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성객사는 그동안 해체와 복원, 이전 등으로 인해 많은 수난을 겪은 건물이다. 객사(客舍)란 지방 관아의 중심건물이기도 하다. 객사는 매달 초하루와 보름에 임금을 상징하는 전폐를 놓고, 절을 하는 의식인 망궐례를 행하는 곳이다. 또한 중앙에서 파견된 관리들이 이곳에서 묵어가는 곳이기도 하다.

 

조선 초기 이전에 조성된 안성객사

 

경기도 안성시 낙원동 609 ~ 1에 소재한 안성객사는,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54호로 지정이 되어 있다. 원래 안성객사는 조선 초기 이전에 건립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으나, 정확한 기록이 없다. 다만 지붕 위에 명문이 새겨진 기와가 남아 있어, 조선조 숙종 21년인 1695년에 중수가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안성객사는 일반적인 객사와는 건축기법이 다르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중앙에 있는 정청은, 주심포계 맞배집으로 구성되었다. 이러한 공포의 형식 중 주심포계 양식은 다포계양식과는 다르다. 주심포계란 공포가 기둥위에만 있는 것을 말하며, 다포계란 기둥 위와 기둥과 기둥 사이에 공포가 놓이는 것을 말한다. 주심포계는 삼국시대부터 전해진 오래 된 건축기법이며, 다포계는 고려 후기부터 시작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안성객사의 공포가 주심포계 양식으로 조성이 되었다는 것은 고려시대의 건축양식을 따른 것으로 보이며, 조선 초기 이전에 이미 객사가 있었다는 것을 말한다.

 

▲ 주심포계 안성객사는 고려시대 건축법의 하나인 주심포계 공포를 사용한 몇 안되는 건물 중 하나이다.

 

이건과 일제의 훼파로 손상된 안성객사

 

안성객사는 그동안 이건과 일제의 훼파로 인해 훼손이 되었던 문화재 중 하나이다. 처음에는 읍내의 관아주변에 있었던 건물을, 1932년에는 명륜여자중학교로 옮겼다가, 1995년에 해체 수리를 하면서 현재의 자리로 옮겼다. 해체 수리 시에 발견된 것은, 바로 1932년도에 옮기면서 기둥의 아랫부분이 잘려나가고, 기둥간 거리가 축소되었다는 점을 발견했다. 또한 기둥의 배흘림 기법이 흐트러졌으며, 기둥간의 거리의 비례도 달라졌다는 것이다.

 

일제치하에서는 우리의 수많은 문화재가 훼파되었다. 문화재의 약탈과 함께 마구잡이식으로 문화재를 이건, 또는 자리를 옮기면서, 많은 문화재들이 제 모습을 잃었다는 것이다. 심지어는 암석에 조각이 되어있는 석불의 일부분을 떼어가는 등, 문화재의 수난이 극에 달했던 시기다. 안성객사도 1995년 이전을 하면서 밝혀졌듯이, 많은 부분이 일제에 의해 훼파가 되었던 것을 복원을 하면서 바로잡아 놓았다.

 

▲ 안성객사 원래 안성객사는 조선 초기 이전에 건립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으나, 정확한 기록이 없다.

▲ 현판 정청의 중앙 위에 걸린 현판. 백성관이라 적혀있다.

 

정청의 살창문과 좌우의 날개채의 멋

 

망궐례 의식을 행하는 정청에는 백성관(白城館)이란 현판이 걸려있다. 이 정청의 앞은 살창으로 꾸몄으며, 3칸으로 되어있다. 중앙에는 살창으로 꾸민 문을 달아 출입을 할 수 있도록 하였다. 정청의 양편에 있는 날개체는 모두 정면 2칸, 측면 2칸으로 하였다. 그러나 정청을 바라보고 좌측은 1칸의 방을 드리고, 우측의 날개채는 2칸의 방을 드렸다.

 

날개채는 마루를 깔고 정청 쪽을 항해 마루의 뒤편에 방을 드렸다. 방은 마루의 뒤쪽으로 물러서 있어, 상대적으로 날개채의 공간 확보를 하였다. 전체적인 모습으로 보면 날개채의 마루가 시원한 느낌을 준다. 날개채는 정청과는 달리 익공계의 팔작집이다. 익공이란 주심포계 중에서 새의 날개모양의 살미 부재를 끼운, 공포 형식을 말한다. 공포란 지붕 처마 끝의 하중을 받치기 위해, 기둥머리 같은데 짜 맞추어 댄 부재를 말한다.

