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선 편안하게 옛 집 이야기를 끌어가려고 한다. 우리가 흔히 고택, 가옥, 생가, 생가지라는 용어를 써서 소개를 하는 집들은 조금씩의 차이를 지니고 있다. 그동안 옛집 기행을 하면서 돌아본 바로는, 고택은 현재 사람이 거주하고 있지 않거나 집을 지은 일족과 연관이 있는 사람이 살 경우에 붙은 명칭이고, 가옥은 사람이 살고 있는 집에 명칭을 붙인다.

가옥의 경우 처음 그 집을 축조한 사람이 아닌, 현재 소유권을 갖고 살고 있는 사람의 이름을 붙여 ‘○○○가옥’이란 명칭으로 사용한다. 생가는 그야말로 그 집에서 태어났거나 살았던 집을 말하는 것이고, 생가지란 그 집에서 태어났거나 살았는데 집의 형태가 당시의 집이 아닐 때 붙이는 명칭으로 보인다. 그동안 전국의 가옥을 돌아다니면서 보니 이런 형태로 명칭이 붙은 것으로 보이는데, 그 명칭을 어떻게 붙였는가는 정확히 가늠은 되지 않는다. 다만 오래도록 다니면서 본 결과 대개는 이런 형태로 명칭을 붙인 것 같다.


독립만세의 고장 천안

충남 천안은 독립만세의 고장이다. 병천 아우내 장터에서는 유관순이 만세운동을 일으켰다. 그 외에도 구국전선에서 열정을 받쳤던 이동녕 선생이 목천에서 태어났다. 목천과 병천은 서로 경계를 이루고 있는 곳이다. 또 한 분의 독립운동에 몸을 바친 유석 조병옥은 병천면 봉두리에서 태어났으니, 이곳은 조국의 독립을 열망하는 많은 사람들이 태어났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유석 조병옥(1894, 5, 21 천안 병천 ~ 1960, 2, 15 미국) 박사는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이자 교육자이다. 또한 정치가로 일생을 살았다. 부통령 출마와 대통령 출마를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선거유세 중 병으로 인해 미국으로 급히 이송이 되어 미국 월터리드 육군병원에 입원 중 6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조병옥은 일제 강점기에는 도미유학과 독립운동에 종사하였고, 1948년 정부수립 후에는 UN대표단, 내무부와 외무부장관 등을 거치기도 했다.



집안에 있는우물과(위) - 자형으로 꾸민 안채(가운데), 그리고 헛간채(아래)

조촐한 초가집, 그러나 쓰임새 있게 꾸며

유석 조병옥의 생가는 천안시 병천면 봉두리 261-6 도로변에 있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는 유관순의 생가가 있어, 두 곳을 돌아보기 위해 길을 나섰다. 이날따라 국지성 호우로 인해 길을 걷기도 힘든데, 다행히 답사를 하는 시간에는 비가 멈추어주었다. 도로변에 자리 잡고 있는 조병옥의 생가는, 조병옥 박사가 태어나고 자란 집이다.

조병옥 박사가 이 집에 살던 때는 초가였으나 와가로 변형되었던 것을, 문중의 고증을 받아 원형 그대로를 복원하였다고 한다. 그 당시의 원형을 복원하였기 때문에 ‘생가’라는 명칭을 붙인 것 같다. 집은 - 자형의 초가로 지어졌다. 대지 550평에 안채가 15평, 헛간채가 7평 정도의 크기로 자리를 잡고 있다. 사립문을 열고 들어서면 우측으로 우물이 보인다.



좌측 끝에 툇마루를 달아내고(위) 정면으로는 반 칸 정도의 한데공간을 마련했다(가운데)
그리고 툇마루가 달린 방에는 한데부엌을 놓았다(아래)


-자 형으로 꾸민 안채는 모두 네 칸으로 구성을 하였고, 동편으로 반 칸의 툇마루를 놓았다. 이곳을 사랑방으로 사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집을 보면 우측으로부터 한 칸의 부엌과 두 칸의 방, 그리고 툇마루가 달린 한 칸의 사랑으로 꾸며져 있다. 맨 끝에 툇마루가 달린 방에는 한데 부엌을 놓았으며, 정면에는 반 칸 정도의 빈 공간을 개방형으로 만들어 이동이 편리하게 하였다. 측면은 이러한 개방된 곳 때문에 칸 반 정도로 보인다.

