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에는 ‘태실, ’태봉‘ ’태재’ 등의 이름을 가진 곳이 상당히 많이 있다. 이는 모두 왕족의 태를 묻은 곳이 있다는 이야기다. 왕자가 태어나면 태실도감을 설치하고 길일을 택해 ‘안태사.를 보내 태를 묻게 했다. 『경국대전』에 예전에 보면 지방은 관찰사가 왕과 왕비, 왕세자의 태실을 모두 살피게 되어 있다.

영조 22년인 1746년에 펴낸 조선 후기의 법전인『속대전』에는 태왕태실의 경계는 300보, 왕세자의 태실은 200보로 정해, 이 경계 안으로는 일반인의 출입을 금한다고 되어있다. 태실은 대개 한 사람의 것을 묻지만, 사적 제444호인 성주군 월항면 인촌리의 성주세종대왕 자태실은 모두 19기의 태실이 몰려 있는 곳도 있다.


태실은 어떻게 꾸미나?

태실은 대개 산의 봉우리 근처에 자리를 잡는다. 그러나 전주 경기전 안에 있는 예종대왕의 태실 및 비는, 일반 평지에 자리를 하고 있어 의아스럽게 생각을 들기도 한다. 하지만 이 태실은 원래 이곳에 있었던 것은 아니다. 현재의 자리에서 멀리 떨어진, 완주군 구이면 원덕리 구이초등학교 뒷산 정상부근에 있던 것이다.

이 자리에 있던 태실이 어떻게 해서 경기전 안으로 옮겨온 것일까? 태실은 태항아리라는 태를 담은 석실을 만들게 되어있다. 기단석을 놓고 그 위에 무늬를 새긴 앙련을 올려놓는다. 그 위에는 둥근 모양의 중동석을 놓고 개첨석을 올린다. 머리에 해당하는 덮개석은 복련과 보주로 구별된다.




이와 같이 땅 위에 있는 것과 달리 지하에는 기단석 밑으로 토석을 깔고 그 밑에는 개석을 놓는다. 태를 담은 태항아리는 돌로 만들고 그 안에 석함을 놓는다. 전체적으로는 땅 밑에서부터 태항아리, 석함, 개석, 토석, 기단석, 앙련, 중동석, 개첨석, 복련, 보주 등의 순서로 위로 올리게 되어 있다.

일제에 의해 파 해쳐진 예종대왕 태실

완주군 구이면에 있던 예종대왕의 태실은 선조 11년인 1578년에 태실을 만들었고, 영조 10년인 1734년에 고쳐지었다. 이렇게 태실을 고쳐지을 때는 예조의 당상관 및 감역관이 감독을 하는 자리에서만 가능했다. 이러한 예종대왕의 태실은 1928년 조선총독부가 태실에 있는 태항아리를 가져가면서 파괴가 되었다.

1920년대 우리문화말살정책을 편 일제는 숱한 우리의 문화재를 일본으로 가져가면서, 태실에 보관 중이던 태항아리도 가져간 것으로 보인다. 그 후 1970년에 태항아리를 잃고 폐허가 되어있던 예종대왕의 태실 및 비를 경기전 안으로 옮겨 복원하고, 전북 민속자료 제26호로 지정하였다.



그나마 석물은 보존이 잘 되어있어

다행인 것은 태항아리를 일본인들이 가져갔다고 하지만, 태실과 비의 석물들은 잘 보존이 되어있었다는 것이다. 예종대왕의 태실은 팔각형의 돌난간을 두르고, 그 안에 기단석을 놓았다. 그리고 배가 불룩한 둥근 중동석을 놓고 지붕돌을 덮은 형태이다. 태실 한편에는 비가 서 있는데 이 비에는 예종대왕의 태실이라 적혀있으며, 뒷면에는 건립년대를 적고 있다. 뒷면에 적힌 연대를 보면, 이 태실이 ‘만력 6년 10월 초 2일’에 세웠다고 기록하고 있다. 선조 11년인 1578년이다.

비는 받침석을 거북이로 했는데 특별한 조각을 하지는 않았다. 다만 비의 덮개석에는 뿔이 없는 용을 새겨 넣은 것이 특이하다. 이틀 후 8월 29일은 경술국치 100년이 되는 날이다. 일제에 의해 수많은 우리 문화재가 훼손되고 일본으로 건너갔다.