 

▲ 살창문 정청의 중앙에는 살창문을 내어 출입을 했다.

  
▲ 좌측날개채 좌측날개채에는 방이 한칸으로 꾸며졌다

  
▲ 우측날개채 정면 2칸, 측면 2칸인 우측 날개채는 2칸의 방이 있다.

 

객사 뒤편의 여유

 

안성객사를 한 바퀴 돌아보면 뒤편의 모습에 눈길이 간다. 뒤편으로 가면 날개채에 들인 방에서 연도가 보이지 않도록 하고, 굴뚝만을 도드라지게 놓았다. 이러한 구성도 신선하다. 굴뚝은 황토와 기와를 이용해 조성을 하였으며, 위는 타원으로 막아놓았다. 또한 정청의 뒷벽과 옆벽은 심벽으로 구성을 하였다. 강돌을 이용해 심벽을 조성한 것이 아름답다.

 

그동안 수없이 많은 상처를 안고 다시 태어난 안성객사. 우리는 이러한 문화재 하나를 복원하고 보존을 하는데 심혈을 기울어야 한다. 그것이 우리들의 것이 아니고, 우리 후손들의 문화자산이기 때문이다. 많은 날이 흐르고 난 후에, 우리는 우리 후손들에게 무엇이라고 이야기를 할 수가 있을까? 과연 이 시대에 우리는 우리 소중한 문화재를 제대로 간직했다고, 자랑스럽게 후손들에게 이야기를 할 수가 있을까? 그러한 자문을 해본다면 '최선을 다했지만 최고는 아니었다.'라는 대답을 할 수 밖에 없음이 안타깝다.

 

 
▲ 굴뚝 날개채 객방의 뒤편에 서 있는 굴뚝. 연도가 보이지 않는 것이 특이하다.

가을이 무척 좋아서

밝은 빛의 이 밤이 기이하네

강에 비추어 물결이 움직이고

메뿌리에 닿으니 그림자가 들쑥날쑥하네

터럭이 희니 더럽힘이 없음을 알겠고

마음이 참되려면 속이지 않는 것이 필요하네

나그네의 넋은 늙을수록 느끼기 쉬우니

시 읊고 휘파람 부는 것이 스스로 많을 때이네

 

용인시 기흥읍 지곡동에 있는 음애 이자 고택의 담 밖에 세운 문학비에 적힌 시다. <추월(秋月)>이라는 이 시는 민족문화추진위원 이필구 역으로 적혀있다. 음애 이자(李자)는 성종 11년인 1480년에 출생하여, 중종 28년인 1533년에 세상을 떠났다. 이자는 정치가며 도학자였다. 그리고 뛰어난 시인으로도 명성을 떨쳤다. 고려 말의 대학자인 목은 이색의 5대손으로, 자는 차야(次野), 호는 음애(陰崖)이며, 본관은 한산이다.

 

 

이자는 어려서부터 학문에 뛰어났으며, 연산군 7년인 1501년에 식년 문과에 장원급제하여 사헌부 감찰(監察)을 거쳐 이조좌랑에 올랐다. 그러나 연산군의 폭정이 시작되자, 홀연히 관직을 사직하고 초야에 묻혔다. 그 후 중종반정으로 다시 조정에 나아가 우승지, 한성판윤, 형조판서를 거쳐 우참판이 되었다. 조광조와 함께 정치개혁에 선봉에 섰으나, 기묘사화 때 조광조 등과 함께 고초를 당하기도 했다. 낙향한 이자는 음성, 충주, 용인 등에서 학문에 전념하였으며, 용인 지곡리에는 고택과 유택이 있고, 조광조 등과 함께 노후를 생각해 지은 사은정이 있다.

 

음애 이자의 시문은 3656편이라는 대단한 글을 남겼다고 한다. 그러나 그 대부분이 유실되었으며, 현재는 120여 편의 시문이 실린 음애집이 남아있다. 1533년 54세로 운명하니, 중종은 이자를 관직에 복위시키고, 1577년 선조 시에 문의공(文懿公)이란 시호를 내렸다.

 



팔각형의 기둥이 있는 사랑채

 

이자 고택은 부와산을 마주하는 낮은 야산을 뒤로하고 동향으로 앉아 있다. 처음의 가옥은 사랑채와 안채가 부엌으로 연결이 되어 ㄷ자 모양을 하고 있고, 그 앞에 -자형의 행랑채가 있었다고 한다. 튼 ㅁ자 형의 집이었던 것이 지금은 행랑채는 없어지고, ㄷ자형의 사랑채와 안채가 남아 있다.  