헛간채는 모두 세 칸으로 광 한 칸을 두고 가운데는 헛간으로 꾸몄다. 그리고 끝에 한 칸은 마구간으로 사용을 하였으며, 처마를 길게 달아내 비에 젖지 않도록 한 것도 이 집의 특징이다. 특별한 것은 없는 초가집이다. 그러나 15평이라는 적은 공간을 아주 짜임새 있게 꾸며 놓았다.



헛간채는 처마를 길게 빼어 눈비를 피할 수 있도록 하였다(위) 여물통과 안채와 헛간채(아래)

지금은 앞으로 도로가 나 있지만, 어린 시절 조병옥은 이곳에서 자연을 벗 삼아 뛰놀았을 것이다. 비가 오는 날 찾아간 조병옥의 생가. 말끔히 정리가 되어 있는 이 집에서, 나라의 안위를 걱정한 한 세대를 풍미한 인물이 태어나고 자란 것을 생각이니, 괜히 마음이 경건해진다. ‘사람은 죽어서 그 이름을 남긴다.’라는 옛말처럼, 이 작은 초가집에서 그 이름을 남긴 역사의 인물이 살다가 갔다. 그래서 옛집의 순례는 의미가 있는가보다.


방안과 뒤뜰. 간소하게 꾸며진 이 집에서 어린시절을 보낸 유석 조병옥 선생은 독립운동과,
나라의 민주주의의 꽃을피우기 위해 살다가 세상을 떠났다.  

천안시 목천읍 동리 79-2에는 이동녕 선생의 생가지가 있다. 평생을 독립운동에 목숨을 바쳤던, 석오 이동녕 선생이 태어난 곳이다. 8월 29일은 국치 100년이 되는 날이다, 부끄러운 역사를 안고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이동녕 선생의 존재는 남다르다. 이곳 천안은 이동녕 선생 외에도 유관순 열사의 생가가 있는 곳이기도 하다.

이동녕 선생은 이 자리에서 태어났다. 현재 이 집은 충남 기념물 제72호로 지정이 되어있다. 원래는 9칸 반의 안채와 사랑채가 있었으나, 현재의 건물은 많이 바뀌었다고 한다. 생가지 조성을 하면서 바꾼 것으로 보인다.


말끔하게 조성 된 이동녕 선생 생가지

이동녕 선생은 이병옥의 장남으로 1869년에 태어났다. 1904년 1차 한일협약이 체결이 되자, 상동청년회에 가입하여 애국계몽운동에 전념하였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이상설 등과 북간도로 망명하여 서전의숙을 설립하고, 1907년에 귀국하여 안창호, 김구 등과 함께 신민회를 조직하였다.

1910년에는 만주로 건너가 이시영, 이강영 등과 함께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하였으며, 1919년 상해임시정부에서 국무총리, 국무위원 주석의 일을 함께 보았다. 1928년에는 한국독립당을 결성하여 이사장이 되고, 1935년에는 한국국민당 당수로 활약하였다. 1940년 중국 사천성에서 병을 얻어 사망하였으며, 그곳에 안장하였다가 1948년에 효창공원으로 이장하였다.



생가지 앞마당에는 선생의 앉아계신 모습이 있다. 생가지의 대문채와 안채(아래)

국지성 호우가 미친 듯 쏟아지고 난 뒤, 이동녕 선생의 생가지를 방문했다. 그렇게 쏟아지는 비는 요즈음 들어서도 처음인 듯하다. 마치 국치일의 아픔을 씻어내기라도 한 것일까? 그래도 아직 정신을 못 차리고, 또 다른 국치를 만들고 있는 윗분들 때문에 마음이 울적해 찾은 곳이다.

