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산 관촉사에는 보물 제218호인 거대한 관촉사 석조미륵보살입상이 있어 유명한 절이다. 이 석조미륵보살입상을 흔히 ‘은진미륵’이라고 부르는데, 이 미륵보살입상이 있는 곳에서 20m 정도 앞에는 배례석이 놓여있다. 현재 충남 유형문화재 제53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이 배례석은, 우리나라의 석조물 중에서도 그리 흔하지 않은 문화재다.

배례석은 절을 찾은 불자들이 부처님께 합장하고, 예를 갖추는 장소로 사용했다고 한다. 아마 이 배례석에서 예를 올린 것은 아니고, 이 배례석 앞에 자리를 마련하고 그곳에서 부처님께 예를 올렸을 것으로 보인다. 지금은 뒤편에 석탑이 1기가 서 있고, 그 앞으로는 미륵전이 있다.


논산 관촉사 경내에 있는 문화재인 배례석(위)와 석문(아래)

뛰어난 조각술이 엿보이는 관촉사 배례석

관촉사 미륵전 뒤편에 놓인 배려석은 장방형의 대석이다. 바닥에서 2단으로 직각고임을 해서 올려놓고, 그 위의 면석에는 사방에 안상을 새겨 넣었다. 안상은 고려 때의 석조물에서 흔히 보이는 문양으로, 전면에는 3개를 새겨 넣고 단면에는 2개가 새겨져 있다. 가운데는 버섯구름 모양의 문양을 돋을새김하고, 여울진 모양으로 주변을 장식했다.

배례석의 윗면에는 중앙에 커다란 연꽃을 중심으로, 좌우에 그보다 약간 작은 연꽃 두 송이를 돋을새김 하였다. 가운데 연꽃이 양쪽의 것보다 약 3㎝ 정도가 크며, 연꽃잎은 모두 8잎으로 연꽃 한 잎의 중앙부가 갈라져 두개의 잎으로 나누어진 것으로 표현되었다. 이렇게 섬세하게 조각을 해 놓은 배례석은, 오랜 시간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원형이 잘 보존이 되어있다.





사찰의 중문 역할을 한 석문(石門)

미륵전을 조금 비켜선 계단위에는 돌로 만든 석문이 보인다. 예전에는 이 문을 통해 경내로 들어갔을 것이다. 이 석조물은 일주문과 천왕문을 거쳐 경내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야 했던 문이다. 석문의 한쪽 기둥에는 ‘해탈문’이라고 새겨 놓았다. 문 입구에는 넓이가 48cm 정도의 돌기둥을 양편에 세우고, 윗면 천정에는 길게 장대석으로 잘 다듬은 돌을 다섯 장 올려놓았다.

전체적인 석문의 모습은 4각형을 이루고 있으며, 터널과 같은 형태로 꾸며졌다. 지금은 일부만 남아있지만 문의 양편에는, 성문을 연결하여 경내를 보호할 수 있도록 석벽으로 둘러놓았다. 이러한 형태의 석문은 다른 사찰에서는 찾아보기가 힘든 예이다. 이 석문은 석조미륵입상과 같은 연대에 제작된 것은 아니고, 그 후에 필요에 의해 축조되었을 것으로 본다.




기둥 좌측에는 해탈문이라 적었다(맨위) 석문 안으로 은진미륵이 보인다. 그리고 문에 연결한 석벽괌(위에서 세 번째) 바위와 어우러진 석문(아래)

은진미륵이 자리하고 있는 논산 관촉사. 2기의 희귀한 석조물이 있어 남다른 곳이다. 전국에 있는 수많은 절에는 많은 문화재를 보유하고 있지만, 관촉사는 또 다른 형태의 문화재로 찾아드는 이들을 들뜨게 만든다.

