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두장군 전봉준을 모르는 사람들은 거의 없다. 양반들의 수탈에 대항하여 농민군을 이끌고, 동학농민혁명을 일으킨 교육자이자 지도자이다. 전봉준은 1854년에 전라북도 정읍에서 몰락한 양반가의 전창혁과 김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릴 적 이름은 명숙이라 했으며 족보상의 이름은 영준이라고 한다. ‘녹두장군’은 그의 키가 작아서 붙여진 별칭이다. 전봉준은 어려서부터 가난한 생활을 했으며 끼니를 잇기 위해 약도 팔고 훈장 일을 하기도 했다고 전한다.


전봉준을 그리는 소리 ‘새야새야 파랑새야’

새야새야 파랑새야
녹두밭에 앉지마라
녹두꽃이 떨어지면
청포장수 울고간다

어렸을 때 한 번쯤은 불러본 노래다. 음률이 처량하기도 한 이 노래는 전봉준이 공주 우금치 전투에서 패하고 난 뒤 순창으로 피해 다시 거사를 일으키려 하였으나, 현상금을 노린 옛 부하 김경천 등의 밀고로 관군에게 체포되었다. 한성부로 끌려간 전봉준은 1895년 3월 30일에 교수형에 처해졌다.

이 ‘새야새야 파랑새야’라는 노래는 전봉준이 교수형을 당하고 난 뒤, 백성들 사이에서 유행했다고 한다. 전봉준의 동학농민운동이 성공하지 못하고, 양반들의 세를 꺾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음을 한탄하는 소리이다.


조촐한 초가에서 세상을 바로잡다

정읍시 이평면 장내리에는 사적 제293호로 지정이 된 전봉준의 고택지가 있다. 마을 한편에 주차장이 마련되어 있고, 조금 안쪽에 초가로 지은 집이 보인다. 고택지에는 살림채 한 동과 헛간 채 한 동이 있을 뿐이다. 지난 날 어려웠던 살림살이가 느껴지는 집이다.




살림채는 전봉준이 살던 집으로 조선조 고종 15년인 1878년에 지어졌다. 4칸의 - 자형으로 지어진 살림채는 동쪽으로부터 부엌, 큰방, 윗방, 끝 방인 골방으로 연결이 되어있다. 골방 앞으로는 바람막이 벽이 있고, 그 앞에는 한데 아궁이를 두었다. 큰방과 윗방 앞쪽에는 툇마루를 달아내고, 마루 끝에는 부엌과 연결이 되는 문을 달았다.

살림채 앞에 있는 헛간채는 측간과 헛간으로 사용이 되었으며, 두 칸으로 되어있다. 녹두장군 전봉준은 이곳에서 농사를 짓고 마을의 훈장 일을 맡아하면서 가난한 삶을 이어가고 있었다. 몰락한 양반가라고는 하지만 나름대로 부끄럼 없는 삶을 살았던 것 같다.




방안을 들여다보니 그저 어느 양반집 하인들의 방을 연상케 하는 모습이다. 허름한 가구 몇 가지가 놓여있고, 천정은 서까래와 흑이 그대로 노출이 되어있다. 집을 지을 때 사용한 부재도 모두 인근 어디서나 구할 수 있는 그러한 나무들을 이용했다.

부엌은 두 짝 여닫이문을 달았는데 안으로 들어가니 바닥은 조개무덤이 가득하다. 예전 어머니들은 이 조개무덤이 부자가 될 징조라고도 했다. 집 뒤에는 장독대가 있고, 물길을 낸 골방 뒤로는 물길 위로 지나는 연도와 굴뚝이 서 있다. 연도와 굴뚝은 무너져 내리고 있다.



이집에서 고부군수 조병갑이 만석보를 설치하고 과중한 물세를 징수하는 등, 각종 명목으로 수탈을 일삼자 고종 31년인 1894년 1월, 말목장터에서 조병갑을 응징할 것을 역설하고 천여 명의 농민군을 이끌고 고부관아를 기습 점령한 것으로 동학농민혁명을 일으켰다.

