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이 바뀌면서 남들과 다른 날 쉬어야 하고, 남들은 쉴 때는 일을 해야한다. 그렇다고 남들처럼 온전히 쉬는 것은 아니다. 그저 편하게 몇 시간이라도 내 생활을 할 수 있을 뿐이다. 하지만 그것으로도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세상을 살다보니 화를 낼일 보다는 감사할 일이 많다는 것을 뒤늦게 배워나가고 있다.

 

매주 목요일은 마음 편하게 하루를 보낼 수 있는 날이다. 이 목요일이 나에게는 그렇게 중요할 수 없다. 가고 싶은 곳을 갈 수 있고,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는 날이기 때문이다. 모처럼 하루를 시간을 내어 멀리 여행을 떠날 수 없으니 그동안 꾹꾹 참고 있었던 문화재 답사를 떠나기로 마음먹었다.

 

문화재담사, 얼마나 마음 설레는 일인가? 30년 가까운 시간 전국을 돌며 수많은 문화재를 만났지만 아직 볼 것도 많고 갈 곳도 많다. 예전처럼 먼 길을 떠날 수 없으니 가까운 안성시를 찾아보기로 했다. 마침 함께 동행한 지인이 안성에 상당히 아름다운 카페를 알고 있다고 하면서 그곳에 들려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커피 한 잔을 하자고 한다.

 

 

아름다운 미산저수지 옆 카페

 

안성시 양성면 미리내성지로 299-8(미산리)에 소재한 카페엔비노 로스가든. 알고보니 탤러트 노주현씨가 운영하는 카페리고 한다. 친구들과 이곳을 들렸던 지인이 황혼이 너무 아름다운 곳이라고 안내를 해준다. 미산저수지 옆에 자리하고 있는 이 카페는 주변이 산과 저수지, 그리고 숲으로 쌓여있어 상당히 아름다운 공간을 확보하고 있는 곳이다.

 

22, 30도를 웃도는 날씨라고 하지만 이곳은 별천지인 듯하다. 앞으로는 시원하게 조망이 전개되고, 미산저수지가 바라다보이기 때문에 더운 줄을 모르겠다. 바람까지 시원하게 불고 있으니 얼마나 마음 편하게 쉴 수 있는 공간인가? 그저 이런 곳에서 단 하루라도 모든 세상시름을 다 잊고 지내고 싶은 마음이다.

 

어딜 가나 주변 소음이 문제다. 연예인이 운영하는 곳이고 주변경관이 아름답다보니 평일 한 낮인데도 꽤 사람들이 모여든다. 그러고 보니 이곳 손님들 대부분은 여자들이다. 주변사람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이야기를 하는 소리가 귀에 거슬린다. 접시가 깨질만도 하다. 저수지 주변을 돌면서 여기저기 구경을 하다보니 상당히 주변정리가 잘 되어있고 사람들이 좋아할 만한 곳이란 생각이다.

 

 

돌아오는 길에 만난 문화재 한 점

 

정해진 시간 안에 돌아와야 하는 중압감 때문인가? 오후 세 시가 넘어가면서 마음이 조급해진다. 마침 동행한 지인이 미리내성지를 돌아보다가 보고 싶은 문화재가 있으면 찾아가보자고 한다. 그 말 한 마디가 그리 반가울 수가 없다. 멀지 않은 곳에 경기도 기념물 제46호인 안성 대농리 석불입상을 돌아보기로 하고 그곳으로 향했다.

 

얼마만의 문화재답사인가? 안성시 대덕면 대농리 91에 소재한 경기도 기념물 제46호인 대농리 석불입상은 우리가 흔히 볼 수 있는 석불입상과는 다르다. 머리에 쓴 보관은 중절모와 같은 형태의 갓을 쓰고 있다. 커다란 나무 옆에 서 있는 석불입상은 하반부가 땅 속에 묻혀있기 때문에 전체적인 형태는 파악할 수 없다.

