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화 각화사는 봉화군 춘양면 석현리에 소재하고 있다. 각화사는 신라 신문왕 6년인 686년에 원효대사가 창건하고, 고려 예종 때 계응이 중건하였으며, 1926년에 달현이 중수하였다. 각화사가 자리하고 춘양은 강원도 태백과 서로 이웃하고 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봉화를 가려면 구절불구불한 산길에 조성한 국도를 위태롭게 가야 했지만 요즈음은 넓고 곧은길이 나있어서 편하다.

 

봉화군에는 우리가 대찰이라고 부를 만한 절은 없다. 하지만 조선시대에 왕조실록을 보관하던 태백산 사고가 생기면서, 태백산 사고의 수호사찰로 정한 절이 바로 각화사이다. 각화사는 우리나라의 소나무 중 최고로 치는 춘양목이라는 가장 좋은 소나무로 유명한, 봉화군 춘양면 석현리에 자리하고 있는 의성 고운사의 말사이다.

 

각화사는 오래 전 춘양면 서동리 춘양상업고등학교 교정 자리에 남화사라는 절이 있었으나, 서기 665년인 신라 문무왕 5년에 원효대사가 이곳으로 이건하여 남화사를 생각한다는 뜻으로 각화사라 명명했다고 한다.

 

 

고려 전기의 귀부가 남아있어

 

각화사에는 고려 전기에 세운 비 받침돌인 귀부가 남아있다. 경상북도 유형문화제 제189호인 각화사 귀부가 소재한다. 이 귀부는 각화사에 놓여 있는 비의 받침돌로, 고려 전기 문신인 좌간의대부 김심언이 세웠던 통진대사비(通眞大師碑)’의 일부로 전하고 있다. 이 귀부는 통일신라 시대에 세워진 귀부들과는 사뭇 다른 형태로 조성되었다.

 

귀부는 바닥돌과 하나의 돌로 이루어져 있으며, 등 중앙에 마련된 비를 꽂아두는 비좌는 약간 파손이 되긴 하였으나 거의 본 모습을 갖추고 있다. 등 무늬는 6각형이 전면에 덮여 있고, 그 안마다 ()’자와 ()’, ()‘자를 를 도드라지게 새겼다. 대체적으로 고려 전기의 정교하고도 웅대한 조각솜씨를 이어받고 있으나, 몸통에 비해 머리가 작은 감이 든다.

 

 

비와 이수는 사라졌지만, 소중한 고려 전기의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귀부의 길이는 220cm, 폭은 190cm에 높이는 92cm이다. 후에 비몸과 머릿돌을 새로이 만들어 그 위에 세워놓았다.

 

용머리에 거북, 거 참 괴이하네

 

귀부의 형태는 신라시대에는 대개 거북이의 머리와 몸으로 제작을 하였으나, 통일신라시대부터 고려로 넘어오면서 용머리에 거북이의 몸을 가진 형태로 조성하였다. 통일신라시대에서 고려초기의 귀부는 상당히 힘이 있어 보이는 용머리를 귀부에 붙였다. 왜 이렇게 용머리를 조각하였는지는 정확치 않으나. 아마도 강한 국권을 상징하기 위해서는 아니었을까?

 

 

각화사 귀부를 찬찬히 돌아본다. 귀두의 뒤편에는 굵게 금이 가 있으며, 귀부의 앞과 뒷발은 금방이라도 무엇인가를 낚아 챌 곳 같이 날카롭다. 귀두의 귓가에는 금방이라도 펄럭일 듯한 아가미를 새겼다. 몸체에 비해 머리가 작게 조성이 되었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매우 힘이 있는 형태이다.

 

벌써 각화사를 다녀온지가 꽤 시간이 흘렀다. 그동안 밀린 자료정리를 하느라 하루 종일 부산하다. 날이 좋아 가까운 곳으로 답사라도 나가려고 했지만, 그보다는 그동안 밀린 자료정리가 더 시급할 것 같다. 올해도 300장이 넘는 자료CD가 장식장에 나란히 꽂힌다. 각 종류별로 구분을 하여 하나하나 정리를 하다 보니 하루해가 다 지났다.

