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안문 기단석과 유수 서유린 선정비 등에 성혈 보여

 

성혈(性穴)’이란 선사시대부터 전해진 바위그림의 한 종류로 돌의 표면에 파여져 있는 구멍을 말한다. 성혈은 주로 고인돌의 덮개돌이나 자연 암반에 새겨 놓았는데, 그 파인 형태적 차이에 따라 민속에서는 알구멍, 알바위, 알터, 알미, 알뫼 등으로 부른다. 성혈은 단단한 바위의 표면을 오목하게 갈아서 만든 홈을 말한다.

 

성혈을 학자 중에는 일반적으로 선사 시대의 신앙이나 별자리와의 관련성을 이야기하기도 하지만 아직도 성혈에 대한 정설은 내지 못하고 있다. 일부학자는 성혈을 그림이나 형상을 표현한 바위그림(=岩刻畵)으로 보기도 한다. 성혈은 그 새겨진 장소나 위치에 따라 근세에도 자손의 번창과 부귀공명 등을 기원하고자 성혈을 새기는 주술적인 행위로 볼 수 있다.

 

전국의 문화재를 답사하면서 지석묘나 선돌 등에 새겨진 성혈을 수도 없이 볼 수 있었다. 이러한 성혈은 죽은 망자에 대한 그리움이나 망자의 극락왕생을 염원하는 마음에서 새겨졌을 것이라고 유추해볼 수 있다. 또한 큰 바위나 남성의 성기(안양시 만안구 석수동 산10-1, 삼막사 경내에 소재한 경기도 민속문화재 제3삼막사남녀근석(三幕寺男女根石)’)를 닮은 바위에도 성혈이 보인다. 이는 자손을 바라는 염원에서 새겨졌을 것으로 보인다.

 

하기에 성혈을 선사시대의 신앙이나 별자리와 연관 짓는다는 것은 어찌보면 타당성이 결여되었다고 생각한다. 깊은 산속 바위에도 성혈이 새겨진 것을 보면 성혈은 그 새겨진 위치에 따라 그 목적이 무엇인가를 알아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란 생각이다. 즉 성혈은 선사시대에만 새겨진 것이 아니라 근세에도 새겨졌기 때문에, 성혈은 자신의 간구하는 바를 이룰 수 있도록 형성한 염원의 산물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수원에서 만날 수 있는 성혈은 무슨 용도였을까?

 

그동안 수원에서 문화재 등을 답사하면서 찾아본 성혈은 수원화성의 장안문 기단석과 수원화성박물관 앞에 늘어서 있는 선정비 군 중 유수 서유린의 선정비 받침석, 그리고 수원화성 축성 시 성돌을 떠낸 여기산에서 발견된 바위 위에 새겨진 성혈 등이다. 이중 가장 많은 성혈은 장안문 기단석에 새겨진 성혈이다.

 

20일 오후, 답사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잠시 들린 장안문. 장안문 성안 화단에 잔디를 정리하느라 막을 치고 한창 잔디 정리작업을 하고 있다. 작업 중에 방해가 될까봐 얼른 안으로 들어가 사진 몇 장을 촬영한다. 장안문 기단석의 성혈은 그동안 몇 번이고 촬영을 한 자료가 있지만 답사를 할 때 촬영하는 것을 원칙으로 세운 나로서는 당일 사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정조는 왜 화성의 북문을 장안문이라고 이름 붙였을까? 1794228, 화성유수부의 북쪽, 장안문을 축조하기 위한 자리에서 이유경은 북문 성곽 터에 제단을 쌓고 고유제를 올렸다. 장안문은 우리나라 성곽의 문중에서는 가장 큰 성문이다. 정조가 장안문을 이렇게 크게 만든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장안이라는 말은 나라의 도읍을 의미한다. 아마도 화성에서 여생을 보내려고 했던 정조로서는 이곳 화성을 도읍으로 정하고자 했던 것이 아니었을까?

