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 답사를 하면서 늘 느끼는 것은, 다양한 모습을 만날 때마다 신비롭다는 것이다. 어떻게 선조님들은 이렇게 다양하게 하나하나 생명을 불어 넣을 수 있었는지, 아무리 생각을 해도 그 답을 얻을 수가 없다. 아마도 오랜 세월을 그렇게 조형을 한 문화재마다, 그 문화재를 조성한 장인들의 혼이 들어있을 것이란 생각 밖에는 말이다.

 

전라남도 함평군 해보면 광암리에 위치한 용천사는, 꽃무릇으로 유명한 절이다. 이 용천사의 가을 풍취는 아름답기로 소문이 나 있다. 용천사를 찾았을 때는 꽤나 늦은 가을이었는가 보다. 절집 여기저기 아름다운 단풍이 온통 치장을 하고 있었을 때였으니. 그런 곳을 다녀오면 아무리 시간이 지난다고 해도 쉽게 잊히지가 않는 법이다.

 

작은 석등 하나, 거 참 신기하네

 

용천사 경내의 여기저기를 찍다가보니, 전각 앞에 작은 석등 한 기가 서 있다. 석등은 부처님의 말씀을 온누리에 펼쳐 사바세계를 밝게 비친다는 뜻을 갖고 있다. 석등은 절 경내뿐만 아니라 묘역 등에도 세우는데, 이것은 유택에 잠든 영혼의 저승길을 밝힌다는 뜻을 갖고 있다. 묘역에 세우는 석등은 장명등이라고도 부른다.

 

그런데 이 석등을 바라보다 한찬 넋을 빠트리고 말았다. 크지 않은 석등이지만 일반적으로 보아왔던 석등과는 많이 다르다. 이렇게 낯선 문화재를 만날 때면 괜히 가슴이 콩닥거린다. 비밀스런 그 무엇을 찾은 기분이라고 표현을 해야 할까? 작은 석등 하나가 주는 즐거움은 답사에 빠져보지 않은 사람들은 그 마음을 이해할 수가 없다.

 

 

 

함평 용천사의 석등은 불을 밝히는 화사석을 받치는 기둥인 팔각 간석에, 강희 24년이라 음각을 해 놓았다. 조선조 숙종 11년인 1685년에 조성한 석등임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제작한 조성연대까지 음각을 한 경우도 드문 예이다. 기본적으로 우리가 보던 석등과는 다른 용천사 석등. 그 모습이 자꾸만 시선을 딴 곳으로 돌리지 못하게 만든다.

 

간주석 거북이들, 어디까지 오르려고?

 

우선 이 석등의 머릿돌은 팔작지붕을 본떠 만들었다. 지붕의 형태도 그렇지만 처마에 부연을 달아낸 것까지 조각을 하였다. 부연 밑에는 투박하기는 해도 공포를 조각한 것도 보인다. 이런 석등을 찾아보기란 쉽지가 않다. 화사석은 간단한 무늬를 음각해 고졸한 멋을 풍기고 있으며, 둥글게 창을 내었다.

 

화사석을 받치고 있는 간석은 연꽃문양을 조각하였다. 석등의 아랫 간석에는 두 줄을 내고 네 마리의 거북이가 매달려 있었는데, 현재는 두 마리만 남아있다. 거북이의 형태는 흡사 줄에 매달린 듯 재미난 형상을 하고 있다. 저 거북이들이 저렇게 위로 오르다가는 화사석에 낸 창 안으로 들어갔다가 불에 델 것만 같다. 혹 두 마리는 벌써 탄 것은 아닐까? 괜한 생각을 하면서 속으로 키득대본다.

 

용천사는 6·25 동란 때 불에 타서 거의 모든 유물들이 소실이 되었는데, 이 석등만은 제 모습을 갖추고 있다. 높이 2.37m의 화강암 쑥돌로 조성된 이 석등은 투박하지만, 나름대로의 특징을 지니고 있다.

