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포항시 북구 송라면 보경로 523 (중산리) 보경사 경내에는 고려시대 5층 석탑 한 기가 자리하고 있다. 이 탑은 보경사 적광전 앞에 서 있기 때문에 금당탑이라고 부른다. 높이 약 5m 정도의 오층석탑은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203호로 지정이 되어있으며, 고려 현종 14년인 1023년에 건립하였다.

 

보경사는 내연산에 자리하고 있으며 602년 진나라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신라 지명법사가 진평왕에게 '동해안 명산에서 명당을 찾아 자신이 진나라의 도인에게 받은 팔명보경을 묻고 그 위에 불당을 세우면 왜구의 침입을 막고 이웃 나라의 침입도 받지 않으며 삼국을 통일할 것'이라고 하였다.

 

이에 진평왕이 지명법사와 함께 내연산 아래에 있는 큰 못에 팔면보경을 묻고 못을 메워 금당을 건립하고 보경사라고 했다. 경내에는 보경사원진국사비(보물 252)와 보경사부도(보물 430)가 있으며, 조선 숙종의 친필 각판 및 5층석탑 등이 있다.

 

 

 

 

단아한 보경사 오층석탑

 

고려시대 탑의 특징은 화려하지 않다. 단아한 모습으로 석재를 올려 탑을 쌓는 것이 특징이다. 보경사 오층석탑 역시 탑이 단아하다. <보경사 금당탑기>에 보면 도인(道人) 각인(覺人), 문원(文遠) 등이 고려 현종 14년이 건립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보경사 오층석탑은 지대석 위에 기단을 놓고 그 위에 오층석탑을 쌓았다.

 

 

보경사를 찾아간 날은 날이 잔뜩 흐려 금방이라도 비가 뿌릴 것 같은 날 오후였다. 일주문을 지나 사천왕문을 들어서니 늘어선 전각들이 눈에 들어온다. 먼저 대웅전에 들려 잠시 숨을 고른 후에 절 경내를 한 바퀴 돌아보았다. 입구에서부터 늘어선 소나무 향이 짙게 드리운 것이 곧 비가 내릴 모양이다.

 

멀리까지 나갔으니 길을 재촉하야만 했다. 날이 흐려 금방이라도 어두움이 내리 깔린 것만 같은 날이기 때문이다. 먼저 보물 252호인 보경사 원진국사비를 촬영하고 난 뒤,오층석탑 앞에서 잠시 머리를 숙인다. 절을 찾아다니면서 문화재 답사를 하다가 보면 이렇게 귀한 문화재 앞에서면 절로 머리가 숙여지고는 한다.

 

 

 

 

중간에 보충이 된 보경사 오층석탑

 

보경사 오층석탑은 아래에 4매의 지대석을 놓았다. 그 위에 기단을 올렸는데 기단 받침은 새로 보충이 된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인가 석재의 색이 다르다. 기단의 면석은 4매로 남쪽과 북쪽의 2개의 면석이 동서면석 사이에 끼여져 있다. 동서 면석 역시 새롭게 조형한 것이다.

 

1976년 이 오층석탑을 보수하였는데, 보수할 당시 기단과 4, 5층의 몸돌, 그리고 5층 지붕돌 등이 새로 보충이 되었다고 한다. 보경사 오층석탑은 비례가 잘 맞아 안정감이 있다. 높이가 5m에 달하는 석탑치고는 균형이 제대로 잡혀있는 형태이다. 1층 몸돌에는 잠을통이 새겨져 있는 모습이 보인다.

 

오층석탑은 그리 화려하지는 않지만 균형이 잘 맞고 단아한 형태로 서 있어 안정감이 있다. 만일 이 오층석탑이 제대로 보존이 되었었다고 하면 수준급의 석탑일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 석탑의 층 받침은 3단으로 되어 있으며, 머릿돌의 처마는 약간 위로 치켜져 있다.

 

문화재는 소중한 유산이다. 그것이 어느 시대이건, 어느 종목에 해당하는가는 중요하지 않다. 그 문화재 하나가 그 자리에서 천년세월을 지키고 있다는 것이 더욱 소중하단 생각이다. 보경사 오층석탑 역시 중간에 보수를 해서 지금에 이르고 있지만, 우리의 소중한 문화재임에 틀림없다.