 

 

올해는 답사에 좀 더 신경을 써야겠다고 마음을 먹는다. 지난해는 생태교통으로 인해 한 달간이나 행궁동 일대를 돌아다니느라, 제대로 마음먹고 답사한 번을 못한 듯하다. 지난해 하지 못한 답사를 올 한 해 정말 열심을 내어야 할 판이다.

경기도 양평군 용문면 신점리 산99-6에 소재한 양평 용문사. 스령 1200년이 넘은 천연기념물인 용문사 은행나무로 유명한 절이다. 용문사 경내에서 동편으로 약 300m 정도를 가면 보물 제531호로 지정된 양평 용문사 정지국사탑 및 비를 만날 수가 있다. 이곳을 찾은 시기가 여름철 비가 내리는 날인 듯하다.

 

이 탑과 비는 용문사에서 약 300m 떨어진 동쪽에 자리하고 있는데, 비가 오는 바람에 작은 물길을 건너야 했던 기억이 난다. 이 비는 정지국사(13241395)의 행적 등을 기록한 것이다. 정지국사는 고려 후기의 승려로 황해도 재령 출신이며 중국 연경에서 수학하였다. 조선 태조 4년에 입적하였는데 찬연한 사리가 많이 나와 태조가 이를 듣고 정지국사라는 시호를 내렸다.

 

 

오직 수행에만 힘을 써

 

정지국사 축원은 고려 말의 고승으로 충숙왕 11년인 1324년 황해도 재령에서 태어나, 19세에 장수산 현암사에서 승려가 되었다. 공민왕 2년인 135330세에 자초 무학대사와 함께 중국 연경에 들어가 법원사의 지공을 찾아보고, 그에게 법을 이어 받은 혜근, 나옹선사에게 사사하였다.

 

그 뒤 무학대사와 함께 중국 각지로 다니며 수도하다가 공민왕 5년인 1356년에 귀국하였다. 벼슬이 싫어 몸을 숨기고 수행에만 힘쓰다가 조선조 태조 4년에 천마산 적멸암에서 입적하였다. 입적 후 다비를 거행할 때 수많은 사리가 나와 정지국사라는 별호를 태조가 내렸다고 전한다.

 

 

단아한 자태의 정지국사 탑

 

탑과 비는 80m정도의 거리를 두고 위치하고 있다. 탑은 조안 등이 세운 것이며 바닥돌과 아래받침돌이 4각이고, 윗받침돌과 탑의 몸돌이 8각으로 되어 있어 전체적인 모습이 8각을 이루고 있다. 아래받침돌과 윗받침돌에는 연꽃을 새기고, 북 모양의 가운데받침돌에는 장식 없이 부드러운 곡선만 보인다.

 

탑의 몸돌에는 한쪽 면에만 형식적인 문짝 모양이 조각되었다. 지붕돌은 아래에 3단 받침이 있고, 처마 밑에는 모서리마다 서까래를 새겼다. 지붕돌 윗면에는 크게 두드러진 8각의 지붕선이 있고, 끝부분에는 꽃장식이 있는데 종래의 형태와는 달리 퇴화된 것이다. 꼭대기에는 연꽃 모양의 장식이 놓여 있다.

 

일반적으로 사리탑에서 보이는 화려함이 없이 단아한 형태로 조성이 된 정지국사 탑. 아마도 생전 정지국사의 오직 구도에만 애를 쓴 모습 그대로가 아니었을까? 빗길에 찾아 들어간 골짜기에 그저 찾는 이 하나 없이 서 있는 탑을 보면서 괜히 콧등이 시큰해진다. 요즈음처럼 호의호식하면서 수행자인체 한다는 많은 이야기를 들으면서 정지국사는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작은 비도 소중한 보물

 

비는 작은 규모의 석비로 윗부분은 모서리를 양쪽 모두 접듯이 깎은 상태이고, 문자가 새겨진 주위에는 가는 선이 그어져 있다. 비문은 당시의 유명한 학자인 권근이 지었다. 처음에는 정지국사탑에서 20m 아래 자연석 바위에 세워 놓았는데, 빠져 나와 경내에 뒹굴고 있던 것을 1970년경 지금의 위치에 세웠다고 한다.

