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6일, 오후까지 일을 보고 잠시 광한루원에 들렸다. 걸어서 20여분, 카메라 하나를 걸머메고 천천히 걸어 광한루원까지 가는 길에, 은행잎이 떨어져 온통 세상이 노랗게 변해버렸다. 광한루원은 명승으로 지정이 되어있는 곳이다. 광한루원이야 유명한 곳이고 수많은 소개가 된 곳이니, 구태여 여기서 또 다시 설명을 하지 않아도 좋을 듯하다.

광한루원 한편에는 ‘월매의 집’이 자리하고 있다. 언제 적에 조성한 것인지는 몰라도 춘향전에 나오는 정경을 본 따 축조를 했을 것이다. 담벼락 한편에 은행나무가 서 있어. 초가 위에 노랗게 떨어진 은행잎이 아름답다. 월매의 집은 대문채와 안채, 그리고 춘향이와 이몽룡이 사랑을 나누었다는 별채인 부용당으로 꾸며져 있다.


전형적인 민가를 잘 나타내고 있어

물론 월매의 집이 문화재는 아니다. 그리고 예부터 있던 집은 더욱 아니다. 그러나 이 집을 돌아보면, 예전 민가의 형태를 잘 나타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월매의 집 앞에는 이런 안내판이 서 있다.


월매(月梅)집 - 조선시대 우리나라 고전 <춘향전>의 무대가 된 집이다. 남원부사의 아들 이몽룡이 광한루 구경 길에 올랐을 때, 그네를 타고 있던 성춘향에게 반하여 두 사람이 백년가약을 맺은 집으로 춘향 어머니의 이름을 따서 월매집이라고 하였다.

이 집은 돌담 위에 짚으로 이엉을 올렸으며, 대문은 네 칸이다. 안으로 들어서면서 우측 한 칸은 대문채인 하인의 방이고, 대문, 그리고 좌측 두 칸은 광으로 사용을 한다. 그 옆에는 한 칸으로 지은 측간이 자리한다.

그 측간위에 은행나무 한 그루가 있어 노랑 은행잎이 떨어져 가을의 분위기를 물씬 풍기고 있다. 누가 가을은 붉다고 하였는가? 이 노랑 은행잎이야말로 가을을 알리는 가장 멋진 색이 아닐까 한다.

다섯 칸으로 구성한 안채 훌륭하네.

월매의 집 안채는 대문채를 들어서면 정면으로 자리한다. - 자로 서 있는 안채는 모두 다섯 칸으로 구성이 되어있다. 집을 바라다보면서 좌측으로부터 부엌이 자리하고, 부엌 옆에는 두 칸의 안방이 있다. 그리고 한 칸의 마루방과 맨 우측에 한 칸의 건넌방이 있다. 건넌방 앞으로는 높임마루를 놓고 정자와 같이 난간을 둘렀다.

뒤편으로 돌아가면 안방과 대청까지 연결하여 툇마루를 놓았다. 그리고 건넌방 뒤로는 문을 달아 불을 땔 수 있는 아궁이를 놓은 듯하다. 문마다 잠겨있어 안을 확인할 수 없다는 점이 조금 아쉽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볼 때 이정도 집이라면, 민초들의 집 치고는 상당히 좋은 집이라는 생각이다.

안채의 앞면이다. 가끔은 앞에 굴뚝을 놓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다. 사진 좌측 부엌쪽에도 없다





이런 세상에 집을 돌아보니 굴뚝이 없네

옆에 서 있는 ‘부용당’은 굳이 설명을 하지 않아도 좋을 듯하다. 이 대문채와 안채만 갖고도 충분히 아름다운 초가의 모습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집을 돌아보다가 그만 실소를 하고 만다. 그래도 명승에 마련한 집이고, 더욱 춘향전에 나오는 대목으로 꾸민 집이다. 그런데 대문채를 들어서면 대문채 방 앞에 <행랑채 - 방자가 식사하는 장면입니다>라는 설명이 붙어있다.

방자가 왜 월매네 집의 행랑채에 묵고 있을까? 그것이야 이도령이 부용당에서 춘향이와 사랑 놀음에 빠져있으니, 이 대문채 행랑방에서 방자가 밥을 좀 먹기로서니 무엇이 문제이랴. 그런데 안채를 돌아보다가 정말 어이가 없는 경우를 본다.