 

화성시 송상동 188에 소재한 용주사는 신라 문성왕 16년인 854년에 창건된 갈양사로써, 청정도량이었으나 병자호란 때 소실된 후 폐사가 되었다. 그 후 조선조 제22대 임금인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을 화산으로 옮기면서 절을 다시 일으켜 원찰로 삼았다.

 

조선전기에는 고려의 전통을 이어 왕이나 왕실의 무덤을 수호하고 죽은 사람의 명복을 빌기 위한 사찰이 간혹 세워지기도 하였으나, 하지만 조선후기에 와서 사림세력이 국권을 흔들면서 왕실에서의 사찰건립이 쉽지 않았다. 용주사를 마지막으로 하여 조선왕조에서의 왕실의 원찰은 더 이상 세워지지 못했으며, 이처럼 사회적 여건이 좋지 못하던 시대에 거대한 왕실의 원찰이 세워지게 되었던 연유는 정조의 지극한 효성 때문이다.

 

 

현륭원을 수호하던 용주사

 

용주사는 사도세자의 무덤인 현륭원을 수호하고, 그의 명복을 비는 것이 가장 중요한 기능 중에 하나였다다. 용주사는 창건이후 지금까지 가람의 구조가 크게 변모되지 않고, 창건당시의 상량문을 비롯하여 발원문등 용주사의 창건과 관련된 문헌 자료들이 많이 남아 있는 편이다

 

용주사 매표소를 지나 경내로 들어가다가 보면 홍살문이 보인다. 원래 사찰에는 홍살문을 세우지 않지만, 이곳은 현륭원을 지키는 사도세자의 원찰이기 때문에 홍살문을 세운 것으로 보인다. 이 홍살문을 바라보고 좌측으로 효행박물관이 자리하고 있다. 효행박물관 앞에는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212호인 오층석탑이 자리한다.

 

 

용주사에는 두 기의 오층석탑이 있다. 사람들은 간혹 천보루 앞에 서 있는 높이 4m의 오층석탑을 유형문화재로 잘못 알고 소개를 하기도 한다. 하지만 문화재로 지정이 된 오층석탑은 높이 4.5m의 이 화강암으로 조성한 고려시대의 석탑이다.

 

위패형 제액을 마련한 특이한 오층석탑

 

효행박물관 앞에 서 있는 이 오층석탑은 간략화 된 기단부와, 탑신부의 탑신석과 옥개석 등의 양식과 치석 수법을 볼 때 고려시대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다만 이 석탑의 기단부 면석부에 위패형 제액을 마련한 점은 드문 예에 속한다. 이 오층석탑은 딴 곳에서 옮겨온 것으로 전해진다.

 

이 오층석탑은 일반적인 석탑과는 차이가 난다. 오층의 지붕돌인 옥개석과 상륜부를 하나의 돌로 조성한 점이나, 처마가 수직으로 처리되었다는 점이다. 몸돌과 지붕돌을 각각 일석으로 조성한 것은 여느 탑과 다름이 없으나 1층 몸돌에는 문비가 새겨져 있다. 1. 2. 3층의 머릿돌의 옥개받침은 4단이나, 4층은 2단으로 이루어져 있다.

 

 

제일 밑에는 지대석을 놓고 그 위에 하대석을 놓았다. 지대석에는 사방에 귀꽃모양의 인상을 3구씩 새겨놓았다. 그리고 그 위에 올린 기단면석에는 위패형의 사각을 모각하였다. 부분적으로 훼손이 된 곳은 있지만, 고려시대의 석탑 중에서도 보기 힘든 형태로 조성하였다.

 

용주사를 찾아가 가장 먼저 만나게 된 오층석탑. 그 탑 앞에 서서 잠시 머리를 숙인다. 세상의 온갖 추악한 무리들을 벌하시고, 선한 사람들이 제발 마음 편하게 사는 날이 하루빨리 돌아오기를.

 

속초시 설악동 켄싱턴 호텔 길 건너편에 보면 장엄한 탑이 1기가 서 있다. 속초시내에서 신흥사를 올라가는 길 좌측에 서 있는 이 삼층석탑은, 보물 제443호인 향성사지 삼층석탑이다. 전형적인 통일신라시대의 탑의 모습을 하고 있는 이 탑은, 상륜부는 없어졌으나 그 모습이 웅장하고 잘 보존이 되어 있다.

