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적 제349호인 남원시 왕정동에 소재한 고려 전기의 문종 때 지어진 절인 만복사. 『동국여지승람』 권지39, 남원도호부「불우조(佛宇條)」에는, 만복사는 기린산을 북쪽에 두고 남쪽으로 넓은 평야를 둔 야산에 위치하고 있다고 하였다. 창건 당시 만복사에는 5층과 2층으로 된 불상을 모시는 법당이 있었고, 그 안에는 높이 35척(약 10m)의 불상이 있었다는 기록이 전한다.

창건 당시 만복사에는 대웅전을 비롯한 많은 건물들과 수백 명의 승려들이 머무는 큰 절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1597년에 일어난 정유재란 때 남원성이 함락되면서 불타 버렸다. 이 만복사에는 당간지주를 비롯해 오층석탑과 석불입상 등 보물이 경내에 있다. 잘 정돈된 사지 중앙 쪽에는 보물 제31호 만복사 석좌가 자리한다. 돌로 만든 이 좌대는 불상을 올려놓는 받침인이다.


만복사 사지 내에 있는 보물 제31호 석좌와 만복사지 전경

하나의 돌로 조각한 거대한 작품
 
이 석좌는 하나의 돌로 상·중·하대를 조각하였는데 육각형으로 조각한 것이 특이하다. 하대는 각 측면에 고려시대의 석조물에서 흔히 나타나는 안상을 새기고, 그 안에 꽃을 장식했다. 윗면에는 연꽃모양을 조각하였으며, 중대는 낮고 짧은 기둥을 본떠 새겼다. 상대는 중대보다 더욱 넓어졌으며, 좌대의 윗면에는 구멍이 뚫려있다. 이 구망은 불상을 웠던 것으로 보이는 네모진 구멍이 뚫려 있다.

옆면에 연꽃이 새겨졌던 부분은, 주변 전체가 파손이 되어 아름다운 석좌의 미를 반감시키고 있다. 이 석좌는 통일신라시대의 전형적인 8각형에서 벗어난 6각형으로 조성을 한 것이 특징이다. 안상의 안에는 꽃을 장식했으며, 이러한 조각의 형태로 보아 이 석좌는 11세기 경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투박한 돌에서 느끼는 따스한 온기

이 돌로만든 좌대 위에는 어떤 부처님을 올렸을까? 만복사지에는 두 곳의 전각에 부처님을 모시고 있다고 기록하였다. 5층과 2층으로 된 전각 안에 부처님을 모셨다면, 그 좌대도 어마어마한 크기였을 것이다. 이런 점으로 본다면 현재 보물 제31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이 석좌는, 2층의 전각 안에 모셨던 부처님의 좌대가 아니었을까 추정을 해본다.

더욱 5층으로 지어진 전각 안에 봉안된 불상은 그 높이가 10m 정도였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이 석좌보다도 컸을 것으로 보인다. 이 석좌를 찬찬히 살펴보면, 그 아름다움이 눈이 부시다. 고려시대의 석조물들이 조금은 투박하고 간결하게 처리를 하는 것에 비해, 이 석좌는 다양한 조각수법을 보이고 있다. 아마 통일신라의 유풍을 따른 것으로 보인다.


부처를 움직이지 않도록 고정시킨 상면에 낸 구멍

상부는 많이 파손이 되었는데, 그 남은 일부를 살펴보면 꽃을 조각한 듯하다. 그 조각수법이 뛰어나 중앙의 장인에 의해서 만들어진 작품일 것 같다. 전체적으로는 많이 손상이 되었지만, 찬찬히 살펴보면 뛰어난 조각술이 보인다. 석좌 곁에는 네모난 돌이 보이는데, 그 상면에는 구멍이 뚫려있다. 이 또한 풀어야 할 수수께끼가 아닐런지. 남원 만복사지에서 만난 문화재. 그 중에서 이 석좌는 또 다른 아름다움을 느끼게 한다. 그리고 찬 돌이지만 따스한 온기를 느낄 수가 있다.


