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남도 보성군 득량면 오봉리 강골마을은 참 아름다운 곳이다. 이 마을에는 정자이면서도 중요민속문화재로 지정이 될 만큼 아름다운 열화당이 있다. 또 중요민속문화재 제157호인 이금재 가옥과 제159호인 이용욱 가옥도 찾아볼 수 있다. 고택 답사를 하면서 가장 아름답고, 오랜 기억에 남을 만한 집을 친다면 당연히 이용욱 가옥일 것이다.

 

집이 균형 있게 자리를 잡고 있는 것도 그러하지만, 이용욱 가옥에는 담장에 '소리통'이라는 희한한 구멍이 나 있기 때문이다. 이 소리통이 주는 무한한 상상의 즐거움은, 그 어떤 것도 견줄 바가 아니다. 이용욱 가옥은 강골마을의 중심에 자리하고 있다. 조선 헌종 1년인 1835년 이진만이 지었다고 한다. 이용욱 가옥은 5칸의 솟을대문인 대문채(행랑채), 사랑채, 중간문채, 곳간채, 안채, 사당과 연못 등을 모두 갖추고 있다.  

 

사랑채 앞마당 담장에 난 소리통은 무엇?

 

이용욱 가옥을 돌아보면 '집이 참 이렇게 꾸며질 수도 있구나.'라는 생각을 갖게 만든다. 그만큼 집의 전체적인 모양새가 반듯하다. 그러나 굳이 이 집의 여기저기를 돌아보는 것 보다는, 사랑채와 대문채의 사이에 있는 넓은 앞마당 담장에 있는 구멍 하나가 자꾸만 신경이 쓰인다. 도대체 담장에 저 구멍은 무엇일까?

 


이 작은 구멍을 '소리통'이라고 한다. 이곳에 대고 무슨 소리라도 지른다는 것이 아니다. 이 소리통의 크기는 10cm × 20cm 정도이다. 사랑채에서 대문을 바라보면서 좌측담장 중간쯤의 사람 눈 높이에 이 구멍이 나 있다. 이 소리통이 무엇인가를 알아보기 위해, 밖으로 나가 담장 밖을 살펴보았다.

 

대문을 나서 좌측으로 돌면 옆집과의 담장사이에 길이 하나 나온다. 그저 좁은 골목길쯤으로 생각을 하면 될 만한 그런 길이다. 그런데 그 안으로 들어가니 이용욱 가옥의 담장이 조금 안으로 들어가고, 그 곳에 우물이 있다. 우리가 흔히 공동우물이라고 하는 곳이다. 이 소리통은 그 우물과 안마당을 막은 담장 가운데에 나 있는 것이다.

 

이용욱 가옥의 담장 밖에는 마을에서 가장 물 좋기로 소문난 공동우물이 자리하고 있다

마을의 정보를 알 수 있는 소리통

 

이쯤 되면 이 소리통이 무슨 용도로 쓰였을 것이라고 답이 나오지 않을까? 우물이라는 곳은 마을의 아낙네들이 모여드는 곳이다. 우물에 모인 아낙네들의 수다야, 이야기 하지 않아도 알만하다. 어느 집에 무슨 일이 있는지, 누구는 어떤 짓을 했는지. 누가 살기가 어려운지, 우물가에 모인 아낙네들의 수다는 끊이지 않고 이어진다. 그 수다 가운데는 양반을 욕을 하는 사람들도 있을 테고, 더러는 누구누구는 어떤 염문을 뿌렸는지도 이야기를 할 것이다.

 

이런 우물가의 이야기가 소리통을 통해 안으로 그대로 전달이 되는 것이다. 그저 벽에 귀를 갖다 대지 않고 근처만 가도 밖에서 하는 이야기가 다 들린다. 함께 답사에 동행한 일행에게 밖으로 나가 이야기를 좀 해보라고 했다. 신경을 쓰고 들을 필요도 없다. 바로 귀에 대고 말을 하듯 그대로 다 들린다. 결국 담장 너머 우물가에서 수다를 떨면서 나온 마을의 모든 정보가, 이 소리통을 통해 하인들에게로 전해지고, 한발에 달려갈 수 있는 사랑채의 주인 어르신께 전달이 되었을 것이다.

 

대문채와 마주한 사랑채. 넓은 앞마당을 사이에 두고 마주한다.