 

 

장안문의 성문 안쪽을 보면 성문을 견고하게 하기 위한 받침돌인 기단이 있다. 성 안에서 장안문을 바라보고 좌측 기단에 보면 키고 작은 성혈이 있다. 화성이 축성 된 후 사람들은 장안문에 와서 기단석에 성혈을 판 것이다. 화성의 4대문 가운데도 가장 큰 장안문, 그리고 그 성문을 받치고 있는 기단석. 그곳에 성혈을 판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도 장안문이 한양으로 올라가는 길목에 서 있고, 그 이름이 장안이었기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이곳 장안문에 성혈을 갈아내면서 자손들이 한양으로 입성해 벼슬길에 오르기를 바란 것은 아니었을까? 혹은 자손들이 정조의 효를 본받기 위해서 성혈을 조성했을 수도 있다. 그렇지 않으면 효심 가득한 자손을 낳게 해 달라는 기자속(祈子俗)으로 조성했을 수도 있다.

 

 

유수 서유린의 선정비 받침돌에도 성혈 파놓아

 

이렇게 수원화성 장안문이나 유수 서유린의 선정비에도 성혈을 조성한 것을 보면 성혈은 선사시대의 각종 기원속(祈願俗)신앙에서 유래된 습속으로 근세까지 이어졌다고 볼 수 있다. 서유린(1738(영조14)~1802(순조 2))은 조선조 문신으로 자는 원덕(元德), 호는 영호(潁湖)이다. 교리 효수의 아들로 영조 42년인 1766년에 정시문과에 갑과로 급제하여, 1768년 부교리를 거처 도승지, 충청도 관찰사에 이어 대사헌을 지냈다. 1781년에는 호조판서에 제수되었다.

 

정조 12년인 1788년에는 공시당상으로 국경무역을 관장하고, 1790년에는 왕의 명령으로 <증수무언록>을 번역했다. 그 뒤 선혜청 당상과 판의금 부사, 한성판윤, 수원부 유수 등을 지냈다. 순조 1년인 1801년에 집권한 벽파에 의해 경흥에 유배되어 이듬해에 유배지에서 세상을 떠났다.

 

화성 유수 서유린의 선정비는 1831년에 건립되었다. 이 선정비는 1797년부터 1800년까지 화성 유수를 재임할 때 선정을 베푼 것을 기리는 비이다. 그런데 이 선정비의 받침돌에는 무수한 성혈이 보인다. 왜 이 비에만 성혈을 이렇게 파 놓은 것일까? 서유린의 선정비 받침돌에는 사방으로 돌려 크고 작은 성혈이 20여 개나 보인다. 어떤 것은 깊게 파여져 있고, 또 어떤 것은 조금 파다가 만 것도 있다.

 

 

유수 서유린은 화성유수를 지내면서 정조에게 많은 건의를 한 것으로 기록에 보인다. 정조는 1794년에는 화성 성역을 착공하고, 1797924일 화성유수 서유린은 정조에게 시흥과 과천도 화성유수부에 속해야 한다고 건의한다. 또한 정조 22년인 1798년에는 당시 화성유수인 서유린이 조세를 면해 줄 것을 아뢰자 이를 승낙한다.

 

이와같이 화성 유수시절 많은 업적을 쌓은 서유린의 선정비에 성혈을 판 것은 선정에 대한 감사와 그와 같이 충신이 태어날 것을 간구하기 위해 조성한 성혈로 볼 수 있다. 20일 한창 무더울 시간 찾아간 장안문과 화성 유수 서유린의 선정비에 새겨진 성혈. 그 성혈의 의미는 지역학자들의 연구로 정확히 밝혀지기를 기대한다.

 

15년 전 촬영한 자료에서 만난 동북공심돈 내부

 

수원화성 창룡문과 연무대인 동장대 사이에 우뚝 서 있는 원형의 구조물이 있다. 지금은 안전문제로 출입할 수 없는 동북공심돈은 수원 화성의 또 하나의 작은 고성(古城)이다. 화성만이 갖고 있는 공심돈은 그 자체만으로도 엄청난 화력을 자랑하는 곳이었다. 층마다 개인 화기인 불랑기를 지참한 병사들이 공심돈 안에서 쏘아대는 화포만으로도 근접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만큼 견고한 구조물이 바로 공심돈이다.