아직도 돌아오지 못한 숱한 문화재들이 있는데, 이 땅에 있는 문화재조차 제대로 관리가 되지 않는 현장을 볼 때마다 가슴이 미어지는 듯하다. 그보다는 먼저 소중한 우리의 문화재가 제대로 알려질 수 있도록 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대중매체에 혈안이 되어있는 국적 없는 문화를 선호하는 우리민족의 우둔함이 더욱 가슴을 찢는다.

‘대한민국 근대문화유산’ 이란 문화재가 있다. 문화재청에서 지정을 하는 이 문화유산은 문화재청이 개화기인 1876년 무렵부터, 한국전쟁 전후에 조형된 건축물, 산업물, 예술품 등을 포괄한 근대문화유산을 보호하기 위해 「등록문화재 제도」를 도입했다. 이 등록문화재는 개화기를 거쳐 일제 강점기와 광복 당시 등의 연관성을 지닌 것들 중, 귀중한 자료가 되는 것을 문화유산으로 지정을 하여 보존하자는데 있다.

전주시 완산구 다가동, 중앙동 일대를 ‘소주가’라고 부른다. 중국인 거리라는 뜻이다. 이 중국인 거리는 사적 제288호인 전주 전동성당을 건축할 때, 중국에서 들어 온 100여명의 중국인 벽돌공들이 살게 되면서 시작하였다고 한다.

전주 다가동에 있는 중국인거리. 그러나 이제는 몇 집만이 그 자취를 남기고 있다.

100년이 된 전통적 거리

전동성당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자리한 중국인 거리는, 이제는 몇 집 남지 않은 중국인들이 살아갈 뿐이다. 전동 성당은 서울 명동 성당의 내부 공사를 마무리했던 프와넬 신부의 설계로, 보두네 신부가 1908년에 성당 건축을 시작하여 7년 만인 1914년에야 우여곡절 끝에 외형공사를 마쳤다.

이 때 벽돌은 중국인 인부 100여명이 직접 구워서 사용을 했다고 하는데, 당시 이곳으로 이주해 온 중국인들이 집단으로 모여살기 시작하면서 나름대로 상권을 형성한 것으로 보인다. 현재는 신흥상회와 전주화교소학교 등 몇 집이 남아 있다. 100여 년의 역사를 자랑하고 있던 중국인 거리는 이제 그 흔적만이 남아있을 뿐이다.


등록문화재 제174호, 포목점 건물

이 중국인 거리에는 중국인들이 모여 살기 시작하면서 생긴 포목점이 있다. 4대 째 포목점을 열었다는 이 집은, 완산구 다가동 1가 28번지에 있는 왕국민의 소유이다. 등록문화재 제174호로 지정이 되어 있으며, 1920년대에 1층 건물로 지어졌다. 이 건물은 전주 전동성당을 짓기 위해 이곳으로 정착한 벽돌공들에 의해서 지어졌으며, 중국 상하이의 전통 비단 상가 건물의 형태를 따랐다고 전한다.

옆에는 같은 형태로 지어진 중국화교소학교가 자리 잡고 있어, 당시 화교들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그러나 이제 건물의 주인은 나란히 붙은 신흥상회를 운영하고 있고, 등록문화재로 지정된 건물에는 이발소와 실사출력소가 자리를 하고 있다. 건물이 지어진지 90년이 지나 건물은 낡고 퇴락했으며, 비가 오는 날이면 비가 샌다고 현재 이 건물에 세입자들은 이야기를 한다.



등록문화재로 지정된 건물. 4대째 중국인이 포목점을 이어가던 집이었으나,
현재는 이발소와 실사출력소가 세들어 있다.

지정만 해 놓으면 당상인가?

이 집이 등록문화재라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은, 벽에 붙은 등록문화재를 알리는 작은 동판 하나이다. 주변 어디에도 이 문화재에 대해 알리는 안내판이 보이지를 않는다. 명색이 등록문화재라고 지정을 했으면서도, 안내판 하나 없이 서 있는 건물.




중국 상하이에 있는 포목점의 건물형태를 유지하고 있다는 건물이다. 건축양식이 우리와는 달라
등록문화재로 지정이 되었다. 이발소 앞 벽면에는 등록문화재임을 알리는 동판이 부착이 되어있다.