 

이용욱 가옥의 대문은 처음에는 3칸이었다. 그러던 것을 이방희의 손자인 이진래가 5칸으로 개축을 했다

 

이용욱 가옥은 지방 사대부가를 대표하고 있는 집이다. 이 집에 사는 양반네들은 마을에서는 추앙을 받고 살았다고 한다. 그렇게 마을사람들에게서 대접을 받고 살기 위해서는, 마을사람들의 아픈 곳을 알아서 어루만져 주는 지혜가 필요했을 것이다.

 

그렇다고 아랫사람들이 양반집에 찾아가 '나 어디가 아프오'라는 말을 하지는 못한다. 이 소리통은 그런 창구 역할을 한 것이다. 마을주민들의 이야기를 듣고, 마을의 모든 일을 결정할 수 있는 교류의 창구 역할을 한 것이다. 물론 그 안에는 양반들을 욕하는 자들도 더러는 있었을 테지만.

 

이 소리통이 하인들에게는 어떤 용도였을까?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서 한 가지 생각이 떠올라 소리통으로 바깥 우물 쪽을 내다보았다. 세상에, 우물이 한 눈에 들어온다. 밖으로 나가 우물에서 소리통을 통해 안을 들여다보았다. 앞마당 밖에는 보이지를 않는다. 참 묘한 소리통이다. 사랑채와 대문채의 사이 담장에 자리를 잡은 소리통. 대문채는 하인들이 생활공간이다.

 

이용욱 가옥의 대문은 처음에는 3칸이었다고 한다. 그러던 것을 이방희의 손자인 이진래가 5칸으로 개축을 했다는 것이다. 앞마당에서 보면 좌측에는 두 칸의 방이 있고, 우측에는 한 칸의 방이 있다. 왜 대문채를 넓히고 방을 더 드렸을까?

 

담장의 중간쯤에 소리통을 뚫어놓았다
 

 

 

아마 모르기는 해도 이 대문을 넓힌 이진래의 아랫사람들에 대한 배려가 아니었을까?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일축을 하겠지만, 그런 생각이 자꾸 들어 혼자 키들거린다. 여름철 하루 종일 밖에서 일을 하고 들어오면, 땀도 많이 나고 온몸이 꿉꿉하다. 그럴 때 시원한 찬물이라도 끼얹으면 날아갈 듯하다. 마을 사람들은 해가지고나면 하루 종일 땀으로 범벅이 된 몸을, 이 우물에 와서 씻고는 했을 것이다. 이 우물은 물이 좋기로 유명하다. 이곳에서 땀으로 범벅이 된 몸을 씻으면, 더위도 가시지만 미용에도 좋다는 마을 분들의 이야기다.

 

젊은 하인들이 물소리를 들으면 잠이 올까? 아마 이 소리통을 통해서 담 너머에 있는 우물을 힐끗거렸을지도 모른다. 달이 으슥하면 남의 이목을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을 테니, 이보다 좋은 기회가 또 있을까? 결국 이 소리통은 집의 어르신은 정보를 수집하는 창구로, 대문채에 머문 머슴들은 야릇한 상상을 할 수 있는 은밀한 창으로 이용을 했을 것만 같다.

 


소리통 하나만 갖고도 무한한 상상을 할 수 있는 보성의 이용욱 가옥. 그래서 고택을 답사하는 길이 늘 힘든 것만은 아니다. 때로는 이런 즐거운 상상을 할 수 있기 때문에.

전북 정읍시 산외면 오공리에 소재한 중요민속문화재 제26호 김동수 가옥. 호남 부농의 상징인 이 가옥은 김동수의 육대조인 김명관이, 정조 8년인 1784년에 건립하였다고 한다. 흔히 아흔 아홉 칸 집으로 불리는 김동수 가옥은 해수로 따지면 230년이 되었지만, 이 가옥은 아직도 원형을 유지하고 있어 우리 고택을 연구하는데 소중한 문화재로 꼽히고 있다.

 

청하산을 배경으로 앞으로는 정읍의 젖줄인 동진강의 상류인 맑은 하천이 흐르고 있다. 김동수 가옥의 특징은 대문채인 바깥사랑채, 사랑채와 중문채, 그리고 안채와 아녀자들이 외부의 여인네들과 만나서 담소를 즐기는 안사랑채가 별도로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또 하나 담 밖으로는 노비들이 묵는 '호지집'이라고 하는 집이 여덟 채가 집 주위에 있었으나, 지금은 그 중 두 채만 남아있다.