남원시 왕정동에 소재한 만복사지는 사적 제349호로 지정이 되어있다. 이 만복사는 김시습의 단편소설인 『금오신화』에 실린 「만복사저포기」의 무대이기도 하다. 만복사는 고려 문종(1046~1083) 때 처음으로 세워졌다. 경내에는 동으로 만든 거대한 불상을 모신 이층법당과, 오층목탑이 있었다고 전한다.

이 만복사를 찾은 것은 이번이 세 번째이다. 갈 때마다 사지가 잘 정리가 되어있어, 기분 좋게 돌아보고는 했다. 1597년에 일어난 정유재란 때 소실이 될 때까지, 만복사는 가운데 목탑을 세우고, 동, 서, 북쪽에 법당을 둔 일탑삼금당 식 배치를 보이고 있었다. 경내에는 네 점의 보물(당간지주, 석불입상, 오층석탑, 불상대좌)과 많은 석재들이 있다.

사적 만복사지. 우측에 석인상이 서 있다.

새로 선보인 석인상 일기

이번 답사 때 찾아간 만복사지(2010, 9, 18). 그런데 입구 쪽을 보니 지난번에 보지 못했던 석조물 1기가 서 있다. 만복사지 석인상이라는 안내판이 보인다. 이 석인상은 만복사지 당간지주의 남쪽 4m 정도 떨어진 도로변에, 2기가 나란히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 중 도로를 운행하는 차량들로 인해, 훼손의 우려가 있는 1기를 옮겼다는 것이다.

이 석인상은 처음 본 것이다. 두 번이나 이곳을 답사를 했으면서도 보지를 못했다. 아마 4점의 보물을 중점적으로 찾아보는 바람에 놓친 것 같다. 그런데 이 석인상을 보는 순간, 참으로 자신이 참담하다는 생각이 든다. 도대체가 이런 형태의 석인상을 한 번도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흡사 아프리카의 원주민들이 조각한 목각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보지 못한 형태의 석인상

이 석인상은 그 모습이 괴이하기까지 하다. 부정형의 사각형 장초석의 3면에 조각을 하였는데, 사람 모양을 조각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얼굴은 노여움에 가득 찬 표정을 하고 있으며, 팔은 몸에 붙인 채로 구부려 무엇인가를 꽉 잡고 있는 형태다. 팔에는 두터운 팔과 근육을 표현 한 듯한 선이 나 있다. 주변을 돌면서 보아도 정확한 모습은 아니다. 자연석인 돌을 이용을 하느라 그랬는지, 팔과 기타 신체의 부분이 제대로 갖추지를 못하고 있다.

얼굴은 눈을 돌출시킨 것이 민속 석조물에서 보이는 석장승의 형태를 닮았다. 눈썹은 두텁게 처리하고 눈은 불거졌으며, 볼은 광대뼈가 튀어나오고 코는 뭉툭하다. 석장승의 모습을 하고 있는 석인상은 상반신이 반나로 서 있다. 허리부분에 옷을 묶어 매듭을 내었으며, 옷 주름은 굵은 물결무늬로 선명하다.


팔의 조각한 형태는 괴이하다. 한 팔은 뒤로 돌아갔다.

하반신은 특별한 조각이 없으며, 늘어트린 옷 주름으로 가렸다. 전체 길이는 550cm이며, 머리부터 다리까지의 길이는 370cm 정도이다, 나머지 부분은 뾰족하게 깎았으며 땅 속에 묻혀있다. 도대체 이 석인상의 용도는 무엇이었을까? 석인상을 찬찬히 훑어보지만 금방 그 용도가 떠오르지는 않는다.

뒷면에 있는 구멍이 용도를 알리는 열쇠?