 

탑과 비가 일괄로 보물로 지정된 정지국사 탑과 비. 비가 뿌리는 날 찾아간 양평 용문사에서 소로 길로 접어들어 탑을 찾아가던 길에 물웅덩이에도 빠지고, 수렁에도 빠져 애를 먹었다. 하지만 그것이 무슨 대수이랴. 소중한 문화재를 만났다는 기쁨은 그 몇배나 행복인 것을. 아마도 문화재 답사를 그치지 못하는 이유일 것이다.

수종사는 대한불교 조계종 제25교구 본사인 남양주 봉선사의 말사이며, 운길산 8부 능선에 자리하고 있는 조선 초기에 중창한 사찰이다. 소재지는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북한강로 433번길에 있다. 북한강과 남한강이 합수되는 두물머리(양수리)를 내려다보고 있는 수종사는, 그 경계가 빼어난 사찰로 명성을 얻고 있다.

 

수종사라는 절 이름은 1458년 세조가 신병치료차 금강산을 유람하고 돌아올 때, 밤이 되어 이수두(二水頭=두물머리)에서 하룻밤을 묵게 되었다. 밤이 늦었는데 운길산 어디선가 은은한 종소리가 들려와 다음 날 숲 속을 둘러보게 하니, 천년고찰의 폐허 바위굴에는 18 나한상이 줄지어 앉아 있었는데 그 바위굴에서 물방울이 떨어지는 소리가 종소리처럼 들렸던 것을 알게 되었다.

 

이에 세조는 감동하여 왕명으로 지금의 자리에 절을 중창케 하고 절 이름을 수종사라 부르도록 하였다고 전한다. 조선 시대의 명문장가인 서거정은 수종사에서 두물머리를 내려다보고, 동방의 사찰 중 제일이라 했을 정도이다. 수종사 절 마당에서 내려다보는 북한강의 경관이 그 정도로 빼어나다.

 

 

8각으로 조성한 조선시대의 부도

 

수종사 경내에는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57호인 남양주수종사부도(南楊州水鍾寺浮屠)’가 자리한다. 부도는 승려의 무덤을 상징하여 그 유골이나 사리를 모셔두는 탑이다. 수종사의 부도는 전체적으로 8각을 기본으로 하여, 2단을 이루는 기단 위에 탑신을 올리고 머리장식을 얹은 모습이다.

 

수종사를 다녀온 지도 벌써 한 달이 훌쩍 자났다. 하지만 문화재 답사라는 것이 다녀온 후 한꺼번에 모든 것을 다 기록할 수가 없으니, 이제라도 정리를 하는 수밖에. 수종사 부도의 기단부는 긴략하게 2개의 돌로 마련하였다. 일반적으로 부도의 경우 상, , 3단으로 구성되는데 비해 특이한 형태이다.

 

 

몸돌에 새긴 구름과 용, 장엄해

 

부도의 탑신인 몸돌은 둥근 형태가 변하여 거의 사각형에 가깝고, 용의 모습을 매우 도드라지게 새겨 넣었다. 구름과 함께 새긴 용은 섬세하지는 않으나, 그래도 장중함을 더하고 있다. 지붕돌은 두꺼운 편이고, 처마는 느린 U자형을 이룬다. 꼭대기에는 노반(머리장식받침) 위로 보주(구슬모양 장식)와 보륜(수레바퀴모양 장식) 등이 남아 머리장식을 하고 있다.