 

 

김동수 가옥을 둘러보면 참으로 대단한 가옥이라는 생각이 든다. 동서 65m, 남북 73m의 장방형 담장을 둘러 그 안에 건물을 지었다. 한 채의 가옥이 이렇게 넓게 자리를 한 집은 많지가 않은 점도 이 집안 부의 내력을 알만하다.

 

'호지집'의 용도는 무엇이었을까?

 

김동수 가옥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담밖에 자리한 호지집이다. 솟을대문을 약간 비켜서 한 채가 있고, 담 밖 전후좌우에 모두 여덟 채가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두 채만 남아있다. 호지집이란 말은 생소하다. 김동수 가옥을 방문하기 전에 수많은 고택을 답사했지만, 호지집이라는 말을 들은 적이 없기 때문이다. 이 호지집은 노비들이 기거를 하던 집이라고 한다. '호지(護持)'란 수호하고 지켜낸다는 소리다. 이 호지집을 단순히 노비집이라고 설명을 하기에는 적당치가 않다. 단순히 노비였다면 무엇 때문에 전후좌우에 두 채씩 배분을 해서 지었을까?

 


  
김동수 가옥의 담장 밖에 있는 여덟채의 호지집은 노비집이라고 하지만, 내용을 들여다보면 노비가 아닌 사병이 묵었을 가능성이 더 크다.

 

아마 생각해보건 데 이 김동수 가옥의 규모로 보아 지역의 부농이었을 것이다. 실제로 김동수 가옥에서 보이는 많은 곳간과 헛간들을 보면 알 수가 있다. 그 많은 양의 곡식과 재물이 있는 김동수 가옥은 늘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한 재물을 지키기 위해 사방에 집을 짓고, 집을 수호하는 역할을 준 것이란 생각이다.

 

그러기에 단순히 노비집이라는 말을 붙이지 않고, <호지가(護持家)>라고 했을 것이다. 즉 이 호지집에 묵는 노비들은 일을 하기 위한 노비이기보다는, 집을 지키는 경계의 업무를 지니고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런 점으로 본다면 호지집에 사는 사람들은 기실 노비가 아닌, 노비로 가장한 김동수 가옥을 지키는 사병(私兵)이었을 확률이 더 크다.

 

대문채와 마주한 사랑채는 전국에서 단연 으뜸

 

김동수 가옥은 행랑채라고 부르지 않고 대문채, 혹은 바깥사랑채라고 부른다. 행랑채에도 많은 손님들이 묵었다는 설명이다. 주인을 찾아오는 외부의 손님을 행랑채에 묵게 하는 것은 예의에 어긋나므로, 바깥사랑채 혹은 대문채라 한 것으로 보인다. 대문채는 솟을대문 좌우에 담을 쌓아 건물로 사용을 했으며, 담장에 나 있는 대문을 들어서면 좌, 우측에 곳간과 마굿간 방, 대청 등이 자리한다. 곳간의 넓이로 보아서도 이 집의 부(富)가 상상이 간다. 대문채를 들어서 우측에 마굿간 등이 있으며 꺾인 북쪽에 있는 칸에도 방을 두 칸 두고 있다.

 

  
대문채의 동편부분이다. 마굿간과 방 들로 꾸며져 있다. 행랑채라고 하지 않고 바깥사랑채라고 부른다.

 

이 대문채와 마주한 사랑채야 말로 김동수 가옥에서 보이는 건물 중 단연 최고이다. 사랑채는 정면 5칸, 측면 3칸의 一자형 평면이다. 높은 기둥에 세워 방은 두 칸과 뒷방 한 칸을 꾸몄다. 부엌과 안창고라 불리는 내고(內庫)가 있는 외는 전부를 마루로 만들었는데 보기에도 시원한 양청으로 꾸며 멋을 더했다. 잘 다듬어진 화강암으로 만든 장대석의 기단 위에 올려놓은 사랑채는, 김동수 가옥이 얼마나 집을 짓는데 있어 방위와 멋을 중요시했는가를 알 수가 있다. 전국에서 보이는 많은 고택 중, 김동수 가옥의 사랑채를 단연 으뜸으로 치는 것도 그러한 이유다.   

 

  
김동수 가옥의 사랑채는 고택의 사랑채 중에서 단연 으뜸으로 꼽힌다.

