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 익산시 여산면 여산리에 가면 전북 유형문화재 제93호인 여산동헌이 자리하고 있다. 이 동헌 건물은 조선 시대에 고을의 수령이 집무를 보던 청사이다. 이 건물은 3단의 계단식 건물 제일 위에 자리를 잡고 있다. 맨 아래는 대원군의 쇄국정책의 일환으로 전국을 피로 물들인 병인박해로 인한 아픔의 장소이다.

조선 고종 3년인 1866년 정월에 대원군은 전국에 천주교의 탄압 교령을 포고했다. 병인사옥, 혹은 병인박해라고 하는 이 천주교의 탄압 포고령으로 인해 여산 동헌의 맨 아래 뜰에서는 천주고 신도들을 잡아와, 얼굴에 물을 뿌리고 백지를 여러 겹 붙여 호흡을 못하게 만드는 백지사를 행한 곳이다.


한식 건물의 아름다움을 지닌 동헌

여산동헌은 조선 조 말기에 벽과 방의 구조를 일부 개조하기는 했지만, 비교적 원형을 잘 보존하고 있는 건물이다. 특히 추녀와 대청마루에서 한옥의 멋스러움이 그대로 드러나고 있다. 동헌 앞뜰 우측에 서 있는 수령 600년이 넘는 느티나무는 이 동헌의 역사를 말해주고 있다.

전북 기념물 제116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이 느티나무는 여산 동헌과 주변에 7그루가 집중적으로 분포되어 있는 점으로 보아, 여산 동헌과 관계가 있을 것으로 추정한다. 이 느티나무를 보면 여산 동헌은 조선조 태종 조에서 세종 조대에 설치했을 것으로 보인다. 이 느티나무는 가슴 높이 둘레는 4.5m, 높이는 22m 정도이다.



여산동헌은 한옥의 아름다움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여산동헌을 정면 5칸, 측면 2칸으로 구성되었다. 동헌을 바라보면서 좌측 2칸은 뒤로 물린 방을 드리고, 우측 세 칸은 마루로 놓았다. 이 대청에서 고을의 수령이 집무를 맡아 본 것이다. 여산은 고려 공양왕 3년인 1391년에는 감무를 두었고, 조선 태종 2년인 1402년에는 여산현으로 불렀다. 그 뒤 세종 18년인 1436년에는 원경황후의 외향이라 하여 군으로 승격이 되기도 했다.




동헌은 장주추를 써 높였다. 그리고 기둥은 보수를 한 흔적이 역력하며, 대청의 뒷벽은 판벽으로 구성했다.
 
동헌 한 편에 남아있는 아픔, 척화비

동헌은 구조가 간단하면서도 한옥의 멋을 그대로 들어내고 있다. 대청마루 밑은 앞을 벽으로 막아 그 안에 아궁이를 내고, 주초는 장초석을 사용했다. 마르를 높게 만들고 그 밑으로 아궁이를 낸 것도 이 건물의 특징이다. 대청의 뒷벽은 모두 판벽으로 마감을 했으며, 판자문을 내었다. 3단으로 구성된 축대 맨 위에 자리한 동헌. 아마 이곳에서 호령을 한다면 밑 뜰에 모인 사람들은 오금이 저렸을 것이다.


동헌 앞뜰에 서 있는 느티나무는 수령이 600년이 넘었다

동헌의 우측에는 일각문이 있는데, 그 사이에 비석이 줄지어 서 있다. 송덕비라도 모아 놓은 것일까? 그런데 그 앞에 철책으로 둘러 친 한 기의 비석이 눈에 띤다. ‘척화비’다. 대원군이 쇄국정책을 펴면서 전국에 세운 척화비 중에 하나이다. 그 비를 보면서 마음이 아프다, 저 비로 인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받고 이 앞에서 목숨을 잃었을 것인지.

더위는 한풀 간다고 하지만 아직 한 낮의 더위는 따갑다. 동헌마루에 올라 앉아 그늘을 드리운 느티나무를 바라다본다. 철 늦은 매미 한 마리가 목청을 돋는다. 저 매미도 이 여름이 가는 것이 안타까운가 보다. 세월은 그렇게 흘렀어도 동헌 앞마당의 느티나무가 변하지 않듯, 이곳의 아픔도 쉬이 가라앉지는 않을 것만 같다.