이렇게 괴이한 모습을 보이고 있는 만복사지 석인상의 용도는 과연 무엇일까? 뒤로 돌아가 보니 뒷면에 둥근 구멍이 아래위로 나 있다. 위쪽의 구멍은 머리에서부터 아래로 122cm, 그리고 그 밑에 구멍은 318m 정도 내려온 곳에 있다. 땅 위로 솟아있는 석인상의 높이가 370cm 정도이니, 아래 구멍은 땅에서 52cm 정도 위에 있는 셈이다. 그리고 위에 있는 구멍은 248cm 정도 위에 있다.

이 구멍의 용도는 무엇일까? 아무리 머리를 쥐어짜지만 알 수가 없다. 그런데 혹 이 뒤편에 있는 구멍이 당간지주와 관련이 있는 것은 아닐까? 당간이나 석인상의 높이가 있어 그 정확한 구멍의 차이는 알 수가 없지만, 어림잡아 구멍의 높이가 비슷한 것 같다. 그렇다면 이 석인상은 당간의 용도로 쓰였을까? 아니면 당간의 바깥에 세워 더 많은 당을 걸게 했던 것은 아닐까?




문화재로 지정이 되어있지 않아, 그 이상의 내력은 찾아볼 수가 없다. 무섭게 눈을 부라리고 두 주먹을 꽉 쥔 것으로 보아, 절의 입구에 서서 액을 막아내는 사천왕은 혹 아니었을까? 아니면 절의 신성한 장소의 양편에 세워, 뒤에 난 구멍을 서로 연결하여 그곳의 출입을 제한하던 문지기는 아니었을까? 긴 시간을 생각해보지만, 그 정확한 용도를 알지 못한 체 만복사지를 뒤로한다. 저 석인상의 용도를 알 수 있는 날까지, 꽤나 속을 썩일 것만 같다.

논산 관촉사에는 보물 제218호인 거대한 관촉사 석조미륵보살입상이 있어 유명한 절이다. 이 석조미륵보살입상을 흔히 ‘은진미륵’이라고 부르는데, 이 미륵보살입상이 있는 곳에서 20m 정도 앞에는 배례석이 놓여있다. 현재 충남 유형문화재 제53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이 배례석은, 우리나라의 석조물 중에서도 그리 흔하지 않은 문화재다.

배례석은 절을 찾은 불자들이 부처님께 합장하고, 예를 갖추는 장소로 사용했다고 한다. 아마 이 배례석에서 예를 올린 것은 아니고, 이 배례석 앞에 자리를 마련하고 그곳에서 부처님께 예를 올렸을 것으로 보인다. 지금은 뒤편에 석탑이 1기가 서 있고, 그 앞으로는 미륵전이 있다.


논산 관촉사 경내에 있는 문화재인 배례석(위)와 석문(아래)

뛰어난 조각술이 엿보이는 관촉사 배례석

관촉사 미륵전 뒤편에 놓인 배려석은 장방형의 대석이다. 바닥에서 2단으로 직각고임을 해서 올려놓고, 그 위의 면석에는 사방에 안상을 새겨 넣었다. 안상은 고려 때의 석조물에서 흔히 보이는 문양으로, 전면에는 3개를 새겨 넣고 단면에는 2개가 새겨져 있다. 가운데는 버섯구름 모양의 문양을 돋을새김하고, 여울진 모양으로 주변을 장식했다.

배례석의 윗면에는 중앙에 커다란 연꽃을 중심으로, 좌우에 그보다 약간 작은 연꽃 두 송이를 돋을새김 하였다. 가운데 연꽃이 양쪽의 것보다 약 3㎝ 정도가 크며, 연꽃잎은 모두 8잎으로 연꽃 한 잎의 중앙부가 갈라져 두개의 잎으로 나누어진 것으로 표현되었다. 이렇게 섬세하게 조각을 해 놓은 배례석은, 오랜 시간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원형이 잘 보존이 되어있다.