뒤켠에도 굴뚝이 보이지 않는다. 연도도 없다. 만일 연도가 있다면 축대와 비슷하거나 조금 아래로 내려가 지나가는 것이 보여야만 한다



안채 부엌에는 향단이가 불을 때고 있는 모형이 보인다. 이 안채의 구성으로 보아서 적어도 굴뚝이 두 개가 있어야 한다. 안방에서 나오는 굴뚝과 건넌방에서 나오는 굴뚝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연도도 없고 굴뚝도 없다. 이런 모습을 보다가 피식 웃고 만다. 불 때는 향단이가 아마 질식해서 죽을 것이라는.

측면에도 역시 굴뚝이 보이지 않는다. 이 집에는 두 개의 굴뚝이 서 있어야 한다. 안방에서 나오는 굴뚝과 건넌방 아궁이에서 불을 때면 나오는 굴뚝. 그런데 굴뚝이 없다. 보일러를 옛날에도 썼는지?


명색이 명승 안에 마련한 집이다.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이 찾아오는 곳이다. 그런 곳 안에 마련한 집에 굴뚝이 없다니. 굴뚝 하나가 아무것도 아니라고 해도 그렇다. 이런 경우를 어떻게 설명을 해야 할까? 그저 건성으로 대충 만들어 놓고 보여주는 전시행정. 참으로 멋진 월매네 집의 ‘옥에 티’란 생각이다.

전남 무안군 심향면 유교리 698에 소재한 나상열 가옥은, 중요민속문화재 제167호이다. 마을에서는 이 집을 ‘천석지기의 집’ 이라고 부른다. 천석지기라는 실감이 나지 않는 나로서는 그것이 어느 정도의 부를 말하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대농의 집이라고 부르는 이 집을 돌아보고 나서야, 그 부의 척도를 알았다.

나상열 가옥을 찾아가 보았다. 약 90여 년 전에 지은 안채와 일제 때 지은 창고, 그리고 문간채와 중문채가 자리를 하고 있다. 나상열 가옥은 전체적으로 3단의 구조로 축조되었다. 맨 위에는 안채가 있고, 계단을 내려 맞은편에 창고와 중문채가 자리하고 있다. 마지막 맨 아래편 3단에는 대문과 행랑채가 자리하고 있다. 부호답게 많은 일꾼들을 거느리고 있었다고 하는데, 집의 전체적인 구조로 보아 예전의 건물에서 사라진 부분이 있는 듯하다.


대문도 창고로 사용한 부호의 집

나상열가옥의 대문은 일반적인 집과는 다르다. 커다란 대문을 갖고 있을 경우, 그 양편은 문간채로 사용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높고 큰 나상열 가옥의 대문은 다르다. 문 앞과 안 편이 모두 판자문을 만들어 놓았다. 담벼락 위에 낸 들창으로 안을 들여다보니, 바닥 등이 이것도 곡식창고로 이용했음을 항 수 있다.

그렇다면 이 집에는 여기저기 곳곳에 곡식창고를 만들어 놓았다는 소리다. 그만큼 천석지기의 집에는 다양한 창고가 필요했다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아마도 이 대문에 붙은 창고는 원 곡식창고에서 곡물을 밖으로 운반하기 전에 사용한. 중간 창고 역할을 했던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행랑채는 대문 안을 들어서면서 좌측으로 나 있다. 이곳도 너른 광을 만들고 그 한편 구석에 방을 들여 놓았다. 너른 공간을 최대한으로 확보를 한 형태다. 나상열 가옥이 오밀조밀한 멋을 벗어나 시원하게 보이는 이유이기도 하다.

부엌과 연결된 마루의 용도는?


나상열 가옥에서 눈에 띠는 또 한 가지는 바로 안채에 딸린 부엌이다. 이 부엌은 안쪽과 문쪽에 작은 방을 두었다. 아마 안채에서 일을 하는 집안의 부녀자들이 이용한 듯하다. 그런데 그 방 사이에 마루가 있다. 앞을 문을 단 것으로 보아 대청은 아니다. 마루방의 한편에는 벽에 붙여 계단식으로 짠 것이 보인다.