 

 

하지만 민머리에 오뚝한 코와 눈, 입 등은 산명하게 표시되어 있고, 귀는 어깨까지 늘어져 있다. 법의는 통견으로 두 어깨를 감싸 흘러내렸으며 오른손은 가슴 앞에서 보병을 잡고 왼손은 병을 받치고 있다. 이 석불입상은 그 조형한 형태로 볼 때 고려 때의 것으로 추정한다. 안성에는 유난히 미륵입상이 많은 곳이다. 아마 궁예가 이곳 칠장사에서 어린시절 수학을 했다고 하는데 그와 안성의 관계 때문은 아닐까하는 생각이다.

 

미륵은 석가모니 다음 후천세계에 부처가 될 것이라고 한다. 미륵불은 보살과 부처의 상으로 구분되는데 이 미륵입상은 불상으로 조성되었다. 손에 들고 있는 보병은 사람들의 병을 치유하는 약병으로 볼 수 있으며, 이 미륵입상은 약사불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동안 수많은 석불입상을 보아왔지만 이렇게 특이한 석불입상은 처음인 듯하다. 더구나 머리에 쓴 보관의 형태기 흡사 무관들이 쓰는 전립과 같은 형태로 조성되어 있기 때문에 더 많은 공부를 하게 만든다.

 

단 하루의 여유가 이렇게 즐거움을 줄 것이란 생각은 하지 못했다. 하루를 바쁘게 몇 곳을 돌아보면서 모처럼 생기를 되찾은 듯하다. 수원에 자리를 잡았을 때 수원의 문화재를 만나면서 한참이나 활기가 차 있었다. 그동안 잊고 있었던 문화재답사. 모처럼 만난 문화재 한 점에서 예전 그 열정을 되찾은 듯하다.

 

이 고인돌이 있던 곳에서도 성돌을 채취했나?

 

쐐기란 커다란 바위나 돌을 쪼개기 위해 깊은 구멍을 낸 것을 말한다. 예전 화성을 축성할 때 커다란 바위를 쪼개 성돌로 이용하기 위해 바위에 줄을 지어 판 쐐기자국이 있다. 이렇게 쐐기구멍을 낸 후 그곳에 바짝 마른 밤나무와 참나무를 박고 물을 부어 놓으면 나무가 불어나면서 그 팽창하는 힘으로 돌을 쪼개낼 수 있었다. 지금처럼 큰 도구를 사용하지 않고도 이렇게 바위를 절개해 낸 선인들의 지혜에 그저 머리를 조아릴 수밖에 없다.

 

수원의 팔달산과 여기산, 숙지산 등에는 화성을 축성할 때 성돌을 조성하기 위해 큰 바위에 조성한 쐐기자국을 발견할 수 있다. 그 모든 곳에서 바위를 쪼개 화성 축성장으로 옮겨 화성을 쌓았다. 그런데 광교박물관 뒤편에 있는 고인돌을 돌아보다가 그 고인돌 한 기의 받침돌에 쐐기자국이 있는 것을 보았다.

 

광교박물관 야외 측면에는 두 기의 고인돌이 있다. 그 중 박물관 뒤편에 자리하고 있는 고인돌은 이의동 작은 안골 마을 논 가운데 있던 것을 옮겨 온 것이다. 또 한 기는 광교박물관 주치장에서 박물관 입구로 들어가는 좌측에 자리하고 있다. 이 고인돌은 이의동 뒷골마을 언덕 경사면에 있던 것을 옮겨왔다고 한다.

 

쐐기자국이 선명한 고인돌

 

지석묘, 혹은 고인돌이라고 부르는 돌무덤은 우리나라 전역에 걸쳐 나타난다. 전 세계에 고인돌은 모두 6만 여기가 있는 것으로 추정되며, 그 중 3만 여기가 우리나라에 소재한다. 세계 고인돌의 절반이 우리나라에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 전역에 소재한 고인돌 군은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가 되기도 했다.

 

고인돌은 모두 3종류가 있으며 탁자식, 바둑판식, 개석식 등으로 그 유형을 구분한다. 탁자식은 평평한 굄돌을 세워서 땅위에 네모꼴의 방을 만들고 그 위에 덮개돌을 올려서 탁자처럼 조성한 것이다. 바둑판식은 땅 위에 3~6개의 받침돌이 덮개돌을 받치고 있으며, 지하의 무덤방은 돌놀, 돌덧널, 구덩 등의 형태가 있다. 개석식은 지상에는 커다란 덮개돌만 드러나 있으며 남방식 고인돌 혹은 무지석식 고인돌이라고 부른다.