집을 돌아보고 앞으로 나오니 우물이 보인다. 지금은 장방형 돌을 이용해 우물주변을 잘 정비를 해놓았다. 전봉준의 고택 우물이라는 안내판이 붙어있다. 우물 속을 들여다보니, 아직도 맑은 물이 고여 있다. 조소마을 주민들이 사용하던 공동우물이다.



세상을 바로잡겠다고 분연히 떨치고 일어선 녹두장군. 지금은 이렇게 집과 우물만이 남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버린 한 인물을 기억해내고 있다. 하지만 아직도 이 땅에는 민초들의 아픔은 채 가시지를 않았으니...


아산시 송악면 외암리에 소재한 외암리 민속마을은, 마을 전체가 중요민속자료 제236호로 지정이 되어 있다. 그리고 마을 안에는 충청지방의 양반집과 초가가 한데 어우러져, 우리의 기옥구조나 실생활 등을 볼 수 있는 전통의 마을이다. 조선조 경종 3년인 1723년에 이간 선생이 지은 <외암기>에는 마을 이름을 '외암'이라 기록한 사실이 있어, 외암의 명칭이 이때 지어진 것으로 보인다.

 

외암리 민속마을은 우리나라에서 집단으로 한 마을이 중요민속자료로 정해진 몇 곳 안 되는 곳 중 한 곳이다. 경주의 양동마을, 순천의 낙안마을과 강원 고성의 왕곡마을 등이 이렇게 집단으로 지정이 되어 있지만, 외암리 민속마을은 수도권에서 가장 가까이 있어 많은 사람들이 즐겨 찾는 곳이기도 하다.

 

▲ 민속마을 외암리 민속마을은 우리나라에서 집단으로 한 마을이 중요민속자료로 정해진 몇 곳 안 되는 곳 중 한 곳이다

 

입장료 징수에 맞는 관람이 이루어져야

 

외암리 민속마을은 사진작가 등 많은 사람들이 즐겨 찾는 곳이다. 이곳은 아산시민들은 주민등록증 등을 보여주면 무료로 관람을 할 수가 있다. 그러나 외지인은 경우 성인들은 2000원의 관람료를 지불하여야만 한다. 문제는 이렇게 관람료를 지불하고도 몇몇 집은 밖으로만 관람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우리가 어느 민속마을 등에 들어가면 그 안에 사는 모습을 보고 싶어서다. 그저 수박 겉핥기식으로 밖으로만 맴돌다가 나온다면, 굳이 관람료를 지불해야할 이유가 없다는 생각이다.

 

그러나 외암리 민속마을의 경우 마을 안에 중요민속자료로 지정이 되어 있는 집이거나, 그 외에 몇 집은 아예 문을 걸어두거나, 개인의 소유임을 써 붙이고 출입을 통제하고 있는 실정이다. 경주 양동마을의 경우 누구나 관람료 없이 마을을 돌아볼 수가 있다. 물론 몇 집은 사생활이 침해받는 것을 싫어 출입을 제한한다는 문구가 보이기도 한다.

 

▲ 건재고택 중요민속자료인 건재고택. 문이 굳게 닫혀있어 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다.

▲ 건재고택 담 밖에서 본 건재고택, 아름다운 정원 등이 있어 외암리에서도 가장 뛰어난 고풍을 자랑하는 집이다.