 

세계문화유산이자 국가사적 제3호인 수원화성에는 모두 3개소의 공심돈이 있었다. 보물로 지정된 서북공심돈과 팔달문과 남수문 사이에 유실된 남공심돈, 현재 남아있는 또 하나의 공심돈인 동북공심돈이다. 둥근 원형으로 조성한 동북공심돈은 성곽 안으로 들어와 성벽의 여장과 사이를 두고 조성하였다. 작은 문을 통해서 들어갈 수 있는 동북공심돈은 통로가 나선형으로 위로 오르게 되어있어 소라각이라고도 부른다.

 

 

세계문화유산 화성 가운데서도 가장 특별하게 조성된 동북공심돈은 기단석은 돌로 놓고 그 위에 벽돌을 이용해 축조하였다. 몇 년 전 개방을 했을 때 들어갔던 동북공심돈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면 우측으로 잠겨 있는 곳이 있다. 아마도 무기고나 병사들이 묵을 수 있는 온돌방으로 보인다.

 

화성의 전각에는 추위에도 병사들이 편안하게 묵을 수 있는 온돌방이 마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좌측으로는 공심돈 위로 오르는 나선형의 통로가 있다. 나선형의 통로 끝에는 계단으로 조성해 공심돈 위에 마련한 전각으로 오른다. 맨 위에는 역시 전각을 지었는데 사람들이 올라 주변을 살피고는 했다.

 

 

옛 자료 정리하다가 만난 동북공심돈의 모습

 

20, 일기예보에서는 수원에도 폭염주의보가 발령될 것이라고 한다. 더 뜨거워지기 전에 몇 곳을 돌아보리라 마음먹고 이른 시간에 길을 나섰다. 창룡문을 지나 만날 수 있는 동북공심돈 앞으로 날이 뜨거워지기 시작하는데도 몇 사람의 관광객이 지나치고 있다. 사진 몇 장을 촬영하고 장안문과 화성박물관을 돌아본 후 돌아와, 2004824, 수원화성을 한 바퀴 돌아보면서 촬영한 수원화성 자료를 검색해본다.

 

15년이 지났다. 15년 전에 수원화성을 돌아보면서 촬영한 자료에는 서장대가 화재로 인해 소실되기 전의 자료가 들어있어 나름대로 소중한 자료로 따로 보관하고 있다. 그 자료CD 안에 동북공심돈과 봉돈의 내부 등을 꼼꼼히 촬영해 놓은 자료가 들어있다. 15년 만에 다시 찾아보는 동북공심돈의 내부, 당시 무더운 복중에 땀 흘리며 돌아본 수원화성 동북공심돈의 내부모습이다.

 

동북공심돈은 정조 20년인 1796719일에 완공되었다. 화성은 그 짜임새나 둘레에 비해 빠른 공정을 보이고 있는 것 또한 특이하다. 아마도 많은 기물을 사용하여 축성을 하였기 때문으로 보인다. 지금은 들어갈 수 없는 서북공심돈과 마찬가지로 동북공심돈도 일반인들의 출입을 재한하고 있다. 나선형의 통로를 따라 위로 오를 수 있었던 동북공심돈. 개방을 했을 당시 그 위에 올라 주변을 살펴보았던 기억이 새삼스럽다.

 

 

자료보관의 중요성을 깨닫다

 

15년 전의 소중한 수원화성의 자료가 담긴 CD를 보관하고 있는 것은, 30여 년 전부터 전국의 문화재를 답사하기 시작하면서 자료의 중요성을 알았기 때문이다. 보관하고 있는 자료 CD3,000장을 넘어서면서 더 이상 CD에 담을 수 없어 몇 년 전부터는 외장하드에 담아놓고 있다.