 

 

현재 이 용천사의 석등은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84호로 지정이 되어있다. 일반적인 석등과는 달리 팔작지붕을 얹고 원형의 화창을 낸 화사석. 그리고 간석에 붙은 거북의 모습 등, 조금은 매끄럽지 못한 듯한 모습으로 조성이 되었지만, 가치가 있는 소중한 문화재이다. 답사에서 만나게 되는 작은 문화재 하나가 주는 즐거움. 용천사 석등은 바로 그런 즐거움을 만끽하게 해준 문화재였다.

여주 신륵사. 봉미산 신륵사라고 이름을 붙인 이 고찰은 신륵사라는 이름보다 ‘벽절’이라는 이름으로 더 유명한 곳이다. 남한강 변에 자리 잡은 신륵사 일주문에는 '봉미산 신륵사'라는 현판이 걸려있는데, 이는 이 고찰이 자리한 절이 봉의 꼬리라는 것이다. 그 봉의 머리는 바로 강원도 오대산이다.

신륵사 조사전 뒤에 보면 산으로 오르는 계단이 있다. 신륵사 서북쪽으로 난 이 계단을 오르면 보물인 보제존자의 석종과 석등, 비 등이 자리하고 있다. 이 세 가지 모두가 보물로 지정이 되어있다.


뛰어난 조각기법을 선보이는 고려시대의 석등

철책으로 조성된 보호대 안에 자리한, 보물 제231호인 <신륵사 보제존자 석종 앞 석등>이란 명칭을 갖고 있는 석등은, 조각기법이 뛰어나고 보존상태가 양호하다. 석등은 대개 절의 전각 앞이나 부도탑 등의 앞에 세운다. 아마 두 곳 모두 불을 밝힌다는 뜻을 갖고 있나보다. 더욱 보제존자의 사리를 모신 석종 앞에 있는 이 석등은, 영원한 안식처로서의 부처의 세계로 가는 길을 밝힌다는 뜻으로도 볼 수 있다.

보물 제231호로 지정이 된 8각 석등은 불을 밝혀두는 화사석을 중심으로, 아래에는 간주석이 없이 세 부분으로 이루어진 받침을 두었다. 위로는 지붕돌과 머리장식을 얹은 모습으로 구분이 되며, 받침돌에는 표면 전체에 꽃무늬를 가득 새겨 장식하였다. 화사석은 각 면에 무지개 모양의 창을 낸 후, 나머지 공간에 비천상과 이무기를 조각했다.



630여년이나 지난 소중한 문화재

이 석등은 고려 우왕 5년인 1379년에, 보제존자 석종 및 석비와 함께 세워진 작품이다. 조성시기를 알 수 있는 630년이나 지난 세월을 지켜 온 귀중한 유물이다. 이 석등은 고려 후기의 대표적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받고 있다.

석등을 촬영하다가 화사석을 본다. 그리고 절로 탄성을 지른다. 어찌 이 단단한 돌에 이렇게 섬세한 조각을 할 수가 있었을까? 비록 안면은 다 깨어진 것인지 사라졌지만, 그 하나하나가 정말 뛰어난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 당장이라도 석등을 박차고 날아오를 것만 같은 부드러움. 천의는 하늘거리며 석등을 벗어나 나부낄 듯하다.




기둥을 타고 오르는 이무기는 또 어떠한가? 금방이라도 비를 만나면 용이되어 하늘로 승천을 할 것만 같다. 8면에 새겨진 비천상 그 하나하나가, 각기 다른 모습으로 특징이 있게 표현이 되었다. 아마 이 석등이 언제인가 그저 하늘로 날아가지는 않을까? 하는, 우둔한 생각을 해본다. 그만큼 뛰어난 작품이다.

한 무리의 외국인들이 찾았다. 그리고 석등 앞에서 일일이 사진을 찍고 기록을 한다. 우리들은 그저 무심코 지나쳐버리고 마는 그러한 문화재를, 저들은 이렇게 꼼꼼히 살피고 있는 것이다. 그 모습을 보면서 참 부끄럽다. 남들도 저렇게 관심을 보이고 있는데, 정작 우리는 훼손이나 시키고 있다는 것이. 비천상들의 안면이 다 사라진 것을 보면서, 그 부끄러움은 가슴을 아프게 한다.