 

만일 관람료를 받았다면 그만큼의 충분한 관람을 책임져야만 한다. 사람이 살기 때문에 생활에 지장을 초래한다고 하면, 하루에 몇 시간만이라도 개방을 하거나, 안내자의 안내를 받아서라도 관람을 할 수 있도록 해주어야만 한다. 그러나 그렇게 꼭꼭 닫혀있는 집들은 관람을 할 수 없다는 것이, 관리소 측의 대답이다. 물론 주차료로도 그만한 돈을 받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여주 세종대왕릉이나 효종대왕릉의 경우 주차는 무료이다. 그리고 두 곳의 능을 관람하는 대도 대인의 경우가 일괄 천원이다. 2000원을 받든지 얼마를 받든지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만큼 외지에서 온 관람객들을 위한 서비스는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대충 꾸며놓은 시설물, 외국인들에게 미안해

 

▲ 물레방아 마을 입구 다리건너에 있는 물레방아. 그러나 그 기능을 잃었다

▲ 디딜방아 공이가 찧는 부분은 다 망가지고 낙엽만 수북하다.

 

외암리 마을에서 관람료를 지불하고 다리를 건너면 좌측에 물레방아가 있다. 물은 흐르는데 정작 방아는 찧어지지 않는다. 가까이 가서보니 물의 힘으로 수차가 돌아가면, 방아를 움직여야 하는데 연결되는 부분이 연결이 안 되어 있다. 마을을 돌다가 보면 디딜방아와 연자방아도 보인다. 그런데 이 방아들 역시 대충 모양만 꾸며 놓았다. 디딜방아 공이가 곡식을 찧는 부분은 무너져 있고 가득 낙엽 등이 쌓여져 있다.

 

외암리 민속마을은 외국인들이 많이 찾아오는 곳이다. 그런데 이 사람들이 디딜방아를 돌아보다가 눈살을 찌푸린다. 무엇이라고 이야기를 주고받는데, 대충 들어보니 어떻게 여기서 방아를 찧느냐는 것이다. 그저 보여주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다. 제대로 된 모습을 보여주고, 그들이 실제로 체험을 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러나 모습만 갖춘 이런 것들을 볼 때, 정말 부끄럽기 짝이 없다.

  

보이지 않는 안내판 정비해야

 

 
▲ 안내판 글이 다 지워져 알아볼 수 없는 안내판

▲ 외국인들 민속마을 관람을 하고 있는 외국인들. 좀 더 신경을 써서 제대로 된 마을을 관람할 수 있도록 해야한다.

 

마을을 돌다가 보면 집 앞에 그 집이 어떤 집이었나를 안내하는 안내판들이 있다. 여러 성씨가 살았으나 조선조 명종 때 예안 이씨인 이사종이, 세 딸만을 둔 진한평의 첫째 사위가 되면서 이곳으로 이주했다. 그 후손들이 크게 번창하면서 동족마을이 된 곳이 바로 외암리 민속마을이다. 그러다 보니 마을 내에는 종손집, 참판댁, 송화댁 등 가호가 붙은 집들이 있다. 이렇게 집집마다 명칭이 붙으면서 그 내력을 설명한 안내판이 집 앞에 놓여있다.

 

그러나 그 중 몇 곳의 안내판은 글이 지워지고 훼손이 심해 알아볼 수가 없다. 마을의 여기저기서 보수를 하느라고 주변이 부산하다. 관람을 편하게 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고, 모든 것을 제대로 갖추어 놓아야 우리 것을 제대로 알릴 수가 있다. 무엇인가 부족한 듯한 모습에서 우리 민속마을의 아름다움이 제 가치를 잃는다면, 차라리 보여주지 아니함만 못한 것이 아닐까? 제대로 된 관리가 이루어져, 민속마을을 찾는 사람들이 더 기분 좋은 관람을 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다. (출처 : 오마이뉴스 / 2010, 3, 9)


벌써 두어 달이 지났나 보다. 이천시 율면에 있는 어재연장군 생가를 답사하기 위해 가보니, 한창 공사 중이었다. 안내판에 2009년 5월 29일부터 11월 25일까지 지붕보수를 한다고 적혀 있다. 복잡한 공사 중인 집을 촬영할 수가 없어 그냥 돌아왔다. 12월 6일이니 공사를 마쳤을 것 같아, 다시 이천시 율면 산성리 74번지 중요민속자료 제127호인 생가로 향했다. 올 들어 가장 춥다는 날씨답게, 걷는 길이 쉽지가 않다. 어재연장군 생가가 보이는 소롯길로 접어들었는데, 이게 웬일인가? 지붕 위에 파랑색이 보인다. 공사기간이 10일이나 지났는데 아직도 공사가 끝나지 않았다. 마침 일요일이라 공사는 하지 않고 있긴 하지만, 이런 낭패가 어디 있을까?