이 건물의 특징은 창문을 모두 아치형 벽돌로 쌓았다는 점이다. 문은 쇠창살을 사용했으며, 건물 전면 상단에는 둥그런 원과 꽃그림을 새겨 넣었다. 붉은 색을 칠한 벽돌이 깨어진 틈으로 보니 안에도 붉은 색이다. 그러나 그 점질이 약해 보인다. 건물은 낡을 대로 낡았지만 보수를 마음대로 할 수도 없어 불편하다고 한다. 4대를 포목점으로 운영을 한 이 등록문화재는 이제 건물의 외형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건물이 소중한 역사적인 자료로 인정을 하여 지정을 했으면, 거기에 합당한 보존이 되어야 할 것이다. 등록문화재임을 알리는 안내판을 세우고, 비가 새고 헐어지는 부분은 보수를 해야 하지 않을까? 지정만 해놓고 나 몰라라 하는 식의 보존방침은 차라리 지정을 안 함만도 못한 일이기 때문이다.

세월이 오래되어 건물자체가 망가져가고 있다. 비가 오면 천정이 샌다고 한다. 보수신청을 했으나
이루어지지도 않는다고 푸념을 한다. 문화재 앞에는 당연히 있어야 할 안내판조차 서 있지 않다. 

우리나라의 수많은 불교 석탑 중에서 원나라 라마교의 영향을 받은 탑은 국보 제2호인 원각사지 십층석탑과, 일제에 의해 수난을 당하다가 복원이 된 개성 인근의 경천사 십층석탑, 그리고 공주 마곡사의 오층석탑 등이다.

보물 제799호로 지정이 된 마곡사 오층석탑은 고려 말기의 세워진 석탑으로, 당시 원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라마교는 티베트에서 발생하여 중국 원에서 크게 융성한 불교의 한 종파이다. 이 탑의 상륜부에는 라마탑에서 보이는 풍마동 장식을 두어 특이하다.


훼손이 심한 마곡사 오층석탑

마곡사 오층석탑은 대광보전 앞에 자리하고 있다. 무더운 여름날이라 고찰을 찾은 사람들도 그늘을 찾아든다. 나뭇가지도 늘어져간다는 삼복더위에 찾아간 마곡사다. 그래도 마음을 먹고 찾아간 곳이니 뙤약볕이라도 찬찬히 훑어볼 수밖에. 첫눈에 보기에도 여기저기 많이 훼손이 되었다. 이 탑이 이렇게 훼손이 된 것은, 석탑 뒤편에 자리 잡은 보물인 대광보전이 불이 났을 때 많이 훼손이 되었다고 한다.



풍마동 높은 기단부와 탑머리에 장식한 풍마동은 라마교의 영향으로 보인다

이층으로 된 기단부는 일반적으로 보이는 기단부보다 월등히 높다. 그리고 그 위로 오층의 탑신이 있는데, 지붕돌의 변화가 없어 불안정해 보인다. 일반적으로 많이 보이는 고려 석탑들보다 안정감이 떨어져 보이는 것도 상륜부에 있는 풍마동의 무거움 때문은 아닌가 모르겠다.

몸돌에 새겨진 사방불은 백미

탑 주위를 돌아보니 기단석과 몸돌, 지붕돌 등이 많이 훼손이 되었다. 아무리 석탑이라고 해도 불에는 견디기가 어려웠나보다. 그래도 오랜 세월 이렇게 마곡사 경내에 자리잡고 있는 석탑을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고마움을 느낀다. 1972년도에 해체 수리를 하였고, 1974년도에 이 자리로 옮겨왔다고 하는 것을 보니 처음부터 이곳에 있었던 것은 아닌가보다.

마곡사는 처음에 세워진 년대가 정확하지는 않다. 신라 선덕여왕 9년인 640년에 자장율사가 창건을 하였다고 하기도 하고, 643년에 세웠다고도 한다. 또한 그보다 200년이나 뒤인 840년에 보조 체징스님이 창건하였다는 설도 있다.


사방불 이층 몸돌에 새겨진 사방불은 이 탑의 백미로 꼽힌다

천년고찰 마곡사 대웅보전 앞에 자리하고 있는 오층석탑. 그 이층 몸돌에 보면 사방에 좌불을 새겨 넣었다. 부처와 보살 등을 몸돌 사면을 파내면서 돋을새김으로 윤곽을 주었다. 두광과 신광을 표현하였으며, 연화대와 법의 등이 아직도 선명하게 남아있다. 천년 세월을 그 모습 그대로 좌정을 하고 있는 사방불. 그 아름다움에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이 탑이 훼손이 되지 않고 원형 그대로를 간직하고 있었다면, 지금보다 더 가치가 있었을 것이란 생각이다. 세월이 지나면서 자연적인 풍화에 의해서 훼손되는 것만도 가슴이 아픈데, 인위적인 훼손까지 더해 망가져 가고 있는 수많은 문화재들. 오늘 우리가 반성해야할 일들이 아니던가. 쉽게 발길을 돌리지 못하는 것도 그러한 죄스러움에서다.