문화재 답사를 하다가 보면, ‘문화재오적(文化財五賊)’이 생각이 난다. 바로 소중한 우리 문화재를 훼손하고 강탈한, 문화재를 훼손한 족속들이다. 내가 ‘인간’이나 ‘사람’이라고 표현을 하지 않고, ‘족속’이라고 강하게 표현하는 것은, 그만큼 많은 문화재들이 수난을 당했기 때문이다.

그 오적의 첫째는 바로 수많은 문화재를 약탈해 간 일본과 많은 나라들이다. 도대체 얼마나 많은 우리 문화재를 강탈해 가고 돌려주지 않고 있는 것일까? 당연히 오적 중 수괴이다. 둘째는 종교가 다르다는 이유로 많은 문화재를 훼손한 ‘종교광신자‘들이다. 이는 더 이상 설명할 필요도 없다. 어찌 보면 외적보다 더 나쁠 수도 있다. 세 번째는 책무를 다하지 못하고 문화재를 지켜내지 못하는 관계자들이고, 네 번째는 심심풀이로 낙서를 하는 등 무개념한 인간들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문화재에 무관심한 모든 인간들이다.


일본인들이 들고 가려고 했던 영암사지 석등

8월 20일, 비가 내리는 가운데도 답사를 강행한 합천 영암사지. 몇 번이고 찾아가 보려고 했던 곳이었기에, 비가와도 이번만은 답사를 멈출 수가 없었다. 영암사지에 도착했을 때는 더 많은 비가 내리고 있었다. 그러나 영암사지에 도착했을 때, 난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물론 발굴 후 복원을 하느라 새로운 석재를 사용하기는 했지만, 그 장엄함에 그저 놀라움을 감출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영암사지에 세워진 통일신라시대의 석등인 보물 제353호 영암사지 쌍사자석등. 경남 합천군 가회면 둔내리 1659번지, 사적 제131호인 영암사지 안에 자리한다. 높은 석축 위에 자리한 쌍사자석등은 양편으로 석등이 있는 곳으로 오르는 석조층계가 아름답게 자리를 하고 있다. 아마도 그 뒤가 절의 중심인 본존불을 모셨던 터인 듯하다.





이 영암사지 쌍사자석등은 1933년경 일본인들이 불법으로 가져가려는 것을, 마을 사람들이 막아 면사무소에 보관하였다고 한다. 도대체 많은 문화재들을 이렇게 약탈당하면서도, 아직도 제자리로 돌아오지 못하고 있는 수많은 우리의 소중한 문화재들. 참 가슴이 아픈 일이다. 이 석등은 1959년 절터에 암자를 세우고, 원래의 자리로 옮겨 놓았다고 한다.

통일신라시대의 기본 형태인 팔각으로 이루어진 석등

쌍사자석등은 그리 흔하지가 않다. 영암사지 쌍사자석등은, 국보 제5호인 보은 법주사 쌍사자 석등에 견줄만한 아름다움을 보이고 있다. 석등은 불을 밝혀두는 화사석을 중심으로 하여, 아래로는 이를 받치기 위한 3단의 받침을 두고 위로는 지붕돌을 얹었다. 지붕돌 위에도 상륜부의 석재가 있었을 텐데, 현재는 지붕돌만 남아있다.



영암사지 석등은 사자를 배치한 가운데 받침돌을 제외한 각 부분이, 모두 통일신라시대의 기본 형태인 8각으로 이루어져 있다. 아래받침돌에는 연꽃모양이 조각되었고 그 위로 사자 두 마리가 가슴을 맞대고 서 있다. 두 마리 사자의 뒷발은 아래받침돌을 딛고 있으며, 앞발은 들어서 위받침돌을 받들었다. 그 두 마리 사자의 다리가 힘이 넘쳐난다. 마치 화사석의 무게를 느끼는 듯하다.

‘더 이상 아름다울 수는 없다’

머리는 위로 향하고 갈퀴와 꼬리, 근육 등의 표현이 사실적이다. 화사석은 4면에는 네모난 창을 내고, 기둥을 삼은 4면에는 사천왕상을 힘차게 조각하였다. 지붕돌은 8각으로 얇고 평평하며, 여덟 곳의 귀퉁이마다 자그마한 꽃 조각인 귀꽃 등이 솟아있다. 각 부분의 양식이나 조각으로 보아 통일신라 전성기에 비해 다소 형식화된 면을 보이고 있어, 통일신라 후기인 9세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여겨진다.



