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창이 밝았느냐 노고지리 우지진다
소치는 아해놈은 상기아니 일었느냐
재너머 사래 긴밧츨 언제 갈려 하나니

학교를 다니면서 한번쯤은 암기를 한 기억들도 있을 남구만의 시 ‘동창이 밝았느냐’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약천 남구만선생은 조선 후기(1629(인조 7)~1711(숙종 37))의 문신이다. 당시 서인의 중심인물이었으며, 문장과 서화에도 뛰어났다. 남구만의 본관은 의령이며 자는 운로, 호는 약천 또는 미재로 불렀다.


유배지에서 지은 ‘동창이...’

후일 영의정까지 지낸 남구만은 1684년 남인의 기사환국으로 강원도 강릉(현재 동해시 망상해수욕장 부근에 있는 심곡동으로 약천동이라고도 한다)에 서 1년 정도 유배생활을 하였다. 동창이 밝았느냐는 약천마을의 농촌 정경을 보고 지은 시조라고하나, 그 이면에는 정치적인 색채가 짙은 시조라고도 한다.

남구만선생이 이 마을로 유배를 왔을 때 ‘약천(藥泉)’이라는 샘물이 있어 자신의 호를 약천이라 짓고, 마을에 심일서당을 개설하여 마을사람들에게 1년 정도 글을 가르치기도 했다. ‘동창이 밝았느냐’는 바로 이 심일서당에서 지은 시조라고 한다. 심일서당은 200년 넘게 지속되어 오다가, 1900년대 들어 이 고장의 학자 김남용과 여운형 등이 운영을 하였으며, 1927년 명진소년회사건(明進少年會事件)으로 일제에 의하여 폐쇄 당하였다.



‘약천팔경’에 마음이 설레이다.

동해 망상해수욕장으로 가다가보면 망상역 못 미쳐 우측에 <약천문화마을>이란 입간판이 보인다. 길에서 조금 들어가긴 하지만 그 마을에 ‘약천정(藥泉亭)’이란 정자가 있다고 하니 들어갈 수밖에. 안으로 들어가니 마을어구에 마을 유래에 대한 설명을 해 놓았는데 바로 ‘동창이 밝았느냐’라는 시조가 이 마을에서 지어졌다고 한다.

약천마을에는 팔경이 있다. 죽전의 맑은 바람, 약천 샘물가의 버드나무, 초구의 목동이 부는 피리소리, 마평 들에서 들리는 농악소리, 노봉에서 보이는 고깃배 불, 한나루에 들어오는 어선의 풍경, 향로봉에 뜨는 아침 해, 승지동의 저녁밥 짓는 연기 등 약천팔경이 있다고 하니 마음이 설렌다.

마을 안에는 이곳저곳 이정표와 안내문이 있어 여기저기 찾기가 쉽다. 정자에 오르기 전 먼저 마을을 한 바퀴 돌아본다. 나름대로 약천팔경의 한부분이라도 느껴보고 싶어서다. 그러나 어디 팔경이라는 것이 잠시 돌아본다고 느낄 수 있는 것인가. 이곳에서 터전을 잡고 살아가면서 느낄 수 있는 것을 괜히 조바심을 낸 것 같아 오히려 송구스럽다. 마을 한복판에는 누각이 있다. 이정표를 따라 마을 진입로 우측에 자리한 송림 안에 위치한 약천정을 찾는다.



솔바람소리의 풍취가 좋은 약천정

‘약천정(藥泉亭)’. 하늘을 찌를 듯 솟아있는 노송 사이에 한낮의 햇볕이 따사로웠는지, 인적 없는 약천정은 그렇게 졸듯 고요함 속에 있다가 나그네를 반기는듯하다. 약천정 뒤로 몇 그루 오죽(烏竹)이 있어 바람에 흔들리고, 정자 안에는 떨어진 솔잎들이 바람에 이리저리 굴러다니는 것이 오히려 정겹다.

돌길로 깨끗하게 잘 정돈이 된 오르는 계단만큼이나 약천정도 그렇게 다소곳이 마을 동산 노송 숲속에 자리를 하고 있다. 노송에서 이따금 떨어지는 솔잎과 ‘툭’하고 소리를 내는 솔방울 떨어지는 소리와, 이 모든 것이 약천 남구만선생이 이곳을 택한 이유는 아니었을까? 아마 옛 선인들이 정자와 누각을 짓고 그 곳에 올라 시를 읊으며 한세상을 산 것도 이런 풍류가 있었기 때문이리라.