조선 고종 3년인 1866년 정월에 대원군은 전국에 천주교의 탄압 교령을 포고했다. 병인사옥, 혹은 병인박해라고 하는 이 천주교의 탄압 포고령이 떨어지자, 전국은 그야말로 피바다로 변해버렸다. 프랑스 선교사 12명 중에서 9명이 처형된 것을 시작으로, 불과 수개월 동안에 국내에서 천주교 신자 6천여 명이 처형되었다. 이들은 관군을 피해 깊은 산속으로 피신하여 쫓겨 다니다가 잡혀서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고, 굶주림에 죽어간 부녀자와 어린이들이 부지기수였다. 더욱 이러한 난리 통에 신도가 아닌 사람들이 억울하게 박해를 당한 예도 허다하였다고 한다.

전북 익산군 여산면. 이곳에는 병인박해 때 생명을 잃은 천주교 신자들이 죽음으로 신앙을 지킨 두 곳의 성지가 있다. 병인박해 때 순교를 한 천주교 신자들의 죽음은 비참하기 짝이 없었다. 교수형과 참수는 물론이고, 성벽 위에서 거꾸로 밑에 있는 바위위로 떨어트리기도 했다. 이러한 병인박해는 병인양요를 불러 오게 한 요인이 되었다.

백지사형을 행한 여산동헌 아래뜰

한지를 덮어 질식시킨 백지사(白紙死)

백지사란 말 그대로 백지를 이용하여 사람들을 죽이는 형벌이다. 얼굴에 물을 뿜고 그 위에 백지를 여러 겹 덧붙여 질식을 시켜 처벌하는 형벌로,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익산시 여산면 여산리 소방서 앞에 자리한 여산동헌. 이 동헌의 앞뜰에서 바로 이 백지사를 실행하였다. 일명 ‘도모지사(塗貌紙死)’라고도 하는 이 백지사는 호흡을 할 수 없어 받는 고통이 길어 오히려 더 심한 형벌이라고도 한다.

동헌의 아래 뜰인 이곳에는 당시 백지사를 당한 얼굴의 모형이 십자가 앞에 있다. 그리고 한편에는 건물의 주추나 축대를 쓰였을 장대석을 모아놓았다. 딴 곳의 성지가 여러 가지 형태로 꾸며 놓은 것에 비해, 간단하게 성지임을 알리는 안내판 과 모형조각만 땅에 놓여있다. 아마 이곳이 여산동헌이 문화재로 지정이 되어있기 때문인가 보다.



얼굴의 모형만 보아도 얼마나 고통스러웠는가를 능히 짐작할 수가 있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손을 뒤로 묶고 말뚝에 매달아 백지를 얼굴에 덧 씌었다고 한다. 이들의 솜옷은 솜이 하나도 없었다고 하는데, 배가 고파서 옷의 솜을 다 빼서 씹어 먹었다는 것이다. 동헌건물의 옆에는 대원군의 척화비가 서 있어 박해사실을 증명하는 듯하다.


얼굴에 물을 뿌리고 그 위에 백지를 여러겁 덮어 질식을 시키는 백지사의 형태(위)

한 가족 6명 등 25명이 순교한 숲정이 성지

여산면사무소에서 멀지 않은 곳 도로변에 보면 또 한 곳의 성지가 있다. 일가족 6명 등 모두 25명이 순교한 숲정이 순교 성지. 이곳은 금산과 고산, 진산 등지에서 붙잡힌 신자들이형을 당한 곳이다. 그 중 고산 널바위 사람들이 17명이나 이곳에서 순교를 했다고 한다. 지금은 주변이 정리가 되고 논이 들어차 있지만, 당시는 이곳이 숲이 우거져 ‘숲정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는 것이다.

이곳에서 목숨을 잃은 순교자들은 형장에서 칼을 풀어주자, 배가 고파 풀을 마구 뜯어먹었다고 전한다. 기록상으로는 25명이 이곳에서 순교를 했다고 하지만, 그 외에도 더 많은 사람들이 순교를 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 숲정이 성지는 전라북도 기념물 제125호로 지정되어 정비가 되었다.

숲정이 성지 정경

숲정이 성지로 들어가니 한편에 안내판이 있다. 안내판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적혀있다.