 

 

공사 중인 어재연장군 생가, 멀리서 온 분들의 불평

 

어재연 장군 생가를 들어가니 멀리서 왔다고 하는 분들이 안을 둘러보고 계시다. 이분들도 나처럼 황당하다고 한다. "공기를 적었으면 책임지고 공사를 마쳐주어야지, 무엇하러 안내판에 공사기간을 적어요. 의미도 없는 기간을"이라며 볼멘소리를 한다. 이렇게 어지럽게 널려있는 상황에서 무엇을 제대로 촬영이나 할 수 있을까? 그래도 어쩔 것인가. 여기까지 두 번이나 찾아왔는데, 볼썽 사납기는 하지만 그대로 돌아갈 수는 없다는 생각이다. 할 수 없이 몇 바퀴 집안을 둘러본다.

 

  
▲ 안내판 공사 안내판에는 2009년 11월 25일까지 공사를 한다고 적혀있다.

 

350년 된 안채, 평범함 속 돋보이는 미

 

어재연장군 생가는 초가로 지어진 조선 후기 살림집 형태이다. 대문을 마주하고 좌측으로는 사랑채와 헛간채가 - 자로 자리하고, 대문을 들어서면 문간방과 광채가 ∣자로 배치가 되어 있다. 사랑채와 광채를 마주 하고 ㄱ 자형 안채가 자리하고 있어, 전체적으로는 튼 ㅁ 자형 가옥구조다.

 

안채는 조선조 현종 1년인 1660년에 지어졌으니, 벌써 350년이나 되었다. 안채는 건넌방과 두 칸 마루, 그리고 안방이 일렬로 배치가 되었고, 꺾인 곳에 부엌과 광이 있다. 대청은 방에 비해 꽤 넓게 자리를 잡았다. 대청에는 두 곳 문을 내어 바람을 통하게 하였다. 그런데 건넌방 앞에 있는 문 위에, 세 개의 작은 창이 보인다. 무엇이었을까? 열어보니 다락이다. 이렇게 대청에 작은 다락을 만든 용도가 무엇일까?

 

  
▲ 대청의 창호 대청 뒤편에 난 문과 그 위에 작은 창호

  
▲ 다락 윗부분만 있는 다락. 대청에 있어 많은 용도로 사용이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뒤쪽으로 돌아가 보니 윗문이 있는 곳이 돌출이 되어 있다. 밑은 나무로 지줏대를 만들고, 그 위 벽을 돌출된 다락과 같은 형태로 만들었다. 여름에도 집 뒤쪽에 있으니 시원하게 바람이 소통될 듯하다. 대청에 있고, 습기가 차지 않는다는 점, 바람이 잘 통한다는 점에서 돌출된 작은 다락 용도를 생각해보면, 과일이나 습기에 약한 비싼 천 가지를 보관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어릴 적 시골 친척집에 갔다가 이런 대청에 붙은 다락에서, 친척할머니께서 과일을 꺼내는 것을 본 기억이 난다.

 

  
▲ 문틀 안채의 안방 뒤. 가로지른 문틀의 나무가 다듬지 않은 자연 그대로이다.

 

안채를 돌아보다가 안방 뒤쪽으로 돌아갔다. 안방은 길게 놓여있는데 뒷문이 두 개나 나 있다. 그 뒷문 문틀을 보고는 한참이나 서 있었다. 자연스럽게 휜 나무를 그대로 사용해 문 밑에 틀인 가로기둥을 삼았다. 흙벽으로 바른 안방 벽에 가로지른 문틀. 그 하나의 여유가 이렇게 사람을 푸근하게 할 줄이야. 그래서 사람들은 다듬고, 자르고, 가꾸기보다, 자연 그대로가 더 아름답다고 하는 것일까? 아마 성형미인이 아무리 예쁘다고 해도, 자연 그대로 미인보다 떨어진다는 것이 그래서인지. 괜히 비교도 안되는 것을, 억지로 비교를 해가며 혼자 웃는다.           