깨끗이 정리된 생가지 ‘옥의 티’가 즐비해

이동녕 선생이 태어난 생가지 주변은 정리가 잘 되어있다. 그 집 앞에 선생이 쏟아지는 비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의자에 앉아 엷은 미소를 띠우고 계시다. 물론 이곳을 찾는 사람들이 함께 사진을 찍기 위해 조성된 선생의 모습이다. 집을 배경으로 한 선생의 모습이, 찾는 이들에게 무엇인가를 이야기 하려는 듯하다.


원래 집의 모습은 ㄱ 자형의 안채에 사랑채가 있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집의 구조를 대충은 알고 있었다는 이야기다. 더욱 9칸 반이었다고 하면 그 집이 어떤 형태로 지어졌었는가는, 지역마다 갖고 있는 특징이 있기 때문에 대충 알 수가 있다.

현재 이동녕 선생의 생가는 앞으로 대문채인 광채가 - 자로 있고, 뒤편에 ㄇ 자형의 안채가 놓여있어 튼 ㅁ 자형으로 공간구성을 하였다. 현재 안채는 중앙에 세 칸 대청이 있고, 대청을 바라보고 좌측에는 부엌과 안방이 자리하고 있으며, 그 끝에 다락방인 듯한 반 칸 정도의 방을 드려 모두 4칸으로 구성을 하였다. 대청 좌측으로 보이는 곳도 네 칸으로 구성을 했으며, 대청에 달아낸 부분에는 사랑방을 드렸고, 부엌과 방, 그리고 개방된 마루방을 놓았다.


안방문은 도대체 저런 기발한 생각을 어떻게 한 것일까? 그리고 한편에 붙은 마루방은 또 무엇일까

이 집을 돌아보면서 씁쓸한 마음을 금할 수가 없다. 생가지에 새롭게 집을 짓는다고 해도 가급적이면 예전집의 형태로 복원을 했어야만 했다. 안채와 사랑채가 있었다고 하면, 앞쪽으로는 사랑채가 있고, 그 뒤편에 ㄱ 자형의 안채가, 그리고 한편에는 광채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재현된 집은 도대체 그 비슷한 형태조차 갖추고 있지가 않다.

생가지의 집에는 무슨 옥의 티가 있을까? 우선 안채의 좌측 끝에 있는 개방마루방이다. 이런 구조를 어떻게 생각해 낸 것일까? 개방마루방을 꾸미려면 마루를 높여 정자와 같이 앞뒤로 개방을 했어야만 했다. 이런 식의 마루방은 전국을 돌면서 한옥을 보았지만, 내 안목이 좁아 그런지 본 적이 없다. 만일 이것이 광을 들인 것이라고 한다면, 당연히 판자문을 달아야만 한다. 

뒷벽에 난 창문을 보면 이것은 방이라는 것이 확실해진다. 광일 경우 뒷벽도 막아야하고, 상단에는 까치구멍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또 하나는 사랑방과 안방의 문이다. 대개 안방의 문은 네 짝 짜리 미닫이문을 달아야 한다. 그런데 커다란 문 한 개와 작은 문 한 개를 만들어, 위로 올려 붙들어 매게 만들었다.



뒤편에 있는 우물을 들여다보고 그만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이 정도였나?
역사적 인물의 흔적이 있는 고장에서, 이렇게 흉내만 내고 있다니. 

기가 막힐 노릇이다. 뒤편으로 돌아갔더니 우물이 보인다. 맑은 물이 차 있을 것이란 생각으로 다가갔더니, 세상에 이럴 수가 있나. 우물 안에는 자갈만이 가득하다. 사람들이 찾아와 들여다보고는 하는 우물인데, 지하수라도 끌어다가 채웠으면 좋았을 것을. 역사의 한 인물이 살다가 간 흔적이 있는 집을, 이렇게 터무니없이 만들어 놓다니. 일제에 의해 수도 없이 조작이 된 우리의 역사다. 그런데 이것은 또 다른 조작은 아닐까 하는 생각에 울화가 치민다.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는 곳. 그리고 나라의 독립을 위해 평생을 몸 받쳐 온 선생의 생가지에, 이런 집이라니. 돌아보고 나오는 길에 선생의 곁에 가서 앉았다. 쏟아지는 폭우에 젖은 선생에게 정말 죄스런 마음이 들어서다.