 

8매의 돌로 구성된 지대석은 하단까지 지표에 노출되어 있고, 그 위에는 높직한 괴임대와 같이 4매의 장대석으로 결구된 기대를 마련하여 하층기단 면석을 받치고 있다. 하층기단면석은 대소 8매의 장방형석재로 이루어졌는데, 각 면마다 양우주와 중앙의 탱주가 돋을새김 되어 있다. 그 위의 갑석은 5매의 판석으로 덮였는데, 그 상면은 현저하게 경사를 이루었다.

 

자장이 창건한 향성사

 

신흥사사적에 의하면 향성사는 신라 고승 자장이, 진덕여왕 6년인 652년에 건립했다고 전해지는 신흥사의 전신이다. 지금은 신흥사가 뒤로 물러나 있지만, 이 삼층삭탑이 있는 자리로 보아 이곳까지 향성성의 가람이 형성되어 있었던 것 같다. 처음으로 해체보수를 할 때, 3층 탑신석 중앙에서 사리구멍이 발견되었으나 유물은 발견되지 않았다고 한다. 전체 높이가 4, 33m에 이르는 장엄한 탑이지만, 전체적으로는 간결한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

 

설악을 뒤로하고 수 백 년은 족히 넘었을 노송을 곁에 둔 삼층석탑, 그동안 이곳을 몇 번이나 지나쳤는데도 보지 못했을까? 아마 그동안은 나와 인연이 없었나보다. 나뭇가지 사이로 비치는 빛이 탑에 아른거리는데, 천년 그 자리에 서 있는 탑은 말없이 지나는 차들의 소음을 듣고 서 있다.

 

뒤편으로 흐르는 계곡의 물과, 그 너머에 있는 설악. 예전 같으면 그 탑의 자리에 서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불심이 일었을 것만 같다. 지난 시간 천년, 앞으로 또 수많은 시간을 자리를 지키고 있을 이 탑을 보면서 마음속으로 간구를 한다. 다시는 이 많은 문화재들이 수난을 당하지 않았으면 하고.

 

 

이 향성사지 석탑을 처음으로 해체 보수할 때 3층 탑신석 중앙에서 사리공이 발견이 되었지만 내용물은 없었다고 한다. 전국에 산재한 수많은 석탑과 석불 안에 있던 내용물은 도대체 어디로 간 것일까? 문화재는 민족이 정신을 계승하는데 있어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그런 소중한 문화재를 우리는 그동안 너무 홀대해 왔다는 생각이다.

 

문화재보존 제대로 이루어져야

 

문화재를 제대로 간수하지 못하는 것은 지금도 다를 바가 없다. 나라에서 국보나 보물 등으로 지정을 해서 보존을 하고 있거나, 사찰 경내에 있어 보존을 하는 문화재들은 그나마 나은편이다. 들이나 산 등에 산재한 문화재들은 아무래도 사람들의 손을 탈 수밖에 없다. 며칠전 뉴스에서 모 지방의 문화재지킴이들이 문화재를 도굴해 팔았다는 소식을 들었다.

 

결국 문화재를 도둑놈들에게 맡겨놓은 꼴이 되었으니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일인가? 그 정도로 우리는 문화재 보존에 대해서 불감증을 앓고 있는 나라라는 생각이 든다. 자손들에게 물려주어야 할 소중한 문화재. 향성사지 3층 석탑 앞에서 머리를 숙이는 것은, 나 자신도 그런 문화재 보존에 대해서 제 할 일을 다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전라남도 순천시 낙안면은 옛 역사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낙안읍성이 있다. 낙안면은 백제시대에 분차 또는 분사군이었으며, 통일신라 제35대 경덕왕 때는 분령군이라 불렀다. 고려 때에 들어서 낙안 또는 양악으로 칭하여 나주에 속해 있으면서, 1172년인 고려 명종 2년 에 감무를 두고 그 후에 지주사가 되어 군으로 승격되었다.