사찰의 중문 역할을 한 석문(石門)

미륵전을 조금 비켜선 계단위에는 돌로 만든 석문이 보인다. 예전에는 이 문을 통해 경내로 들어갔을 것이다. 이 석조물은 일주문과 천왕문을 거쳐 경내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야 했던 문이다. 석문의 한쪽 기둥에는 ‘해탈문’이라고 새겨 놓았다. 문 입구에는 넓이가 48cm 정도의 돌기둥을 양편에 세우고, 윗면 천정에는 길게 장대석으로 잘 다듬은 돌을 다섯 장 올려놓았다.

전체적인 석문의 모습은 4각형을 이루고 있으며, 터널과 같은 형태로 꾸며졌다. 지금은 일부만 남아있지만 문의 양편에는, 성문을 연결하여 경내를 보호할 수 있도록 석벽으로 둘러놓았다. 이러한 형태의 석문은 다른 사찰에서는 찾아보기가 힘든 예이다. 이 석문은 석조미륵입상과 같은 연대에 제작된 것은 아니고, 그 후에 필요에 의해 축조되었을 것으로 본다.




기둥 좌측에는 해탈문이라 적었다(맨위) 석문 안으로 은진미륵이 보인다. 그리고 문에 연결한 석벽괌(위에서 세 번째) 바위와 어우러진 석문(아래)

은진미륵이 자리하고 있는 논산 관촉사. 2기의 희귀한 석조물이 있어 남다른 곳이다. 전국에 있는 수많은 절에는 많은 문화재를 보유하고 있지만, 관촉사는 또 다른 형태의 문화재로 찾아드는 이들을 들뜨게 만든다.

논산에서 강경읍으로 가다가 보면 중간에 채운면을 지나게 된다. 이곳에서 강경읍으로 들어가기 전 채운교를 비켜 서 조금 거슬러 올라가면 다리가 있는데, 바로 강경 미내다리이다. 이 미내다리는 강경의 대표적인 문화유적이다. 현재 충남 유형문화재 제11호로 지정이 되어있다.

미내다리는 조선 영조 7년인 1731년에 건립된 것으로 비문에 전한다. 일명 ‘조암교(潮岩橋)’라로도 불렀던 미내다리는 이곳을 흐르는 하천명이 미내천이라는 데서 붙여진 이름이다.『여지승람』에는 ‘미내다리가 있었는데 조수가 물러가면 바위가 보인다 해서 <조암교>라 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곳은 강경포구가 있던 곳으로 조수의 왕래가 심했으며, 수많은 배들이 이 미내천을 이용해 교역을 감행하였다.


개들도 생선을 물고 다니던 강경포구

강경포구는 한 때는 우리나라 상권을 대표하는 포구의 장 중 한곳이었다. 포구에는 객주집들이 즐비했으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는지, 그야말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는 것이다. 선창에는 잡아온 물고기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으며, 지나는 개들도 생선을 물고 다녔을 만큼 그렇게 풍요로운 곳이었다고 전한다.

그런 강경에 교량이 놓이기 이전에는 장마철이나 겨울에 눈이 많이 내릴 때면, 홍수와 눈이 쌓여 교통이 두절되고 인명의 피해가 자주 발생하였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강경사람 석설산과 송만운이 주동이 되어, 황산의 유부업과 스님인 경원, 설우, 청원, 그리고 여산의 강명달, 강지평이 다리를 놓기 시작해 1년 미만에 공사를 완성하였다 한다.




미내다리는 세 개의 아치형 교량 중 가운데가 크고 남북 쪽이 약간 작다. 받침은 긴 장대석을 쌓아 올리고 그 위에 홍예석을 돌려 구름다리로 축조하였으며, 석재는 40㎝×50㎝×110㎝ 내외의 장대석을 사용하여 만들었다. 홍예 사이의 간지에는 드러난 면이 35㎝×150㎝ 정도의 장대석을, 잘 치석하여 반월형의 둘레에 따라 돌을 사다리꼴로 쌓았다. 부착제를 사용하지 않고 돌만으로 맞추어 아치를 형성케 한 축조방법은, 당시 선조들의 재주가 과학적으로 얼마나 뛰어났는가를 짐작케 한다.