“죄송합니다. 선생님. 또 다른 슬픔을 이곳에서 보고 가네요.” 선생의 손을 잡아본다. 그래도 미소를 잃지 않는 모습에서 왈칵 눈물이 솟는다.

'선생님 정말 죄송합니다.' 집을 돌아보고 난 뒤 너무나도 미안한 마음에
비에 젖은 것도 아랑곳 하지 않고 선생님의 곁에 앉아 손을 잡았다.  

발품을 파는 문화재답사를 한지가 벌써 20년째다. 그동안 숱한 문화재를 보고 다녔지만, 아직도 너무 많은 곳을 찾아가야 한다는 생각에 늘 마음만 바쁘다. 일을 시작하고 보니, 요즈음은 시간이 더 빠른 듯하다. 문화재 답사를 하면서 가장 화가 나는 것은 꽁꽁 닫힌 문이다. 사람이 거주하고 있는 곳임에도 불구하고, 열 수 있는 방법이 없어 담장 밖에서 까치발을 딛고 보아야하기가 일쑤였다.


생활에 여유가 있는 것도 아니고, 시간이 남아도는 것도 아니다. 내가 아니라도 많은 사람들은 문화재 답사를 하고 글을 올린다. 그래서인지 이제는 그만 두고 싶다는 생각을 가끔은 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럴 수 없는 것은, 아마 타고난 역마살 때문일 것이다.



닫힌 문 앞에 메모지 하나


충북 단양군 가곡면 덕천리에 가면 중요민속자료 제145호인 조자형가옥이 있다. 어렵게 길을 물어 찾아간 곳은, 좁은 마을길로 들어서야만 한다. 집 앞에 도착하니 문이 닫혀있다. 오늘도 또 공을 치나보다 하고 돌아서려니, 대문 사이에 웬 쪽지 한 장이 보인다. 가서 읽어보다가 왈칵 눈물이라도 쏟을 것만 같다.


‘주인은 외출중입니다. 천천히 둘러보시고 안녕히 가십시오.’



세상에 이런 배려를 하는 문화재도 있다. 문을 밀쳐보니 열린다. 안으로 들어가니 곳곳마다 이곳은 어디입니다. 이곳은 무슨 용도로 쓰이는 곳입니다. 그런 안내문구가 붙어있다. 어떻게 이렇게 자상할 수가 있는 것일까? 남들은 문화재를 보호한다고 사람이 있어도 문도 열어주지 않는데, 주인이 없다는 안내와 함께 문을 열어 놓고 천천히 돌아보란다.


집 안으로 들어가니 모든 것이 깨끗하게 정리가 되어있다. 40평의 목조기와집은 조자형 가옥은 남향집이다. 집 앞으로는 남한강이 흐르고 뒤로는 산을 두르고 있는, 전형적인 배신임수의 형태를 띤 전형적인 민가이다. 집이 자연을 벗어나지 않고, 자연과 조화를 이루며 지어졌다. 주인의 심성을 닮아서인가 보다.

  



안채 대청마루와 안채 부엌의 까치구멍, 그라고 부엌 건너에 아랫방

1800년대 중부지방의 민가형태


이 집은 일제 때는 최씨가 살았고, 6,25 동란 후에는 박씨가 살았다고 한다. 1958년에는 조성락씨가 대대적인 수리를 하였으며, 1972년 현재의 주인인 조자형씨가 매입을 했다고 한다. 집의 전체적인 구조는 ㄱ 자형의 안채와 ㄴ 자형의 사랑차가 맞물려 튼 ㅁ 자 형으로 꾸며져 있다.


사랑채는 대문 쪽으로 사랑마루를 둔 조금은 색다른 형태로 꾸며졌으며, 사랑채의 안쪽은 행랑으로 삼았다. 사랑채와 대문을 두고 맞물린 곳은 광채로, 좁은 공간을 적절히 이용한 것이 특이하다. 중부지방의 전형적인 건물배치를 하고 있는 이 가옥은 부엌과 안방을 두고, 꺾인 부분에 대청마루와 건넌방을 두었다. 한 가지 특이한 점은 부엌 아래에 별도로 아랫방을 한 칸 더 두었다는 점이다.  