 

1515년인 조선조 중종 10년에는 고을에 불륜한 일이 일어나 현으로 강등되었다가, 1575년인 선조 8년에 복구되어 낙안군이라 하였다. 1908년인 융희 2년에 낙안군이 폐지됨에 따라 읍내면이라 칭하여 순천군에 편입되었다. 그 후 191441일 군면 폐합에 따라 내서면 20개리와 동상면의 교촌, 이동일부와 보성군 고상면의 지동리 일부를 병합하여 낙안면이라 칭했다.

 

금전산에 금둔사가 있었다

 

순천시 낙안면 상송리 산2-1에 소재하고 있는 금둔사. 현재의 금둔사는 과거 이곳에 있던 금둔사와는 별개의 사찰이다. 이 금둔사 일주문을 들어서 절 경내를 행하다가 우측 산 밑에 보면 보물 제945호인 순천 금둔사지 삼층석탑이 자리하고 있다. 낙안면 소재지에서 북으로 약 2km 떨어진 금전산의 무너진 절터에 자리하고 있는 탑이다.

 

 

동국여지승람에는 금전산에 금둔사가 있다라는 기록이 있어, 이 절터를 금둔사라고 추정하고 있으며, 현재는 조그마한 사찰이 지어져 금둔사의 명맥을 잇고 있다. 낙안읍성을 돌아보고 난 뒤 찾아간 금둔사지. 옛 절터에는 삼층석탑과 석불입상이 이 곳이 예전 금전산 금둔사지였음을 알려주고 있다.

 

돋을새김한 팔부중상이 압권

 

금둔사지 삼층석탑은 2단의 기단위에 3층의 탑신을 올린 모습이다. 아래층 기단에는 양우주와 가운데 기둥 모양인 탱주를 본떠 새기고, 위층 기단에는 기둥과 8부중상을 돋을새김 하였다. 탑신은 몸돌과 지붕돌이 각각 한 개의 돌로 되어 있으며, 몸돌에는 모서리마다 기둥을 새겼다.

 

 

특히 1층 몸돌의 앞뒷면에는 자물쇠가 달린 문짝을, 양 옆면에는 불상을 향하여 다과를 공양하는 공양보살상을 새겨 놓았다. 지붕돌인 옥개석은 밑면의 받침이 5단씩이고, 처마는 평평한 편이다. 낙수면은 완만하게 경사가 지다가 끄트머리 네 귀퉁이에서 힘차게 치켜 올려져 있다.

 

이 금둔사지 삼층석탑은 통일신라시대의 전형적인 석탑양식을 갖추고 있어, 9세기경에 조성된 것으로 추측된다. 1층 몸돌에 공양상이 새겨져 있는 점은 특이한 예이며, 각 부의 비례도 좋고 조각수법이 세련된 석탑이다. 탑의 뒤편에는 절개지 연의 앞에 석불입상이 서 있는데, 이들은 서로 연관된 의미를 지니고 있을 것으로 보인다.

 

 

엣 금둔사는 어떤 절이었을까?

 

동국여지승람에 소개가 되어있다는 금전산의 금둔사. 지금 절이 들어서 있는 금둔사의 모습이나. 석불입상과 삼층석탑의 자리 등으로 보아서 옛 금둔사도 큰 절은 아니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만한 가람이 들어서기에는 장소가 협소한 듯하다. 하지만 석불입상이나 석탑의 형태로 보면 이곳에도 제대로 일탑 일가람 형식의 절은 있었을 것 같다.

 

세월이라는 시간 속에서 사라져 버린 수많은 문화재를 갖고 있는 절터들. 전국을 돌면서 만난 수많은 사지들은 늘 마음이 안타까울 뿐이다. 아마도 그 많은 절들이 보존만 되었다고 해도, 지금보다는 더 많은 문화재들을 만났을 것이기 때문이다. 금둔사지를 돌아보고 뒤돌아 내려오면서 내내 속이 편치가 않다.

사찰에 있는 탑이라고 해서 모두 부처의 사리를 보관하거나, 부처를 상징하는 것은 아니다. 사찰 경내에 소재하고 있는 탑 중에서도 여러 가지 이유로 조성한 것이 있다. 공주 갑사에는 갑사를 이룩할 때 노역을 하다가 목숨을 잃은 소를 위한 공우탑도 있다. 이와 같이 조금 특별한 탑이 바로 경기도 가평군 하면 하판리 산163 현등사경내에 자리하고 있는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17호인 지진탑이다.