 

그렇게 자료를 보관하는 버릇을 들여놓은 것이 결국 지금은 소중한 자료가 된 것이다. 물론 처음에 자료를 남겨놓은 것은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다. 바로 더 나이를 먹어 여행을 할 수 없을 때가 되면 조용히 앉아 책을 쓰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런 마음하나가 수많은 자료를 보관할 수 있도록 만든 것이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남겨놓은 많은 자료들을 보면 언제니 든든하다. “책을 써도 100권은 쓰겠네요.” 집을 찾아와 자료를 본 지인이 하는 말이다. 그런 소리를 들어서가 아니라 새삼 자료의 중요성을 알게 하는 것은, 세월이 가면서 문화재도 변화하기 때문이다, 원형에 충실하게 복원을 한다고 하지만 복원이란 자체가 원형에 가깝게 복원할 뿐 원형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른 시간에 돌아본 동북공심돈. 지금은 안을 들어갈 수 없지만 옛 자료로 만나본 동북공심돈의 내부를 다시 한 번 살펴본다.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과거에 기록해 놓은 지료는 시간이 갈수록 더 소중해지기 때문이다,

 

 

남수문에서 방화수류정, 수원천을 경유하다

 

5, 오후에도 날이 무덥다. 오후 5시에 시원한 생수를 한 병씩 들고 지동 창룡마을 창작센터를 출발했다. 수원시민 10명이 화성에 대해 좀 더 알기위해 화성답사를 하기로 약속한 날이다. 그동안 바쁘게 처리할 일이 있어 약속만 해놓고 돌아보지 못한 수원화성에 대한 설명을 해주기로 약속을 했기 때문이다.

 

예전에 수원화성을 돌아보다가 방화수류정에서 만난 어르신이 저에게 한 말이 생각납니다. 어르신은 저에게 수원화성을 제대로 느끼며 알고 싶으면 화성을 100번만 돌아보라고 하셨는데 아마 지금까지 돌아본 것이 100번은 조금 넘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아직도 수원화성에 대해 속속들이 잘 알고 있다고는 말 못하겠습니다.”

 

 

창룡마을 창작센터를 출발하기 전 화성답사를 하기 위해 모인 수원시민은 모두 9, 그리고 서울 강남구에서 동참한 김미연씨까지 10명이다. 수원에서 참석한 분들은 권선구민이 6명에 지동 주민자치위원회 지영호 위원장과 지동주민 들이다. 그 일행과 함께 수원화성의 평지부분인 남수문에서 시작해 창룡문을 경우 방화수류정까지 절반을 돌아보기로 한 것이다.

 

이날 수원화성을 돌아보면 설명을 듣는 시간을 마련한 것은 지동 창룡마을 창작센터 우경주씨가 계획을 세웠다. 그리고 e수원뉴스 하주성 기자가 재능기부로 수원화성을 돌아보며 성명을 맡아한 것이다. 그동안 많은 곳에 수원화성에 대해 연재를 한 하주성 기자는 학술적인 것보다는 수원화성에 숨어 있는 이야기 위주로 설명을 했다.

 

 

창룡문을 지나 방화수류정으로

 

일행은 남수문 인근에서 화성의 밖을 돌면서 화성에 대해 알아가는 시간을 가졌다. 그동안 수원화성을 돌아본 수원시민들이 오히려 많은 질문을 했다. 여장에 난 세 곳의 구멍을 무엇이라고 하는지, 그리고 시설물 등을 치성 위에 올려놓은 까닭은 무엇인지 등 궁금한 것을 일일이 물었다. 또한 수원화성을 쌓은 돌은 어디서 마련했는지 등에 대해서도 물었다.

 

포루와 치성, 봉돈 등을 돌아본 후 화성의 동문인 창룡문에서 성 안으로 들어온 일행은 동장대 앞으로 지나 동암문과 공사 중인 각건대(동북포루)를 지나 북암문을 돌아본 후 방화수류정과 화홍문을 거쳐 수원천으로 내려섰다. 계획은 장안문까지 돌아보기로 했지만 날도 덥고 시간이 많이 지나 화홍문까지만 돌아보기로 한 것이다.

 

두 시간 동안 수원화성의 평지인 절반을 돌아본 셈이다. 그곳까지 걸어가면서 화성을 답사하는 일행들은 봉돈과 붕수대의 차이는 무엇인가?” 또는 수원 팔경 중에 지금은 아름다움이 아닌 아파트들이 들어선 곳을 이제는 팔경에서 제외시켜야 하지 않을까?” 등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밝히기도 했다.