대문을 사이에 두고 광채와 사랑채가 접해있다(맨위) 뒤뜰도 말끔하게 정리를 했으며, 장독대와 예전에 사용하던 풍구가 보인다.

집을 한 바퀴 돌아보고 이것저것 사진을 찍었다. 예전에 사용하던 여물통이며 디딜방아, 그리고 풍구 등도 그대로 말끔하게 손질이 되어, 제자리에 놓여있다. 마치 연대를 거슬러 올라, 이런 것들을 사용할 당시 그대로인 것만 같다. 곳곳마다 붙어있는 안내문구가 정말로 사람을 기분좋게 만든다.


수많은 문화재를 답사하면서 다녔지만, 20년 만에 가장 기분 좋은 하루가 된 날이다. 이렇게 주인이 없어도 개방을 하고, 사람들을 받아들여도, 훼손이 없이 더 잘 보존이 될 수 있다는 모범을 보이는 것만 같다. 집을 다 둘러보고 나서는 부엌 문 앞에는 이런 글이 적혀 있었다.


‘방문해 주신 것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둘러보시고 문은 닫아주시면 고맙겠습니다. 가시는 길 안전운행 하시고, 안녕히 가십시오.       


집 안 곳곳에 붙어있는 안내문구. 문화재 답사 20년 만에 가장 기분좋은 답사를 했다.

충남 서천군 기산면 신산리 120에 소재한 이하복 가옥은 중요민속자료 제197호로 지정이 되어있다. 이하복 가옥은 한산이씨 중시조인 목은 이색선생의 18대손인 이병식(중추원의관)이 조선조 말인 19세기말에 안채 3칸을 짓고, 그 후 대를 이어 20세기 초에 사랑채와 행랑채, 아래채 등을 새로 지었다.

이하복 가옥은 안마당을 중심으로 ㄱ자형의 안채와 그 앞쪽으로 一자형의 사랑채, 안채의 앞 우측으로 광채가 있어 튼 ㅁ자형 배치를 하였다. 또한 안채를 드나드는 중문 밖으로는 사랑채와 대문으로 연결이 된 행랑채와 그 뒤편에 아래채가 자리하고 있다. 중부지방의 전통적인 농가로 안채의 앞쪽지붕이 뒤쪽보다 길게 처리가 되어있으며, 중문 밖으로 며느리의 독립적인 공간을 마련해 준 것이 특이하다.



주인의 설명을 받아 돌아 본 옛집

이하복 가옥을 찾아갔을 때는 대문이 굳게 잠겨 있었다. 인기척에 사랑채에 거주하시던 어르신이 몸소 나오시어 대문을 열어준다. 대문 안으로 들어가면 우측으로 사랑채와 연결이 된 행랑채가 - 자형으로 배치가 되어있고, 그 맞은편에는 아래채가 자리하고 있다. 특이한 집 구조이다.

“이 아래채는 나중에 지은 것인데, 집에서 며느리를 들이면 이곳에서 생활을 하게 했던 곳입니다”

어르신의 설명이다. 중문을 지나 안채로 들어갔다. 안채는 원래 부엌과 방 2개로 구성된 3칸 집이었다고 한다. 나중에 왼쪽의 부엌을 늘리고 오른쪽으로 대청과 방, 그리고·부엌 겸 헛간으로 사용하는 헛청을 덧달았다. 사랑채는 왼쪽에 대문을 내고, 부엌과 사랑방으로 구성되었다. 사랑채의 우측 부엌에는 작은 쪽문을 내어 밖으로 출입을 할 수 있도록 하였다.




사진 위로부터 대문, 중문, 안채, 아래채

전체적인 구성은 길게 - 자 형의 두 줄로 나열된 집이지만, 공간 구성이 특이하고 살아가는데 있어 불편함을 주지 않도록 세심한 배려를 한 것이다. 아마 새로 시집을 온 며느리가 생활을 하기에 불편함이 없도록 마음을 쓴 흔적이 역력하다.