약천정을 뒤로하고 마을길로 내려오면 마을안쪽에 그 유명한 약천(藥泉)이 있다. 샘이라고 하여서 조금씩 솟아나는 물을 생각하다가 정작 물소리를 내며 물줄기를 내뿜는 약천을 보니 조금은 의아스럽다. 대리석으로 잘 정돈이 된 약천은 옛날 남쪽의 어느 선비가 몸에 병을 얻어 각처에 돌아다니며 물 좋은 곳을 찾다가 이곳의 물을 마시고 몸이 다 나았으며, 후일 조정에 나아가 큰 벼슬을 하였다하여 약천이라고 했단다.

약천사 앞에는 커다란 돌에 동창이 밝았느냐를 적은 시조비가 서 있다. 이 약천사는 남구만 선생이 귀향생활을 하는 동안 주민들로부터 칭송을 받아 오다가, 조정의 부름을 받아 떠난 후 약천의 덕을 기리기 위하여 건립하였다고 한다.


약천정으로 오르는 입구에는 한쪽만 터놓고 돌담을 쌓은 곳이 있다. 앞에 금줄이 서려있는 것으로 보아 마을에서 제를 지내는 곳임을 알 수 있다. 약천정을 둘러보고 내려오는 길에 마을 주민에게 물으니 당산제(堂山祭)를 지내는 제장이란다. 매년 음력 11월에 길일을 택해 당산제를 지낸다고 하니 그때 다시 한 번 이 마을을 찾아보아야 할 것 같다.

약천마을은 그렇게 한 시대를 풍미한 문인 약천 남구만선생의 시조 한편 속에 고스란히 담겨있었다. 그리고 송림 사이에서 단아한 자태를 지니고 말없이 나그네를 맞는 약천정도 오늘 그 모습 그대로 긴 세월 또 다른 발길을 맞이할 것이다.


강릉 선교장. 우리 전통가옥의 대명사처럼 여겨지는 고택이다. 선교장은 강릉시 운정동 431번지에 소재한다. 현재 중요민속자료 제5호로 지정이 되어있으며, 효령대군의 11대 손인 가선대부 이내번이, 전주에서 이곳으로 이주를 해와 1703년에 건립한 집이다. 벌써 300년이 지난 고택이다.

조선조 후기의 전형적인 상류주택으로 평가받고 있는 선교장은, 안채, 열화당, 행랑채, 서별당, 동별당, 곳간채와 솟을 문 앞에 따로 떨어져 선교장의 품위를 높이는 정자인 ‘활래정’으로 꾸며졌다. 10대에 걸쳐 원형을 가장 잘 보존하고 있는 전통가옥으로 유명한 선교장. 그 앞에 서 있는 활래정은 도대체 어떻게 생긴 정자일까?


100년이 지난 뒤에 건립한 활래정

활래정은 선교장을 짓고 난 뒤 100여년이 지난 1816년에 건립이 되었다. 선교장 안에 있는 사랑채인 열화당으로서는 아마도 주변 경관을 감상하기에는 부족했었는가 보다. 앞으로 연못을 만들고 그 위에 정자를 지어, 선교장의 멋을 한층 더 높게 만들고자 했던 마음이 그대로 반영이 된 정자이다.

서쪽 태장봉에서 흐르는 맑은 물. 그 물을 그대로 경포호로 흘려보내기에는 아까웠는지도 모른다. 선교장의 동별당보다 아래편에 연못을 파고, 그 물을 가둔 것이 오늘 날 활래정이 있게 만들었다. 태장봉에서 흐르는 맑은 물이 활래정에 잠시 머물다가, 경포호로 빠져 나간다. 결국 활래정은 항상 맑은 물이 고인 것이 아니라, 흐르고 있다고 표현을 해야 맞을 것이다.



손님을 맞는 다실도 겸해

활래정이 딴 정자보다 운치가 있다는 것은, 그 안에 다실을 두었다는 점이다. 물론 어느 정자나 그 안에서 차 한 잔 마시거나, 술 한 잔을 마시지 못했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활래정은 다르다. 물 위에 떠 있는 듯한 기분을 느낄 수 있는 정자이다. 석축으로 쌓은 연못의 한편에 세 칸을 걸쳐 놓고, 한편은 물 위에 뜬 듯이 장초석을 받쳐 띄워놓았다.