 

지붕돌 낙수면에 남아 있는 기록에는 <태종태후정의옹주사리탑시주○○유씨금성대군정통사년기미십월일입>고 적고 있다. 이 기록으로 보아 조선 세종 21년인 1439년에, 왕실의 뜻을 모아 이 부도를 만들었음을 알 수 있다. 부도 안에서 고려시대 청자로 만든 항아리와 은으로 만들어 금을 입힌 6각의 단지(보물 제259)를 발견하여,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다.

 

 

태종의 다섯째 딸인 정의옹주의 부도로 알려진 수종사 부도. 두 마리의 용이 구름 위에서 여의주를 움켜잡고 비상하려는 용트림이 새겨져 있는 이 부도는, 화려하지는 않지만 운룡문 만으로도 장엄함을 엿볼 수가 있다. 원통형으로 조성한 탑신의 둘레가 218cm인 수종사 부도. 575년 세월을 그렇게 수종사에서 두물머리를 바라다보고 자리하고 있다.

 

찻집인 삼정헌 옆으로 다가가 두물머리를 내려다본다. 과거에는 수많은 배들이 드나들었을 두물머리. 지금은 그저 무심한 바람 한 점이 볼을 스치고 지나간다. 다산 정약용은 15세에 수종사에 노닐다라는 글을 지었다. 이곳이 다산의 놀이터였기 때문이다.

 

다래덩굴 드리운 비탈진 섬들이나

경내로 드는 길은 과연 어느 곳인고?

응달 숲 속에 아직 묻은 눈이 남아있고

양지바른 물가엔 아침햇살에 이슬이 반짝인다.

샘물이 솟아 땅은 표주박처럼 움푹하고

종소리는 메아리쳐 깊은 산속으로 흘러가네.

내 여기를 수없이 노닐었지만

그 그윽함을 아직 다 모르겠구나.

문화재 답사를 나갈 때는 사전에 동선부터 정해놓는다. 그것은 같은 시간 안에 더 많은 문화재를 답사하기 위한 방법이기도 하다. 동선을 정해놓지 않으면 가까운 거리에 문화재를 놓고도, 멀리 돌아다녀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사전에 촬영을 할 문화재를 정해놓지만, 가끔은 지나는 길에 생각지고 않은 문화재를 만나는 수도 있다.

 

충남 보령시 웅천읍 수부리 16-6에 소재한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32보령수부리귀부 및 이수(保寧水芙里龜趺螭首)’가 바로 문화재 답사 자료에는 없었던 문화재이다. 보령시 웅천읍에 있는 독살을 촬영하러 가는 길에 만났으니, 이럴 때는 꼭 많은 돈을 얻어 횡재라도 한 듯 기분이 좋다.

 

독살을 만나러 가는 길

 

독살은 보령시 웅천읍 독산리 해안가에 소재한 충남 민속문화재 제16호이다. 보령지방은 조석간만인 밀물과 썰물의 차가 커서 예로부터 갯벌에 살을 매어 고기를 잡았는데, 돌로 성을 쌓아 만든 살을 독살이라고 한다. 예로부터 서해안에서는 갯벌에 울타리를 쳐서 고기를 잡았다. 대개의 독살은 대나무를 이용하지만, 이곳은 돌을 사용하였다.

 

 

돌을 촘촘히 쌓아 v자 형태로 만든 살을 독살이라는 하는데, 썰물 때마다 멸치, 새우, 숭어, 전어, 학꽁치 등 다양한 어종을 잡을 수 있어 좋은 수입원이었다. 독산리라는 지명에서 보이 듯 웅천읍 독산리에는 많은 독살이 있었다고 한다. 현재는 대부분 무너져 사라지고, 두 곳만이 남아있다는 것이다.

 

옛 절터에 있던 것을 수습한 귀부와 이수

 

수부리의 귀부와 이수는 영수암(예전의 단원사) 경내에 서 있는 비로, 근처의 절터에 있던 것을 수습하여 이곳으로 옮겨 놓은 것이라고 한다. 거북 모양의 받침돌 위에는 비몸을 잃어버린 채 머릿돌만이 놓여 있었다. 영수암 경내로 들어가 귀부와 이수만 남은 것을 찾았으나, 보이지 않는다. 지금은 비몸을 만들어 끼워놓았기 때문이다.

