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 거창군 북상면 중산마을에는 지은 지가 150년 정도 되어 보이는 고택 한 채가 있다. 주인인 임종호는 2~3년 전에 세상을 떠났으며, 현재는 구 가옥 곁에 새로 거처를 마련하고 모친이 살고 있다고 한다. 주변 제각 앞에서 만난 마을 어르신은, 그 집에 살고 계신 분이 자신의 질부라고 하시면서 자세한 설명을 해주신다.

이 집은 치목구조나 여러 가지 형태 등으로 보아 조선조 말경에 지은 것으로 보인다. 어르신은 120~130년 정도 되었다고 하신다. 솟을대문 안으로 사랑채가 자리하고 있고, 그 뒤편 우측에 광채가 있다. 그리고 사랑채와 나란히 뒤쪽으로 안채가 자리하고 있으며, 돌담으로 집 전체를 둘러놓았다. 집의 형태로 보면 이곳에서 꽤나 잘 살았던 집안이란 생각이다.



사랑채

다섯 칸으로 지은 사랑채의 풍취

사랑채는 모두 다섯 칸으로 구성이 되어있다. 자연석 주초를 그대로 쓴 집은 기둥을 모두 사각으로 치목을 하였다. 이런 치목의 방법이나 대들보를 받치고 있는 목재들을 보아도, 지방의 목수들이 다듬은 손길이 아니다. 사랑은 바라다보면서 좌측에 아궁이를 두고, 두 칸 마루방을 드렸다. 그리고 안채로 드나들 수 있는 누마루 한 칸과, 온돌방 한 칸을 계속 두고 있다.

우측 온돌방 앞으로는 누마루에 난간을 둘러 정자방으로 꾸며 놓았다. 사랑채 뒤편으로 길게 늘어선 광채는 중문채를 겸하고 있는 듯 보인다. 광채 옆으로는 담을 터 바깥으로 출입을 하게 하였는데, 그 문을 통해 제각으로 드나든 듯하다. 광채는 우측 한 칸은 방을 드리고, 가운데는 광채를 그리고 좌측으로는 뒤주를 삼았다.


광채

그리고 그 끝에는 다시 한 칸의 방을 드린. 네 칸으로 구성이 되어졌다. 아마도 사랑채 쪽의 방은 남자가, 안채 쪽의 방은 여자가 사용한 듯하다. 사랑채 방향의 방이 앞으로 돌출이 되어있어, 남은 공간에는 활주를 대고 지붕을 내어 달았다.

안채에도 굴뚝이 보이지 않는다.

사랑채와 나란히 뒤편에 조성한 안채 역시 다섯 칸이다. 좌측으로부터 한 칸의 부엌과 안방, 윗방 그리고 대청마루 뒤편에 문을 달아 신주방으로 꾸민 듯하다. 맨 오른쪽의 건넌방은 사랑채와 마찬가지로, 난간을 두르고 높임마루를 달아냈다. 임종호 가옥의 특징은 대청마루 뒤편에 마련한 신주방이다.


안채

부엌의 뒤편에도 작은 부엌방을 마련해 놓았는데, 이런 구성은 딴 곳에서는 보기가 힘들다. 사랑채와 광채, 그리고 안채의 동선을 최대한으로 줄일 수 있도록 조성한 임종호 가옥. 전체를 이으면 ㄷ 자 모형으로 구성이 되어있는 앞으로는, 안마당을 시원하게 만드는 정원이 있다. 그 정원 한 가운데 흙담으로 꾸민 굴뚝이 서 있다.

“어르신 저 집의 마당 가운데 굴뚝은 사용하는 것인가요?”
“얼마 전까지도 사용을 했지. 지금은 살림을 하지 않으니 쓰지 않지만”
“그런데 왜 마당 가운데에 굴뚝을 마련했나요?”
“낸들 아나 여기저기 연기가 나면 안 좋으니까 그랬나보지.”
“그럼 안채와 사랑채에도 굴뚝이 모두 저 가운데로 빠지나요?”
“처음엔 그렇게 만들었지. 지금은 잘 모르겠구먼.”


안채 안마당에 조성한 굴뚝과 터진 담

왜 모든 연도를 마당 한 가운데로 모아 굴뚝을 낸 것일까? 주인 잃은 집은 휑하기만 하다. 언제가 다시 시간을 내어 후손들이 모인다는 명절 때 찾아보아야겠다. 궁금증을 풀 수 있으려는 가는 모르겠지만.


