 한 폭의 수묵화 같았다

 

바람이 부는 날, 바람결에 찾아 오른 풍욕정. 그저 어디 하나 막힘이 없이 사방이 탁 트인 곳에 자리를 하고 있다. 나뭇잎이 다 떨어진 키 큰 나무 한 그루가 곁에 지키고 있었지만, 찬바람이 있어 좋은 정자였다.

전북 완주군 고산면 삼기리. 이곳에는 정면 두 칸, 측면 두 칸의 팔작지붕을 얹은 작은 정자 하나거 서 있다. 정자의 이름은 ‘삼기정’이라 하는데, 삼기정은 당시 고산현감 최득지가 짓고, 삼기정이라는 정자의 이름은 지은 이는 하연으로 전해진다. 최득지는 세종 21년인 1439년에 고산현감이 되었다. 당시 정몽주의 문인이었던 하연이 전라도관찰사가 되어 관내를 순시하는 도중, 고산읍에 들렀다가 소풍을 나간 곳이 삼기리였다.

 

하연은 이곳이 앞으로 흐르는 만경강과 기암, 그리고 송림이 우거진 것을 보고 세 가지가 조화를 이루었다고 하여 ‘삼기(三奇)’ 라 송판에 써주었다. 당시 고산현감 최득지가 정자를 세우고 하연에게서 기문을 받아 정자에 거니 이것이 삼기정이다. 지금의 삼기리라는 명칭도 이 정자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율헌 유허지에 서 있는 삼기정

 

삼기정을 축조한 최득지(고려 우왕 5년, 1379~ 단종3년, 1455년)는 본관은 전주, 호는 율헌이다. 태종 13년인 1413년에 장흥교수를 시작으로 관직에 나아가, 환갑을 맞이하던 세종21년인 1439년에 고산현감이 되었다.

 

현 삼기정 건물의 상량에는 '檀君紀元四千三百二十三年庚午重建世宗己未創建'이라는 글귀가 적혀 있다. 고산현감 최득지가 삼기정을 축조한 것은 세종21년인 1439년이고, 그 뒤 오랜 세월 퇴락과 중수를 거듭해 오다 현재의 건물은 1990년에 다시 중건하였다. 처음에 이 삼기정을 세운지 벌써 520년이나 지났다.

 

삼기정은 정면과 측면 모두 두 칸씩이다. 정자 안에는 하연의 ‘삼기정기문’이 걸려있다. 그 내용을 보면, 당시 이곳의 풍광에 얼마나 빠졌는가를 가늠할 수 있다.

 

 

 

「고산현 동쪽 오리쯤에 자그마한 언덕이 있으니 절벽이 깎아질렀고 그 아래에는 긴 내가 맑게 굽어 흐르고 위에는 노송이 울창하여 푸르렀다. 그 서쪽에는 평평한 들이 펼쳐 있다. 임인년(1422년) 봄에 나는 고산읍에 간 일이 있어 이 언덕에 오르게 되었다. 연하 초목이 모두 아름답게 내 눈앞에 깔려 있는데 수석과 송림이 더욱 기이하게 보였다. 이에 삼기라 이름 하여 깎은 나무에 글씨를 써주었더니 이에 현감 최득지가 여기에 정자를 짓고 나에게 기문을 청하니, 내가 처음 이름을 지어 준 것으로써 그러한 뜻에서 사양할 수 없이 되었다.

 

생각하건대 사람의 마음은 물건을 보고 감동되는 것으로 눈을 달리하여 보게 된 그 느낌은 더욱 간절했다. 맑은 물을 보게 되니 나의 천부의 본성을 더욱 맑게 하고 바위가 엄엄한 것을 보니 뽑아낼 수 없는 확고한 신념을 더욱 굳게 하며 소나무의 변하지 않는 푸른 벌을 보게 되니 곧고 굳은 절개 뽑아낼 수 없는 확고한 신념을 더욱 굳게 하며 소나무의 변하지 않는 푸른 벌을 보게 되니 곧고 굳은 절개를 더욱 높게 하여 이 언덕의 세 가지 물건이야말로 어찌 경치가 아름답거나 찌는 더위에 재미있게 논다는 것 뿐이리요.