 

사랑채와 대문간의 여유

 

어재연장군 생가의 사랑채는 6칸 규모다. 사랑방과 대청 앞뒤에 개방된 툇간이 있다. 그리고 4칸의 헛간이 연결되어 있어 전체적으로는 10칸 규모다. 사랑채 앞에 놓인 대청은 시원하게 만들어졌다. 문도 없고 그대로 개방이 되어 있다. 대문과 연결 된 곳에는 작은 골방이 있다. 방들이 전체적으로 작은 것은, 겨울철 방을 따듯하게 보온하기 위해서이다. 대개 민가의 초가집은 방이 작고 천정이 얕다.

 

  
▲ 사랑채 공사중으로 어수선하다. 대문과 연결된 사랑채의 대청은 문이 없이 개방이 되어있어, 시원하개 보인다.

  
▲ 문간방의 담 문간방 앞에 돌로 담을 쌓았다. 안채를 직접 보지 못하게 한 가림벽이지만 바람벽의 구실도 함께 한다

 

광채 끝에 마련한 문간방 앞에는 돌담을 쌓았다. 안채를 직접 보지 못하는 가림벽 용도로도 사용했지만, 바람벽이기도 하다. 초가집의 이런 오밀조밀함이 고래 등 같은 기와보다 오히려 정겹다. 그런 돌담 하나를 두었다고 안채가 전혀 들여다보이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런 작은 것 하나를 갖고도 마음의 편안함을 느낄 수가 있다는 것에 대해, 우리 선조들의 여유가 어느 정도인가 가늠이 된다.

 

돌로 붙인 담벼락이 투박하다고

 

사랑채와 안채, 그리고 광채 바깥벽 아랫부분은 돌로 담벼락을 만들었다. 기존 벽을 두고 그 위에 돌을 절반쯤 올려붙인 것이다. 진흙과 함께 바른 돌들이 그대로 문양이 된다. 높이는 어른 가슴 정도지만, 돌출된 돌 담벼락이 아름답다. 누군가 내가 우리 고택을 돌아보면서 이런저런 모습을 아름답다고 했더니, 별걸 다 아름답다고 감탄을 한다고 한마디 한다. 그러나 난 이런 작은 것 하나가 사람을 기분 좋게 만든다는 것을, 느끼지 못할 정도로 살고 싶지는 않다고 늘 생각을 한다.

 

  
▲ 담벼락 돌로 문양을 넣은 담벼락. 기존의 담벼락에 덧붙여 보온의 효과를 높였다.

 

이것이 단지 담벼락을 아름답게 치장하기 위해서 붙인 것일까? 아니다. 이렇게 이중으로 아랫부분을 만들면 그 담벼락의 두께가 두꺼워지고, 그만큼 찬 겨울에 보온이 된다. 외부의 바람과 맞닿는 곳에 이런 담벼락을 만든 것도, 알고 보면 과학적인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어재연장군 생가는 야산 기슭에 북서향으로 위치하고 있으며, 앞으로는 바람을 막을 구조물이 하나도 없다. 주변에도 집이 들어서 있지를 않아, 바람에 그대로 노출이 된다. 그런 집의 구조상 이중의 담벼락이 보온에 상당한 효과가 있을 것이다. 아름다움에, 방한의 효과까지 있다면 금상첨화가 아닐까?

 

돌담에 초가를 올렸다.