 

사랑채는 좌측 남서쪽 모서리에 마루로 놓은 신주를 모시는 청방을 두었다. 이 방이 정자 역할을 하는 마루방이 아닌 것은 창호에서 나타난다. 정자 역할을 하는 마루방의 경우 정면과 측면을 모두 창호로 내는데 비해, 이자 고택의 마루방 측면의 문은 판자문으로 만들었다. 이런 점으로 보아 이 방이 사당 역할을 하는 청방임을 알 수 있다. 과거 집의 규모가 크지 않은 중류 주택에서는 사당을 별도로 짓지 않고, 사랑채나 안채에 일부를 사당으로 사용했기 때문이다.

 

 

돌출이 된 청방의 옆으로는 두 칸 사랑방이 있다. 이 사랑방은 두 칸으로 넓게 트여 있으며, 청방과 사랑방의 사이는 전체를 문으로 해달았다. 사랑채의 우측 맨 끝에는 부엌을 들였는데, 위는 다락방이다. 그리고 사랑방의 우측 끝에는 문을 달아 높은 다락을 만들었다. 이 다락은 사랑방 앞에 놓은 툇마루를 통해서만 출입이 기능하다. 이자 고택의 사랑방에서 가장 돋보이는 것은 사랑방 전면에 있는 기둥이다. 네모기둥의 모서리를 긁어 팔각기둥으로 만들었다. 이런 팔각기둥은 딴 곳에서는 찾아보기가 힘든 이자 고택만이 갖고 있는 멋이다.

 

간결한 안채의 꾸밈이 돋보여

 

이자 고택은 사랑채와 안채가 붙어있다. 사랑채와 안채는 공간을 별도로 했으며, 이어지는 부분에 부엌을 두었다. 사랑채에서 꺾이는 부분에 부엌을 두고 한 칸 건넌방이 있다. 이어서 두 칸의 대청이 있고, 꺾인 부분에 두 칸의 안방이 있다. 그리고 다시 두 칸의 부엌을 두었다. 한 칸의 건넌방 앞에는 툇마루를 두어 대청과 연결을 했다.

 

 

안방은 길게 두 칸으로 만들었으며, 부엌 위 한 칸은 다락을 꾸몄다. 그런데 그 다락을 올려다보면 굽은 목재를 이용하여 집을 지었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굽은 목재를 이용했다는 것은, 집을 지은 목수의 기능이 뛰어나다는 것을 의미한다. 전체적으로 이자 고택은 치목 수법이 뛰어나며, 평면과 입면의 짜임새가 도드라진다. 조선조 후기 경기도 지역 중류주택의 특성을 잘 간직하고 있는 집이다. 

 

안채 대청의 뒤에는 툇마루를 놓았는데, 이 툇마루가 또한 일품이다. 길게 마루를 놓은 것이 아니고, 두터운 통나무를 그대로 툇마루로 이용을 하였다. 그 옆에 연도를 놓아 올린 굴뚝도 낮게 만들어 편안한 마음이 들게 한다. 이자 고택을 돌면 주춧돌에 눈길이 간다. 다듬지 않은 네모난 돌을 이용해 집안의 주추를 놓았는데, 그러한 흐트러짐이 이 집의 여유로움이다. 그 하나하나가 다 다르면서도 어우러짐의 미학이라니. 우리 고택을 돌아보면서 느끼는 즐거움이 이런 데 있다.

 

 

이자 고택의 안채 부엌에는 아궁이 옆에 광을 두고 있다. 이렇게 아궁이 곁에 광을 둔 것도 이자 고택에서 보이는 또 다른 특징이다. 전체적으로 보면 집안의 여인들이 생활을 하기에 편리하게 꾸며졌다. 안채의 부엌과 사랑채의 부엌 사이에 놓인 우물을 보아도, 이 가옥이 여인네들의 동선에 많은 신경을 썼다는 것이 나타난다. 

 

흰 눈이 녹지 않아 설원으로 변한 이자고택. 현재 경기도 민속자료 제10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이자 고택은 운치가 있다. 눈을 밟고 집안 구서구석을 돌아보면, 절로 탄성이 나온다. 크지 않으면서도 멋이 있고, 화려하지는 않으나 짜임새가 돋보인다. 대문으로 사용하는 일각문을 나서면 담장 모서리 위에 올린 기와가 눈길을 끈다. 눈이 덮인 담장의 기와는 모두 감추어졌는데, 한 장의 기와가 밖으로 돌출이 되어 있다. 그 또한 아름다움이라. 이자 고택이 주는 즐거움이다.