동헌의 경내에 서있는 송덕비와 그 앞에 섰는 척화비

절을 찾아가면 대웅전이나 석불, 혹은 부도 탑 앞 등에서 있는 석등을 볼 수가 있다. 이 등은 어둠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고통을 받고 있는 중생들을, 부처님의 자비광명으로 깨달음을 주어 어둠에서 벗어나라는 뜻을 갖고 있다. 이 석등은 실제로 불을 켜는 경우가 있어 실용적인 성격이 강했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면서 후대에 이르러서는 불전이나 탑 등의 앞에 세우는 장식적인 축조물로 변하고 말았다. 석등은 대개 세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하대석과 중간인 석주, 그리고 불을 밝히는 화사석, 맨 위에는 지붕돌을 얻는 형태가 석등의 일반적인 모습이다. 논산시 관촉동 254번지 관촉사 경내에 자리한 석등은 보물 제232호로, 고려시대에 조성이 된 석등이다.


거대한 석등 은진미륵과 어우러져

관촉사 미륵보살입상 앞에 서 있는 석등은 그 높이가 5,45m나 되는 거대한 석등이다. 이 석등은 남한에서는 화엄사 각황전 앞에 있는 석등 다음으로 거대 석등으로 본다. 이 석등은 석조미륵입상이 세워진 해인, 고려 광종 19년인 968년에 조성한 것으로 기록에 보인다. 이 석등은 4각의 석등으로 화사석이 중심이 되어, 아래에는 3단의 받침돌을 쌓고, 위로는 지붕돌과 머리장식을 얹었다.

이 관촉사 석등은 여러모로 특이하다. 우선 화사석이 2층으로 되어있다는 것도 특이하지만, 창이 넓고 기둥이 가늘어 조금은 불안한 감을 주기도 한다. 전체적으로 석등의 평면이 정사각형으로 이루어진 전형적인 고려시대 양식으로, 아래 받침돌과 위 받침돌에 새겨진 굵직한 연꽃무늬가 두터움을 드러내고 있다.





중앙에 둥근 기둥으로 조형을 한 기둥은 굵고 조금은 투박하게 제작이 되었으며, 위아래 양끝에는 두 줄기의 띠를 두르고 중간에는 세 줄기의 띠를 둘렀다. 특히 중간의 세 줄기 중에서 가장 굵게 두른 가운데 띠에는 여덟 송이의 꽃을 조각하여 뛰어난 조각미를 자랑하고 있다. 아마 이러한 꽃이 조각되어 있지 않았다면, 그저 평범한 석등으로 제작이 되었을 것이란 생각이다.

귀꽃이 아름다운 지붕돌

화사석이 2층으로 이루어진 관촉사 석등은 화사석 1층에 4개의 기둥을 세웠다. 이 기둥은 지붕돌을 받치도록 하였는데, 지붕돌의 이랫부분은 다듬지를 않은 듯하다. 각 층의 지붕돌은 처마 끝을 가볍게 올린 듯 곡선을 그리고 있으며, 네 귀퉁이에는 큼직하게 귀꽃을 조각하여 생명이 없는 찬 돌에 부드러움을 주었다. 화사석 위에 올린 머릿돌 꼭대기는 불꽃무늬가 새겨진 큼직한 꽃봉오리 모양의 장식을 두었다.




이렇게 거대한 석등을 조각하면서도 그 하나하나에 많은 공을 들인 관촉사 석등. 고려 시대 최고의 걸작품으로 꼽히는 이 석등은 벌써 천년이라는 시간을 훌쩍 넘겨 오랜 시간을 풍상을 겪었으면서도, 저리도 장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다. 아마 또 앞으로 얼마의 시간을 저리 서 있을지, 오늘 그 석등 앞에서 고개를 숙인다.

전주 경기전 앞에 가면 성당이 있다. 전동성당이라 부르는 이 성당은 1908년에 불란서 보두네 신부가 성당 건립에 착수를 하여, 1914년에 완공했다. 벌써 역사가 100년이나 된 이 성당은, 중국에서 건너 온 100여명의 벽돌공들이 직접 벽돌을 구워 건축을 했다. 이 성당으로 인해 근처에는 중국인 거리가 생겨나기도 했다.