「1866년 대원군의 쇄국정책과 천주교 말살정책으로 시작된 박해는 1868년에 이르러 가장 치열하였다. 이때 금산, 진산, 고산의 심산 궁곡에 숨어살던 많은 신자들이 여산 관아에 끌려와 그 중25명이 진리의 증거자로 목숨을 바쳤다. 특히 당시 고산 넓은바위에서는 많은 신자들이 잡혀와 17명이 처형되었는데, 그 중에서 지도자인 김성첨(토마스)의 가족은 6명이 순교하였다」

이 안내판의 곁에는 당시 순교자들의 명단을 적은 또 하나의 안내판이 서 있다. 당시 순교자들을 보면 김성첨(토마스 62세), 김명언(안드레아 62세), 김정규(야고보 47세), 김정언(베드로 23세), 김홍칠(마티아 19세), 김찬여(요한), 김베드로(19세), 오유리안나, 박베드로(42세), 이필립보(19세), 오윤집(다대오 39세), 김성화(야고보 52세), 이서방, 손막달레나(27세), 한정률(요한 27세), 박성진의 아내, 전루시아(35세), 장윤경(야고보 37세), 전마리아(50세), 이영화, 박성실(요한), 김윤문, 박운겸, 박도미니코, 송가롤로(50세) 등 25명이다.




두 곳의 성지를 답사하면서 믿음이란 과연 무엇일까? 순교를 하는 마음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수많은 생각을 해본다. 그러나 지금 이 시대에 과연 그 마음을 어찌 읽을 수가 있을 것인가? 다만 그 순교한 분들의 굳은 믿음만은 조금은 이해할만하다. 간간히 언론에 오르내리는 소문이 무성한 종교들을 생각하면서, 이들이 더욱 숭고하게 보이는 것은 죽음에도 굴하지 않고 믿음을 지켜낸 분들이기 때문이란 생각을 한다.

데이터베이스[database]란 일반적으로 ‘DB’라고 약자로 많이 적는다. 데이터베이스는

자료 기지 또는 자료틀. 보통 DB라고 약칭한다. 동시에 복수의 적용 업무를 지원할 수 있도록 복수 이용자의 요구에 호응해서 데이터를 받아들이고 저장, 공급하기 위해 일정한 구조에 따라서 편성된 데이터의 집합이다. 기업이나 조직체의 활동에 필요 불가결한 자원이 되는 정보에 대한 다양한 요구에 응하기 위해 대량의 정보를 수집, 관리하여 공동으로 이용할 수 있게 한 것이다.」라고 설명을 하고 있다.(다음 백과사전)

데이터베이스란 언제나 그 자료에 대한 가장 최근 의 것, 혹은 가장 정확한 것이라야 제 가치를 지니고 있다는 생각이다. 그런데 한 나라의 문화재를 총괄하고 있는 관계부처에서 제대로 된 사진하나를 데이터로 갖고 있지 못하다고 하면, 쉽게 납득이 가는 이야기일까?

문화재청 데이터베이스 검색. 강경 미내다리

데이터베이스는 관리가 잘 되고 있을까?

전국을 다니면서 문화재를 답사하고, 그것을 많은 사람들과 공유하기 위해서 다음 뷰에 글을 송고한다. 문화재라는 특성상 글을 쓰기 위해서는 문화와 관련된 단체의 홈페이지 등을 꼼꼼히 살펴보고는 한다. 글을 쓰기 위해서 내가 찾아보는 자료는 문화재청, 해당 지자체 사이트, 그리고 현장의 안내판 등이다. 그리고 혹 시간적 여유가 있거나, 운이 좋을 때는 근처에 계신 분들의 이야기도 빠트리지 않고 챙겨온다.

문화재청의 문화재 소개나 해당 지자체의 관련 사이트, 그리도 현장의 안내판 등도 모두 데이터베이스에 속한다. 그런데 다니면서 보면, 잘못된 자료가 너무 많다는데 대해 놀랍기만 하다. 적어도 한 나라의 문화재를 설명하는 자료가 잘못되어 있다면, 그것을 이해 할 수가 있는 것일까?

다니면서 잘못 된 안내판 등을 수도 없이 관련 단체에 전화를 해 시정을 요구하고는 했다. 그동안 꽤 많은 자료들을 고치기도 했지만, 매번 이렇게 전화를 하는 것도 번거롭다. 또한 이야기를 나누다가 보면 가끔 본의 아니게 말투가 거칠어지기도 하고, 말끝이 올라가기도 하는 일이 있다 보니 그도 반가운 일은 아니란 생각이다.