이 사랑채에는 재미난 점이 하나가 있다. 바로 사랑채에 붙은 방이다. 사랑채의 방은 ㄴ자 형태로 3칸의 규모이다. 이 세 칸 중 앞에서 보이는 2칸은 어른이 사용을 하였고, 뒷방 한 칸을 아들이 사용하였다. 뒤쪽 방을 아들이 사용한 까닭은 안채의 며느리가 사용하는 건넌방과 동선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사랑채와 안채를 연결하는 동선이 사당 쪽에 담장을 낀 좁은 통로로 이어진다. 이 길을 지나면 건넌방의 뒤편이 나오는데, 툇마루를 놓아 뒷문으로 방을 드나들 수가 있다. 집안사람들의 눈을 피해 젊은이들이 정담을 나눌 수 있도록 세심한 배려를 한 것이 김동수 가옥의 최고의 멋이란 생각이다.

 

마주한 안채와 중문채의 비밀

 

김동수 가옥의 특징은 집들이 서로 마주하고 앉았다는 점이다. 대문채와 사랑채가 마주하고, 중문채와 안채가 마주한다. 중문채는 모두 11칸으로 지어졌으며 양편을 꺾어 날개채를 달아냈다. 이 중문채는 집안의 여자하인들과 어린자녀의 공부방, 안변소와 곳간 등으로 마련되어 있다. 그런데 이 김동수 가옥에서 보이는 특징은 사랑채와 대문채도 그러하지만, 중문채와 안채도 방이 서로 마주하지를 않는다.

 

대문채와 중문채의 방을 놓는데 있어, 조금은 비켜서 방을 놓았거나 꺾인 부분에 방을 들여 놓았다. 중문채는 안 변소, 헛간, 곳간에 이어 내외벽이 있는 두 칸의 중문이 있다. 그리고 이어서, 헛간과 곳간이 계속되다가 아홉 칸 째에서 꺾이어 북쪽으로 부엌과 방이 두 칸 이어진다.

 

  
집안 곳곳을 담장으로 막고 일각문을 내어 통행을 하도록 하였다.

  
사랑채에서 안채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길게 ㅡ자로 늘어선 중문채의 중문을 지나야만 한다.

왜 이렇게 방을 놓는데 있어 주인과 하인의 방을 마주하지 않았을까? 그것이 아마 두 가지의 의미가 있으리라고 본다. 하나는 주인의 신분이 하인과 마주 할 수 없이 높다는 뜻일 테고, 또 하나는 밑에 사람들이 마주하면 불편할 것을 감안해 조금 비켜나도록 방을 들였을  것이란 생각이다.

 

중문채와 마주하는 안채는 집안의 여주인이 거주하는 것이다. 이 안채는 ㄷ자형으로 지어졌는데 양편 꺾인 부분에 부엌을 달아낸 독특한 방법을 썼다. 안채는 가운데 6칸을 대청으로 조성을 하였다. 이 안채 역시 사랑채와 마찬가지로 김동수 가옥의 중요 건물 중 하나로 그 멋을 더했다. 대청의 양 끝에 방을 두고 대청의 뒤로는 큰 문을 내어, 뒤뜰의 경계를 감상할 수 있도록 했다.    

 

  
김동수 가옥에서 보이는 또 하나의 멋스러움을 지닌 안채. 양편 날개채에 부엌을 들인 독특한 형태이다.

출가한 딸이 해산을 하기 위해 친정에 오면 이곳에서 몸을 풀기도 하고, 찾아온 여인들이 묵기도 했다.

김동수 가옥의 또 하나의 특징은 바로 안채의 서남쪽에 자리한 안사랑채다. 사랑채는 주로 남주인이 기거를 하면서 손님들을 접대하는 곳이지만, 이 안사랑채는 안주인을 찾아오는 여인들이 하루 유숙을 하기도 했지만, 출가한 딸이 해산을 하기 위해 친정에 오면 이곳에서 몸을 풀었다고 한다. 결국 사랑채보다도 더 안채를 중시한 가풍을 느낄 수가 있다. 이 안사랑채는 입향조인 김명관이 본채를 지을 때, 그 자신과 목수들이 임시로 거처하기 위하여 지은 건물이라고 한다. 남향으로 지어진 이 안사랑채는, 一자형으로 정면 5칸, 측면 한 칸 반이 되는 규모로 지어졌다.