 

수원에는 팔달산에 경기도 기념물 제125호로 지정된 팔달산 고인돌군과 수원박물관 입구에 자리하고 있는 금곡동 고인돌, 그리고 광교박물관 야외에 전시된 이의동에서 옮겨온 고인돌 등이 소재하고 있다. 이 세 곳의 특징은 모두 물과 가까이 있다는 점이다. 즉 청동기시대 인류의 주거지는 물이 있는 곳이었을 것이고, 고인돌도 물이 흐르는 주면에서 발견되고 있다.

 

그런데 이 이의동 뒷골마을 언덕 경사면에서 옮겨왔다는 지석묘의 덮개석 옆에 놓인 받침돌에 쐐기 흔적이 보인다. 이 돌이 나중에 고인돌의 형태를 조성하기 위해 딴 곳에서 가져왔다고 할 수 없는 것이 덮개석과 재질이 흡사하다는 점이다. 하기에 이 고인돌의 쐐기자국은 의문점을 가질 수밖에 없다.

 

 

쐐기자국의 진위 밝혀낼 수 있을까?

 

8일 오후, 광교박물관 2층에 자리한 사운 이종학 선생의 자료를 찾아보기위해 방문한 광교박물관 야외에서 만난 고인돌. 위편에는 무수한 성혈의 흔적이 있는 이 고인돌 한 기가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든다. 이 덮개석 옆에 놓인 돌에 쐐기흔적. 이 흔적이 쐐기흔적이 맞는 것인지, 아니면 후일 누군가에 의해 조성이 된 것인지 아직은 알 수 없다.

 

자료를 정리하면서도 그 쐐기흔적 하나로 인해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든다. 내일은 박물관 관계자들에게 고인돌 쐐기자국에 대해 질문을 해봐야 할 듯하다. 역사란 밝혀내는 것이라고 했던가? 우연히 찾아본 고인돌 쐐기자극 하나가 밤잠을 이루지 못하게 만들 듯하다.

고성 정수암 산신각 점안식이 열리던 날

 

4월 초파일은 부처님 탄생일이다. 부처님 오신 날또는 석가탄신일(釋迦誕辰日)’이라고 하는 초파일은 불교 연중행사 가운데 가장 큰 명절로 여기며, 이 날은 기념법회를 비롯하여 연등놀이, 관등놀이, 방생, 탑돌이 등 각종 행사가 열리기도 한다. 초파일은 각 절마다 가장 많은 사람들이 몰려드는 날이다.

 

각 사찰에서는 법당과 경내, 거리에 등을 내달고 경내에 수많은 등을 밝히는 등 공양 행사를 이어 온다. 이날은 육법공양을 행하는데 '육법(六法)'이란 깨달음과 관련된 6가지 공양물로 정신적인 상징을 의미하는 것이다. 육법공양물은 쌀, , , , 과일, 차 등으로 이러한 공양물을 부처께 바치는 의식이다.

 

4월 초파일에 다는 연등은 그 의미가 깊고 오래되었다. 4월 초파일 연등에 관한 최초의 기록은 고려사에서 볼 수 있는데, 고려 의종 때 백선연이 48일에 점등했다고 적고 있다. 당시에는 초파일 연등을 열면 3일 낮과 밤 동안 등을 켜놓고 미륵보살회를 행했다고 한다. 이러한 연등회는 조선 태종 15년인 1415년 이후로는 기록에 나타나지 않는다.

 

 

초파일 법회를 위해 찾아간 고성 정수암

 

강원도 고성군 현내면 산학리에 소재한 정수암(주지 진관스님)을 찾았다. 벌써 다녀온 지가 며칠이나 지났다. 지난 1일 찾아갔다가 3일에 돌아왔으니 4일이나 지난 셈이다. 다녀오고 나서 수원 화성연극제며 많은 행사로 인해 제때 글을 쓰지 못하고 말았다. 무슨 일이나 바로 글을 써야 감이 잡히는데, 단 하루라도 늦어지면 처음에 들었던 생각이 무뎌지기도 한다.