 

어재연 장군은 조선조 말기 무장이다. 순조 23년인 1823년 이 집에서 태어나 고종 8년인 1871년에 고아성보 전투에서 세상을 떠났다. 어재연 장군은 신미양요 때인 1871년, 로저스 제독이 이끄는 미국 아시아 함대가 조선에 쳐들어오자, 4월 15일 진무중군에 임명되어 600여 명의 각 영 포군을 이끌고 광성보로 나가 적과 대치를 하였다. 4월 23일과 24일, 초지진과 덕진진을 함락한 미군은, 4월 25일 광성보를 공격해왔다. 미군이 수륙양면에서 광성보로 돌입하자, 치열한 백병전을 벌이며 적과 싸우다가 장렬하게 전사를 하였다. 어재연 장군의 생가 맞은편에는, 장군과 형제인 재순 등의 위폐를 모셔놓은 충장사가 자리하고 있다.

 

  
▲ 돌담 돌담 위에 용마름을 틀어 짚으로 지붕을 만들어 올렸다. 어재연장군 생가에서 볼 수 있는 또 하나의 멋이다.

 

어재연 장군의 생가에서 보는 또 하나의 색다름은 바로 담장이다. 안채 뒤편에는 돌로 축대를 쌓아 만든 밭이 있고, 담장을 둘러놓았다. 이 담장은 돌과 황토를 섞어 만들고, 그 위에 용마름을 엮어 초가를 올렸다. 용마름을 얹은 담장. 지금은 정비가 되지 않아 조금은 지저분하게 보이지만, 공사를 마친 후에는 이 또한 색다른 멋으로 다가올 것이다. 공사를 다 마치고 나면, 다시 한 번 이곳을 방문하리라 마음을 먹는다. 겨우겨우 촬영한 몇 장의 사진이 어재연 장군의 생가를 소개하는 데는 버겁지만, 그래도 이 초가로 된 고택의 아름다움은 조금은 소개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출처 : 오마이뉴스 / 2009, 12, 7)




이인영은 여주인으로 고종 4년인 1867년 여주 북내면 상교리에서 태어났다. 의병활동을 하다가 아버지의 죽음으로 인해 더 이상은 의병 활동을 하지 않고 있다가, 시영(時榮)이라는 가명으로 상주에서 은거하였다. 충청북도 황간으로 옮겨 거주하던 중, 1909년 일본헌병에게 잡혀 경성감옥에서 사형을 당했다. 여주군 북내면 상교리 상교1길 119 - 16 이인영의 생가 앞에는, 지난해 세운 의병대장 중남 이인영기념비가 서 있다.

  

13도 창의대진소 총대장

 

  
▲ 기념비 생가 앞에 세운 기념비. 지난 해인 1009년 9월 20일이 이인영 총대장이 순국한 지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
ⓒ 하주성
이인영

 

이인영은 대성전재임을 지냈다. 1895년 을미사변이 일어나고 단발령이 내려지자, 유인석, 이강년 등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강원도 춘천과 양구 사이에서 일본군과 싸우고, 유인석의 제천전투에 참여했으나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그 후 부친의 병환으로 인해 의병활동을 하지 못하고 있다가, 1907년 고종의 강제퇴위와 군대해산을 계기로 의병이 재기하자, 그 해 9월 원주에서 의병원수부를 설치하고, 관동창의대장에 올랐다. 서울에 있는 각국의 공사관에 호소문을 띄우는 등 국권회복을 위하여 최선을 다했다.

 

1907년 11월 전 병력을 24진으로 하는 13도 의병연합부대를 편성한 이인영은 원수부 13도 의병총대장에 추대되었다. 군사장에 허위, 관동총대장에 민긍호, 호서창의대장에 이강년, 호남창의대장에 문태수, 영남창의대장에 박정빈, 경기황해창의대장에 권중희, 관서창의대장에 방인관, 관북창의대장에 정봉준을 선정한 뒤, 일거에 서울로 진격하여 통감부를 격파하고 조약을 무효로 만들어 국권을 회복하고자 했다.