 

  
담장 안에 있는 집들 중 유일한 초가집인 외측

한 때는 가을에 수확한 벼가 1200섬이 넘었다고 하는, 부농의 상징인 김동수 가옥. 230년 가까운 세월동안 원형 그대로를 유지한 채 지켜낸 집이기에 더욱 소중하다. 건물과 건물을 담으로 막고, 일각문을 내어 출입을 도운 김동수 가옥. 99칸의 대부호의 집답게 여기저기 둘러볼 것이 많다. 사랑채에서 안채로 난 동선을 따라 이동을 하면서 괜히 혼자 가슴을 설레 본다. 그 곳에 기다리는 여인이 있지도 않건만. 

 

그동안 전국의 고택답사를 하면서 어림잡아 150집 정도를 돌아다녔다. 아직도 찾아갈 곳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고, 더 좋은 집들이 남아있어 발길을 재촉해야겠다는 생각이다. 요즈음 들어 우리 고택에 대해 글을 쓰는 분들이 많아, 고택이 갖고 있는 비밀 몇 가지를 적어본다.

 

사람들은 흔히 안채의 안방이나 건넌방 등의 문이 작다거나, 왜 사랑채에서 안채로 들어가는 문을 딴 곳으로 내었는가 등을 이야기를 한다. 그러나 우리 고택에는 집을 지을 때, 그 모든 것이 과학적이고 윤리적인데서 비롯했다고 하면 조금은 의아해 할 것이다. 전북 장수군 산서면 오산리에 소재한 전북민속문화재 제22호인 권희문 가옥을 예로, 한옥의 숨은 비밀을 찾아본다.

 

 

조선시대 상류가옥인 권희문 가옥

 

장수 권희문 가옥은 권희문의 선조들이 조선조 영조 49년인 1773년부터 100년 정도에 걸쳐 지은 집이다. 조선시대 지방의 상류가옥의 건물로 안채, 사랑채, 아래채, 문간채, 바깥채, 서쪽채 등과 나뭇간채 등 많은 건물이 있었다고 한다. 현재도 권희문 가옥은 넓은 대지에 많은 건물들이 자리하고 있어 옛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이 권희문 가옥의 안채에서는 상지삼년계축이월이십묘시주사시상량이라는 상량문으로 보아, 1866년도에 건립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안채는 전라북도 지방의 가옥 중에서는 보기 힘든 자형 집이다. 고패집으로 지어진 권희문 가옥의 안채는 중문을 들어서면서 바로 부엌의 벽이 보이고, 안방과 윗방을 드렸다. 그 위에 꺾인 부분에는 세 칸 대청과 한 칸 건넌방이 있으며, 대청 한 칸을 사당으로 사용하고 있다.

 

 

 

앞뜰에 나무를 심지 않는 이유는?

 

사람들은 대개 안채의 넓은 앞마당을 비워놓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모른다. 안채와 사랑채 사이의 공간을 비워놓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환기 때문이다. 안채의 뒤편에는 대개 후원을 조성한다. 그리고 많은 나무들을 심어 놓기도 한다. 이렇게 앞쪽에는 비워두고, 뒤편으로는 나무를 심어 놓는 이유는 바람의 소통 때문이다.

 

즉 여름이 되면 아무것도 심지 않은 앞마당의 열기가 상당하다. 이럴 때 대청 문을 열어 놓으면, 뒤편 숲에 있는 찬바람이 대청을 통해 앞마당으로 들어오게 된다. 뜨거운 열기는 위로 오르게 되기 때문에, 자연 뒤편에 있는 시원한 바람을 끌어오게 된다. 그러면 집안이 모두 시원하다. 이런 과학적인 논리를 이용한 것이다.

 

 

안채 안방의 뒤에 놓는 쪽마루의 용도도 바로 이런 논리를 이용해, 좀 더 시원하게 여름을 나기 위한 방법이다. 또한 안채 앞마당에 정원 같은 것을 조성하면, 겨울에 내린 눈을 말끔히 치울 수 없어 찬 기운이 오래가게 된다. 눈을 말끔히 치우자면 정원 등이 없어야 하기 때문에, 안채와 사랑채 사이의 공간을 비워두는 것이다.

 

안채 안방의 작은 방문은 왜일까?