 

정수암을 찾아간 것은 지난해 조성한 마애불 때문이다. 지난해 정수암을 찾아가 아침에 문을 열고 나오다가 법당 옆 바위에 마애불을 보았다. 분명 바위였는데 그 바위에 마애불을 조성한 것이다. 물론 착각이다. 하지만 순간 저 바위에 마애불을 조성하라는 것인가?”라는 생각이 들어, 몇 사람과 의논 끝에 마애불을 조성한 것이다.

 

지난 해 마애불을 조성하면서 정수암은 큰 불사를 했다. 절 입구에 일광보살과 원광보살 상을 마련해 불이문(不二門)을 삼고, 인법당 뒤편에 큰 바위를 세워 산신각을 조성했다. 원래 계획은 마애불과 신신각을 부조로 각인하기로 마음먹었지만, 조성을 맡은 여주시에 거주하는 김원주 작가의 일정으로 인해 산신각은 부조로 조성하지 못하고 그림을 그렸다.

 

 

마을 여인들이 지켜 낸 산신각바위

 

원래 저 산신을 그린 바위가 지금보다 더 컸다고 하네요. 그런데 돌이 워낙 좋으니까 조경업자가 저 바위를 산 후 쪼개서 가져가려고 했나 봐요. 바위를 쪼갠다는 소식을 들은 마을 분들이 막았데요. 저 바위가 예전에는 마을 여인들이 위하는 바위였다는 거예요

 

정수암 주지 진관스님이 전하는 이야기로는 그 바위에 치성을 드리고 난 후 아들을 낳은 여인이 있어 마을에서 신령한 바위로 여긴다는 것이다. 그런 바위를 쪼개 가져간다는 소식에 여인들이 반대를 하고 나섰다고 한다. 바위는 일부 쪼개서 가져갔다고 하는데도 불구하고 세운 면의 높이가 2m가 넘는다.

 

그 바위가 마을에서 위하는 산신바위예요. 그런데 스님이 주지로 오시고 나서 그 비위에 산신도 그림을 저렇게 멋지게 그려놓아 이제 제 모습을 찾은 것 같아 여간 좋은 것이 아닙니다

 

초파일에 절을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공양할 비빔밥에 들어갈 나물을 다듬고 있던 신도 한 분이 하는 말이다. 정수암 신도들은 연세가 드신 분들이 많은 것도 특징이다. 초파일이 되면 고성군 산학리만 아니라 속초와 서울, 구리, 남양주, 수원, 전주 등 먼 곳에 거주하는 신도들까지 모두 찾아오기 때문에 100인분의 비빔밥을 준비한단다. 그동안 정수암은 초파일이라고 해도 50여명의 신도들이 찾아왔을 뿐이다.

 

그래도 올해는 연등을 100개 넘게 달았어요. 초파일에 찾아올 순 없어도 많은 분들이 등 값을 보내주셨거든요

 

모든 이들이 마음을 합한 산신각 점안식

 

오늘 부처님 오신 날에 다들 예불을 마치고 공양을 하셔야하는데 신신각 점안식까지 다 마치고나서 공양을 하셨으면 좋겠습니다. 다들 괜찮으세요?“

 

초파일 예불을 마치고난 뒤 신도들이게 시간이 조금 걸려도 신신각 점안식을 마친 후 공양을 해도 되겠느냐고 묻자, 다들 그렇게 하겠다고 한다. 이날 정수암을 찾아 온 신도들은 어림잡아 70여명, 그 모든 사람들이 산신도가 그려진 바위 앞에 나아가 점안식에 동참을 한다. 연세가 드신 분들은, 그동안 산신바위를 대우하지 못해 마음이 불편했는데 정말 다행이라고 한다. 이제 산신바위가 제 모습을 찾았다는 것이다.

 

정수암 주지 진관스님의 인도로 점안식에 참석한 신도들은 모두 손을 오색실을 잡고 산신바위를 에워쌓았다. 점안식 의식을 마치고 난 뒤 한 신도가 하는 말에 공감을 한다.