 

  
▲ 안방 이인영 생가는 모두 7 칸으로 지어진 초가이다.
ⓒ 하주성
이인영 생가

 

그러나 각 도의 의병 중에는 제 날짜에 도착을 하지 못한 자가 많았고, 기밀을 알아차린 일본군이 먼저 공격을 해옴에 따라 다시 여주까지 퇴군을 하였다. 여주에서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패한 이인영은 대치를 하고 있던 1908년 1월 28일, 문경에 거주하던 부친의 사망소식을 듣게 되었다. 이인영은 "충은 효이고, 효는 충이다"라는 신념을 갖고 후사를 군사장인 허위에게 맡기고 본가로 급히 내려갔다. 부친의 장례를 치른 후에는 재기하지 않고 있다가, 결국 일본 헌병에 잡혀 순국을 하고 말았다.

 

역사의 흔적 이인영 생가지 너무 쓸쓸해

 

여주 북내면 상교리에 있는 이인영 총대장의 생가지. 얼마 전 까지만 해도 작은 집이 이 집에서 살고 있었다고 한다. 몇 년 전인가 여주군에서 집을 보수를 하고, 지난해인 2009년 9월 20일 기념비를 세웠다. 지난 해  9월 20일은 이인영 총대장의 순국 100주기가 되는 해였다. 좁은 마을길을 가다가 내를 건너면 기념비는 집을 들어가는 입구에 서 있는데, 이곳이 나라의 국권회복을 위해 분연히 떨치고 일어난 13도 의병 총대장의 생가라는 안내판 하나가 없다.

 

  
▲ 마루 두 칸 대청 앞은 엉망이다. 보수를 했다고 하는데 이렇게 엉망이 되었을까?
ⓒ 하주성
대청

  
▲ 떨어진 담벼락 담벼락의 흙이 다 떨어져 내렸다.
ⓒ 하주성
담벼락

  
▲ 굴뚝 깨진 굴뚝 주변에는 떨어져 내린 흙이 쌓여있다. 흉물이 되어가고 있는 이인영 의병 총대장 생가
ⓒ 하주성
굴뚝

이인영 의병 총대장의 생가는 ㄱ 자 초가로 7칸 집이다. 좌측으로는 부엌과 두 칸 안방의 있고, 한 칸 윗방이 있다. 꺾인 곳에 두 칸 대청을 두고, 한 칸의 건넌방이 있다. 시골 어디서나 볼 수 있는 단순한 초가집이다. 이런 집에서 13도 의병을 총괄하는 총대장이 태어난 것이다. 집은 보수를 했다고 하지만, 마루 앞으로는 블록이 깨져있는 등 엉망이다.

 

집 뒤로 돌아가니 말라버린 돌우물이 보인다. 주변은 정리가 되어있지 않고, 담이 떨어져 내리고 굴뚝은 바른 흙이 다 떨어져 내렸다. 방을 들여다보니 누군가 이곳에서 머물렀던 흔적이 있다. 마루는 신발을 신고 돌아다닌 듯 흙발자국이 잔뜩 찍혀있다. 앞에는 새로 지은 화장실이 있는데, 정작 보수를 했다는 생가는 화장실보다도 못한 느낌이다.

 

  
▲ 우물 말라버린 우물. 하루 빨리 주변 정리를 해 주기를 촉구한다.
ⓒ 하주성
우물

  
▲ 더럽혀진 대청마루 마루 위는 누군가 돌아다닌 듯 엉망이다.
ⓒ 하주성
마루

 

그래도 13도 의병의 총대장이었던 사람이 태어나고 살았던 집이다. 어떻게 이런 몰골이 되어있는 것인지. 돌아보면서 마음이 아프다. 세월이 흐르고 많은 인물들이 잊힌다고 하지만, 절대로 잊어서는 안 될 인물이다. 우리는 다시 한 번 기억해내야 할 것이다. 13도 의병 총대장인 이인영 대장을. 그리고 위대한 인물이 태어난 이 곳 생가도 하루 빨리 주변 정리를 해서 역사의 교육현장이 될 수 있기를 고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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