 

 

수원천에도 많은 관심 있어

 

권선구애 거주하고 있는 일행들이 많기 때문에 세류동에 거주한다는 한 사람은 저는 남편과 함께 일주일에 세 번 정도 수원천을 걷고는 했어요. 왕복 두 시간정도 절리는 거리를 걸으면 운동도 상당히 되고 건강도 좋아지는 것 같아요라고 한다. 아무래도 수원시민들이 주축을 이루자보니 수원천에 관한 관심도 남다른 듯하다.

 

수원천 산책로를 걸으면서 일행은 수원천에 대한 많은 이야길 나누면서 남수문까지 걸었다. “오늘 화성의 절반을 돌아보았습니다. 남은 정반은 산성구역이므로 더위가 가실 때 돌아보겠습니다. 오늘 더운데 수고들 하셨습니다.” “오늘 수원화성에 관해 저희들이 몰랐던 내용들을 설명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남은 산성구간도 꼭 날을 잡아 설명해 주셨으면 고맙겠습니다. 연락 기다리겠습니다.”

 

수원화성을 돌아보면서 사로 배워가는 시간. 화성답사에 동참한 사람들은 유익한 시간이었다고 말한다. 날이 무덥기는 했지만 두 시간동안 돌아본 수원화성 답사는 새로운 것을 알아가는 시간이었다.

 

강화 전등사를 찾아 옛 전설을 기억하다

 

사랑하는 여인이 배신을 했다. 장인은 그 여인에게 평생 벗어날 수 없는 멍에를 씌웠다. 전등사는 인천시 강화군 길상면 온수리 635번지에 자리하고 있으며, 정족산성 안에 있는 절로 대한불교조계종 조계사의 말사이다. 고구려 소수림왕 11년인 381년에 아도화상이 창건하고 이름을 진종사(眞宗寺)’라 한 데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전등사는 원종 7년인 1266년에 중창하였으며, 충렬왕 8년인 1282년에 충렬왕의 비인 정화궁주가 승려 인기에게 부탁하여, 송나라의 대장경을 가져와 이 절에 보관하게 하고 옥등을 시주하여 전등사라 개칭하였다고 한다. 충숙왕 6년인 1337년과 1341년 승려들이 중수하였고, 그 뒤 여러 차례 중수를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는 고찰이다.

 

 

고졸한 멋을 풍기는 전등사 대웅전

 

전등사대웅전은 1963121일에 보물 제178호로 지정이 되었다. 전등사 대웅전은 1916년 수리 시에 발견된 양간록(樑間錄)’에 의하면 선조 38년인 1605년에 일부가 불탔으며, 다시 광해군 6년인 1614년에 불이나 전소되었다. 다음해인 1615년에 공사를 시작하여, 광해군 13년인 1621년에 거의 완공을 본 것으로 되어 있다.

 

전등본말사지(傳燈本末寺誌)에는 철종 6년인 1855년에 규영화주에 의해 중건되었다는 기록도 있다. 전등사 대웅전은 아름답다. 정면 3, 측면 3칸의 단층팔작집으로 막돌 허튼층 쌓기 한 높은 기단 위에 막돌 초석을 놓고, 민흘림 두리기둥을 세워 공포를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도 짜 올린 다포식 건축이다.

 

 

처마를 받치고 있는 벌거벗은 나목녀

 

전등사를 몇 번이나 찾아갔지만 전등사와 만날 때마다 새로운 기분에 젖는 것은 주변의 경관이 아름답다는 점도 있겠으나 볼 때마다 달라지는 처마 밑 나목녀(裸木女)’들의 표정인 것 같다. 어느 날은 편안한 듯한 표정이었다가, 또 어느 땐가는 절박한 표정이기도 한 것은 찾을 때의 내 마음이 비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전하는 이야기대로라면 도편수를 속이고 정분이 나서 사라진 여인을 영원히 절의 처마를 바치고 참회를 하라는 뜻으로 조각을 해서 올렸다는 것이다. 전하는 이야기가 참으로 마음 아프게 다가오는 것은 왜인지. 휴일을 맞아 찾아드는 많은 관광객들은 그저 처마 밑에 웬 사람이 있느냐고 반문을 하다가도 죄를 지은 여인이 벌을 받고 있다는 말에 시큰둥한 표정이다.