가만히 보니 그곳을 부엌에서 사용하는 용기를 보관하는 곳인가 보다. 집에서 일을 하는 많은 식솔들을 거느리고 있었을 테니, 그만큼 집안에서 사용하는 용기도 많았을 것이다. 많은 용기를 보관하기 위해, 부엌과 방 사이에 별도로 장식장처럼 꾸며놓았다. 그런 것들을 보관하기 위한 마루방을 만들 정도로 세심한 배려를 하고 지은 셈이다

안채 뒤편에 있는 석빙고

나상열 가옥에서 볼 수 있는 또 하나의 특징은 집안에 석빙고가 있다는 점이다. 이런 축대 안에 만들어 놓는 석빙고는 많은 인원이 기거하는 절집 같은 곳에서 볼 수 있다. 일을 하는 사람들이 많다보니, 그만큼 음식을 만들 때도 많은 양의 재료를 사용해야 한다. 그 많은 양의 음식재료를 날마다 사들이는 것도 한계가 있다.

그러한 음식물을 보관하기 위해 안채의 뒤편에 굴을 파고 석빙고를 만들었다. 이 석빙고는 음식을 보관하는 용도로만 사용되는 것이 아니고, 음식의 적당한 숙성까지도 도왔을 것이다. 결국 이 집안의 음식은 항상 신선한 것을 먹을 수 있었다는 이야기다.

우물 안에서 자라나는 나무의 정체는?

우물에는 도르래를 달아서 사용을 한 흔적이 보인다. 사람들이 많으면 그만큼 많은 음식을 준비해야 하고, 많은 음식을 준비하기 위해서는 물의 사용양도 많았을 것이다. 그러다보면 음식을 조리하는 집안 아낙네들이 많은 노동력을 필요로 하게 된다. 그런데 사용하는 힘을 낭비하지 않기 위해, 우물의 양편에 기둥을 세워 도르래를 달았다.


우물을 보기 위해 가까이 갔다. 안을 들여다보다가 깜짝 놀랐다. 우물 안에 등나무와 같은 나무가 자라고 있다. 왜 이 안에서 나무가 자라고 있을까? 저 나무는 어떻게 저곳에서 자라게 된 것이고, 언제부터 저렇게 자라고 있는 것일까? 무성한 잎이 싱싱해 보인다. 그 밑에는 물이 있다는 소리다. 나상열 가옥을 돌아보면 여기저기 수수께끼와 같은 질문을 하게 된다.


반전의 미학, 아름다운 돌담장

집안의 전체를 돌담장으로 쌓은 나상열 가옥. 그래서 전체적으로 무거운 집의 분위기를 반전시킨다. 또한 그 무거움을 덜어내는 하나는 담장의 한편이 열려있기 때문이다. 안채를 보고 좌측의 담장 앞으로는 계단이 아닌 비탈로 조성을 하였다. 곡식을 나르기 위한 수레가 다니던 길이기 때문이다.

전체적으로 너른 대지위에 시원하게 조성된 나상열 가옥에서, 정감이 가는 유일한 축조물이 바로 돌담장이다. 이 담장은 담장에 붙은 대문과 행랑채까지도 이어진다. 그리고 그 끝에는 수레를 끌 수 있는 비탈로 여유를 부렸다. 천석지기 집이라는 나상열 가옥에서 보이는 전체적인 여유. 그것은 생활의 여유이기도 하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은 어머니를 지극한 효심으로 모신 효자였다. <난중일기>에는 이러한 이충무공의 내력을 적고 있다. 임진왜란이 일어난 1593년 6월에서 12월 사이에 팔순에 가까운 어머니를, 여수 웅천동 송현마을 정대수 장군의 집에 모셔다 놓고 수시로 문안을 드렸다고 한다.

하루는 노모를 뵙기 위해 일찍 배를 타고 송현마을로 문안을 드리러 왔는데, 기운이 많이 떨어진 어머니의 모습을 보고, 사실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생각에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장군은 어머니를 뵈러 갈 때는 흰 머리카락을 모두 뽑고는 했는데, 이는 늙어가는 아들의 모습을 보고 어머니께서 마음 아파할 것을 생각해서였다고.


장군의 모친이 살던 집터를 찾아가다.