 

내가 다른 사람과 소견을 달리하고 있는 것은 뒷날에 선비들이 이 언덕에 오르면 느끼고 뜻을 두게 될 것으로 생각 할진대 마음을 삼가 하고 뜻을 길러내는 기회가 족히 되어야 할지라. 또한 목욕을 하고 풍월을 하는 행락도 있을 것으로 전날에 내가 이름을 지은 뜻이 거의 같을지다.」

 

 

 

옛 선조의 마음을 읽어보다

 

정자에 걸려있는 삼기정이란 편액은 강암 송성용이 썼다고 한다. 작은 정자에 올라 주변을 들러본다. 옛날 선조가 느낀 삼기는 느낄 수가 없지만, 그래도 이곳의 풍광은 아직 옛 모습이 여기저기 남아있다. 정자 뒤편으로는 바위가 있어, 아마도 과거에는 이곳이 꽤 큰 바위 등이 있었을 것이란 생각이다.

 

 

 

크지 않은 정자 마루에 앉아 선조의 숨결을 느껴본다. 아주 오래 전 내 선대인 하연 할아버지도 이곳에서 이렇게 호흡을 했을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하다보면 역사는 그렇게 흘러가지만, 이다음에 또 누군가 나의 후대도 우연찮은 기회에, 이렇게 나를 기억할 수도 것이란 생각이다. 그래서 옛 말씀에 ‘후대에게 부끄럽지 않은 조상이 되라’고 하신 것인지. 오늘 또 삼기정이란 작은 정자에서 또 하나의 공부를 한다.


 

하연(1376∼1453)

선조 하연은 경상도 진주(지금의 산청)에서 태어났다. 고려왕조 최후의 충신이었던 정몽주(1337∼1392)로부터 학문을 사사한 하연은, 조선 태조 때인 1396년 과거시험 병과 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올랐다. 그 뒤 많은 요직을 거친 하연은 태종 이방원 시절에는 ‘사헌부 간관(諫官)’으로 일하면서, 항상 흐트러짐이 없이 의연한 태도를 보여 임금이 직접 손을 잡고 치하할 정도로 인정받은 관료였다.

 

1423년 대사헌, 1425년 경상도관찰사, 1431년에는 예문관 대제학을 거쳐 1436년 예조와 이조 판서를 거쳤다. 70세인 1445년 우의정에 제수되었으며, 영의정 황희(1363∼1452), 좌의정 신개(1374∼1446)와 함께 ‘조선의 빛나는 삼정승 시대’를 연 주역이기도 했다. 당시 세자 섭정을 하고 있던 문종의 스승으로도 활동한 하연은, 좌의정을 거쳐 세종 39년인 1449년에 영의정에 올랐다.



너른바희 우히

松竹을 헤혀고

亭子를 언쳐시니

구름탄 청학이

천리를 가리라

두나래 버렷난듯

玉泉山 龍泉山

나린 믈리

亭子압 너븐들히

올올이 펴진드시

넙거든 기디마나

푸르거든 희디마나

 


전라남도 담양군 봉산면 제월리 대나무 숲 위에 자리하고 있는, 면앙정 앞에 서 있는 '면앙정 가비(俛仰亭 歌碑)'에 적힌 글이다. 면앙정은 전라남도 기념물 제6호로 지정이 되어 있으며, 도로변에서 조금 위로 오르는 대숲을 지나 길 위에 자리하고 있다.


강호제현이 다 모여들다


면앙정은 송순(1493~1582)이 관직을 그만두고 물러난 후, 고향으로 내려와 지은 정자이다. 이곳에 정자를 지은 송순은 퇴계 이황을 비롯하여, 강호제현들과 나라의 일을 논하고 학문을 논했다. 이 면앙정에 모인 문인들을 '면앙정가단'이라고 불렀다고 하는데, 그렇게 부른 것도 이곳에 수많은 시인묵객들이 모여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송순이 관직에 나아가 있는 50년 동안에는 4대 사화가 일어나는 등 혼란한 시기였다. 그러나 단 1년의 유배생활을 한 것을 보면, 그의 인품이 뛰어나고 사람들과 교류가 좋았음을 의미한다.


'가단(歌壇)'이란 노래를 부르는 장소를 말한다. 가단은 가대(歌臺), 가소(歌所), 가당(歌堂) 등의 명칭으로도 불렀는데, 이는 송순이 중심이 되는 면앙정의 '면앙정가단'과 정철이 중심이 되는 '성산가단' 등이 유명하다. 이 가단이라는 것은 문인들이 상호교류를 하면서 시가활동을 하는 특수집단을 말하는 것이다.