염라대왕이 ‘미내다리를 보고 왔느냐?’고 묻는다고 한다.

사람이 죽어 염라대왕 앞에 나아가면 ‘강경 미내다리를 살아생전 보고 왔느냐?’고 묻는다고 한다. 이 정도로 강경장은 포구를 끼고 발달한 장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고, 미내다리는 그 장을 연결하는 중요한 통로였다. 미내다리가 망가져 사람들이 통행을 뜸하게 할 때, 이 미내다리 돌을 가져다가 집에 쓰려고 했던 사람들은, 갑자기 마른하늘에서 천둥이 치고 벼락을 쳐 공포에 떨고는 했다는데, 거기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하다.



미내다리가 없어 늘 통행에 어려움을 겪던 사람들이 두 청년을 시켜 다리를 놓게 하였다. 다리를 다 놓고 보니 경비로 걷어준 엽전이 남았는지라, 두 청년은 이를 나중에 다리를 보수할 때 쓰리라 생각하고 다리 밑에 묻어두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중 한 청년이 시름시름 앓기 시작해, 온갖 좋다는 약을 다 써 보았으나 차도가 없었다. 그 때 같이 다리를 놓은 친구가 우선 사람을 살려야겠다는 생각으로 돈을 묻어둔 곳으로 가, 다리 밑을 파보았으나 엽전은 보이지 않았다. 시간이 가면서 병석에 누운 청년은 더욱 병이 악화되다가 구렁이로 변해버렸다. 그리고 미내다리 밑으로 들어가 흔적이 사라져 버렸다.

사람들은 폐교(廢橋)가 된 미내다리 돌을 갖다 쓰려고 하면 벼락이 치고 날이 어두워져, 놀라 다시 돌을 제자리에 갖다 놓으면 벼락이 그쳤다고 한다. 그때부터 미내다리의 돌은 ‘구렁이 돌’이라고 하여 아무도 건드리지 않았다.

난 추석날 미내다리를 건넌다.


아마 이렇게 청년이 구렁이가 된 것은 미내다리 밑에 묻어두었던 엽전을, 몰래 꺼내서 약값으로 사용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 미내다리는 정월 보름날 다리를 자기 나이수대로 왕복을 하면, 그 해에는 액운이 소멸된다고 한다. 또한 추석 날 이 미내다리를 일곱 번을 왕래하면 행운이 온다는 속설이 전하고 있다.

우리 풍습에는 정월에 ‘다리밟기’라는 놀이가 있다. 겨우내 움츠렸던 몸을 원활하게 하기 위한 방법으로 다리를 밟으며 건강을 기원한다. 미내다리를 건너는 것도 그러한 놀이에서 연유가 된 속설로 보인다. 이번 추석에는 미내다리를 일곱 번 걸어보아야겠다.

전국에는 ‘태실, ’태봉‘ ’태재’ 등의 이름을 가진 곳이 상당히 많이 있다. 이는 모두 왕족의 태를 묻은 곳이 있다는 이야기다. 왕자가 태어나면 태실도감을 설치하고 길일을 택해 ‘안태사.를 보내 태를 묻게 했다. 『경국대전』에 예전에 보면 지방은 관찰사가 왕과 왕비, 왕세자의 태실을 모두 살피게 되어 있다.

영조 22년인 1746년에 펴낸 조선 후기의 법전인『속대전』에는 태왕태실의 경계는 300보, 왕세자의 태실은 200보로 정해, 이 경계 안으로는 일반인의 출입을 금한다고 되어있다. 태실은 대개 한 사람의 것을 묻지만, 사적 제444호인 성주군 월항면 인촌리의 성주세종대왕 자태실은 모두 19기의 태실이 몰려 있는 곳도 있다.