사람이 사는 것은 제각각이다. 어느 누구는 치부를 자랑으로 사는가 하면, 어느 누구는 청빈한 삶을 살기도 한다. 명성을 찾는 이가 있는가하면, 자신의 할 일만 죽어라 하고 하는 사람들도 있다. 어떤 인생이 성공을 했는가는 후세의 사가들이 기록을 한다고 하니, 사람마다 한평생을 산다는 것이 녹녹치가 않다는 생각이다.

함안군 군북면 원북리에는 생육신의 한분인 어계 조려선생(1420 ~ 1489)의 생가가 있다. 단종의 폐위에 벼슬을 버리고 낙향한 뒤, 이곳에 내려와 은거를 하면서 살았던 집이었을 것이다. 건물이 그 때에 지은 것인지는 확실치가 않지만, 아마도 그 집 자리에서 몇 번은 보수를 한 듯하다.


청빈한 생활 그대로

울안에는 수령 500년의 보호수가 한 그루 서 있다. 어계 조려선생이 이곳으로 낙향한 시기와 흡사하다. 아마 집을 짓고 난 뒤, 이 은행나무를 심었는지도 모르겠다. 높이 20m에 둘레가 3,4m나 되는 적지 않은 나무이다. 단종이 영월에서 사약을 마시고 세상을 떠난 뒤, 그 시신을 거두어 장례를 치룬 분이 바로 어계 선생이다.

당시 사약을 받고 청령포에 시신을 버렸다고 일설에 전하고 있다. 그 시신을 수습하고 위폐를 동학사에 모신 후 이곳으로 내려왔다. 낙향한 어계선생은 일체 좋은 음식을 먹지를 않고, 고사리와 풀만 먹었다고 전한다. 수양산으로 들어간 백이, 숙제와 같은 생활을 한 것이다. 그래서인가 그 뒤편 산의 명칭도 백이산이라고 한다.




어계선생의 생가는 단출하다. 당시 벼슬을 한 사람들의 집이 고래등 같은데 비하면, 기와집이라고는 하지만 초막과 다를 바가 없다. 현재 전하는 집은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59호로 지정이 되어있다. 집은 대문채와 재실로 사용하고 있는 원북재, 그리고 뒤편에 있는 사당으로 구성되어졌다.

대문 위에 걸린 충신지려

어계생가를 들어가려고 솟을대문 앞으로 다가섰다. 대문 위에 현판이 걸려있다. 충신지려이다. <충신 증 이조참판 조려지려>라 적혀있다. 생육신의 한분이었으니, 충신이었음에 이의를 달 사람은 없다. 대문을 들어서면 원북재라는 편액이 보인다. 이 원북재를 재실로 보고 있다. 살림집이 아닌 재실로 보는 까닭은 부엌 등을 갖추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재실은 정면 네 칸, 측면 두 칸의 팔작집이다. 양편에 한 칸씩의 방을 드리고, 가운데는 두 칸 대청을 놓았다. 별난 것도 없는 검소한 고옥이다. 이 원북재는 사랑으로 사용을 했을 것 같다. 두 단의 축대 위에 지은 원북재. 그 집에서 조려선생의 마음을 읽을 수가 있다. 조금의 화려함도 찾아볼 수가 없는 집이다.

원북재 뒤편에는 사당이 있다. 뒤편으로 돌아가면 삼문이 있고, 그 뒤편에 대나무 숲을 뒤로 한 사당이다. 사당은 세 칸으로 되어있으며, 주변을 돌담으로 둘렀다. 사당에서는 조려선생과 부인의 항례가 행해진다고 한다. 아마도 이 사당에서 제를 올리기 위한 집이기에, 원북재라는 이름을 붙인 것이나 아닌지 모르겠다.


담장에 붙어있는 집, 안채가 아닐까?

조려선생 생가 곁에는 또 한 채의 집이 있다. 따로 담장을 쌓고 문을 내었는데, 주추 등으로 보아 조려선생 생가와 년대가 비슷한 것으로 보인다. 할머니 한 분이 계시는데, 집에 대해서는 자세한 대답을 들을 수가 없다. 이 집은 네 칸으로 지어진 팔작집이다. 기단은 시멘트로 발라놓아 정확한 모습을 알기는 어렵다. 정면 네 칸, 측면 두 칸으로 지어진 이 집은 우측 한 칸을 내달았다.