 

안채의 안방 문을 보면 윗방의 방문보다 작다. 그리고 방문의 아래쪽을 나무로 문양을 내어 꾸며놓았다. 이런 형태를 보고 사람들은 어른이 주거하는 안방이기 때문에, 예를 갖추기 위해 고개를 숙이고 들어가라는 뜻이다라는 말을 한다. 물론 그도 맞을 수도 있다. 하지만 안방문을 작게 만드는 것 역시 기후에 따른 대처방법이라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바람은 겨울 동안에는 대륙의 차가운 공기가 남하하여 한파를 몰고 오고, 여름에는 해양의 무더운 공기로 여름 내내 폭서가 지속된다. 이러한 계절의 온도 때문에 방문을 작게 하고 그 턱을 높이는 것이다. 즉 겨울에 찬바람을 가급적 적게 받도록 하고, 방안의 열기를 보호하자는데 있다.

 

하기에 이렇게 구성이 된 안방의 문은 사람들이 출입을 하지 않는다. 부엌 쪽에 안방을 두고, 그 위에 대청과 연결되는 윗방을 만드는 것도 기온과 관계가 지어진다. 즉 겨울에는 따듯하게 안방의 실내기온을 보호하고, 여름이면 대청과 연결된 윗방의 문을 열어 바람을 끌어들이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이건한 사랑채는 아픈 사람을 치료하는 장소로도 쓰여

 

권희문 가옥의 사랑채는 숭정기원후계사삼월초십일묘시립주미시상량을해오일중수라는 상량문이 있다. 이 내용으로 보면 1773년 세워지고, 1875년에 다시 중수를 하였다는 것이다. 이 사랑채는 안채가 세워진 뒤에 다른 곳에서 옮겨왔다고 전한다. 따라서 상량문에 쓰인 중수연대인 1875년은 사랑채를 이건한 해일 것으로 생각된다.

 

사랑채에는 '의왕서'라 쓴 편액이 걸려 있다. ‘산 높고 물이 맑은 곳에 곁들인다.’라는 뜻이다. 이 사랑채는 예전에는 과객들의 숙소와 아픈 사람을 지료하는 곳으로 사용을 하였다고 한다. 아마도 지방의 상류가정에서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병을 치료하고 지나던 사람들을 묵게 하였던 것이란 생각이다.

 

 

사랑채 뒷문이 딴 곳으로 행한 이유는?

 

사랑채에서 안채로 이동하는 공간에는 쪽문을 내어 놓거나, 아니면 사랑채 뒤편에 문을 낸다. 이러한 문은 사랑채에서 주로 거주하는 바깥주인이 안채로 이동하는 동선을 고려한 것이다. 그런데 사랑채에서 안채 쪽으로 낸 문은 바로 안채를 바라다 볼 수 없도록 한다. 뒤편에 방향이 다른 문을 낸 작은 마루를 놓거나, 아니면 툇마루를 벽으로 막아 사용을 한다.

 

이렇게 사랑채에서 안채를 직접 바라다 볼 수 없도록 한 것은, 우리사회의 오랜 유교적 습속 때문이다. 우리 고택은 그저 생활을 하기 위해 지은 것이 아니다. 지역마다 나름대로의 풍토에 맞게 집을 지었으며, 용도에 따라 다른 형태로 나타난다. 이런 점을 알고 찾아간다면, 좀 더 고택답사의 묘미가 있지 않을까?

장수군 산서면 면소재지에서 721번 지방도를 이용해 남원시 보절면 방향으로 가다가 보면, 이룡삼거리를 지나 하월리가 나타난다. 하월리에는 우측으로 사계봉을 두고, 좌측 조금 안쪽으로 폐교가 된 구 계월초등학교가 보인다. 이 계월초등학교는 195541일 개교를 하여, 1995228일 폐교가 되었다. 그동안 계월초등학교를 졸업한 학생 수는 1,608명이라고 한다.

 

이 계월초등학교 터에는 지금당(知今堂)’이라고 부르는 서당 터에 다섯 칸의 작은 건물이 들어서 있다. 옆에는 수령 460년의 보호수로 지정 된 은행나무가 서 있어, 이곳의 역사를 가늠할 수가 있다. 아마도 지금당이 문을 열 때 심은 것이나 아닌지 모르겠다. 시기적으로 연륜이 같기 때문이다. 지금당은 장수군의 향토유적으로 지정이 되어있다.

 

 

과거급제의 산실인 지금당

 

지금당은 조선 선조 35년인 1602년에 정유헌 선생을 비롯하여, 활계 이대유, 만헌 정염 등이 서당을 설립하여 유생들을 지도한 곳이다. 이 서당에는 인근의 학동들은 물론, 전국 각처에서 많은 학동들이 모여들어 학문을 연마하였단다. 이 서당에서 학습을 연마한 학동들은 대과에 15, 소과에는 40여명이나 과거에 급제를 시켰다는 것이다.