 

이항로(1792∼1868년) 선생은 조선 후기의 대표적 성리학자이다. 이항로 선생은 순종 8년인 1808년에 과거에 합격을 했으나 포기하고, 학문과 제자 양성에만 전념하였다. 고종 3년인 1866년에 병인양요가 일어나자, 흥선대원군에게 전쟁으로 맞설 것을 건의하면서 주전론(主戰論)을 주장했으며, 경복궁 중건 등 흥선대원군의 정책에는 반대를 하기도 하는 등, 조선 말기 위정척사론의 사상적 기초를 형성하였다.

 


 

양평군 서종면 노문리에 자리한 이항로 선생의 생가는, 부친인 이회장 때에 지은 집으로 250여 년 정도가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지난해까지 복원을 마친 생가는 노문리 벽계마을의 조금 높은 곳에 자리하면서, 앞으로는 벽계천을 내다보고 있는 전형적인 사대부가의 집이다. 이 집은 성리학의 요람으로 최익현, 홍재학, 김평묵, 유중교, 박문일 등 많은 선비들을 배출해 내기도 했다.

 

벽계천을 바라보며 학문을 연마한 사랑채

 

사랑채는 대문 우측에 세 칸으로 마련하였다. 마루에 앉으면 벽계천이 바라다 보인다.

 

이항로 선생의 생가는 사랑채와 대문채, 그리고 사랑채의 뒤로 이어진 행랑채가 있고, 안담장에 난 일각문을 들어서면 안채와 안채의 뒤편에 낸 광채로 마련되어 있다. 사랑채는 대문을 바라보고 우측에 자리한다. 사랑채는 세 칸으로 되어있으며, 두 칸의 방과 한 칸의 마루방으로 꾸며졌다. 사대부가의 사랑채치고는 단아한 느낌을 갖게 한다. 사랑채의 앞으로는 모두 툇마루를 내어, 이곳에서 앞으로 흐르는 벽계천을 바라볼 수 있도록 하였다.

 

지금은 안채의 마루방에 걸려있는 '청화정사(靑華精舍)'라는 현판은, 이 사랑채에 걸려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곳에서 선생은 앞으로 흐르는 벽계천을 바라다보면서 많은 후학들을 양성했다. 올 들어 가장 춥다는 날에 찾아간 이항로 선생의 생가. 큰 길에서 5.5km 정도를 계곡을 따라 들어갔다. 길도 비좁은데 눈까지 쌓여, 차라도 만나면 몇 번이고 후진을 하면서 찾아간 곳이다. 사랑채 마루에 올라앉으니, 마을 전체가 보인다. 아마 제자들과 함께 이 마루에 앉아 강학을 하고, 벽계천 주변에 있는 노산팔경을 이야기했을 것이다.

 

사랑채와 붙어 역 ㄷ 자로 꾸며진 행랑채. 안 담장을 구분으로 안채와 같은 선상에 있다.

기와로 만든 굴뚝. 낮은 굴뚝에게서 스스로 겸손함을 배웠을 것이다.

 

사랑채의 뒤편에는 행랑채가 자리하고 있다. 사랑채와 행랑채는 붙어있으며, 역 ㄷ 자형의 구성으로 꾸며졌다. 안담과 경계로 구분을 한 행랑채는 ㄱ 자형으로 사랑채와 붙어있다. 행랑채는 두 칸의 방과 꺾인 부분에 헛간을 두고, 다시 방으로 이어진다. 이 꺾인 부분에 들인 두 칸의 헛간은 밖으로도 빗장문을 낸 것으로 보아, 각종 농기구들을 넣어두고 손쉽게 드나들었을 것으로 보인다.

 

아랫사람들의 동선까지 생각해서 지은 집이다. 아마 그것이 이항로 선생의 부친 때부터 전해진, 선비의 올곧은 마음이었을 것이다. 행랑채 뒤편에 선 기와로 만든 굴뚝은, 이 집의 딱딱함을 희석시키는 효과가 있다. 이렇게 낮게 낸 굴뚝은 항상 모든 일에 겸손하라는 선생의 가르침을 일깨워 주는 듯 하다.