모악산에 자리한 대원사는 전북 완주군 구이면 원기리 997번지에 소재한다. 대원사는  모악산 동쪽 중턱 어머니 품속 같은 형태에 자리잡고 있으며, 삼국유사 권제3 <보장봉로 보덕이암> 조애는 '백제 의자왕 20년인 660년에 열반종 개산조 보덕의 제자인 대원, 일승, 심정 등의 고승이 창건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고려조 인종 8년인 1130년에 원명국사 징엄 스님(1090~1141)이 중창 하고, 이어서 공민왕 23년인 1374년에는 나옹 혜근스님(1320~1376)이 중창하였다. 조선조에 들어서는 태종 15년인 1415년에 중창 흔적의 기록이 있으며, 그 뒤 선조 30년인 1597년의 정유재란 때 대부분 건물이 불타 없어졌으나, 선조 39년인 1606년 진묵스님(1562~1633)이 다시 중창하였다.

 

어머니의 절 대원사

 

▲ 벚꽃이 만개한 경내 모악산 대원사 주변에는 수령이 300년 이상이 되었다는 산 벚꽃나무들이 아름답게 꽃을 피운다.


대원사 주변에는 300년 이상 되었다는 산 벚꽃이 둘러쌓고 있어, 봄철에는 흐드러지게 피는 벚꽃 속에서 아름다움을 찾을 수 있으며, 가을이면 온통 불이 타는 듯한 붉은색이 절을 뒤덮는다. 대원사에서는 2001년부터 매년 1월1일 촛불기원 해맞이 타종축제와 4월 둘째 주 일요일에 열리는 모악산진달래 화전축제로 이미 전국적으로 명성을 얻고 있는 고찰이다.

 

모악산 대원사는 어머니 품속 같은 터전에 자리 잡아, 천하대복지 최길상지 명당이라고 한다. 대원사를 어머니의 절, 효의 절이라고 부르는 것도 그러한 이유에서다. 주말과 휴일이 되면 등산객들로 늘 경내가 붐비고 있는 대원사는, 전국 각지에서 예를 갖추고 찾는 이가 끊이지 않는 창건 1350년의 유서 깊은 전통사찰이다.

 

대원사 문화재 안내판의 이변

 

▲ 방치된 옛 안내판 문화재를 분실하고 나서 그대로 방치된 목각사자상 안내판

▲ 안내판 목각사자상을 도난 당한 사연을 적은 현 안내판


어느 절이나 사찰에 문화재가 있으면, 그 앞에 문화재 안내판을 설치해 놓는다. 모악산 대원사에는 대웅전에 모셔진 전북 유형문화재 제215호인 삼존불과 전북 유형문화재 제71호인 용각부도가 있다. 그런데 대원사 안내판에 보면 현재는 보이지 않는 또 하나의 문화재가 있었음을 적고 있다. 바로 진묵 스님이 만든 것으로 전해지는 목각사자상이다. 전북 민속자료 제9호로 지정이 되어 있었다는 목각사자상은 어떤 것일까?

 

대원사 경내 한편에는 예전 목각사자상을 설명한 문화재 안내판이 아직도 남아있다. 그 내용을 보니 다음과 같다. 

 

이 목각사자상은 조각한 시기와 조각한 사람이 누구인지는 자세히 알 수 없으나, 전하는 바에 의하면 진묵대사가 만들었다고 하며, 이 위에 북을 올려놓고 가축을 하늘로 인도하는 제사를 지낼 때 북을 쳤다고 한다. 크기는 높이 90cm, 길이 135cm이며 괴목나무로 섬세하게 조각한 사자상이다. 다리는 다른 나무로 만들었으며 현재 다리부분이 약간 떨어져 나갔다. 이 사자상의 등에 경전 등을 올려놓을 수 있게 만들었다.

 

위와 같은 설명으로 보아 이 목각사자상은 상당히 소중한 문화재임이 틀림이 없다. 더구나 제를 지낼 때 사용하였다는 것으로 보아, 신물(神物)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도대체 이 목각사자상은 어디로 간 것일까? 현재 대원사 문화재 안내판에는 목각사자상이 사라진데 대한 자세한 설명을 하고 있다.