집안에 사용하던 가재도구가 그대로 박물관

대문 입구에는 ‘재단법인 청암문화재단’이란 현판이 걸려있다. 안으로 들어가 집안을 돌아보면서 입을 다물지 못한다. 수많은 책들과 많은 농기구들. 그리고 광채에 놓여진 그릇들이며 각종 집기들. 도대체 이 많은 것들이 왜 이 고택에 있는 것일까?





위로부터 안 광채, 아래 광채 그리고 전시가 되어있는 각종 기물

“이것들은 모두 어디서 구해오셨어요”
“예전부터 집에서 사용하던 것인데 물량이 너무 많다보니 이렇게 정리를 했어요.”
“이것만 해도 말할 수 없을 만큼의 가치가 있을 듯합니다”
“사람들은 옛 것이라고 자꾸만 버리지만, 그것이 우리의 실생활에서 사용하는 것이기 때문에 소중한 것이죠.”

할 말이 없다. 이렇게 하나하나 정리를 하고 진열을 해 놓으면 훌륭한 교육자료가 된다. 역사 속에서 우리네와 함께 생활을 해온, 손때가 묻은 것들이다. 몇 번이고 주변을 돌아보지만 그 어느 곳에서도 이리 방대한 자료를 본 적이 없다. 고택기행을 하면서 이하복 가옥의 남다른 점이 바로 이렇게 많은 생활도구 때문이다.

“정말 좋은 구경을 했습니다. 고맙습니다”

날은 덥고 땀은 흐르지만, 이보다 더 값진 선물은 없을 듯하다. 몇 번이고 뒤를 돌아보고 길을 떠나면서 ‘고맙습니다’를 속으로 되뇐다.




중문으로 내다 본 아래채와 장독, 그리고 안채 굴뚝 

아산시 송악면 외암리에 소재한 외암리 민속마을은, 마을 전체가 중요민속자료 제236호로 지정이 되어 있다. 그리고 마을 안에는 충청지방의 양반집과 초가가 한데 어우러져, 우리의 기옥구조나 실생활 등을 볼 수 있는 전통의 마을이다. 조선조 경종 3년인 1723년에 이간 선생이 지은 <외암기>에는 마을 이름을 '외암'이라 기록한 사실이 있어, 외암의 명칭이 이때 지어진 것으로 보인다.

 

외암리 민속마을은 우리나라에서 집단으로 한 마을이 중요민속자료로 정해진 몇 곳 안 되는 곳 중 한 곳이다. 경주의 양동마을, 순천의 낙안마을과 강원 고성의 왕곡마을 등이 이렇게 집단으로 지정이 되어 있지만, 외암리 민속마을은 수도권에서 가장 가까이 있어 많은 사람들이 즐겨 찾는 곳이기도 하다.

 

▲ 민속마을 외암리 민속마을은 우리나라에서 집단으로 한 마을이 중요민속자료로 정해진 몇 곳 안 되는 곳 중 한 곳이다

 

입장료 징수에 맞는 관람이 이루어져야

 

외암리 민속마을은 사진작가 등 많은 사람들이 즐겨 찾는 곳이다. 이곳은 아산시민들은 주민등록증 등을 보여주면 무료로 관람을 할 수가 있다. 그러나 외지인은 경우 성인들은 2000원의 관람료를 지불하여야만 한다. 문제는 이렇게 관람료를 지불하고도 몇몇 집은 밖으로만 관람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우리가 어느 민속마을 등에 들어가면 그 안에 사는 모습을 보고 싶어서다. 그저 수박 겉핥기식으로 밖으로만 맴돌다가 나온다면, 굳이 관람료를 지불해야할 이유가 없다는 생각이다.

 

그러나 외암리 민속마을의 경우 마을 안에 중요민속자료로 지정이 되어 있는 집이거나, 그 외에 몇 집은 아예 문을 걸어두거나, 개인의 소유임을 써 붙이고 출입을 통제하고 있는 실정이다. 경주 양동마을의 경우 누구나 관람료 없이 마을을 돌아볼 수가 있다. 물론 몇 집은 사생활이 침해받는 것을 싫어 출입을 제한한다는 문구가 보이기도 한다.