 

부처님이 어디 큰 절에만 계시겠어요. 난 우리 절에 참 부처님이 계시다고 생각해요. 요즘 종교가 제 몫을 못하고 있는데, 이 작은 정수암은 날마다 작은 불사를 계속하고 있잖아요. 이 산신바위는 정말 영험한 바위예요. 이 금강산 자락에 자리한 절도 그렇고 저 바위도 그렇고, 지난해 조성한 마애불도 그렇고. 그런 것을 보면 부처님이 정말 이 절에 계시다는 생각이 들어요. 신도들이 하나같이 이웃을 먼저 생각하고 있으니 이 절에 부처님이 계신것이죠

 

종교는 사람들의 마음을 편하게 해주어야 한다. “신도들에게는 어떠한 부담도 주지 않겠다는 정수암 주지 진관스님. “인연이 닿으면 누군가 불사를 하러 오지 않겠느냐며 웃는다. 강원도 고성군 작은 암자 정수암은 늘 그렇게 좋은 인연으로 만나는 사람들이 들리는 곳이다.

 

여주시 도곡리 석불좌상을 찾아가다

 

문화재란 있던 그 자리에 소재한다. 어느 것은 수천 년을 자리 한 번 옮기지 않고 지키고 있는 것들도 있다. 문화재가 조성 될 때는 역사적으로나 사회성, 혹은 지리적 여건 등 여러 가지를 종합해 조성한다. 하기에 문화재는 제 자리를 지키고 있을 때 가장 빛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수없이 많은 문화재들이 제 자리를 지키지 못하고 옮겨져 있다. 그것 하나만으로도 우리는 문화재를 제대로 보존하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다.

 

문화재가 제 자리를 지키지 못하고 옮겨진 사연이야 다양하다. 하지만 꼭 이런저런 이유를 대가며 문화재를 딴 곳으로 옮겨야만 했을까? 허울 좋게 보존이라는 구실로 자리를 옮긴 많은 문화재들을 정작 조성한 자리가 아닌 딴 곳에서 찾아보아야 한다는 것은 어찌보면 우리가 갖는 슬픔인지도 모른다.

 

 

문화재 답사를 한지 30년 세월이 훌쩍 지났다. 그동안 수없이 많은 문화재를 답사라는 길에서 만났다. 하지만 그런 문화재 답사라는 것이, 시간이 남고 돈이 많아 하는 것이 아니다. 나에게는 문화재 답사가 숙명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젊은시절, 우연히 만나게 된 문화재 한 점으로 인해 30년이 넘는 세월을 전국을 걸으며 문화재를 찾아다녔다.

 

이제 힘도 부치고 시간적 여유도 없다. 어찌보면 문화재답사를 젊은시절 객기로 시작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렇게 돌아다니면서 만난 많은 문화재들, 나에게는 누군가 지켜내야 할 우리의 정신적인 유산이라는 생각에서이다. 아무리 경제가 발전하고 수많은 종류의 문화예술 활동을 한다고 하지만, 소리없이 그 자리를 오랜시간 지켜내고 있는 문화재를 등한시한 민족은 역사 속에서 사라졌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왜 문화재를 지켜내야 하는 것인지 답이 된다.

 

 

알아보기 힘든 작은 안내판, 좀 더 크게 했더라면

 

지난 24일 오후, 여주시 금사면 도곡리 산 7에 소재한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70호인 여주 도곡리 석불좌상을 찾아갔다. 문화재는 지나는 길에 몇 번이고 들려보고는 한다. 혹 그동안 훼손이 된 곳은 없는지, 아니면 문화재 주변에 무슨 이상은 없는지, 그런 것들이 궁금하기 때문이다. 문화재를 지나는 길에 다시 찾아보는 것은 몇 년이 지난 뒤에 찾아간 문화재 한 점이 심하게 훼손되어 있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도곡리 석불좌상은 마을길에서 산쪽으로 소로를 지나야 만날 수 있다. 몇 년 전인가 도곡리 석불좌상을 찾아갔을 때, 누군가 버리고 간 각종 제물과 기물 등으로 지저분하게 어지럽혀져 있는 모습을 보았다. 이번에도 또 누군가 주변을 훼손한 것은 아닐까 걱정이 된다. 그런데 한 번 간 길은 절대 잊은 적이 없는 나로서도 황당한 일이 벌어졌다.