 

아마도 요즈음에 그런 것이 무슨 죄가 되겠느냐는 그런 마음인지도 모른다. 전등사 처마 밑의 나목녀들을 바라보면서 세상이 참으로 많이도 변했다는 생각과, 이제는 그만 그 올무를 벗고 처마 밑에서 내려왔으면 하는 마음이다. 그렇게 벌을 받고 있는 나신의 여인이 지금세상아리면 어떻게 살아가고 있을지 궁금하다.

 

또 하나의 전하는 이야기는 네 모서리기둥 윗부분에 벌거벗은 여인상이 공사를 맡았던 목수의 재물을 가로챈 주모의 모습이라는 전설이 전해져 온다. 재물을 잃은 목수가 주모의 나쁜 짓을 경고하고 죄를 씻게 하기 위해 발가벗은 모습을 조각하여 추녀를 받치게 하였다는 것이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3곳의 처마 밑에서는 두 손으로 처마를 받치며 벌을 받고 있는 모양새인데 비해, 한 귀퉁이의 것은 한 손으로만 처마를 받치고 있다는 점이다. 마치 벌을 받으면서도 꾀를 부리고 있는 듯한 모습으로 우리 선조들의 재치와 익살을 느낄 수 있는 대목이다.

 

 

여인을 벌거 벗겨놓은 도편수의 숨겨진 마음

 

전등사 대웅전의 처마를 받치고 있는 나목녀는 마을에 사는 여인네였다고 전한다. 절집을 짓던 도편수가 그 여인에게 반하여 돈을 벌어 모두 주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 여인은 도편수가 벌어다 준 많은 돈을 갖고 딴 남자와 눈이 받아 도망을 갔다는 것이다. 실의에 빠져 있던 목수는 배신감을 느꼈고, 그 여인을 벌거벗겨 대웅전 처마 밑에 올렸다. 그 곳에서 참회를 하고 살라는 것이다.

 

나는 이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의아심을 갖는다. 그 도편수의 마음이다. 참회를 하라고 그 여인상을 만들아 올렸다고 하는데, 그러면 옷이나 입혀줄 일이지 하필이면 발가벗겨 놓았을까? 갈 때마다 그 여인을 바라보면서 측은하다는 생각이다. 오랫동안 무거운 처마를 이고 벗은 몸이 부끄러워 한손으로는 처마를 받치고, 한손으로는 무릎 밑을 가린 채 엉거주춤 쭈그리고 앉아있는 그 여인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때로는 그 도목수가 원망스럽기도 하다.

 

그러나 그 도목수의 깊은 마음을 알게 된 것은 몇 번인가 전등사를 찾은 후였다. 옷을 입혀 놓으면 자신이 사랑했던 여인이 다시 도망을 갈 테고 그러면 죄를 또 짓게 되어 그 업보가 더 깊어질 것을 막기 위함이라는 것이다. 사랑하던 여인이 더 이상 죄를 짓지 못하게, 마음이 아프지만 옷을 벗겨 대웅전 처마 밑에 올린 도편수의 마음을 한 스님에게서 들었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정녕 그 시대의 아름다운 사랑을 안 것은 아닐는지. 요즈음 그런 이야기를 듣고 콧방귀를 뀌는 사람들에게 진정한 사랑이 무엇인지를 알려주는 것 같아 고개가 숙여진다. 이번 봄에 서해바다도 돌아보고 봄철 흐드러지게 피는 꽃들을 만날 겸 강화 전등사를 찾아 나목녀를 바라보며, 다시 한 번 사랑을 다지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란 꿩을 말하는 것이다. 화성에는 치라고 부르는 시설물이 있다. 성벽을 쌓다가 일정 간격을 두고 밖으로 튀어나온 시설물들이다. 이 치는 꿩이 자신의 몸을 숨기고 주변을 돌아보듯, 그렇게 자신을 숨기고 적을 공격할 수 있는 구조물이다. 밖으로 돌출된 이 치는 여장을 두르고 총안을 내어 성벽으로 기어오르는 적을 막을 수 있도록 했다.