전동성당은 현재 국가 사적 제288호로 지정이 되어있다. 전동 성당을 세운 자리는 우리나라 최초의 순교지이기 때문에 의미가 더 크다고 하겠다. 조선조 정조 15년인 1791년 12월 8일 우리나라 최초의 순교자인 윤지충(바오로, 당시 32세)과 권상연(야고보, 당시 41세), 그리고 순조 원년인 1801년 10월 24일에는 호남의 첫 사도인 유항검(아우구스티노, 당시 45세)과 윤지헌(프란치스코, 당시 37세) 등이 이곳에서 순교를 했다.



믿음의 순교지에 세운 성당

우리나라 첫 순교지인 이곳에 세운 성당은 웅장하고 화려한 로마네스크 복고양식으로, 인접한 풍남문과 경기전 등과 함께 전통과 서양문화의 조화를 선보이고 있다. 첫 순교자인 윤지중은 현 충남 금산에서 명문가의 후손으로, 1791년 모친상을 당하였다. 그는 모친상을 당하면서 당시 유교식의 절차를 따르지 아니하고, 천주교의 제례절차에 따라 장례를 모셨다.

나라의 법을 따르지 아니하고 천주교식의 장례절차를 따랐다고 하여, 외종사촌 권상연과 함께 1791년 12월 8일 오후 3시에 이 자리에서 참수를 당했다. 시체는 당시 국법에 따라 9일간이나 효시가 되었다.





피로 얼룩진 풍남문의 돌로 주추를 삼다

1801년 10월 24일, 사도 유항검과 윤지충의 동생인 운지헌은 대역모반죄라는 억울한 죄명을 쓰고 능지처참 형을 당했다. 그리고 호남의 첫 사도인 유항검의 목은 사람들에게 경각심을 주기 위해, 풍남문의 누각에 매달려졌다고 한다. 그로부터 90년 정도가 지난 1889년 봄에 전동성당의 초대 주임신부로 부임한 프랑스 보두네(한국명 윤사물) 신부에 의해서, 1908년에 착공이 되었다.

이 건물은 비잔틴풍의 건물로 지어졌으며, 설계는 프와넬 신부가 담당을 하여 1914년에 완공을 하였다. 당시 이 건물을 지을 때 주춧돌은 풍남문의 성벽을 이용했다고 한다. 사도 유항검의 피로 얼룩진 돌을 이용해 의미를 더하고 있다. 최초로 주임신부로 부임한 보두네 신부는 1859년 9월 25일 프랑스 아베롱 지방에서 태어났다. 1884년 9월 20일 사제서품을 받았으며, 1885년 10월 28일 한국으로 입국했다.




1889년 5월 전주본당 주임신부로 부임하여 26년간 재직을 하였으며, 1915년 5월 27일 선종에 들었다. 보두네 신부는 본당과 사제관을 신축하였으며, 이 두 건물이 사적으로 지정이 되었다. 전동성당은 호남 최초의 서구식 건물이다.

한국 최초의 순교지 위에 세워진 전동성당. 입구는 마치 우리나라의 솟을대문을 연상케 한다. 중앙을 높이 두고 양편을 낮게 조성을 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외국 영화에서 나오는 고성을 연상케 하는 앞면과 측면은 볼수록 웅장하다. 안으로 들어가면 촘촘히 놓인 기둥 위에 나란히 보이는 창문들이 이채롭다. 연인들 두어 쌍이 앉아서 밀담을 나누는 모습이 보기 좋다.




사제관 앞에는 배롱나무의 꽃이 지기 시작한다. 나무 밑에는 젊은 연인들이 다정하게 앉아있는 모습이, 흡사 서구 어느 한가한 공원의 모습을 보는 듯하다. 저 젊은 연인들은 이곳이 피의 역사로 얼룩진 곳이라는 것을 알고는 있는 것일까? 초가을 오후의 전동성당은 그렇게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 평온하기만 하다.