10일 아침 일찍 여수 수산시장에 볼일이 있어 내려갔다. 여수에 사는 지인을 만나 함께 장을 보고 오는 길에, 장군의 어머니께서 사셨다는 집터를 찾아갔다. 길가에는 ‘이충무공 어머님 사시던 곳’이란 푯말이 붙어있다. 안으로 들어가니 요즘 주변 정리를 하느라, 한창 공사 중이다. 전남 여수시 웅천동 송현마을 1420-1번지. 옛 집터 인 듯한 곳에는 거북선에 비를 세운 형상물이 있는데, 이 근처 어디인가 이충무공의 모친이 5년간 살았던 곳이라고 한다.

거북비가 서 있는 안으로 들어서면 정면 7칸 정도에, 측면 두 칸 반 정도의 팔작 겹처마 지붕으로 된 집이 있다. 현재 이 집은 사람들이 거주를 하고 있는데, 현재 거주를 하시는 분은 정평호(남, 79세)로 임지뢔란 시 활동을 하던 정대수 장군의 후손이라고 한다. 이분은 임진왜란 때부터 선조들이 대대로 이 터에서 살아왔다는 것이다.



 

고택다운 옛집, 1930년대 지은 것으로 전해져

현재의 집주인도 이 집에서 태어나고 자랐다고 한다. 임진왜란 이후 조상 대대로 이 집터에서 살았다는 분들. 집터는 옛집 터지만, 집은 그동안 여러 번 개축을 한 것인지 옛 모습은 찾아보기가 힘들다. 현재 이 집은 예전 충무공의 어머니께서 사시던 집은 아니다. 당시 발굴을 할 때 대들보 등이 발굴된 곳은, 현재 정대수 장군의 후손인 정평호옹이 살고 계시는 집의 부엌과 장독대에 걸쳐 있다고 전한다.

현재 주인이 거주하고 있는 집이 옛 선조들이 살던 집터에 나중에 보수, 개축을 했다고 보면, 이순신 장군의 어머니는 아마 사랑채나 별채에 기거를 하였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당시 이 집에는 정대수 장군의 가족들이 살고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대문 앞에 선 안내문에 보면 「1972년 옛 집이 있던 자리로 추정되는 곳에서 대들보, 마룻대, 세살창문과 같은 집 구조물과 맷돌, 디딜방아용 절구, 솥 같은 세간들을 찾아냈다」고 적고 있다. 현재 사람이 거주하고 있는 집 주변으로는 수령 300년이 넘는 팽나무가 서 있다. 보호수로 지정이 되어있는 이 팽나무는 수고가 25m에, 나무의 둘레는 5.2m나 되는 거목이다.



문화재 발굴조사 후 문화재지정도 고려 해

집을 자세히 살펴보면 예사집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우선 주춧돌은 원형으로 다듬었으며, 그 위에 팔각기둥을 세웠다. 사방에는 처마 끝에 활주를 받쳐 놓았으며, 전체적으로 보아도 고택의 멋스러움이 그대로 배어있다.

여수시 문화재 관련 담당자는 내년에 발굴에 필요한 예산 신청을 했다고 한다. 발굴 후에 이 터가 정확하게 이순신 장군의 어머니가 살던 집이라고 밝혀진다면, 이곳에 복원계획도 고려해 보겠다는 것이다. 그럴 경우 현재의 집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결정할 것이라고.



만일 이 터가 발굴조사 후에도 정확한 고증이 들어나지 않는다면, 관광자원으로 활용을 할 것이라고 한다. 어차피 난중일기에 밝혔듯이, 송현마을에 어머니를 모셨다고 기록이 있고, 현재의 집이 당시 정대수 장군의 집터이기 때문이다. 충신이요 효자인 이충무공의 어머니가 살았다는 집터. 그곳에는 충무공에 관한 역사를 안내판을 통해 배울 수 있지만, 아직 발굴이 끝나지 않아 정확한 위치를 알 수 없다는 것에 아쉬움이 크다.

전라북도 고창군 무장면 성내리 155번지에 소재한 사적 제346호 ‘무장현 관아와 읍성’. 몇 번이고 찾아가고 싶었던 길을 번번이 뒤돌아서야 했던 곳이다. 고창군 답사를 서너 번을 했지만, 이상하게 이곳까지 갈 수가 없었다. 답사 중 날이 저물어서이다. 지난 9월 4일 마음을 먹고 찾아간 무장읍성. ‘가는 날이 장날’이라더니, 무장읍성은 한창 공사중이었다.