문화재청 데이터베이스에 소개된 미내다리 사진

최고기관인 문화재청, 데이터베이스 관리 꼼꼼히 살펴야

오늘 강경 미내다리 글을 쓰기 위해 여기저기 조사를 하다가, 문화재청 ‘문화유산지식’이라는 카테고리에 들어가 미내다리의 설명을 보았다. 물론 미내다리의 설명으로 본다면 가장 신빙성 있는 곳이 문화재청이어야 한다. 우리나라의 모든 문화유산을 총괄하고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모든 문화유산이라고 해서 문화재청에서 일일이 관리를 하는 것은 아니다. 국보나 보물, 중요민속자료, 중요무형문화재, 사적, 천연기념물 등 그중 가치가 중요한 것은 문화재청에서 직접 관리를 하고, 지방의 유무형문화재나 기념물 등은 광역자치단체에서 관리를 한다.

그렇다고 지자체에서 관리를 한다고 해서, 그 가치가 없는 것은 아니다. 문화재란 그것이 어떤 분류에 속해있던지 모두가 소중한 문화유산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미내다리 자료를 보니 사진이 이상하다. 문화재청 데이터베이스에 있는 사진은 복원이 되기 전에 찍은 사진이다. 논산시청을 들어가 보았다. 현재의 미내다리 모습이다.

논산시청의 미내다리에 소개된 사진

그렇다면 문화재청은 이 미내다리의 원래 모습을 그대로 놓아두어야만 했을까? 당연히 아니다. 그 자료도 소중하겠지만 복원 전의 모습과 복원 후의 모습이 있었다면, 더 훌륭한 데이터베이스였을 것이다. 문화재를 관리하는 최고 기관의 데이터베이스가 이토록 허술하게 관리가 되고 있다면, 이 문제가 그냥 넘어가도 좋을만한 것일까?

수많은 사람들이 들어와 보고 가는 곳이다. 더욱 요즈음 우리문화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전국을 수많은 블로거들이 찾아다니면서 답사하고 글을 올리고 있다. 꼭 블로거가 아니라고 해도 문화재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문화재를 즐겨 찾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다. 따라서 문화재청도 항상 새로운 모습의 자료를 구축하고 그것을 올려주어야 한다. 그 길만이 온전한 데이터베이스의 관리라는 생각이다.

논산에서 강경읍으로 가다가 보면 중간에 채운면을 지나게 된다. 이곳에서 강경읍으로 들어가기 전 채운교를 비켜 서 조금 거슬러 올라가면 다리가 있는데, 바로 강경 미내다리이다. 이 미내다리는 강경의 대표적인 문화유적이다. 현재 충남 유형문화재 제11호로 지정이 되어있다.

미내다리는 조선 영조 7년인 1731년에 건립된 것으로 비문에 전한다. 일명 ‘조암교(潮岩橋)’라로도 불렀던 미내다리는 이곳을 흐르는 하천명이 미내천이라는 데서 붙여진 이름이다.『여지승람』에는 ‘미내다리가 있었는데 조수가 물러가면 바위가 보인다 해서 <조암교>라 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곳은 강경포구가 있던 곳으로 조수의 왕래가 심했으며, 수많은 배들이 이 미내천을 이용해 교역을 감행하였다.


개들도 생선을 물고 다니던 강경포구

강경포구는 한 때는 우리나라 상권을 대표하는 포구의 장 중 한곳이었다. 포구에는 객주집들이 즐비했으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는지, 그야말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는 것이다. 선창에는 잡아온 물고기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으며, 지나는 개들도 생선을 물고 다녔을 만큼 그렇게 풍요로운 곳이었다고 전한다.

그런 강경에 교량이 놓이기 이전에는 장마철이나 겨울에 눈이 많이 내릴 때면, 홍수와 눈이 쌓여 교통이 두절되고 인명의 피해가 자주 발생하였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강경사람 석설산과 송만운이 주동이 되어, 황산의 유부업과 스님인 경원, 설우, 청원, 그리고 여산의 강명달, 강지평이 다리를 놓기 시작해 1년 미만에 공사를 완성하였다 한다.