 

찬광을 낸 안채의 아름다움

 

중문인 일각문을 통해서 들어갈 수 있는 안채는  역 ㄱ 자형이다. 들어서면서 한 칸의 건넌방이 있다. 건넌방은 앞에 툇마루를 냈는데, 양편 툇마루를 벽으로 막았다. 흡사 이 한 칸의 건넌방이 특별한 용도로 사용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건넌방 옆으로는 개방한 아궁이를 두었다. 그리고 한 칸의 방을 지나 두 칸의 마루방이 있는데, 툇마루가 안방까지 연결이 된다. 지금은 이 마루방 위에 청화정사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이 집의 특징은 안채에 대청이 없다는 것이다. 그 대신 두 칸의 마루방을 꾸몄다.

 

중문을 들어서면 마주하는 건넌방. 툇마루 양편이 벽으로 막혀있다. 조금은 특별한 용도로 사용을 한 듯 하다.

역 ㄱ 자로 꾸민 안채. 모두 열 칸으로 꾸며진 안채. 중간에 두 칸의 마루방을 내었다. 대청이 없는 특이한 모습이다.


안방은 꺾인 부분에 드렸는데, 두 칸의 안방에 비해 부엌이 세 칸으로 넓다. 부엌 안으로 들어가면 한 칸이 벽과 판자문으로 구분이 되어있다. 문을 열어보니 현대식으로 싱크대 등을 마련해 놓았다. 아마 이곳을 한옥체험의 공간으로 만든 것은 아닌지. 원래 이 끝에 달린 막힌 한 칸은 찬광이라고 한다. 많은 사람들이 찾아들었을 이항로 선생의 생가에는, 그만큼 기물 등이 많았을 것이다. 그런 것을 보관하기 위해 따로 한 칸의 찬광을 드려놓았다.

   

세 칸의 부엌 안에는 담과 판바문으로 구분을 한 찬광이 한 칸 있다.

                   

뒷문을 낸 광채와 대문채

 

안채 뒤편에 마련한 광채는 이항로 선생의 생가지에서 유일하게 초가로 된 건물이다. 모두 네 칸으로 구성이 된 광채는 우측 맨 끝에 문을 내었다. 문을 열면 바로 밖으로 나갈 수가 있다. 아마 이 문을 통해 집 뒤편에 있는 마을 동산으로 포행을 다녔을 것이다. 네 칸의 광채는 안채 부엌의 뒤편에 있는데, 작은 문과 두 칸의 광, 그리고 한 칸의 측간으로 지어졌다. 담장은 모두 판자벽으로 둘렀다.

 

넓지 않은 부지에 많은 건물을 들여서인가 조금은 답답해 보이기도 하는 이항로 선생의 생가. 그러나 그 하나하나가 이루어져 공간의 아름다움을 연출하고 있다. 안채와 마주한 대문채는 광채와 마찬가지로 판자벽으로 둘렀다. 대문채는 대문을 들어서 안 담장으로 막혀있다. 안으로 들어서면 - 자 형으로 되어 모두 광으로 사용을 했다고 한다.

 

안채 뒤편에 자리한 광채. 광채 끝에는 문이 있어 밖으로 출입을 할 수 있도록 하였다. 강채는 모두 판자벽으로 둘렀다.

대문채는 판자벽으로 담벼락을 내어 운치를 더했다. 모두 세 칸으로 꾸며졌다.

 

생가 벽계천 주변에 있는 제월대, 명옥정, 분설담, 석문, 쇄취암, 일주암 등, 선생이 직접 친필로 각자를 했다는 노산팔경과 어우러진 집. 날이 춥다는 것을 잊을 만큼 빠져드는 집이다. 현재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05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이항로 선생의 생가. 구불구불 찾아들어가는 집은 한 겨울 찬바람에도 그렇게 의젓하니 객을 맞이하고 있다.

용인시 처인구 원삼면 문촌리 414 - 4에 소재한 이주국 장군 고택. 집안을 돌아보면 안채에 붙은 부엌과 광을 손본 것이 그렇게 안타까울 수가 없다. 전체적으로 보면 중요민속자료를 넘을 그런 집이다. 꾸밈도 그렇고 집안의 조경 수법이나 채의 구성, 공간의 사용 등이 매우 뛰어난 집이다. 더욱 사랑채 하나만 놓고 본다면, 얼마나 고쳤는지는 몰라도 보물로서의 가치를 지니고 있을 정도로 훌륭하다. 이주국 장군의 고택은 현재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96호로 지정이 되어있다.