무장읍성은 1991년 2월 21일에 사적 제346호로 지정되었으며, 성의 남문인 진무루에서 무장초등학교 뒷산을 거쳐, 해리면으로 가는 도로의 좌편까지 뻗어 있는 성이다. 성의 둘레는 약 1,4km 정도이며 넓이는 43,847평이다.


토성과 석성으로 쌓은 무장읍성

조선 태종 17년인 1417년에 병마사 김저래가 여러 고을의 백성과 승려 등, 주민 2만여 명을 동원하여 흙과 돌을 섞어 축조하였다고 하는 무장읍성. 성내에는 객사, 동헌, 진무루 등 옛 건물이 그대로 남아있고, 건물 주변에는 여러 가지 유구들이 산재해 있다. 여기저기 복원과 보수 공사를 하느라 파헤쳐진 무장읍성. 진무루를 지나 객사를 거쳐 뒤편에 있는 동헌건물인 취백당으로 향한다.

만 4개월 동안 2만 여명을 동원하여 축성을 하였다는 무장읍성의 동헌. 동헌은 관아에서 업무를 처리하던 중심 건물로, 당시 무장현감이 집무를 보던 곳이다. 조선 명종 20년인 1565년에 세웠으며 한때 무장초등학교 교실로 사용하기도 하여 변형이 된 것을, 1989년 원형으로 복원하였다고 한다.



정면 6칸, 측면 4칸 규모의 무장동헌은 멀리서 보아도 한 폭의 그림을 연상케 한다. 팔작 지붕으로 지은 동헌 건물은 겹처마로 구성해, 전체적으로는 장중한 느낌을 주는 조선시대 건축물이다. 동헌은 현재 전라북도 지정 유형문화재 제35호로 지정이 되어있다.

한 폭의 그림 같은 동헌 취백당

무장읍성의 동헌건물은 객사 뒤편에 자리한다. 동헌 뒤편으로는 토성으로 쌓은 성이 있으며, 동한으로 들어가는 길은 아름드리나무들이 줄 지어 서 있어, 무장읍성의 역사를 말해주고 있다. 동헌을 찾았을 때는 배롱나무가 꽃을 피우고 있어, 마치 한 폭의 동양화를 보는 듯하다.





정면 6칸인 동헌 건물의 중앙에는 <취백당>이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아무리 동헌 건물이라고는 하지만, 넘치는 취흥을 이기지 못해 붙인 이름인가 보다. 대청 안에는 많은 시판들이 걸려있는데, 그 중에는 최집의 취백당기를 비롯해 김하연의 찰미루기, 정곤의 아관정기, 우여무의 동헌시, 이덕형의 동헌시, 정홍명의 동헌시, 기준의 동백정시가 보인다.

이런 시판으로 보아 동헌을 동백정이라고도 불렀는가보다. 무장은 무송과 장사를 합한 고을이라 하여 동헌 이름을 ‘송사(松沙)’라 하였는데, 영조 때 최집이 부임을 해와 ‘취백(翠白)’으로 바꾸었다고 한다.

장중한 느낌을 주는 취백당

단 한 동의 건물이 사람에게 주는 느낌이 이리 장중할 수가 있다는 것이 놀랍기만 하다. 아마도 뒤편에 있는 토성이나, 주변에 늘어선 아름드리나무들 때문은 아닌지 모르겠다. 날렵하게 솟아오른 처마 끝이 살아있는 듯하다. 아래는 넓고 위가 좁게 마련한 주초위에는 두리기둥을 사용하였다.




그러고 보니 두리기둥의 길이가 길어 건물 전체가 장중한 느낌을 주는 듯하다. 대청은 세 칸으로 마련하였으며 뒤편에는 판문을 달아냈다. 건물을 바라보며 좌측은 두 칸의 방을 한 칸 뒤로 밀어서 드렸으며, 우측은 마루 끝까지 방을 드렸다. 우측방은 따듯하게, 좌측 방은 시원하게 계절을 보낼 수 있을 듯하다.

집 뒤편으로 돌아가면 뒤편전체를 복도마루로 마련한 것도 취백당의 특징이다. 아무래도 뒤편의 경치를 감상하기 위한 배려로 보인다. 단 한 동의 건물이면서도 장중함을 느끼게 하는 취백당. 그 이름 속에는 솔처럼 푸른 기상을 지니고, 힌 모래처럼 그렇게 민초들의 삶 속에 녹아들어 고고함을 지키라는 뜻이 있는 듯하다. 취백당은 450년 세월을 그렇게 자리를 지켜오면서, 늘 푸른하늘을 동경했는가보다.