태실은 어떻게 꾸미나?

태실은 대개 산의 봉우리 근처에 자리를 잡는다. 그러나 전주 경기전 안에 있는 예종대왕의 태실 및 비는, 일반 평지에 자리를 하고 있어 의아스럽게 생각을 들기도 한다. 하지만 이 태실은 원래 이곳에 있었던 것은 아니다. 현재의 자리에서 멀리 떨어진, 완주군 구이면 원덕리 구이초등학교 뒷산 정상부근에 있던 것이다.

이 자리에 있던 태실이 어떻게 해서 경기전 안으로 옮겨온 것일까? 태실은 태항아리라는 태를 담은 석실을 만들게 되어있다. 기단석을 놓고 그 위에 무늬를 새긴 앙련을 올려놓는다. 그 위에는 둥근 모양의 중동석을 놓고 개첨석을 올린다. 머리에 해당하는 덮개석은 복련과 보주로 구별된다.




이와 같이 땅 위에 있는 것과 달리 지하에는 기단석 밑으로 토석을 깔고 그 밑에는 개석을 놓는다. 태를 담은 태항아리는 돌로 만들고 그 안에 석함을 놓는다. 전체적으로는 땅 밑에서부터 태항아리, 석함, 개석, 토석, 기단석, 앙련, 중동석, 개첨석, 복련, 보주 등의 순서로 위로 올리게 되어 있다.

일제에 의해 파 해쳐진 예종대왕 태실

완주군 구이면에 있던 예종대왕의 태실은 선조 11년인 1578년에 태실을 만들었고, 영조 10년인 1734년에 고쳐지었다. 이렇게 태실을 고쳐지을 때는 예조의 당상관 및 감역관이 감독을 하는 자리에서만 가능했다. 이러한 예종대왕의 태실은 1928년 조선총독부가 태실에 있는 태항아리를 가져가면서 파괴가 되었다.

1920년대 우리문화말살정책을 편 일제는 숱한 우리의 문화재를 일본으로 가져가면서, 태실에 보관 중이던 태항아리도 가져간 것으로 보인다. 그 후 1970년에 태항아리를 잃고 폐허가 되어있던 예종대왕의 태실 및 비를 경기전 안으로 옮겨 복원하고, 전북 민속자료 제26호로 지정하였다.



그나마 석물은 보존이 잘 되어있어

다행인 것은 태항아리를 일본인들이 가져갔다고 하지만, 태실과 비의 석물들은 잘 보존이 되어있었다는 것이다. 예종대왕의 태실은 팔각형의 돌난간을 두르고, 그 안에 기단석을 놓았다. 그리고 배가 불룩한 둥근 중동석을 놓고 지붕돌을 덮은 형태이다. 태실 한편에는 비가 서 있는데 이 비에는 예종대왕의 태실이라 적혀있으며, 뒷면에는 건립년대를 적고 있다. 뒷면에 적힌 연대를 보면, 이 태실이 ‘만력 6년 10월 초 2일’에 세웠다고 기록하고 있다. 선조 11년인 1578년이다.

비는 받침석을 거북이로 했는데 특별한 조각을 하지는 않았다. 다만 비의 덮개석에는 뿔이 없는 용을 새겨 넣은 것이 특이하다. 이틀 후 8월 29일은 경술국치 100년이 되는 날이다. 일제에 의해 수많은 우리 문화재가 훼손되고 일본으로 건너갔다.



아직도 돌아오지 못한 숱한 문화재들이 있는데, 이 땅에 있는 문화재조차 제대로 관리가 되지 않는 현장을 볼 때마다 가슴이 미어지는 듯하다. 그보다는 먼저 소중한 우리의 문화재가 제대로 알려질 수 있도록 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대중매체에 혈안이 되어있는 국적 없는 문화를 선호하는 우리민족의 우둔함이 더욱 가슴을 찢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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