 

▲ 건재고택 중요민속자료인 건재고택. 문이 굳게 닫혀있어 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다.

▲ 건재고택 담 밖에서 본 건재고택, 아름다운 정원 등이 있어 외암리에서도 가장 뛰어난 고풍을 자랑하는 집이다.

 

만일 관람료를 받았다면 그만큼의 충분한 관람을 책임져야만 한다. 사람이 살기 때문에 생활에 지장을 초래한다고 하면, 하루에 몇 시간만이라도 개방을 하거나, 안내자의 안내를 받아서라도 관람을 할 수 있도록 해주어야만 한다. 그러나 그렇게 꼭꼭 닫혀있는 집들은 관람을 할 수 없다는 것이, 관리소 측의 대답이다. 물론 주차료로도 그만한 돈을 받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여주 세종대왕릉이나 효종대왕릉의 경우 주차는 무료이다. 그리고 두 곳의 능을 관람하는 대도 대인의 경우가 일괄 천원이다. 2000원을 받든지 얼마를 받든지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만큼 외지에서 온 관람객들을 위한 서비스는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대충 꾸며놓은 시설물, 외국인들에게 미안해

 

▲ 물레방아 마을 입구 다리건너에 있는 물레방아. 그러나 그 기능을 잃었다

▲ 디딜방아 공이가 찧는 부분은 다 망가지고 낙엽만 수북하다.

 

외암리 마을에서 관람료를 지불하고 다리를 건너면 좌측에 물레방아가 있다. 물은 흐르는데 정작 방아는 찧어지지 않는다. 가까이 가서보니 물의 힘으로 수차가 돌아가면, 방아를 움직여야 하는데 연결되는 부분이 연결이 안 되어 있다. 마을을 돌다가 보면 디딜방아와 연자방아도 보인다. 그런데 이 방아들 역시 대충 모양만 꾸며 놓았다. 디딜방아 공이가 곡식을 찧는 부분은 무너져 있고 가득 낙엽 등이 쌓여져 있다.

 

외암리 민속마을은 외국인들이 많이 찾아오는 곳이다. 그런데 이 사람들이 디딜방아를 돌아보다가 눈살을 찌푸린다. 무엇이라고 이야기를 주고받는데, 대충 들어보니 어떻게 여기서 방아를 찧느냐는 것이다. 그저 보여주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다. 제대로 된 모습을 보여주고, 그들이 실제로 체험을 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러나 모습만 갖춘 이런 것들을 볼 때, 정말 부끄럽기 짝이 없다.

  

보이지 않는 안내판 정비해야

 

 
▲ 안내판 글이 다 지워져 알아볼 수 없는 안내판

▲ 외국인들 민속마을 관람을 하고 있는 외국인들. 좀 더 신경을 써서 제대로 된 마을을 관람할 수 있도록 해야한다.

 

마을을 돌다가 보면 집 앞에 그 집이 어떤 집이었나를 안내하는 안내판들이 있다. 여러 성씨가 살았으나 조선조 명종 때 예안 이씨인 이사종이, 세 딸만을 둔 진한평의 첫째 사위가 되면서 이곳으로 이주했다. 그 후손들이 크게 번창하면서 동족마을이 된 곳이 바로 외암리 민속마을이다. 그러다 보니 마을 내에는 종손집, 참판댁, 송화댁 등 가호가 붙은 집들이 있다. 이렇게 집집마다 명칭이 붙으면서 그 내력을 설명한 안내판이 집 앞에 놓여있다.

 

그러나 그 중 몇 곳의 안내판은 글이 지워지고 훼손이 심해 알아볼 수가 없다. 마을의 여기저기서 보수를 하느라고 주변이 부산하다. 관람을 편하게 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고, 모든 것을 제대로 갖추어 놓아야 우리 것을 제대로 알릴 수가 있다. 무엇인가 부족한 듯한 모습에서 우리 민속마을의 아름다움이 제 가치를 잃는다면, 차라리 보여주지 아니함만 못한 것이 아닐까? 제대로 된 관리가 이루어져, 민속마을을 찾는 사람들이 더 기분 좋은 관람을 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다. (출처 : 오마이뉴스 / 2010, 3,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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