전북 정읍시 산외면 오공리에 소재한 중요민속문화재 제26호인 김동수 가옥. 호남 부농의 상징인 이 가옥은 김동수의 육대조인 김명관이 정조 8년인 1784년에 건립하였다고 한다. 흔히 아흔 아홉 칸 집으로 불리는 김동수 가옥은, 처음으로 집을 지은 해수로 따지면 226년이 되었다.

청하산을 배경으로, 앞으로는 정읍의 젖줄인 동진강의 상류인 맑은 하천이 흐르고 있다. 김동수 가옥에는 대문채인 바깥사랑채, 사랑채와 중문채, 그리고 안채와 아녀자들이 외부의 여인네들과 만나서 담소를 즐기는 안사랑채가 별도로 있다는 점이다. 그 외에도 우리가 알 수 없는 외측이라는 건물과, 담 밖으로 지은 초가인 노비들이 묵는 '호지 집'이라고 하는 집이 여덟 채가 집 주위에 있었다고 한다. 지금은 그 중 두 채만 남아있다.

고택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건축미를 보인다는 정읍 김동수 가옥 사랑채 

부의 상징인 김동수 가옥

고택 답사를 하다가 만난 김동수 가옥. 참으로 대단한 가옥이라고 생각이 든다. 동서 65m, 남북 73m의 장방형 담장을 둘러, 그 안에 곳곳에 건물을 지었다. 한 채의 가옥이 이렇게 넓게 자리를 한 집은 많지가 않은 점도 이 집안 부의 내력을 알만하다.

김동수 가옥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담밖에 자리한 호지집이다. 솟을대문을 약간 비켜서 한 채가 있고, 담 밖 전후좌우에 모두 여덟 채가 있었다고 한다. 지금은 두 채만 남아있다. 호지집이란 말이 생소하다. 김동수 가옥을 방문하기 전에 수많은 고택을 답사했지만, 호지집이라는 말을 들은 적이 없기 때문이다.

김동수 가옥 담 밖에 여덟채가 담장을 둘러 있었다고 하는 호지집.

노비가 살던 집이라고, 글쎄 그럴까?

이 호지집은 노비들이 기거를 하던 집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 집이 자리하고 있는 형태를 본다면 단순히 노비집이라고 하기에는 설명이 부족하다. '호지(護持)'란 수호하고 지켜낸다는 소리다. 또한 이 집들의 자리 배치를 보아도, 단순히 노비집이라고 하기에는 맞지가 않는다. 무엇 때문에 전후좌우에 두 채씩 배분을 해서 지었을까?

김동수 가옥은 부농의 상징이다. 집이 자리 잡고 있는 마을을 보면 인근에 곡창지대가 자리하고 있다. 김동수 가옥을 둘러보면 이 집 안에 많은 곳간과 헛간들을 볼 수가 있다. 그만큼 많은 재물들이 있다는 뜻이다. 또한 집안에 대문채나 중문채에도 방들이 있어, 굳이 담 밖인 외부에 몇 채의 집을 지어, 노비들을 그곳에 살게 했다는 것도 설들력이 부족하다.


김동수 가옥의 안채와, 대문채와 중문채 사이 한편에 자리한 외측

많은 양의 곡식과 재물이 있는 김동수 가옥은, 늘 도적을 맞을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한 재물을 지키기 위해 사방에 집을 짓고, 집을 수호하는 사병들을 기거하게 했을 것이란 생각이다. 그러기에 단순히 ‘노비집’이라는 하지 않고, ‘호지가(護持家)’라고 했을 것이다.

즉 이 호지집에 묵는 노비들은 일을 하기 위한 노비이기보다는, 집을 지키는 경계의 업무를 지니고 있었던 사병들이 묵었다고 볼 수 있다. 사병을 양성한다는 것은 금지가 되어있는 시대에, 대신 노비라고 신분을 숨겼을 것이다. 이런 점으로 본다면 호지집에 사는 사람들은 기실 노비가 아닌, 노비로 가장한 김동수 가옥을 지키는 ‘사병(私兵)’이었을 확률이 더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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