 

길을 찾지 못한 것이다. 주변이 변해도 너무 변했다. 석불좌상을 찾아가는 진입로에는 그동안 볼 수 없었던 펜션들이 여기저기 길 양편으로 자리를 잡고 있다. 문화재를 찾아가는 길 안내표지가 길 한편에 조그맣게 서 있기 때문에 산을 오르는 길을 찾기조차 힘들다. 글씨라도 좀 큼지막하게 세웠거나 제대로 된 안내판을 길이 변하는 부분에 세웠다면 한결 수월했을 텐데. 아직 우리나라 문화재에 대한 관계기관들의 인식은 많이 부족하다는 생각이다.

 

 

석불좌상 앞에 무릎을 꿇다

 

몇 번이고 길을 찾아 헤매다가 찾은 작은 안내판 하나. 주변 환경이 변해 길을 찾기조차 어려웠지만 도곡리 석불좌상이 소재한 전각이 산 밑에 보인다. 진입로는 시멘트포장을 해 말끔히 정리하였다. 지난 번 찾아왔을 때보다 주변은 많이 정리가 되고 깨끗하다. 그것 하나만으로 안내판이 적다고 투덜대던 마음이 싹 가신다.

 

석불좌상을 모신 전각은 맞배지붕 기와로 조성하였다. 앞에는 배례석인 듯 넓적한 돌도 보인다. 무엇을 망설이랴. 그 앞에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린다. 이 나라에 서원할 것이 한 두 가지가 아니다. 그래도 우선은 나라가 평안할 것을 먼저 서원한다. 뒤죽박죽이 되고 몇 갈래로 찢어진 나라. 온전히 하나로 봉합될 날이 하루 빨리 오기를 서원한다.

 

여주시 도곡리 석불좌상은 통일신라 말기작품으로 추정한다. 원적산 자락에 북동쪽을 향해 팔각대좌 위에 자리한 석불좌상. 결가부좌를 하고 있는 이 석불좌상은 전체적으로 알맞은 비례를 보이고 있다. 이곳에서 20m 정도 떨어진 북쪽에 절터가 있다는 점으로 보면 이 석불좌상이 제 자리에서 멀리 벗어난 것은 아니란 생각이다.

 

 

불상은 육계가 많이 마모가 되었지만 삼도는 뚜렷하다. 이 석불좌상은 특이한 수인을 하고 있다. 오른손은 가슴 부근에서 약지와 새끼손가락 두 개를 펴고, 왼손은 결가부좌한 다리위에 손바닥을 위로 하고 있다. 법의는 모두 통견으로 처리했다. 석불좌상을 모신 팔각대좌는 좌상에 비해 작은 편이라 조금은 불안해 보이기도 한다.

 

석불좌상 앞에 머리를 숙여 서원을 하고 난 뒤 석불좌상 뒤편으로 돌아가니 이상한 것이 보인다. 정기계측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일부구간에 발생한 이격 및 균열현상에 대한 변화추이와 진행을 알아보기 위함이라는 안내문구가 있다. 천여 년이 훌쩍 지난 세월을 많은 세인들의 마음속 염원을 받아들이며 자리를 지키고 있었을 석불좌상.

 

그런 석불좌상이 이격과 균열현상을 보이고 있는지를 알아본다는 안내에 마음이 편치않다. 얼마나 많은 우리의 문화재가 주변환경에 의해 수명을 달리하고 있는 것일까? 문화재답사를 계속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바로 누군가 이 소중한 문화유산을 둘러보고 지켜내야 한다는 것이다. 단지 나도 그 중 한명일 뿐이고, 더 많은 사람들의 관심이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정월 보름 전에 각 마을마다 제를 지내던 신표

 

우리민족은 음력 정월이나 10월 상달이 되면 마을마다 반드시 하고 넘어가는 의식이 있다. 바로 대동의 안녕과 가가호호의 안택을 기원하는 마을제사를 지낸 것이다. 장승제, 성황제, 거리제 등은 모두 마을의 안녕과 풍농과 풍어, 그리고 가내의 안과태평을 기원하던 우리민족의 공동체 의식이었다.

 

4일 수원박물관에서 입춘을 맞이해 시민들에게 춘축을 선사한다는 소식을 접하고 수원박물관을 찾았다. 입구에서 차를 내려 박물관으로 오르다 보면 가장 먼저 만나는 것이 돌을 쌓은 누석탑인 성황당이다. 그리고 그 뒤편에는 5기의 목장승이 눈을 부라리고 서 있다. 부라린 눈이 아무리 보아도 무섭기는커녕 오히려 정감이 있는 모습이다.