 

 

거북받침인 귀부는 머리가 용 모양이며, 귀와 뿔을 새기고 턱 밑의 수염은 목에까지 조각하였다. 이런 형태의 귀부는 통일신라시대부터 고려 초의 귀부에서 많이 나타나는 형태이다. 등에는 벌집모양의 육각형을 새겼고, 중앙에 마련된 비몸을 꽂아두던 홈 주변에는 연꽃을 둘러 장식하였다.

 

주인 없는 귀부와 이수

 

머릿돌은 용과 구름무늬로 가득 차 있으며, 앞면 중앙에는 액자모양의 공간을 두어 다시 자 모양으로 나누어 놓았는데 글씨는 적혀 있지 않다. 이렇게 화려하고 세련된 조각 양식으로 보아 고려시대의 작품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 귀부와 이수가 누구의 것인지는 전혀 알 길이 없다. 대개 머릿돌인 이수의 중앙에 명문을 적어놓지만, 이 이수에는 명문조차 없기 때문이다.

 

 

지금은 비신을 원 규격을 측정하여 몸돌을 만들어 놓았다. 사라진 몸돌인 비와 명문이 적혀있지 않은 머릿돌인 이수. 누구의 것인지 알 수가 없는 문화재. 이런 문화재를 볼 때마다 마음이 아프다. 그 옆에는 팔각원당형 부도편이 있으나, 이 부도 역시 누구의 것인지 알 수가 없다.

 

웅천읍 독산리 독살을 만나러 가다가 만난 귀부와 이수. 결국 예정에 없던 이 문화재를 하나를 만나서인가, 정작 보고 싶던 독살은 물이 차는 바람에 볼 수가 없었다. 문화재라고 찾아가면 언제나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다음 답사 때는 물때를 미리 점검을 해야겠다.

 

 

경기도 양평군 옥천면 용천리 304에 소재한 사나사. 사나사 경내에는 경기도도유형문화재 제72호인 원증국사탑과 도유형문화재 제73호인 원증국사석종비가 소재한다. 원증국사는 사나사를 중창했던 고려 후기의 승려인 보우(13011382)를 말한다. 보우의 호는 태고이며, 시호는 원증이고, 탑의 이름은 보월승공이다.

 

양평 용문산 계곡을 끼고 자리한 천년고찰인 사나사는 많은 수난을 당했다. 신라 경명왕 7년인 923년에 고승 대경대사가 제자 용문과 함께 창건한 후, 5층 석탑과 노사나불상을 조성하여 봉안하고 절 이름을 사나사로 하였다고 전한다. 사나사는 조선조 선조 25년인 1592년에 일어난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던 것을, 선조 41년인 1608년에 단월 한방손이 재건하였다.

 

 

많은 수난을 당한 사나사

 

영조 51년인 1773년에는 양평군내 유지들이 뜻을 모아 당산계를 조직하고 향답을 사찰에 시주하여, 불량답을 마련하고 이를 기념하기 위해 경내에 비를 세웠다. 순종 원년인 1907년에는 일제의 침략에 항거하는 의병들의 근거지라 하여 사찰을 모두 불태웠다. 그 뒤 1909년에 계헌이 큰방 15칸을 복구하였으며, 1937년에 주지 맹현우 화상이 큰방과 조사전 등을 지었다.

 

그러나 1950년에 일어난 6.25사변으로 인해 또 한 번 사나사는 전소가 되었다. 1956년에 주지 김두준과 함문성이 협력하여 대웅전, 산신각, 큰 방을 재건하고 함씨각을 지었다. 그러고 보니 사나사를 다녀온 지가 오늘로 꼭 한 달이 되었다. 915일 오후에 잠시 시간을 내어 바람도 쏘일 겸 다녀온 사나사이다.