미내다리는 세 개의 아치형 교량 중 가운데가 크고 남북 쪽이 약간 작다. 받침은 긴 장대석을 쌓아 올리고 그 위에 홍예석을 돌려 구름다리로 축조하였으며, 석재는 40㎝×50㎝×110㎝ 내외의 장대석을 사용하여 만들었다. 홍예 사이의 간지에는 드러난 면이 35㎝×150㎝ 정도의 장대석을, 잘 치석하여 반월형의 둘레에 따라 돌을 사다리꼴로 쌓았다. 부착제를 사용하지 않고 돌만으로 맞추어 아치를 형성케 한 축조방법은, 당시 선조들의 재주가 과학적으로 얼마나 뛰어났는가를 짐작케 한다.

염라대왕이 ‘미내다리를 보고 왔느냐?’고 묻는다고 한다.

사람이 죽어 염라대왕 앞에 나아가면 ‘강경 미내다리를 살아생전 보고 왔느냐?’고 묻는다고 한다. 이 정도로 강경장은 포구를 끼고 발달한 장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고, 미내다리는 그 장을 연결하는 중요한 통로였다. 미내다리가 망가져 사람들이 통행을 뜸하게 할 때, 이 미내다리 돌을 가져다가 집에 쓰려고 했던 사람들은, 갑자기 마른하늘에서 천둥이 치고 벼락을 쳐 공포에 떨고는 했다는데, 거기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하다.



미내다리가 없어 늘 통행에 어려움을 겪던 사람들이 두 청년을 시켜 다리를 놓게 하였다. 다리를 다 놓고 보니 경비로 걷어준 엽전이 남았는지라, 두 청년은 이를 나중에 다리를 보수할 때 쓰리라 생각하고 다리 밑에 묻어두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중 한 청년이 시름시름 앓기 시작해, 온갖 좋다는 약을 다 써 보았으나 차도가 없었다. 그 때 같이 다리를 놓은 친구가 우선 사람을 살려야겠다는 생각으로 돈을 묻어둔 곳으로 가, 다리 밑을 파보았으나 엽전은 보이지 않았다. 시간이 가면서 병석에 누운 청년은 더욱 병이 악화되다가 구렁이로 변해버렸다. 그리고 미내다리 밑으로 들어가 흔적이 사라져 버렸다.

사람들은 폐교(廢橋)가 된 미내다리 돌을 갖다 쓰려고 하면 벼락이 치고 날이 어두워져, 놀라 다시 돌을 제자리에 갖다 놓으면 벼락이 그쳤다고 한다. 그때부터 미내다리의 돌은 ‘구렁이 돌’이라고 하여 아무도 건드리지 않았다.

난 추석날 미내다리를 건넌다.


아마 이렇게 청년이 구렁이가 된 것은 미내다리 밑에 묻어두었던 엽전을, 몰래 꺼내서 약값으로 사용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 미내다리는 정월 보름날 다리를 자기 나이수대로 왕복을 하면, 그 해에는 액운이 소멸된다고 한다. 또한 추석 날 이 미내다리를 일곱 번을 왕래하면 행운이 온다는 속설이 전하고 있다.

우리 풍습에는 정월에 ‘다리밟기’라는 놀이가 있다. 겨우내 움츠렸던 몸을 원활하게 하기 위한 방법으로 다리를 밟으며 건강을 기원한다. 미내다리를 건너는 것도 그러한 놀이에서 연유가 된 속설로 보인다. 이번 추석에는 미내다리를 일곱 번 걸어보아야겠다.

우리나라 여기저기를 답사를 다니다가 보면, 마을입구나 혹은 마을 안에 돌미륵이 서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것이 형태를 갖추지 않은 부정형의 돌일망정, 사람들은 미륵이라고 여겨 정성껏 치성을 드리고는 한다. 이렇듯 우리나라에는 웬만한 마을에는 미륵이라 불리는 돌부처가 거의 없는 곳이 없을 정도로, 민중들 속에 깊이 파고든 신앙의 형태로 자리 잡고 있다. 이유는 석가모니 부처 다음 세상을 약속한 미륵불이 현신하면, 고통스러운 현실을 살아가던 사람들을 모두 그 고통에서 구해준다는 약속 때문이다.