 

그동안 수원박물관은 내 집처럼 드나들었지만 이렇게 성황당과 장승이 서 있었음에도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전국을 다니면서 워낙 많은 성황당과 장승을 보아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입춘이라서 그런가? 푹한 날씨에도 미쳐 눈이 녹지 않은 잔디 위에 서 있는 탑과 성황당을 그냥 지나치기에는 정유년 벽두부터 너무 소란스럽다는 생각이다.

 

 

돌로 쌓은 성황당, 전국 곳곳에서 만날 수 있어

 

돌을 쌓아올려 누석탑으로 조성한 성황당은 가장 보편적인 형태이다. 성황당은 마을의 안녕과 길손의 안녕을 위해 길거리나 마을의 입구 등에 세우는데 지나는 길에 돌을 이곳에 올려놓고 안전한 행로를 기원하기도 한다. 전국을 여행하다보면 지금까지 가장 많이 남아있는 것이 바로 상황당과 장승이다.

 

성황당은 건물로 축조했을 때는 명칭이 달라진다. 성황당을 당산(堂山)’ 혹은 서낭이라고도 부르는데 경기도와 충청도 지방에서는 산신당· 산제당 혹은 서낭당이라고 부른다. 영남과 호남 지방에서는 주로 당산이라고 한다. 성황당은 돌탑이나 신목, 혹은 조그마한 집을 지어서 신표로 삼는다. 집을 지었을 때는 그 안에 당신(堂神)을 상징하는 신표를 놓거나, ‘성황지신이란 위패를 모셔 놓는다.

 

당산은 내륙지방과 해안지방의 부르는 명칭 또한 다르다. 내륙에서는 신당, 당집, 당산 등으로 부르지만, 해안이나 도서지방에서는 대개 용신당이라고 부른다. 이 당산에서는 매년 정월 초나 보름, 혹은 음력 10월 중에 길일을 택해 마을 주민들이 정성을 드린다. 당산제를 지낼 때는 집집마다 추렴을 하여 제물을 마련하는데, 이런 이유는 마을 사람 모두가 똑 같이 복을 받게 하기 위함이다.

 

 

이빨 드러낸 장승군, 오히려 반갑소

 

수원박물관 초입에 서 있는 5기의 목장승. 장승은 나무나 돌로 만들어 세운다. 나무를 깎아 세우면 목장승이라 하고, 돌을 다듬어 세우면 석장승이라 한다. 장승만 세우는 경우도 있지만, 솟대, 돌무더기, 서낭당, 신목, 선돌등과 함께 동제의 복합적인 형태로 표현이 되기도 한다. 장승은 그만큼 다양한 형태로 표현되고 있다.

 

장승의 기원에 대한 정설은 아직 명확하지 않다. 대개는 고대의 남근숭배설(男根崇拜說)’과 사찰이나 토지의 경계표지에서 유래되었다는 설 등이 있기도 하지만, 그 어느 것도 정확한 것은 아니다. 일설에는 솟대나 선돌, 서낭당에서 유래되었다는 설 등도 전해진다. 일부 장승 중에는 거리를 알려주는 로표장승도 존재한다.

 

 

목장승의 경우에는 복판에 글을 써서 표시하는데 대개는 천하대장군이나 지하대장군, 혹은 지하여장군, 축귀대장군 등으로 표현한다. 수원박물관 입구에 서 있는 장승은 모두 축귀대장군(逐鬼大將軍)’으로 앞에 방위표시를 하였다. 그 중에는 여장군도 서 있어 나라를 지키거나 마을을 지키는 데는 남녀구별이 없음을 알려준다.

 

새해가 시작된다는 입춘. 수원박물관 앞에서 만난 성황당과 목장승 앞에서서 고개를 숙인다. “정유년 한 해 이 나라가 안정을 되찾고 서민들이 마음 편하게 두 다리 쭉 펴고 사는 날이 하루 빨리 오길 바란다는 간절한 마음을 전한다. 모처럼 성황당과 장승 앞에 서 머리를 숙였으니 올해 꼭 이루어질 것이란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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