전북 익산시 왕궁면 왕궁리 산 80-1번지는 사적 제408호는 왕궁리 유적이다. 이곳은 ‘왕궁리성지’라고도 부른다. 이렇게 부르는 것은 이곳이 마한의 도읍지설, 백제 무왕의 천도설, 혹은 별도설 등이 이곳이라는 학설 때문이다. 또한 이곳은 안승의 보덕국설과 후백제 견훤의 도읍설이 전해지는 유적이기도 하다.

한창 발굴이 이루어지고 있는 왕궁리 유적지를 찾았다. 마침 공사를 쉬는 날이라 안내인의 안내를 받아 안으로 들어갔다. 지금은 유적지를 한창 발굴하고 있는 중인데, 성이 발견되었다는 것이다. 여기저기 표시를 한 곳은 아마 건물터인 듯하다. 유적지 앞쪽에 우뚝 서 있는 국보 289호인 익산 왕궁리 오층석탑. 백제석탑의 양식을 충실히 따른 통일신라 말, 또는 고려 초기의 석탑으로 보인다.


안정감 있는 형태의 왕궁리 석탑

오층석탑의 정확한 유래는 전해지지 않는다. 다만 탑 주변에서 「관궁사」,「대궁」등의 명문기와가 발견이 된 점으로 미루어, 궁성과 관련된 사찰이 있지는 않았을까 추정하고 있다. 왕궁리 석탑은 발굴, 복원 전까지만 해도 기단부가 땅속에 파묻혀, 토단을 쌓고 그 위에 탑을 세운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1965년 11월∼1966년 5월의 해체 수리 때에 밑에 석물로 된 가단부가 발견이 되어 원형을 복원되었다.


발굴중인 사적 제408호 익산 왕궁리 유적

멀리서 보아도 왕궁리 오층석탑은 균형이 잘 잡혀있다. 돌 하나하나를 맞추어 쌓아올린 것이 빈틈이 보이지 않는다. 기단부의 네 모서리에 8각의 부등변 고주형 주춧돌이 놓고, 우주석 사이에는 길고 큰 돌을 몇 단 쌓아 올렸다. 탑은 옥신과·옥개석이 모두 몇 장의 돌로 구성되어 있다. 1층 몸돌은 우주가 새겨진 기둥모양의 우주석과, 탱주가 새겨진 중간석으로 되어 8개의 돌로 이루어져 있다. 1층에서 위로 올라갈수록 몸돌은 작아지고, 옥개석도 그에 따라 넓이가 줄어들고 있다. 이렇게 5층까지 올라가면서 매우 안정적인 모습을 보인다.

옥개석은 매우 넓은데, 받침과 지붕이 각각 딴 돌로 되어 있다. 받침은 각 층 3단으로 4개씩의 돌로 짜여 있으며, 등분을 하지는 않았다. 옥개석은 1층부터 3층까지는 8개의 돌로 짜여져 있으며, 4층과·5층은 4개의 돌로 구성하였다. 추녀는 얇고 추녀 밑은 수평이며, 끝부분에는 종을 매달았던 풍령공이 뚫려있다.





발굴 중이기 때문에 출입을 제한하는 줄을 쳐놓아 가까이는 갈 수가 없다. 뒷면과 탑 주위를 돌아보고 싶었으나, 금지를 시킨 줄 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었다. 문화재를 보호하기 위해 쳐놓은 줄을 스스로 넘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탑이 높아 상륜부가 가려 잘 보이지는 않지만, 상륜부에는 노반과 부발, 앙화, 그리고 부서진 보륜 1개가 남아 있다.

왕궁리 석탑 국보라서 다르다. 그 아름다움이

전국을 다니면서 수많은 탑을 보아왔지만, 왕궁리 오층석탑 앞에서는 순간 숨이 막히는 듯하다. 어떻게 저렇게 안정감이 있게 조형물을 만들 수가 있었을까? 마치 거대한 틀에 부어 만든 것만 같은 정교함이 놀랍다. 국보로 지정이 된다는 것은 쉽지가 않다. 그렇다고 국보로 지정된 여느 석탑처럼 화려한 문양이 새겨진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엇인가 말로는 다 표현하기 어려운 고귀한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



마치 후원 한편에 꼭꼭 숨겨졌다가, 발을 걷고 버선코를 살며시 들고 나타나는 여인네와 같은 아름다움이 보인다. 그리고 그 단아한 자태는 범접할 수 없는 위엄이 있다. 한참이나 바라다보다가 ‘가자’는 일행의 목소리에 놀란다. 떨어지지 않는 발길을 억지로 끌며 돌아서지만, 그 단아한 아름다움은 한참이나 남아있을 것만 같다.