집을 바라다보면서 부엌방과 안방, 한 칸의 대청, 그리고 높임마루를 둔 건넌방이 있다. 집을 한 바퀴 돌아보니 부엌이 딸린 방 벽 밑에는 창불을 때는 아궁이가 보인다. 주추도 마름모꼴로 조성을 하였다. 여느 일반집 같지는 않다. 아마도 조려선생 생가의 안채는 아니었을까? 할머니에게 말씀을 드려보았지만, 시원한 대답은 들을 수가 없다.




전체적으로 어계 조려선생의 생가는 일반적인 집 구조와는 다르다. 선생의 평소에 청빈한 삶이 그대로 배어있다. 아마도 사랑채가 없는 것은, 바람 부는 청풍대를 사랑채로 사용한 것은 아니었을까? 오늘따라 어계선생에게 죄스런 마음이 든다. 날마다 커져가는 집들을 자랑하는 세상사가.


영주시 이산면 두월리 도로변에 자리한 괴헌 고택. 현재 중요민속자료 제262호로 지정이 되어있다. 설 연휴 전인 1월 29일에 찾아간 괴헌 고택. 구제역으로 인해 영주의 여기저기 도로가 막혀있다. 특히 이산면 방향은 축산농가가 많아서 그런지 중간 중간 도로를 폐쇄한 곳도 생겨났다는 것이다. 다행히 괴헌 고택까지는 도로폐쇄가 되지는 않았다.

영주 괴헌 고택은 연안 김씨 영주 입향조인 김세형의 8세손인 덕산공 김경집(1715~1794)이 정조 3년인 1779년에 지은 집이다. 이 집은 낮은 비탈을 뒤로하고, 앞으로는 넓은 평지가 조성되었다. 괴헌 고택은 외풍을 막아주고, 바람이 불면 낙엽을 쓸어 모아 준다는 ‘소쿠리형’, ‘삼태기형’의 명당 터라는 것이다. 김경집은 아들 김영(1789~1868)이 분가할 때 이 집을 물려주었다고 한다.


구분

읍면동

개소수

시작지점

폐쇄일자

폐 쇄

설치물

종 류

노선번호

합계

2개

읍면동

7개소

 

 

 

1

이산면

(5개소)

이산면 지동1리덧재

2010.12.08

모래

리도207호

2

이산면 지동3리장수골

2010.12.12

모래

리도202호

3

이산면 신암1리배진기

2010.12.18

 

 

4

이산면 신암2리우금

2011.01.02

 

5

이산면 원리 솔고개

2011.02.06

나무

 

6

봉현면

(2개소)

봉현면 하촌1리한티재

2010.12.06

경운기

리도207호

7

봉현면 하촌3리 제방

2010.12.13

경운기

하천제방

답사 당일 영주시에 통행이 제한 된 마을들. 굵은 글씨는 답사시 막혔던 곳이다. 이산면에 집중적으로 길이 막혀있다




회화나무가 많아 당호를 ‘괴헌’으로 짓다

김영은 이 집에 ‘괴헌’이란 당호를 붙였다. 그것은 집 주위에 회화나무가 많아서였다고 한다. 현재 이 괴헌 고택은 고종 8년인 1871년 선생의 증손인 김복연이 일부를 중수하였다고 하는데, 그 당시 가옥의 모습이 비교적 잘 남아있다. 대문채를 들어서면 사랑채와 안채가 ㅁ 자 형으로 집이 구성되어 있다. 뒤편에는 동편 높은 곳에 사당이 자리한다.

괴헌 고택의 특징은 사랑마당과 안마당, 그리고 사당으로 들어가는 일각문을 사랑채 우측에 두었다는 점이다. 또한 많은 수납공간과 쪽마루, 그리고 고방 등을 여기저기 펼쳐놓아 집안에 많은 기물들을 정리하도록 하였다. 원래 정침의 앞에는 ‘월은정’이라는 정자와 행랑채가 있었다고 하는데, 1972년 수해시에 유실이 되었다고 한다.



날아갈 듯한 사랑채의 처마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앞으로 넓은 사랑마당이 있고, 막돌로 쌓은 축대위에 사랑채가 자리한다. 사랑채는 모두 세 칸으로 지었으며, 동편 한 칸은 마루방으로 꾸몄다. 문간채는 바깥담을 판자벽으로 둘러놓아, 전체적인 집안 분위기를 대문간부터 부드럽게 했다. 사랑채는 툇마루 앞에 난간을 둘러놓았는데, 툇마루는 사랑 동편까지 이어진다.