ㄱ 자 형의 정자는 팔작지붕으로 하고, 사방을 창호를 달았다. 사방 어느 곳에서나 주변을 감상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정자 밖으로는 좁은 툇마루를 놓고, 모두 난간으로 둘러 멋을 내었다. 그리고 연못에는 갖은 수초들을 심었다. 계절마다 연못 속에 있는 수생식물들이 피우는 꽃들이 활래정을 더욱 돋보이게 만든다.



활래정은 축대 위에 걸친 부분에는 두 개의 연결된 방과 한 칸의 누마루방을 드렸다. 그리고 꺾인 부분의 연못 위에 장초석을 받친 방은 큰 누마루를 깐 방이다. 겨울에는 따듯한 방을 사용할 수 있도록 하였고, 여름이면 누마루방에서 시원한 경포호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태장봉에서 흘러드는 맑은 물에 시 한수를 띄워 보낼 수 있도록 꾸민 정자이다.

정자의 조건을 두루 갖추다

그런 아름다운 정자에서 괜한 술로 시간을 보내기가 아까웠는지, 그저 차방을 만들고 차 한 잔에 온갖 정담이 오고갔을 것만 같다. 이번 1월 30일 답사 때와 2007년 2월 6일의 답사 사진을 비교해 본다. 달라진 것이라고는 연못 안에 수위뿐이다. 그 때는 장초석의 일부가 물이 차 가려져 있었다.



해가 지나도 옛 모습 그대로를 지키고 있는 선교장과 활래정. 그래서 이 집이 20세기 가장 아름다운 전통가옥으로 선정된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불편함을 감수하면서도 그것을 지켜내는 후손들의 마음이 고맙기만 하다. 언제 날이 풀려 활래정의 연못에 꽃이 가득한 날, 활래정에 올라 향이 가득한 차 한 잔을 마시고 싶은 것은, 바로 옛 모습 속에서 우리의 선조들을 기억해 내보고 싶어서이다.

정자는 어느 곳에 세울까? 당연히 경치가 좋은 곳에 세운다. 그리고 물이 있고, 숲이 있어야 한다. 가장 기본적인 정자의 입지조건이다. 하지만 꼭 그런 것만은 아니다.정자는 사람의 마음이다. 정자를 처음 그 자리에 세우는 사람들의 마음을 닮는다. 때로는 허전한 벌판가에도 정자는 있을 수가 있다. 볏단으로 지붕을 인 모정같은 것은 논 한가운데 자리를 한다. 그것은 농사를 짓는 농군들이 쉴수있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5년 동안을 돌았나보다. 지나는 길목마다 서 있는 정자에 들린다. 일부러 정자를 찾는 일은 거의 없지만, 지나는 길에 정자가 보이면 어떻게 해서든지 들려보고는 했다. 이제 그동안 들린 정자가 200곳은 넘었나보다. 그러나 우리나라에 있는 수많은 정자에 비하면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그 중 올 가을 여행지로 좋은 곳 10곳을 둘러본다. 물론 올 가을이 아니라도 좋다. 정자는 사시사철 바라보는 그 느낌이 다르기 때문이다.


강릉 해운정

강릉시 운정동에 자리하고 있는 보물 제183호이다. 정자가 보물로 지정이 된 예는 극히 드물다. 해운정은 그만큼 소중한 문화재이다. 뒤편으로는 소나무 몇 그루가 서 있고, 앞으로는 연꽃을 심었다. 요즈음에는 주변에 초당두부집들이 늘어서 있어, 새로운 명소로 떠오르고 있다. 그저 주변만 둘러보아도 즐거운 곳이다.


경주 독락당 계정

경주 안강읍에 소재한 독락당은 보물 제413호로 경주시 안강읍 옥산리 소재하고 있다..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 1491년∼1553년)이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에 돌아와 지은 집의 사랑채이다. 이 독락당 한편으로는 계곡이 흐르는 곳에 계정이라는 정자가 서 있다. 이름 그대로 계곡에 서 있는 정자라는 뜻이다. 이 계정의 한편에는 방을 들이고, 부엌은 암벽 위 담에 두었다. 정자에 올라 앞으로 흐르는 물소리를 듣는 기분은 어떠할까?


고성 청학정

고성 청학정은 고성 팔경의 한 곳이다. 앞으로는 깎아지른 듯한 절벽이 있고, 그곳에 부딪치는 파도소리가 즐거운 곳이다. 멀리는 고기잡이를 하는 고깃배들이 까만 점처럼 보인다. 이 청학정은 고성에 있는 정자 중 한곳이지만, 관동팔경이라는 청간정보다 오히려 운치면에서는 뛰어난 곳이다.
    