 

1753년에 지어진 이주국 장군 고택

 

이주국 장군은 조선 영조와 정조 때의 무신이다. 이주국(1721∼1798) 장군은 조선 정종의 아들인 덕천군(德泉君)의 후손이다. 조선조 경종 1년인 1721년에 원삼면 문촌리 현재의 고택에서 태어났다. 원삼면 문촌리에 전하는 유적으로는, 묘소와 신도비, 생가, 정자 터 등이 전한다. 이주국 장군의 생가는 100여 년 전까지만 해도 장군의 후손들이 살았다고 하나, 현재는 정병하씨 소유의 가옥이다.

 

 

고택의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문간채가 -자로 길게 늘어섰다. 대문을 들어서서 우측으로는 바로 꺾인 담장으로 이어지고, 좌측으로는 두 칸의 방과 네 칸의 광으로 꾸며졌다. 그리고 그 앞에는 네 칸의 사랑채가 자리를 하고 있으며, 안채의 마당이 있다. 이런 집의 형태를 볼 때 과거에는 이 사랑채와 안채 사이에 안담이 있고, 중문채가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좌측으로 두 칸의 방과 네 칸의 광으로


안채는 좌측으로 퇴를 달아낸 건넌방과 세 칸의 대청, 안방 그리고 꺾인 날개채에 부엌과 광을 두었다. 현재는 날개채를 개조하여 사용하고 있다. 부엌은 부엌방으로 개조를 하고, 맨 끝에 광도 방으로 개조를 하였다. 이주국 장군의 생가는 안채의 망와(望瓦)에서 '건륭 18년 계유일 조작(乾隆十八年癸酉日 造作)'이란 글씨가 발견이 되어 영조 29년인 1753년에 최초로 건축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사랑채의 다락방이 정말 좋다

 

이주국 장군 고택의 사랑채는 - 자형 네 칸으로 구성되었다. 사랑채는 앞에서 바라보면서 우측으로부터 한 칸의 청방을 두고, 가운데 두 칸은 방과 마루방으로 구성했다. 그리고 좌측의 맨 끝은 다락방과 부엌이다. 이주국 장군 고택의 모든 방문은 모두가 이중의 겹문으로 되어있다. 안쪽의 문은 모두 범살창으로 구성이 되어 단조롭다.

 

사랑채는 청방을 전체적으로 놓고, 가운데 두 칸의 앞으로는 툇마루를 놓았다. 그리고 그 툇마루가 끝나는 곳에 한 칸의 다락방이 있다. 이 다락방으로 올라서 입을 벌리고 말았다. 문을 열고 안을 보니 툇마루에 접한 부분은 간단한 문이지만, 양편의 창문은 모두 띠살문 네 짝으로 달았다. 이렇게 띠살문을 달아 열게 만들었다는 것은, 이 다락방을 사랑채의 주인이 많이 사용했다는 점이다. 높게 자리를 잡고 양편으로 열어젖힐 수 있는 문. 이 다락방이 누각의 기능을 갖고 있었다는 생각이다. 정말 작지만 아름다운 누정의 역할을 충분히 했을 만한 공간이다.

 

사랑채의 다락방 밑으로는 개방된 아궁이가 있고, 그 위는 다락이다. 그런데 이 아궁이 역시 특이하다. 한편 다락방의 밑이 광으로 사용되고 있다. 사랑채 하나만 갖고도 짜임새 있게 제 각각의 성격을 나타내고 있다.

 

네 칸으로 꾸며진 사랑채. 앞쪽 끝의 다락방은 양편을 띠살문으로 했다. 정자의 기능을 갖고 있었을 것이다.

이주국 장군 고택의 모든 문은 겹문으로 되어 있다. 안쪽의 문은 범살창으로 간단하게 처리했다.

아궁이 다락방 뒤에 다락을 두고, 그 밑을 개방된 아궁이를 조성했다. 다락방 밑은 광이다.

 

날개 잃은 공(工)자 형의 안채

 

안채는 ㄱ 자형의 집이다. 전체적으로는 바라보면서 좌측에 건넌방을 두고, 세 칸 대청이 있다. 그리고 안방과 꺾인 부분에 두 칸의 부엌과 광을 들였다. 현재는 부엌과 광은 개조를 해 사용하고 있다. 그런데 이 집의 특이함은 바로 이 안채의 구성에 있다. 건넌방의 앞으로는 반 칸의 퇴를 냈다. 높은 마루를 깔고 그 밑에 아궁이를 두고 있다. 