 

그 자리에 서 있는 지금당은 1955년 계월초등학교가 개교를 하면서, 지금당이 처음에는 교실로 사용이 되었다. 그 뒤 도서관과 문화관으로 활용을 하였으며, 계월초등학교가 폐교가 된 후에, 장수군의 향토자료로 지정이 되었다. 지금도 과거급제를 한 유생들의 후예들인 창원 정씨, 삭녕 최씨, 제주 양씨, 김해 김씨, 경주 이씨들이 지금당계를 이어오면서 많은 장학사업 등을 펼치고 있다고 한다.

 

 

다섯 칸의 협소한 건물에서 많은 인재가

 

토요일. 주말이라 점심시간이 지난 후에 장수군으로 출발을 하였다. 지난 번 금강의 발원지인 뜬봉샘을 답사하고 난 후, 몇 군데 보아둔 곳이 있어서이다. 수많은 지자체의 문화재를 답사를 하고 다녔지만, 장수군처럼 문화재 안내판을 잘 설치를 한 곳은 그리 많지가 않다. 나와 같이 문화재 답사를 하는 사람들에게는, 정말로 고마울 정도로 안내판이 잘 되어있다.

 

산서면에 있는 창원정씨 종가를 둘러본 후, 종가를 안내해주신 마을 어르신이 지금당을 둘러보라고 권하신다. 인근에 있으니 망설일 필요가 없다. 지금당은 계월초등학교 건물 뒤편에 자리하고 있다. 지붕은 요즈음 유행하는 기와와 같은 플라스틱 구조물로 올려놓아, 조금은 옛 모습을 잃기는 했지만 그 속내야 어디로 갈까?

 

 

정면 다섯 칸에 측면 한 칸 반 정도로 지어진 지금당이다. 주변은 쇠줄로 보호책을 설치하였다. 입구는 반 칸을 툇마루로 놓고, 그 뒤편에는 선생의 휴식공간인 듯하다. 유리가 몇 장 깨어져 조금은 보기에 좋지 않은 모습이다.

 

마루를 놓은 소탈한 교실

 

네 칸으로 된 교실은 마루를 놓았다. 좌우로 창을 내어 밖이 훤히 내다보인다. 아마도 이 창을 통해 주변의 경치를 보면서 꿈을 키웠을 것이다. 벽에는 세 점의 편액이 걸려있다. 벽에 걸린 편액 중 남전유약(藍田遺約)’이라는 말은 아마도 후세에게 학업성취의 뜻을 지켜 전하라는 것인 듯하다.

 

 

400년이 넘는 세월을 이곳에서 학업에 열중한 많은 사람들. 그 중에는 얼마나 많은 큰 인물들이 있었던 것일까? 장수군의 곳곳을 다니면서 만나게 되는 많은 문화재들이, 그런 숱한 역사를 알려주고 있다. 초라한 모습으로 서 있는 지금당. 그러나 이곳은 수많은 인재들을 길러 낸 명당이다. 이러한 깊은 뜻이 있는 곳에서, 길을 재촉해야 한다는 것도 잊은 체 옛 서생들의 글 읽는 소리를 기억하려 애를 쓴다.

전북 장수군 대곡면 주촌에는 의녀 논개의 성역으로 조성이 되어있는 곳이 있다. 이곳에는 논개의 동상과 조부모의 묘, 그리고 논개의 생가를 복원한 초가 등이 자리하고 있다. 날치 차가운 12,, 눈발이 날리고 있는데 찾아간 논개 생가지. 2만 여 평의 땅에 논개를 알 수 있는 여러 가지 조형물들이 있고, 그 한편에 초가로 지은 논개 생가를 복원해 놓았다.

 

논개는 조선조 선조 7년인 1574년 9월 3일, 이곳 장수군 주촌마을에서 아버지 주달문과 어머니 밀양 박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원래 주촌마을에는 생가가 있었으나, 1986년 대곡저수지 축조로 수몰이 되었다고 한다. 현재의 복원된 집터는 논개의 할아버지가 함양군 서상면에서 재를 넘어와, 이곳에 서당을 차렸던 곳으로 전해지고 있다.