 

대원사의 문화재인 사자상은 돌아와야

 

 
▲ 도난단한 목각사자상 도난 당한 목각사자상. 뛰어난 조각솜씨를 보이고 있다. 안내판 사진


어떤 연유로 목각사자상이 대원사를 떠났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안내문에는 1988년 12월 1일에 도난을 당한 것으로 적고 있다. 그리고 1989년에는 완주군에서 속성으로 문화재지정을 해제했다는 것이다. 문화재가 도난을 당할 경우 해당 부처에서는 문화재를 찾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을 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왜 그렇게 빨리 문화재해제를 한 것일까? 그 이유가 궁금하다.

 

그 뒤 목각사자상은 1999년 10월 27일 서울 종로구 가회동에 거주하는 이모씨가 소유를 하고 있었는데, 공소시효를 주장했다고 한다. 당시의 문화재법은 어떠했는지는 모르겠으나, 이미 문화재 지정이 해제돼 있었다. 그리고 이 목각사자상은 다시 종로구 인사동 거주 이 아무개에게 팔렸다는 내용이다.

 

문화재란 개인의 것이 아니다. 더구나 진묵 스님이 만들었다고 하면 이미 그 제작연대가 500년 가까이 되었다는 것이다. 대원사는 진묵 스님께서 가장 오래 묵으신 절이기도 하다. 그만큼 진묵 스님의 체취가 배어있는 고찰이다. 그리고 목각사자상은 중요민속자료로 지정이 될 만큼 소중한 문화재란 생각이다.

 

문화재법도 중요하지만 소중한 모악산의 문화재인 목각사자상은 반드시 대원사로 돌아와야 한다. 그래야 비로소 제 가치를 갖게 되는 것이다. 대원사 문화재 안내판에는 목각사자상이 돌아와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얼마나 간절한 바람이었으면, 안내판에 그러한 사연을 기록을 했을까? 어떤 경로를 통해 문화재를 취득하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이라도 목각사자상은 대원사로 돌아와 제자리를 찾아야 한다는 생각이다. (출처 :  오마이뉴스 / 2010, 4, 19)


여주군 점동면 흔암리는 역사가 깊은 마을이다. 이 마을은 예로부터 줄다리기를 하고 난 뒤, 줄에 액송기를 꽂아 마을 뒤편에 흐르는 남한강에 갖다 놓는다. 정월 대보름 줄다리기를 할 때는 남한강이 꽁꽁 얼어 얼음 위에 줄을 올려놓게 되는데, 얼음이 녹으면 이 줄이 물에 가라앉아 수많은 물고기들의 산란처가 되기도 한다. 이 흔암리에는 선사주거지가 있다. 모두 16채의 집터가 발굴이 되었는데, 남한강에서 그리 멀지 않은 산 구릉에 자리하고 있다.

 

남한강가의 집단 선사주거지

 

흔암리 선사유적이 처음 발견된 것은 1960년대에 김원룡에 의해서다. 그 후 서울대박물관 고고학조사단이 1972년도부터 매년 발굴을 실시한 결과, 모두 20여기에 가까운 움집터를 확인하였고 다수의 유물과 탄화곡물을 발견하였다. 집 자리가 확인된 곳은 마을 뒤편을 흐르는 남한강에서 300여m 정도 떨어진 곳으로, 남북으로 길게 뻗은 표고 123m의 산정상부 지점으로 유적은 이 산 경사면을 따라 형성되어 있다. 

 

이 선사유적지의 발굴에서 출토된 토기는 구멍무늬토기, 민무늬토기, 붉은간토기 등이 있다. 민무늬 토기에는 화분형, 사발, 단지, 짧은목 토기 등이 출토되었으며, 빗살무늬토기와 붉은 간토기 등도 상당수 발굴되었다. 석기로는 돌칼, 반달돌칼, 바퀴날도끼, 돌도끼, 돌화살촉 등이 있다. 또한 이곳에서는 농경용 연모와 함께 땅을 파 만든 저장고에서 쌀, 보리, 조, 수수 등의 곡식이 발견되었다. 이 유적에서 나온 탄화미는 늦은 연대라 하더라도 연대가 최소한 기원전 7세기까지 올라가는 것들로 판명되었다.

 

▲ 재현된 움집 현재 흔암리 선사유적지의 움집들은 당시의 기둥구멍을 확인해 세운 것으로, 안에는 화덕자리 등을 꾸며놓았다.