 

안채의 뒤로 돌아가면 안방의 뒤편에 한 칸의 방이 있다. 방 문 위에 편액이 걸려있어 다가가 보니 '사당방(祠堂房)'이란 글을 적었다. 안채 안방의 뒤편에 한 칸을 달아내어 사당으로 꾸민 것이다. 문을 열어보니 누군가 묵었던 흔적이 보인다. 이주국 장군의 후손들이 떠나고, 현재의 주인이 이 사당도 묵는 방으로 사용한 듯하다. 안채는 전체적으로 보면 '공(工)'자의 한 날개가 잘린 형태로 볼 수 있다.

 

이주국 장군의 고택은 기단이 모두 잘 다듬은 장대석으로 마감을 했다. 건물의 주춧돌도 마름모형의 다듬은 돌이다. 이런 기단이나 주추로 보아 이주국 장군의 고택을 지을 때, 정성을 들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현재 이 집에 거주하는 분의 이야기를 들으면, 대문채와 사랑채는 손을 보았다고 한다. 사랑채와 안채 사이에는 일각문을 높게 한 중문채가 있었다고 하는데, 유실이 되었다는 것이다.


 

안채의 건넌방 앞에 반칸을 달아내어 높은 마루를 깔았다. 그리고 그 밑에 아궁이를 드렸다.

 
안채의 뒤편으로 돌아가면 한칸을 달아낸 방이 있다. 방문 위에는 사당방이란 편액이 걸려있다.

 
세칸의 넓은 대청. 기단이나 툇돌, 주춧돌 등이 모두 잘 다듬어진 석재를 사용하고 있다.

 

메주가 익어가는 집

 

이주국 장군의 고택을 돌다가 안채의 건넌방 옆으로 돌아가니, 벽 앞에 메주를 만들어 걸어놓았다. 솟을대문을 들어서면서 만난 할머니에게 '집을 좀 찍겠습니다.'라고 했더니 '청소를 잘 안 해. 시골집은 다 그렇지 머'라고 하셨는데, 이런 메주를 보니 정말 시골집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 나무에 걸린 메주들을 보면서, 고택과 딱 어울린다는 생각을 한다. 이렇게 정감이 가는 집들이 우리 가옥인데, 우리는 점차 생활의 불편함만 늘어놓으면서 멀리 한다는 것이 안타깝기만 하다.

 

 너무나 시골스러운 모습이다. 건넌방 옆에 메주를 달아 놓았다.
 
 

양평군 서종면 노문리에 소재한 벽계강당. 벽계강당은 앞으로 흐르는 벽계천을 바라보고 있다. 벽계천은 용문산에서 발원을 한 물줄기가 50여 리를 서북간으로 흘러, 수입리 나루터에서 북한강과 합수가 되는데, 이 시냇물을 벽계천이라 부른다. 벽계강당은 벽계천 중간에 위치한 마을인 벽계에 소재한다.

 

화서 생전의 설계대로 지어진 벽계강당

 

지금의 벽계강당은 생전에 화서 이항로(1792~1868)가 후학을 양성하던 곳에 지은 강당이다. 이항로의 후손들과 후학, 그리고 관이 함께 힘을 모아 1999년에 이항로의 설계대로 지은 것이다. 그러나 그 이전에 이곳에 벽계강당이 있었다고 한다. 양헌수, 최익현, 김형묵, 유인석 등이 이곳에서 이항로의 가르침을 받았기 때문이다.   

 


 

면암 최익현(崔益鉉)은 1833년에 태어난 조선 말기의 문신으로 을사조약에 저항한 의병장이다. 양헌수는 조선 말기의 무신으로 조선 순조 16년인 1816년에 태어났다. 이항로의 가르침을 받았으며 어려서부터 활쏘기에 능했다. 의암 유인석은 헌종 8년인 1842년에 태어난 의병장이다. 성리학자인 이항로의 문하에 들어가 전통적 유교질서인 '정(正)에 대비하여, 서양문명의 수용을 '사(邪)'로 규정하고 이에 대항한 위정척사론자이다.

 

이러한 당대의 명사들이 모두 이항로의 문하에서 가르침을 배웠으며, 그 장소가 바로 벽계강당이라고 한다. 그럼 점으로 보면 벽계강당은 지금의 모습 이전에 다른 모습으로 이미 이 자리에 서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현재의 벽계강당은 정면 5칸, 측면 3칸의 건물로 앞을 트고 주변을 방으로 둘렀다. 장대석의 기단을 높게 세우고, 그 위에 둥근 주추를 놓았다.