면앙정이 더 유명한 것은 바로 이곳에서 배출해 낸 많은 인물들 때문이다. 송강 정철을 비롯하여 기대승, 고경명, 임제 등이 송순이 이곳에 정자를 지은 후, 이곳을 통해 이름을 떨쳤기 때문이다.

 

 


평범한 가운데 품위를 지니다


면앙정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으로 지어진 정자이다. 전면과 좌우에 누마루를 깔고 중앙에는 한 칸의 방을 마련하였다. 추녀의 각 귀퉁이에는 길게 삐쳐 나온 지붕처마를 받치기 위한 활주가 받치고 있다. 그저 화려하지도 않고, 딴 정자에 비해 뛰어난 절경을 자랑하지도 않는다.


현재의 건물은 송순이 지은 뒤 여러 차례 보수를 한 것이며, 1979년과 2004년에 지붕을 새로 잇고 주변 정리를 하였다고 한다. 이렇게 평범함 면앙정이 한국의 고전 문학사에 커다란 의미를 두는 것은, 이곳을 중심으로 활동한 면앙정가단 때문일 것이다. 면앙정가단의 장소답게 면앙정 여기저기 걸린 각종 글을 적은 게판들이 수없이 많다. 아마 전국의 어느 정자에도 이렇듯 많은 글이 걸린 곳은 보기가 힘들 것이다.

 

 

 


바람이 지나는 자리에 덩그러니 앉아있는 면앙정. 지금은 찾는 이조차 없는 쓸쓸한 날을 보내고 있지만, 한 때 이곳은 수많은 강호를 넘나든 시인묵객들의 각축장이 아니었을까? 찜통이라고 말하는 깊은 여름의 뙤약볕을 받고 찾아간 면앙정에서 옛 소리를 듣는다.

정자 앞을 흐르는 물이 차고 희다고 해서 붙혀진 이름 한벽당. 1404년 처음으로 지어졌으니 600년 가까이 되었다. 한벽당은 호남의 정자 중에서도 수일경이라 하는 곳이다. 앞으로는 작은 물고기가 노니는 맑은 물이 흐른다. 사시사철 물이 얼마나 시원하고 맑았기에 한벽당이라 불렀을까?

 

전주천 맑은 물을 내려다보고 있는 한벽당. 수많은 시인 묵객들이 들려 사시사철 그 이름다움에 취했던 곳이라고 한다. 한벽당은 승암산 기슭 절벽을 깎아내고 새웠다. 조선조 건국시 개국공신인 월당 최담이 태종 4년에 처음으로 건립을 했다고 하니, 벌써 600년 가까이 오랜 세월을 그 자리에 서 있는 것이다.

 

 

 

전주천을 바라보는 정자

 

한벽당은 운치가 있다. 물빛 고운 전주천에서 잡히는 물고기를 이용해 끓여내는 오모가리 매운탕 한 그릇을 들고 한벽당 밑으로 나가면 한 여름이 훌쩍 지난다. 까마득한 지난 날 아마 우리의 선인들도 그런 맛에 취해서 한벽당을 찾았던 것은 아니었을까?

 

한벽당 곁에 붙어지은 요월대가 있어 낮에는 한벽당에서 밤이면 떠오르는 달을 맞이하는 요월대에서 즐겼을 것이다. 어찌 짧은 시 한수 나오지 않을 것인가? 이곳을 찾아들었던 사람들도 그런 절경에 취해 거나하게 탁주 몇 잔을 마셨을 것이다.

 

 

 

주변이 모두 절경과 볼거리

 

한벽당 주변에는 볼거리가 많다. 오랜 세월 묵묵히 한 자리를 지키고 있는 전주한옥마을을 비롯하여 커다란 고목이 된 은행나무들이 경내에 즐비한 전주향교 등이 있다. 요즈음에는 주변에 전주전통문화센터에서 많은 공연을 하기 때문에 즐기고 먹고 볼거리가 풍부한 곳이다. 명소란 예전이나 지금이나 그렇게 전해지는 것인가 보다.