남원 광한루


광한루에 대한 설명이야 굳이 필요가 없다. 춘향이와 이도령의 이야기가 전해지는 곳이다. 보물 제281호인 광한루는 호남제일루라는 명성을 얻고 있는 곳이다. 정자는 입구에 층이 진 계단을 놓아 멋을 더했고, 앞으로는 삼신산을 꾸며놓았다. 한편에는 방을 들여 겨울에도 주변 경치를 즐길 수 있도록 하였다. 사시사철 언제 찾아가도 그 멋을 잃지 않는 곳이기도 하다.


대전 옥류각

계족산을 오르다가 만나는 옥류각은 송준길(1606∼1672) 선생이 학문을 연구하던 2층 누각 형식의 건물이다. 조선 인조 17년인 1639년에 계곡의 바위 위에 지은 건물로, 골짜기에는 4계절 옥같이 맑은 물이 흐른다고 하여서 붙여진 이름이다. 정자는 계곡물이 흐르는 위에 자리를 잡았는데, 가을 은행잎이 물들때 찾아가면 정말 아름다운 옥류각을 만날 수가 있다. 대전시 유형문화재 제7호이다.


보성 열화정

전남 보성군 득량면 오봉리 강골마을에 있는 중요민속자료 제162호이다. 헌종 11년인 1845년에 이재 이진만이 후진양성을 위해 건립하였다. 영화당은 앞으로 연못을 두고 정자의 한편을 돌촐시켜 연정이라 이름을 붙였다. 영화촬영을 수차례 하기도 한 정자로 가장 아름다운 정자 중 한 곳이다. 열화정은 스스로가 자연이 되어, 자연 속에 파묻혀 있는 정자이다. 그만큼 스스로 드러내지를 않는다. 열화정을 제일로 손 꼽는 이유이기도 하다.


영주 취한대

영주 소수서원 입구를 들어서 송림사이를 지나는 길, 솔향이 코끝을 간지럽힌다. 이런 좋은 송림에서 사람들은 노송의 자태를 닮아 푸른마음을 가졌을까? 소수서원 건너편에, 내 건너 노송 몇 그루와 함께 어우러진 정자가 보인다. 취한대, 조선조 명종 5년인 1550년 당시 풍기군수이던 이황선생이 처음으로 지은 정자다. 이 아름다운 곳에 정자를 짓고, 소수서원의 원생들이 시를 지으면서 청운의 꿈을 키우도록 한 것이다. 취한이란 큰 뜻을 품으라는 것이었을까? 그 자태가 그대로 아름다움이다.


예천 병암정

예천군 용문면에 자리한 병암정. 황진이의 애틋한 사랑을 그려낸 곳으로 더 유명하다. 정자는 커다란 수직의 암벽 위에 자리하고 있으며, 주변에는 노송이 서 있다. 정자 앞 암벽 밑으로는 연못이 있고, 그 앞으로는 너른 들판이 펼쳐진다. 그래서 이곳이 황진이의 촬영지로 선정된 것일까? 보는 눈은 누구나 동일하다. 이 아름다움에 어찌 손을 꼽지 않을 수가 있을까?


예천 초간정

우리나라 최초의 백과사전인『대동운부군옥』을 지은 초간 권문해(1534∼1591) 가 세운 정자이다. 예천군 용문면 죽림리에 자리한 초간정은 권문해가 심신을 수양하던 정자이다. 초간정은 개인적으로는 나이가 먹어 쉴만한 곳을 꼽으라고 한다면 첫째로 꼽을만한 곳이다. 정자를 감싸고 있는 계곡이 아름답기도 하려니와 정자 끝에 모인 소 또한 맑은물이 고여있다. 어찌 이런 곳에서 낚시를 하지 않을손가? 정자의 난간에서 낚시를 내리고 싶은 곳이다.


함양 거연정

맑은 물이 정자를 감싸고 돈다. 정자 뒤편 낮은 암벽에서 떨어지는 물은 깊은 소를 만든다. 그리고 그 바위 위에 그림같이 서 있는 거연정. 화림동 계곡에 서 있는 정자 중 가장 위편에 있는 거연정은 그대로 한 폭의 그림이다. 숲길을 걸어 구름다리를 건너야 들어갈 수 있는 정자. 가을에 그 숲길은 또 어떤 자연의 멋을 보여주려나? 아름다움은 끝이 없다. 그래서 정자는 늘 그곳 바람결에 머물고, 난 발길을 그리로 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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