 

 

4칸 초가, 평범한 시골집

 

논개는 선조 26년인 1593년 6월 남편인 현감 최경희를 따라, 2차 진주성 전투에 참가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물론 논개 자신이 싸움을 한 것은 아니지만, 남편인 최경희를 따라 진주로 옮겨왔을 것이다. 남편 최경희는 중과부족으로 성이 함락되자 스스로 목숨을 끊어 자결을 했다.

 

논개는 죽은 남편의 원수를 갚고자, 스스로 기생으로 가장하여 왜장들의 승전연에 참석을 한다. 이 자리에서 논개는 왜장 ‘모곡촌육조’를 유인하여, 의암으로 함께 투신을 한 의녀이다. 논개의 복원된 생가는 4칸의 초가이다. 돌담을 두르고 사립문을 단 안으로, 넓은 마당이 있다. 문을 열고 들어서면 정면으로 네 칸 초가가, 그리고 우측으로는 세 칸 광채가 자리한다.

 

 

의녀가 태어난 초가, 그 안에서 상념에 잠기다.

 

1986년까지 논개가 태어난 생가가 있었다고 했으니, 복원된 현재의 생가도 그 때와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안채는 모두 네 칸으로 되어있다. 집을 바라보면서 좌측에 한 칸의 부엌을 돌출하여 지었고, 남은 세 칸은 방으로 조성하였다. 들어지은 집은 앞으로 툇마루를 놓고, 맨 끝 방은 앞에 한데 부엌을 들였다.

 

측면 두 칸인 초가는 시골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집이다. 뒤편으로 돌아가 보니 봉화처럼 생긴 굴뚝이 눈길을 끈다. 안채를 돌아 광채를 둘러본다. 어디서나 볼 수 있는 광채의 구성이다. 아무래도 400년 세월이 지나다가 보니, 복원을 하였다고 하지만 그 때와는 다르지 않을까? 그저 논개의 집을 보겠다고 들린 관광객들의 왁자한 소음이, 신경을 거슬리는 것도 복원된 집이 너무나 단순하기 때문인가 보다.

 

 

잠시 돌아보던 발길을 쉬려고 툇마루에 앉아본다. 안으로 들어가는 문 위에는 친절하게도 ‘안방’ 등 알림 패를 달아 놓았다. 안에 있는 기물들이야 옛 것일망정, 논개 살아생전의 것은 아닐 테니, 나에게는 그리 큰 의미가 없다. 다만 그 당시의 분위기만 알고 되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많은 시인들이 논개를 칭송한 것도, 그만큼 당시의 여인들로서는 실천하기 힘든 구국의 행동 때문은 아니었을까?

 

논개여, 논개여, 나에게 울음과 웃음을 동시에 주는 사랑하는 논개여

그대는 조선의 무덤가운데 피었던 좋은 꽃의 하나이다.

그래서 그 향기는 썩지 않는다.

나는 시인으로 그대의 애인이 되었노라.

 

 

만해 한용운은 그의 시 「논개의 애인이 되어서 그의 묘에」에서 이렇게 읊었다. 사실 논개에 대해서는 수많은 사서에서 기록을 하고 있지만, 정작 당시가 아닌 100여년이나 지난 뒤였다. 『호남절의록』『호남상강록』『호남읍지』『동감강목』『매천야록』등의 문헌에서 논개의 출생과 성장에 대해 기록을 하고 있다.

 

논개를 기억하다.

 

주촌에서 출생한 논개는 태어날 때부터 범상치 않은 여인이었다. 갑술년, 갑술월, 갑술일, 갑술시에 태어난 ‘사갑술’의 사주를 갖고 있다고 한다. 이러한 사주를 타고 태어나면 큰 인물이 된다고 하는데, 여인이기에 나라를 위한 충절을 그렇게 행동으로 옮긴 것은 아니었을까? 뒤편 장독대를 돌아본다.

 

 

장독대 앞에 돌로 쌓은 우물이 있고, 그 물이 넘치면 작은 물길 옆으로 빨래터를 마련하였다. 물론 조형을 그렇게 한 것이겠지만, 저 맑은 물에 세파에 찌든 속내를 빨아버리고 싶다. 오늘 비록 이 초가를 떠나지만, 논개를 기억해 내고 싶은 마음 간절하다. ‘시(時)’라고는 담을 쌓은 문외한이니 무엇이라 칭송을 할 것인가? 다만 기억해 내는 것만으로 마음에 담아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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