 

가평군 하면 하판리에 소재한 현등사는 운악산(해발 935m) 산등성이에 위치한 신라시대의 고찰이다. 신라 법흥왕 27년인 540년에 인도에서 불법을 전하기 위해 건너온 마라가미 스님을 위해 왕이 지어준 사찰로, 오랫동안 폐사 되었다가 신라 효공왕 2년에 도선국사가 다시 중창하였다.

 

현등사는 창건 이래 많은 중창을 하였다. 신라 말 효공왕 2년인 898년 도선국사가 한양을 도읍으로 정하고 동쪽의 지세가 약해 이를 보강하기 위해 운악산을 돌아보던 중 옛 절터가 있는 것을 보고 이곳에 절을 지었다고 한다. 두 번째 중창은 고려 회종 6년인 1210년 보조국사 지눌이 운악산 중턱에서 불빛이 비쳐 이곳을 찾아오니, 석등과 마륵바위에서 불빛이 비치는 것을 보고 현등사라 이름 하였다고 한다.

 

보조국사 지눌은 수백 년 동안 폐허로 있었던 이 절터에 새로 절을 짓게 되었다. 이 때 터의 기를 진정시키고자 이 탑을 세워 두었다 한다. 이로 인해 지진탑(地鎭塔)’이라는 이름이 생겨났으며, 승려의 이름을 따서 보조국사탑이라 부르기도 한다.

 

 

삼층석탑의 1층 몸돌이 사라져

 

현등사 입구를 들어서면 위로 오르는 계단 한편에 지진탑이 서 있다. 지진탑은 원래 3층 석탑이었을 것으로 보이나, 기단의 일부와 탑신의 1층 몸돌이 없어져 본래의 모습을 잃고 있다. 바닥돌과 기단의 맨윗돌은 윗면에 경사가 흐르며 네 모서리 선이 뚜렷하다. 지붕돌과 몸돌이 교대로 올려진 탑신부는 몸돌의 모서리마다 기둥 모양인 양우주를 본떠 새겼다.

 

탑의 맨 아래 놓인 지대석은 2단의 괴임대가 마련되어 있다. 네 귀퉁이의 합각은 뚜렷하며 밑면에는 부연이 조각되어 있다. 위면에는 각각 2단의 받침이 조출되어 있다. 이 지진탑은 탑의 몸돌과 지붕돌이 각각 한 개의 돌로 조성하였다. 이 탑은 오랜 세월을 지내오면서 많이 훼손이 되었지만, 남아있는 2층과 3층의 몸돌에 좌상이 새겨져 있어 소중한 가치를 지닌다.

 

 

고려 중기에 조성한 지진탑

 

지붕돌은 느린 경사로 흐르는데 밑면에 받침은 1, 2층은 4, 3층은 3단으로 불규칙하다. 낙수면의 경사는 비교적 완만한데 .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을 받치던 추녀는 수평으로 흐르다가 전각에 다달아 급격한 반전을 이룬다.

 

상륜부에는 네모난 받침돌인 노반석만 남아 있다. 상면에는 지름이 5cm 정도인 찰주를 꼽기 위해 조성한 구멍이 뚫려있다. 이 탑은 현존하는 부재의 조각양식과 이름에 얽힌 이야기로 미루어 고려시대 중기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한다.

 

 

탑은 사찰의 어디에나 존재한다. 하지만 그 많은 탑들은 제각각 이유가 있다. 그리고 그 탑을 조성한 장인의 정신이 있다. 그래서 우리의 문화재들이 소중하다는 것이다. 비록 제 모습을 다 갖추고 있지 못한 지진탑을 보면서, 그래도 그렇게나마 자리를 지키고 있다는 것이 고맙기만 하다.

 

지진탑을 찾아가는 날은 정말 살을 에이는 듯한 날씨였다. 하지만 그곳에 지진탑이 있어주어 그런 추위를 이길 수 있었던 것은 아닐까? 그런 소중한 문화재의 가치조차 제대로 모르는 한심한 인간들이 이 나라에는 너무나 많다는 것이 가슴 아플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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