 

 

특이한 형태의 원증국사 석종비

 

원증국사 석종비는 화강암으로 조성한 지대석인 받침돌 윗면에 비를 꽂아둘 네모난 홈을 파서 비몸을 세웠는데, 그 양 옆에 길고 네모난 기둥을 세워 비를 받치고 있다. 위에는 밑이 둥글고 위는 평평한 지붕돌을 얹어 몸체를 보호하고 있다. 이러한 형식의 비는 1379년도에 세워진 여주 신륵사 보제존자 비와 흡사하나 형식이 그보다 간결하다.

 

이 석종비는 고려 우왕 12년인 1386년 보우의 제자 달심이 세운 비로, 비문은 정도전이 짓고 재림사의 주지인 선사훤문이 글씨를 썼다. 비 뒷면에는 비를 세울 때 도움을 준 신도들의 명단을 적었다. 비는 머릿돌인 옥개석과 몸돌인 비신, 그리고 받침돌인 비좌로 구성되어 있다. 전체 높이는 1.67m이며 한국전쟁 때 파손되어 전문을 판독할 수 없는 상태이다.

 

비는 여기저기 수난을 당한 흔적이 보인다. 비 몸돌에 구멍이 뚫려있는 것이 보기에도 안타깝다. 머릿돌 위에는 사람들이 무엇을 기원하면서 던졌는지, 동전이 여기저기 널려있다. 석종비의 내용만 제대로 판독을 했어도 얼마나 좋을까를 생각하면, 문화재 하나를 소중하게 보존한다는 것이 얼마나 귀중한 일인가를 깨닫게 한다.

 

 

소설암에서 입적한 원증국사의 부도탑

 

원증국사 석종비 옆에는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72호인 사나사원증국사탑이 자리한다. 부도는 승려의 무덤을 상징하여, 그 유골이나 사리를 모시는 곳이다. 이 부도는 태고화상 보우의 사리를 모시고 있다. 원증국사는 13세에 회암사 광지선사에 의해 출가를 하였고, 고려 충목왕 2년인 1346년에 원으로 가서 청공의 법을 이어 받았다. 충목왕 4년인 1348년에 귀국하여 소설암이라는 암자에서 수도를 하고, 왕사와 국사가 되었으며 이 암자에서 입적하였다.

 

부도는 기단 위로 종모양의 탑신을 올린 석종형태를 띠고 있다. 높직하고 네모진 기단 윗면에는 연꽃을 새겼고, 둥글고 길쭉한 탑신에는 아무런 장식도 하지 않았다. 꼭대기에는 연꽃봉오리 모양의 머리장식이 솟아 있다. 부도를 세운 시기는 가까이에 서 있는 탑비의 기록에, 고려 우왕 9년인 1383년에 문인 달심이 이 부도와 탑비를 건립했다는 기록이 있어 고려시대에 세운 것임을 알 수 있다.

 

 

잠시 틈을 내어 다녀온 사나사. 그리고 사나사에서 만난 원증국사의 부도탑과 탑비. 간결하고 화려한 장식을 하지는 않았다. 그러한 모습에서 원증국사의 품성을 알 수 있을 것만 같다. 요즈음 잘 나가는 분들에게 꼭 들려주고 싶은 내용이 하나 있다. 고양시 덕양구 북한동 태고사에 소재한 보물 제611호인 태고사원증국사탑비에는 이러한 내용이 적혀있다.

 

무자년 봄 귀국하여 미원현의 소설산에 들어가 직접 경작하면서, 4년간 부모를 시양하였다. 임진년 여름 현릉께서 스님을 왕도로 맞이하여 모시려 하였으나, 응하지 않자 재차 사신을 보내오므로 스님은 하는 수 없이 나아가서 잠시 있다가 그 해 가을 고사하고 산으로 돌아갔다. 병신년 3월 나라에서 스님을 청하여 봉은사에서 법회를 열었는데, 전국의 선사와 강사가 함께 수없이 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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