크지는 않지만, 아름다운 석조미술의 모든 것을 보여주고 있는 영암사지 쌍사자석등. 비가 오는데도 그 앞에 서서 움직일 수가 없다. 만일 이것을 일본인들에게 도난을 당했다면, 이 영암사지 한쪽이 얼마나 허전했을 것인가? 잘 정리가 된 넓은 영암사지 높은 석축위에 서서 다시 한 번 ‘문화재오적’을 되뇌어 본다.

경상북도 양산시 하북면 지산리에 소재한, 우리나라 3보 사찰 중 한 곳인 통도사 관음전 앞에는 석등 한 기가 서 있다. 이 석등은 등불을 밝히는 화사석을 중심으로 아래는 팔각의 받침돌을 삼단으로 쌓았다. 위로는 지붕돌과 머리 장식을 얹고 있는 이 석등은, 현재 경상남도 지정 유형문화재 제70호이다.

석등의 용도는 절 안의 어두움을 밝히는 것뿐만 아니라, 부처님의 자비광명을 온 누리에 비추어 중생을 깨우쳐 선한 길로 인도한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등불은 수미산과 같고, 등을 밝히는 기름은 넓은 바다를 상징한다고 한다. 이는 등에서 나간 불빛이 고루 퍼져나가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공양구 중에서도 으뜸인 등불

석등은 언제나 석탑과 함께 전각의 앞에 자리한다. 이는 부처님께 드리는 공양물 중에서도 등불 공양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기 때문이다. 갖가지 형태의 많은 석등이 현재까지도 자리하고 있으며, 폐사지 등에도 석등이 남아있는 숫자가 많은 것을 보면, 석등을 그만큼 소중하게 여겼기 때문으로 보인다.

통도사 관음전 앞에 자리하고 있는 석등은, 그 조형 양식으로 보아 고려 초기에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석등은 둥근 형태의 연꽃받침인 연화대 두 개를 아래 위로 놓고, 그 가운데를 팔각의 간주석을 세웠다. 그 윗부분에는 불을 밝히는 화사석과 지붕돌을 올려놓은 형태이다. 석등의 구성형태는 거의가 이런 형태로 꾸며진다.



연화대가 상징하고 있는 뜻은?

이 통도사 석등은 통일신라시대의 양식을 따르고는 있으나, 귀꽃 양식 등이 세밀하지 않다는 점을 보아 고려 초기 작품으로 추정한다. 아래받침돌인 연화대의 옆면에는 안상을 얕게 새겼고, 윗면에는 엎어놓은 연꽃무늬를 조각하였다. 이 아래에 있는 연꽃받침은 물속에 있는 탁한 진흙과 같은 세상을 뜻한다. 아래 위 연화대 가운데에 있는 간주석인 기둥은 중앙에 세 줄의 테를 둘렀다.

이 세 줄은 천, 지, 인을 상징한다고도 하고, 불가에서 부처님의 목에 난 삼도와 같은 의미라고도 한다. 하지만 이 세 줄에 대한 정확한 풀이는 알 수가 없다. 이 팔각의 기둥은 이상의 경지에 도달하기 위한 불교의 올바른 길인 팔정도를 상징한다. 깨달음과 열반으로 이끄는 올바른 여덟 가지 길인 팔정도는, 정견(正見), 정사유(正思惟), 정어(正語), 정업(正業), 정명(正命), 정정진(正精進), 정념(正念), 정정(正定)을 말한다.



간주석 위에 있는 윗받침돌에는 위로 솟은 연꽃무늬를 장식하였다. 위로 향한 연꽃을 조각한 연화대는, 광명, 청정, 부처, 보살의 세계를 상징한다. 이렇듯 석등 하나가 갖는 뜻은 상당히 깊은 것이다.

흔치 않은 부등변 팔각석등

4개의 커다란 불창이 있는 화사석은, 파손이 된 것을 후에 새로 교체한 것으로 보인다. 전체적인 석등의 조화가 맞지 않기 때문이다. 이 석등은 언뜻 보면 4각처럼 보이지만, 부등변 팔각석등으로 우리나라 석등의 변천사를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로 꼽히고 있다.