 

강당은 장대석으로 올린 기단을 쌓고 그 위에 축조했다. 정면 5칸, 측면 3칸의 규모로 정면 3칸은 마루를 깔았다.


독립가옥으로의 가치를 지닌 대문채

 

벽계강당에서 볼 수 있는 특이한 것은 솟을대문이다. 중앙에는 높다랗게 문을 올리고, 양편에 방을 들였다. 양편의 방은 같은 크기로 했으며, 강당쪽과 바깥쪽을 향해 문을 양편에 냈다. 굳이 대문을 열지 않는다고 해도, 벽계천 쪽으로 낸 방문만 열어도 시원한 바람이 들어올 듯하다. 창은 벽면 위편에 조그맣게 냈으며, 밑으로는 거북이를 닮은 굴뚝을 만들었다. 이항로의 설계대로 지어진 것이라고 한다면, 화서 선생은 설계에도 남다른 조예가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벽계강당의 대문채는 돌립가옥으로서의 기능을 가진 건물이다.

목이 들어간 거북이와 같은 모습으로 만들어진 대문채의 굴뚝이 앙증맞다
 

 

올 들어 가장 춥다는 날이다. 사진을 찍는데도 손가락이 잘 펴지지를 않는다. 더구나 양평은 청정지역으로 주변의 지역보다 한결 춥다. 겨울이 되면 으레 주변보다 2~3도가 기온이 낮은 곳이다. 거기다가 벽계천에서 부는 바람까지 옷 속으로 파고든다. 눈이 가득한 마당을 들어서 대문채 방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 본다.

 

벽계천 쪽으로 난 방문을 열어보니 길 아래 펼쳐지는 모습이 장관이다. 지금이야 눈이 쌓여 볼 수가 없지만, 그 아름답다는 노산팔경이 저 아래 벽계천을 중심으로 펼쳐질 것이다. 그것을 못 보고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 못내 아쉽지만, 다음을 또 기약할 수 있으니 그 어찌 서글프다 하리오. 또 한 번 찾아올 수 있다는 것이 오히려 반갑기만 하다.

 

대문채의 양편에 있는 방에 낸 창문. 건물의 크기에 비해 창문이 작다

 
대문채 양편에 1칸의 방을 드렸다. 방문은 벽계천쪽과 강당 쪽에 마주하고 내었다.

 

참으로 좋소, 이 강당이

 

장대석 기단위에 올린 벽계강당. 눈이 쌓인 계단을 조심스럽게 올라본다. 벽계강당은 중앙을 마루를 놓고, 삼면을 돌려 방을 들였다. 양편의 끝 방은 작게, 그리고 양편 안쪽의 방은 크게 들였다. 강당 마루 뒤편에 마련한 세 개의 방은 모두 같은 크기다. 아마 후학들이 이 강당에 마련된 방에 들어가, 나름대로의 배움을 익히고는 했을 것이다. 방의 뒤편으로는 모두 아궁이를 내었다. 한 겨울에도 뜨듯하게 불을 때고, 학문에 게을리 하지 말라는 화서 선생의 배려였을 것이다.

 

벽계강당의 마루에 오르면 앞으로 펼쳐지는 경관이 시원하다. 화서 선생은 제자들과 함께 강당의 주변을 돌아다니면서 강학을 하고, 경계를 즐긴 곳이 있다. 지금은 쌓인 눈으로 인해 들어갈 수가 없지만, 봄이 되면 이곳을 돌면서 평소의 선생의 마음을 느껴보고 싶다.

 

벽계강당의 마루 안편에 자리한 방. 마루정면에는 한 칸의 방 세개가 있다.

강당의 양편에 마련한 2칸짜리 큰 방은 문을 모두 걷어올리도록 하였다.

 강당의 뒤편과 옆에는 아궁이를 내었다. 한 겨울에도 운치가 있다.

 

조그마한 구름이라도 보내서

맑은 빛을 얼룩지게 하지 말라

지극히 순수하고 또 명랑하여

태양의 짝이 되게 하라

 

노산팔경 중 제일경이라는 제월대에 정자로 22자의 명(銘)을 새겼다고 한다. 이렇게 여덟 곳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가 있는 곳이 바로 벽계강당이다. 강당 양편에 큰 방은 문을 들어 올릴 수 있도록 하였다. 마루를 더 넓게 쓰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안에는 막힌 것도 넓게 보라는, 선생의 가르침이 배어 있는 것은 아니었을까? 눈이 쌓인 벽계강당 마루에 올라 찬바람을 맞으며, 한 없이 깊은 상념에 빠져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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