경기도 안성에서 이천 장호원으로 가는 도로를 따라가다가 보면 이정표가 보인다. 경기도유형문화재 제36호인 기솔리 석불입상이 있다는 안내판이다. 길을 따라 안성시 삼죽면 기솔리 산33-1에 소재한 2기의 석불입상을 만난다.


장대석에 조각한 미륵불

미륵불은 석가모니불이 열반한 뒤, 56억 7천만년이 지난 후 인간세계에 나타난다고 했다. 용화수 아래에서 3번을 설법하고 성불하여, 석가모니가 구제할 수 없었던 중생들을 구제한다는 후천세계의 부처이다. 그래서인가 미륵석불의 경우에는 대개는 거대석불입상으로 조각을 하는 것이 예이다. 아마 후천세계가 도래할 때까지의 신앙대상물이기 때문인가 보다.

안성은 미륵불이 많은 곳이다. 이곳은 과거 궁예가 묵으면서 칠장사라는 절에서 무술을 배웠다고 전한다. 그래서인가 안성은 미륵불이 어느 곳보다도 많이 남아있다. 안성 인근에서 보이는 미륵불은 거대석불이다. 기다란 돌을 조각해 놓은 거대석불은 그만큼 인간들보다 월등히 도력이 높은 미륵임을 상징한 것이라는 생각이다.



남녀 한 쌍으로 조형이 된 기솔리 미륵입상

기솔리의 미륵입상은 그 높이가 5m 정도나 된다. 그러나 일반 석불입상과 같이 조각을 한 것이 아니라, 기다란 장대석에 얼굴부분만 조각을 하고, 목 밑으로는 선각에 가깝게 꾸며 놓았다. 2기의 석불입상 모두가 사각형의 얼굴에 가는 눈과 삼각형의 짧은 코, 두터운 입과 목까지 내려 온 귀 등을 뚜렷하게 조각하였다.

이 두기의 미륵입상은 모두 민머리인 소발을 하고, 그 위에 지혜의 상징이라는 육계가 튀어나와 있다. 머리 위에는 얇고 둥근 보개석을 얹어 놓았는데, 그 중앙에 구멍을 뚫어 육계에 끼워 갓처럼 표현을 해놓았다. 입은 굳게 다물었으나 엷은 미소를 띤 것처럼 보인다.



이 미륵입상은 법의를 앞가슴에서 둥글게 파내려, 발끝까지 U자 형 주름으로 표현하였다. 일반적으로 거대석불의 경우 이런 법의의 형태로 나타난다. 아마 이 지역의 특징적인 형태라고 보아도 될 것이다. 가슴까지 올려 진 왼손과, 배위에 올려놓은 오른손은 약식화가 되어 있다. 장대석에 조각을 하다보니 사실적으로 표현을 하기가 불가능 했을 것이다. 몸의 굴곡도 같은 형태로 사실적이지는 못하다. 마을에서는 동쪽으로 향한 불상 중 북쪽에 체구가 굵고 약간 큰 불상을 남 미륵불, 남쪽에 위치한 날씬한 불상을 여 미륵불이라 부른다. 

사람들은 누구나 고통을 받고 싶지가 않다. 그러나 세상을 살다가보면 가진 자나 없는 자나 다 고통이 있기 마련이다. 하기에 그런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을 찾게 되고, 그것이 미륵을 형상화 시킨 미륵입상으로 표현된 것이라고 본다. 이 일대의 미륵입상은 모두 거대석불로 조성이 되었는데, 그 또한 이 지방 미륵입상의 공통된 표현방법이다.



아마도 이렇게 거대석불입상을 세운 것은 미륵불이 하루 빨리 현신해, 중생의 고통을 잊게 해주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인지도 모른다. 기솔리의 석불입상을 보면서 그때나 지금이나 중생들이 바라는 것은 하나일 것이라는 점이다. 바로 세상을 살면서 조금이라도 고통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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