우리나라의 부처님의 조형물을 잘 살펴보면 두 손의 형태가 다르게 표현이 되어있는 것을 볼 수가 있다. 이렇게 손을 어떻게 취하고 있느냐에 따라 각각 그 의미가 달라지는데, 이를 ‘수인’이라고 한다. 천안시 목천읍 동리 178에 소재한 용화사 경내에는, 거대 석불입상 1기가 서 있다. 이 석불은 4m에 이르는 거대석불로 통일신라시대의 조각기법을 잇고 있는 고려 초기의 석불로 보인다.

이 석불은 손을 가슴께로 끌어올려 오른손은 손바닥이 밖을 위로 향하고, 왼손은 아래를 향하고 있다. 이를 ‘시무외여원인’이라고 하며, 모든 중생의 두려움과 고난을 없애주고 중생의 모든 소원을 들어준다는 의미이다. 이 수인은 불교전래 초기에는 석가모니의 모습이었지만, 이후 아미타불, 미륵불 등 보편적인 수인이 되었다. 하기에 ‘통인’이라고도 한다.


나라의 염원을 담은 고려초기의 거대석불

고려 초기의 불상을 보면 대개가 거대석불로 조형이 되었다. 이는 고려의 숭불정책과 아울러, 거대왕국으로 지향적 염원이 깃들어 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한다. 용화사 석조여래입상은 조각 수법이 매우 수려한 대형의 거불이다. 일반적으로 거대석불의 경우 그 조각기법이 다소 떨어지는데 비해, 이 석조여래입상은 나름대로 특징적인 형태를 보이고 있다.

현재 충남 유형문화재 제58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용화사 석조여래입상은, 머리 위 육계는 둥글고 나발은 선명하고 높게 얹혀 있다. 이마에는 백호가 양각되어 있고 두 귀는 크고 길다. 목에는 삼도가 뚜렷하게 보이고, 전체적인 형태는 중후하지만 약간은 비만형이다. 불상의 얼굴은 갸름하고 복스러운 얼굴에, 눈은 지그시 감고 있다. 콧날은 오뚝한 편이며, 입은 작고 단정하다.





전각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

법의는 통견으로 표현을 하였으며, 가슴께가 깊이 파여져 있다. 일반적으로 가슴에 보이는 매듭 등은 보이지 않는다. 법의는 양 어깨에서 U자 형으로 흘러내리다가 무릎에서는 민무늬로 표현을 하였다. 거대석불이지만 전체적으로는 균형이 잘 잡혀있으며, 옷주름이나 U자형의 법의 등이 형식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 발부분에는 앞으로 석조입상과 분리된 발이 있는데, 이는 후에 놓여진 것으로 보인다.

처음 이 석조여래입상이 발견되었을 때, 일대에서는 많은 기와 편과 팔각연화대석편, 석탑부재 등이 흩어져 있고, 불상 주위로 원형 주좌가 새겨진 방형초석이 7점이나 남아 있었다고 한다. 이는 석조여래입상이 전각 안에 모셔져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전면과 측면은 섬세하게 조각을 한데 비해, 후면은 쪼아낸 그대로의 형태가 남아있다.




전국을 다니면서 볼 수 있는 수많은 석조불상들. 그 나름대로 특징을 보이고 있는 것은 지역의 장인들에 의해서 조각이 되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러한 석불들은 당시 조각을 한 장인들의 깊은 불심을 엿볼 수 있어 소중함을 느낀다. 이렇게 거대석불을 조형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시간과 공을 들였을까? 단순한 조형물이 아닌 그 안에 내재된 숨은 마음을 조금이나마 읽어 낼 수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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