팔작지붕으로 꾸민 사랑채는 집 전체가 날아갈 듯하다. 그만큼 사랑채를 꾸미는데 신경을 썼다는 것이다. 사랑채를 바라보면서 좌측에는 중문이 나 있다. 중문 위에는 ‘괴헌고택’이란 편액이 걸려있으며, 안으로는 사랑에 불을 때는 아궁이와 고방을 마련했다. 중문 앞에 쌓여있는 장작더미가 정겹다.

중문 안으로 들어서면 좌측으로는 광채가 자리하고, 맞은편에 안채가 조금 높게 막돌로 쌓은 축대 위에 자리를 잡고 있다. 안채는 앞으로 툇마루를 놓아 공간을 이용하고 있으며, 사랑채 뒤편으로는 쪽마루를 놓고 바람벽으로 막았다. 이 쪽마루를 이용해 중문을 통하지 않고도 바로 안채로 이동을 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러한 쪽마루의 출입처는 사랑채 동편에 붙은 날개채에도 나 있다. 괴헌 고택에는 안방에 피난다락과 사랑방의 뒷벽에 은신처가 있다고 하는데, 이러한 쪽마루가 그런 대피수단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정리 안되는 문화재청 자료

답사를 하기 위해서는 사전 준비가 필요하다. 대개는 그 지역의 홈페이지에 들어가 문화관광 편을 찾아보거나, 문화재청의 문화재 설명을 참고한다. 그런데 괴헌 고택의 자료를 찾다가 보니, 영주시청 홈페이지에는 괴헌 고택이 중요민속자료 제262호로 나와 있다. 2009년 10월 30일에 중요민속자료로 지정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문화재청의 자료에는 괴헌 고택이 중요민속자료와 경상북도 민속자료 제35호 두 곳에 소개가 되어있다. 처음에는 경상북도 민속자료 제35호였다가, 2009년 10월 30일자로 중요민속자료로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벌써 2년이나 중요민속자료로 승급이 된 괴헌 고택이, 문화재청 자료에는 아직도 경상북도 민속자료로 소개가 된 것이 남아있어 혼란을 야기한다.


위는 괴헌고택이 경북 문화재자료라고 남아있는 문화재청 문화재 검색창, 아래는 영주시 문화관광 창

우리의 문화재를 총괄하고 있는 문화재청에서 정신을 어디다 두고 사는 것인지. 이런 것 하나 제대로 관리가 안되는 문화재청에서, 과연 우리 문화재를 올바로 관리를 할 수가 있을는지. 그저 문화재를 사랑하고 찾아다니는 사람으로서 답답할 뿐이다.


우리 고택을 답사하다가 보면 가끔은 비밀스런 곳을 발견할 수가 있다. 그 비밀스런 곳이라는 것이 다름이 아니라, 집안에서 움직일 수 있는 동선이다. 대개 대문을 들어서면 사랑채가 자리하고 있다. 그리고 그 사랑채에서 안채를 들어가려면 중문을 이용하게 된다. 중문을 이용하지 않고 안채로 가는 길은, 그 중간에 쪽문인 일각문을 두어 출입을 한다.

그러나 고택 중에는 그런 쪽문을 사용하지 않고, 사랑채의 뒤쪽에서 바로 안채로 들어갈 수 있는 샛길을 마련한 곳도 있다. 그런 집들을 보면 괜히 즐거워지는 지는 힘든 답사 길에서 가끔은 혼자 멋대로의 상상을 즐겨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샛길의 용도가 꼭 그런 것만은 아니다. 그 외에도 샛길은 다양한 용도로 사용이 되기 때문이다.

조선조 사대부가의 건축을 알 수 있는 거창 정온선생 생가의 사랑채

조선후기 사대부가의 원형

경남 거창군 위천면 강천리 50-1에 소재한 정온선생 생가는, 처음 지은 지가 500여 년 정도가 지난 것으로 생각이 된다. 정온선생의 생가였고 종택이었다는 하는 이 집은 현재 중요민속자료 제205호로 지정이 되어있다. 선생의 생몰연대가 조선조 때인 1569~1641년임을 감안한다면, 줄잡아 500년의 역사를 갖고 있는 집이다.