▲ 움집 출입구 기둥구멍의 벽체가 곧바로 위로 올라간 것은, 기둥의 서까래가 땅에 땋지 않은 반 움집이었다는 것을 말한다


흔암리 유적지의 집의 형태

 

흔암리 선사유적지의 집들은 남북장축으로 풍화된 화강암반을 'ㄴ자'로 파고 지붕을 씌운 것이며, 포탄형의 특징적인 화덕자리가 발견되었다. 주거지의 내부시설에는 화덕자리, 간단한 저장구덩이, 기둥구멍 및 출입구 등이 있다. 움집의 구조는 평면은 긴 네모꼴이며 가장 큰 집터는 길이 10m, 너비 4.2m로 나타나 상당히 큰 편이다. 이렇게 큰 집이 있었다는 것은 당시에도 집단주거지의 주축이 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다. 

 

현재 흔암리 선사유적지의 움집들은 당시의 기둥구멍을 확인해 세운 것으로, 안에는 화덕자리 등을 꾸며놓았다. 발굴 당시 나타난 움집들은 움의 깊이가 조금씩 차이가 있었으며, 같은 집터에서도 4벽이 서로 다르고 기둥구멍의 벽체가 곧바로 위로 올라간 것으로 보인다. 이는 기둥의 서까래가 땅에 땋지 않은 반 움집이었다는 것을 뜻한다.

 

이곳에서 출토된 연모 중에서 그물추가 있었다는 것은 흔암리 선사유적지의 생활에서 농경을 주로 했지만, 뒤편을 흐르는 남한강에서 물고기를 잡았다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 화덕자리 움집 안에는 화덕자리를 재현해 놓았다. 발굴 당시에는 이 화덕자리에서 숯이 발견되기도 했다.

 
▲ 남한강 흔암리 선사유적지에서 300m 정도 떨어져 있는 남한강. 이곳에서 물고기도 잡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재현된 선사유적지 아쉬움이 남아

 

흔암리 선사유적지는 마을회관을 기점으로 양편으로 오를 수가 있다. 마을회관 앞에서 좌측 길로 들어서면 전신주에 '흔암리 선사유적 150m'라는 이정표가 걸려있다. 그런데 불과 10m 정도를 안으로 들어갔는데, 이곳에는 흔암리 선사유적 80m'라는 이정표를 걸어 놓았다. 도대체 이해가 가질 않는 이정표다. 이런 안내판이 보일 때마다 화가 치미는 것은, 우리 문화재에 대해 관계부서에서 얼마나 무관심한가를 보이는 것이란 생각이다.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고는 하지만, 이정표 하나도 확인하지 않은 문화재보존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 안내판1 선사유적지가 150m 전방에 있음을 알려준다
ⓒ 하성

▲ 안내판2 불과 10m 정도를 안으로 들어갔는데 80m 라는 이정표가 걸려있다. 사소한것 하나도 확인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또 한 곳의 입구는 마을회관 우측 길로 남한강 방향으로 가다가 보면, 석비가 서 있는 곳으로 오를 수가 있다. 얼핏 생각을 해보아도 두 개의 거리가 맞지 않는 이정표 중 하나는, 이곳에 있어야 할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다.

 

▲ 주거지 석비 선사주거지를 알리는 석비는 남한강 방향으로 나가는 곳에 있다.

 

펜스로 둘러놓은 선사유적지는 현재 5동정도의 움집을 재현해 놓았다. 안으로 들어가면 화덕자리만 하나씩 만들어 놓았다. 이곳에서 발견된 토기나 연모 등을 모조품이라도 놓아두었다면 좋았을 것을. 돌아보면서 아쉬움이 남는다. 사람들이 이곳을 찾았을 때 볼 것이 너무 부족하다는 생각이다. 더구나 한 움집에는 누군가가 술을 마시고 빈병과 쓰레기를 버리고 갔다. 한 마디로 문화재의 관리가 전혀 되어 있지 않다는 이야기다.

 

▲ 쓰레기 누군가 이곳에서 술을 마시고 쓰레기를 버려놓았다. 문화재의 관리소홀의 한 단면이다.

 

현재 경기도 기념물 제155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흔암리 선사유적지. 우리의 농경문화와 더불어 강가를 주거지를 삼은 취락구조를 알 수 있는 소중한 문화유산치고는 너무나 볼품없이 재현이 되었다는 생각이다.(출처 : 오마이뉴스 / 2010, 3,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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