 

한벽당은 사시사철 아름답다. 봄이 되면 건너다보이는 산에 산벚꽃이 피어나는 모습이 아름답다. 여름이면 정자 앞을 흐르는 차디찬 물에 발을 담그고 있으면 더위가 가신다. 정자 주변에 있는 고목이 만들어내는 그늘은 더 더욱 시원함을 더한다. 가을이면 전주천을 덮는 억새가 하늘거린다. 찬 겨울이라도 정자는 언제나 운치가 있다. 경치만 놓고 가늠하자면 가히 선계라 할 만하다.

 

 

 

시인묵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던 곳 한벽당. 맑은 물빛이 고운 정자다. 한벽당 가까운 곳에는 월당 최담의 비가 서 있어, 이곳이 유서깊은 정자임을 알려주고 있다. 멋스럽지만 난해하지 않고, 아름답지만 화려하지 않은 정자. 물빛 고운 한벽당은 그렇게 속으로 멋스러움을 감추고 있는 정자이다

전남 담양군 고서면 원강리 274에 소재한 송강정은, 송강 정철(1536∼1593)이 조정에서 물러난 후 4년 동안 지내던 정자다. 고서면 원강리 유신교차로에서 봉산초등학교 양지분교 쪽으로 조금 가다가보면 좌측으로 주차장이 보이고, 숲 위쪽에 자리를 한 송강정이 보인다. 이 정자는 원래는 '죽록정(竹綠亭)'이라고 불렀다고 하는데, 송강 정철이 지냈다 하여 송강의 호를 따서 송강정이라고 불렀다는 것이다.

 

송강정은 1955년에 고쳐지었는데, 송강 정철이 선조 17년인 1584년 대사헌을 지내다가, 1585년 양사의 논핵이 있자 스스로 퇴임하여 약 4년간 고향인 창평에서 은거하였다. 송강정은 정철이 이곳에 내려와 지었다고 하니, 처음 송강정을 지은 것은 벌써 450년이라는 세월이 지난 셈이다.

 

 

소나무 향이 짙은 송강정

 

계단을 따라 오르니 솔향이 코를 간질인다. 천천히 뒷짐을 지고 걸어 올라본다. 숨을 들이키자 폐부 한 가득 소나무의 향이 가득 차는 듯하다. 이름 모를 새 한 마리가 인기척에 놀란 듯 날아간다. 계단 위에 자리한 정자는 그렇게 화려하지 않은 평범한 모습이다. 그저 어느 고졸한 학자 한 사람이 이곳에서 쉬어갈 만한 그러한 곳이다.

 

그러나 이곳이 그 유명한 <사미인곡>이 지어진 것이라는데 대해, 다신 한번 정자를 훑어본다. 조선 중기의 학자이자 정치가인 정철은 명종 16년인 1561년에, 27세의 나이로 과거에 급제하였다. 그 뒤로 많은 벼슬을 지내다가 정권다툼으로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에 내려와 글을 지으며 조용히 지냈다.

 

 

 

그는 고향인 창평에 내려와 머물면서 사미인곡, 속미인곡, 성산별곡 등을 지어냈다. <사미인곡>은 조정에서 물러난 정철이, 왕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여인이 남편과 이별하여 사모하는 마음에 빗대어 표현한 노래라고 한다. 이곳 송강정에서 정철은 사미인곡과 속미인곡을 지었다.

 

고졸한 송강정은 숲을 해하지 않아

 

송강정은 정면 3칸에 측면 3칸의 규모로 꾸며졌다. 지붕은 팔작지붕이며, 앞면에는 '송강정'이라는 현판을 걸었고, 측면에는 '죽록정'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아마 송강정이라고 하기 이전에 죽록정이라고 했다고 하니, 그 이름을 잊고 싶지가 않았는가 보다. 주추를 보니 동그렇게 다듬은 돌 위를 평평하게 만들고 기둥을 올렸다. 예전에도 이랬을까? 그저 모든 것이 궁금하기만 하다.

 

 

 

정자의 정면에서 보면 중앙 뒤편으로 한 칸의 중재실을 달아냈다. 아마 이곳에서 4년이란 세월을 묵으면서, 송강은 사미인곡을 집필 한 것이 아니었을까? 마루에 걸터앉아 본다. 앞으로 난 길을 달리는 차들의 소음이 들린다. 아마 예전에는 저곳으로 소를 끈 농부가 지나고, 급하게 말을 몰아 달리던 파발이 지나치지는 않았을까? 송강은 그런 모습을 보면서 임금을 더 그리워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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