순조 20년인 1820년에 후손들이 중창을 한 후로 줄곧 자리를 지켜 온 집이다. 이 집은 조선후기 사대부가의 원형을 살필 수 있다는 점에서 건축사의 중요한 자리를 하고 있다. 정온선생 생가의 구성은 대문채, 사랑채, 중문채, 안채, 아래채, 곳간채, 사당으로 구성되어 있다. 어느 사대부가나 그러하듯 하나 정도의 특징을 갖고 있는데, 이 정온선생의 생가는 지역의 기후에 맞게 북부지방의 보편적인 결집형태와, 남부지방의 특징인 높은 툇마루를 두어 두 지역의 특징적인 요소들을 조화를 시키고 있다.



남부지방 사랑채의 전형을 보다.

대문을 들어서면 앞으로 정원이 있고, 그 뒤편에 사랑채가 자리하고 있다. ㄱ 자형인 사랑채는 7칸인 사랑채는 바라보면서 좌측으로 방을 두고, 연이어 두 칸 대청을 두고 있다. 그리고 방과 누정을 두었다. 누정의 경우에는 기단을 쌓지 않고 그대로 기둥을 놓아 올린점이 특이하다.

난간을 두른 누정의 지붕은 길게 내달아 겹처마로 꾸며졌으며, 바깥으로 기둥을 받치고 있다. 좌측의 방 앞에 툇마루에도 난간을 두른 것이 사랑채의 멋이다. 전체적으로 짜임새가 특이하며 남부지방 특유의 사랑채 구성을 하고 있다. 사랑채의 주금 비켜선 뒤편으로는 중문채가 자리를 하고 있어, 사랑과 안채의 연결구실을 하고 있다.


중문과 광채

정온선생은 조선조에서 충절로 이름이 높은 분이다. 대사간, 경상도 관찰사, 이조참판 등을 지냈다. 1636년 병자호란 때 척화를 주장하다가, 화의가 이루어지자 자결을 시도하기도 했다. 그 뜻을 이루지 못하자 덕유산 모리에 은거하다가 생을 마감하였다. 사후에는 영의정과 홍문관 대제학에 추증이 되었다. 선생은 함양 남계서원, 제주 귤림서원 등에 배향이 되었다.

높임마루를 놓은 안채의 여유

중문을 들어서면 안채로 들어갈 수가 있지만, 안채를 막는 바람벽 등이 보이지는 않는다. 그대신 안채를 조금 비켜서 구성한 것이 이 집의 특징이다. 중문 앞으로는 길게 광채를 놓고, 그 옆으로 - 자 형으로 된 안채가 자리하고 있다. 안채는 두 칸의 부엌에 이어 방과 대청, 그리고 맨 끝에는 한 칸의 높임마루를 둔 방이 있다.



안채의 건넌방 앞에 높임마루는 남부지방의 특징이다.

앞으로는 사랑채의 뒤편이 보이게 지어진 이 안채는 대청을 지나 구성된 건넌방의 툇마루를 높이고, 그 앞을 난간을 둘렀다. 남부지방 특유의 높임마루의 형태로 꾸며진 것이다. 이러한 집의 구성이 색다른 정온선생의 생가는 북부와 남부의 절묘한 조화를 이루는 집의 꾸밈이라는 점에서 높이 평가를 받는다.

은밀한 동선인가? 사랑채 뒤편 터진 담

그런데 안채에서 사랑채 쪽으로 보니 담장이 트여있는 곳이 있다. 대개는 사랑채와 연결을 할 때는 일각문을 두는 법인데, 그대로 담장의 한 편 끝이 떨어져 있는 것이 보인다. 사랑채 방 뒤편에서 바로 안채로 들어갈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이런 동선은 대개 어른들이 기거를 하는 사랑에서, 집안의 젊은 남정네들이 안채에 있는 젊은 새댁을 보러가기 편하게 꾸미는 형태이기 때문이다.


우물과 사랑채 뒤편에서 안채로 이어지는 동선이 있다.
 
더구나 안방에 안주인이 기거를 한다면, 건넌방을 새댁이 사용하기 때문이다. 사랑채의 뒤편에서 중문채에 기거하는 식솔들을 피해, 바로 안채 건넌방으로 갈 수가 있다. 옛 사대부가에 보면 가끔 이런 동선을 발견 할 수가 있다. 정온선생 생가의 사랑채 뒤편으로 난 방문에서 댓돌을 찾아보는 것은 그런 은밀함을 즐기기 위해서이다.


함양군 안의면 금천리에는 중요민속자료 제207호인 안의 금천리 윤씨 고가가 있다. 일명 ‘허삼둘 가옥’으로도 불리는 이 고가는, 영남지역 상류주택으로서의 면모를 간직하고 있는 집이다. 지난 번 10월에 함양을 돌아볼 때는 이 집을 빠트려, 이번 12월 11일의 답사에서는 먼저 찾아가 본 집이기도 하다.