화사석의 위에 얹은 지붕돌은 귀퉁이마다 꽃장식인 귀꽃을 달았다. 지붕돌 위에는 머리장식의 받침인 노반과, 꼭대기에는 꽃봉오리 모양의 장식인 보주를 놓았다. 문화재 답사를 하면서 만나게 되는 수많은 석등. 크고 작은 모형의 이 석등을 볼 때마다 더욱 그 가치를 높이 사는 것은, 바로 이런 깊은 뜻이 있기 때문이다.

경북 청도군 운문면 신원리 1789번지, 비구니의 요람이라는 운문사 금당 앞에는 통일신라시대의 석등 한 기가 서 있다. 운문사에는 많은 전각이 있으며, 율원과 강원 등이 있다. 운문사의 율원은 ‘보현율원’이라 칭하고 있으며,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라 지고지순한 계행을 전문적으로 익히고 연구하는 곳이다.

이 운문사에는 율원과 강원 등이 있어, 일반인들의 출입이 제한되는 곳이 있다. 그 중에는 금당도 끼어있는데, 금당은 삼국시대부터 존재한 것으로 보인다. 이 금당은 가람의 중심으로 본존불을 안치하는 전각을 말한다. 일설에는 전각 안을 금색으로 칠하므로, 본당의 명칭을 금색의 당이라는 의미로 보기도 한다. 그러나 또 다른 일설은 금색의 불상을 내부에 안치하기 때문에 금당이라고 부르게 되었다는 설도 있다.


일반인의 출입이 제한된 금당

운문사는 비구니의 요람답게 일반적인 사찰과는 많이 다르다. 그만큼 지켜야 할 것이 많으며, 출입이 제한되는 곳 역시 많다. 금당 또한 일반인의 출입이 제한되는 곳에 자리하고 있다. 이 금당 앞에는 통일신라시대에 세운 석등 한 기가 서 있는 것이다.

석등은 등불을 안치하는 곳으로 대개 전각 앞에 세운다. 불교에는 육법공양이 있는데, 그 중 등불을 밝히는 것을 공양 중에서도 으뜸으로 친다. 또한 이 석등은 부처님의 불법을 온 세상에 퍼트려 세상을 밝힌다는 뜻도 갖고 있다. 하기에 석등은 공양구의 하나로 제작이 되었던 것이다.




석등은 받침돌인 하대석과 간주석인 중대석, 그리고 상대석과 불을 밝히는 화사석, 맨 위에는 지붕돌인 옥개석 등 5부분으로 구성이 된다. 옥개석 위에는 보주를 얹는 것이 일반적인 형태이다.

우아한 모습의 석등

청도 운문사 금당 앞에 놓여 있는 석등은 8각으로 꾸며졌다. 불을 밝히는 화사석을 중심으로, 아래에는 세 부분으로 이루어진 받침을 두고 위로는 지붕돌과 머리장식을 얹었다. 바닥돌과 하나로 이루어진 아래받침돌에는, 여덟 장의 아래로 향한 꽃잎을 새긴 앙화가 조각되어 있다.

그 위에 놓인 가운데기둥인 간주석에는 아무런 꾸밈이 없으며, 윗받침돌에는 각 면마다 연꽃이 새겨져 있다. 팔각의 화사석에는 불빛이 퍼져 나오도록 4개의 창을 마련해 두었으며, 불창마다 불창을 바람을 막기 위한 장식을 했는지 작은 구멍들이 보인다. 지붕돌은 경쾌한 모습이며, 꼭대기에는 연꽃봉우리 모양의 보주가 남아 있다.




이 석등은 각 부분이 균형을 이룬 우아한 모습이다. 7월 15일 찾아간 운문사. 도착하기 전부터 내리는 비가 점점 더 빗방울이 굵어진다. 우산도 받치지 못하고 금당 앞 석등으로 다가선다. 그리고 연신 사진을 찍어댄다. 한시라도 빨리 촬영을 마치고 딴 곳으로 옮겨가기 위해서다. 비가 오는 날 답사는 만만치가 않다. 하지만 늘 같은 모습으로 기다리고 있는 문화재가 있어, 내리는 비도 마다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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