허삼둘 고가는 기백산을 뒤로하고, 덕유산의 지맥을 따른 진수산에 형성된 마을에 자리하고 있다. 이 마을은 소가 누워있는 형상이라고 하여, ‘쇠부리’라고 부른다. 마을 앞으로는 내가 흐르고 있어, 배산임수의 천혜의 조건을 갖추고 있는 집이기도 하다. 허삼둘 고가는 약 70여 년 전 윤대흥이 진양 갑부인 허씨 문중에 장가를 들어, 부인 허삼둘과 함께 지은 집이다.


멋들어진 사랑채의 구성

허삼둘 가옥은 대문채, 행랑채, 사랑채, 곳간, 안채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좌측으로 행랑채가 있고, 그 옆으로 ㄱ자로 구성된 사랑채가 자리한다. 사랑채 앞에는 나무들이 심어져 있는데, 넓은 공지인 것으로 보아 예전에는 이곳에 정원이 있었음을 알 수가 있다.

사랑채는 마주보면서 우측으로 한 칸을 빼내어 누정으로 삼았다. 난간을 두르고 기둥을 세워 정자와 같은 모양으로 꾸며 놓았다. 이단의 돌을 쌓은 기단을 놓고, 그 위에 사랑채 건물을 지었다. 중앙을 빼고 좌우로도 난간을 둘러 멋을 더했다.



함양 허삼둘 가옥의 전경(위) 솟을대문과 사랑채 누정(아래)

특이한 안채의 구성은 놀라워

안채로 들어가면 ㄱ 자로 꾸며졌는데, 7칸의 집에는 특이하게 중앙에 부엌을 두었다. 이 안채는 꺾인 부분에 좁은 판자문을 두어 마루로 나올 수 있도록 꾸몄다. 안채는 여느 집에서도 볼 수 없는 특이한 건축방법을 택했다. 우선 중앙에 부엌으로 통하는 판자문도 특이하지만, 까치구멍을 넓게 ×자형으로 달아낸 것도 그렇다.

대청은 이중으로 꾸며, 문을 달아낸 뒤로도 다시 마루를 놓았다. 아마 밖에서 들어오는 바람을 막기 위함인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이중으로 대청을 구성함으로써 여름이면 해를 막은 뒤편에 그늘을 만들고, 겨울이면 따듯하게 보호를 한 것으로 보인다. 이런 특이한 집의 구성으로 인해 중요민속자료 제207호로 지정이 되었다.




ㄱ 자형으로 꾸며진 안채. 꺾인 부분에 문을 낸 특이함. 그리고 X 형으로 구성된 까치구멍과 이중으로 된 대청
 
불탄 흔적 그대로 방치가 되

이렇게 잘 꾸며진 허삼둘 가옥을 보면서 참으로 가슴이 미어지는 듯하다. 담장은 무너져 내리고, 사랑채와 안채는 불에 튼 흔적이 그대로 있다. 행랑채가 보수가 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안채와 사랑채의 불에 탄 흔적이 이해가 가질 않는다. 그것도 일부만 그렇게 탔다는 것이 더욱 의심이 간다.

안의면 담당자와 통화를 해보았다. 5년 전인가 방화로 추정되는 불이 났다는 것이다. 문화재는 아무리 국가에서 지정을 했다고 해도, 개인소유이기 때문에 마음대로 손을 댈 수가 없다. 그런데 그 즈음에 안의면에서는, 정자를 비롯한 몇 채의 한옥에 불이 났다는 이야기를 한다. 아마도 의도적인 방화일 것으로 추정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불에 탄 흔적이 있는 사랑채와 무너진 담장

그 후 문화재청에서는 이 가옥을 사서 보수를 하려고 했으나, 여러 가지 여건이 맞지가 않아 아직 그대로 있다는 것이다. 어느 집보다도 특이한 형태로 꾸며진 집이, 이렇게 방치가 되어있다니. 이럴 때는 강제로라도 보수를 할 수 있는 법은 없는 것인지. 그저 집안을 돌아보면서 답답할 뿐이다. 해가 떨어지기 전에 한 곳이라도 더 돌아보려고 길을 나서지만, 자꾸만 그 불탄 모습이 눈에 어른거려 쉽게 발을 떼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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