 

세계문화유산이요 사적 제3호인 화성을 따라 돌다보면 성곽의 부분, 부분에 돌출되어 나온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이 부분이 바로 치(). 치는 성곽의 안에서 보면 밖으로 삐죽이 나와 있다. 성곽 위에는 누각 없이 여장만을 쌓고 몇 군데의 총안을 내 놓았다. 여장과 여장 사이에는 빈틈이 있다. 이 여장의 빈틈은 경사지게 되어 있어 안에서 밖을 살피기에 적당하다. 밑으로는 경사지게 구멍을 만들어 놓았다. 치의 목적은 군데군데 이 치를 만들어 성벽에 접근하는 적들을 물리치기 위함이다.

 

수원 화성에는 10개소의 치가 있으며 각기 서일치, 서이치, 서삼치, 용도서치, 용도동치, 동일치, 동이치, 동삼치, 남치, 북동치가 있다. 치는 화성성역의궤의 기록에 의하면 50타 마다 한 곳씩 둔다고 했다. 1타가 3~4보쯤 된다고 치면 일보가 80cm이니 150m에 한 곳씩 치를 둔 셈이다. 단순히 치만을 둔 곳이 있지만 지형에 따라서는 치를 응용하여 공심돈, 포루(砲樓)와 포루(鋪樓), 적대(敵臺) 등을 세워 적의 침략을 방비할 수 있게 만들어 놓았다.

 

원래 화성에는 11개소의 치가 있었다고 한다. 현재 화성에서 볼 수 있는 치는 열 개다. 화성 동문에서 시작해 좌측으로 성을 한 바퀴 돌면, 동일치서부터 만나기 시작한다. 동일치, 동이치, 동삼치, 남치가 있고, 산 위로 오르는 용도라고 불리는 길에 용도동치와 용도서치가 있다. 그리고 서장대를 지나 동문으로 다시 돌아오는 길에 서삼치, 서이치, 서일치와 북동치가 있다.

 

 

다양한 기능을 갖는 화성의 치.

 

성 밖으로 돌출된 구조물을 단순히 치만을 생각하면 안된다. 치성을 쌓은 후에 그 위에 포루와 적대 등을 설치했기 때문에, 기실 화성의 치와 같은 기능을 갖고 있는 구조물은 그 배나 많기 때문이다. 이 치는 일정한 거리에 있는 것이 아니다. 지형지물을 이용해 축조한 화성이기에, 그 지형에 맞는 곳에 치가 있다.

 

치의 총안을 통해서 성벽을 보면 성벽 전체가 보인다. 치와 치, 혹은 치와 포루 사이에서 성벽을 오르기란 불가능하다. 성벽을 타고 오르려고 한다면, 앞뒤에서 날아오는 화살 등을 막을 수 있어야 하는데 그럴 수가 없다. 공성무기가 제대로 기능을 발휘할 수 없는 성, 그곳이 바로 화성이다.

 

열 곳의 치성은 그 크기가 같은 것이 아니다. 지형에 따라 크기가 다르고, 총안의 각도가 다르다. 한 마디로 이 치성 안에 숨어 성벽을 오르는 적을 공격하기에는 가장 적합한 시설물이다. 치성 안에 들어가 총안으로 밖을 본다. 건너편 포루가 보인다. 저 포루와 이곳 치성 사이에는 성벽이 한 곳도 그늘진 곳이 없다. 그만큼 완벽하게 쌓은 성이다.

 

화성을 돌아보면서 늘 하는 생각이다. 만일 이 성에서 정말로 전쟁을 했다고 한다면, 아마 그 누구도 이성을 함락시키지 못했을 것이란 생각이다. 총안을 통해 적의 뒤를 공격하고, 치성으로 오르려고 하면, 치의 바닥에 나 있는 구멍에 끓는 기름을 붓거나 끓는 물을 부어 적을 덤비지 못하게 만든다.

 

 

아름다운 화성의 치

 

화성을 한 바퀴 안팎으로 돌다보면 참으로 아름답다는 생각이 든다. 단순한 성곽이 아닌 자연과 어쩌면 저렇게 조화를 이룰 수 있게 축조를 했을까 감탄을 하게 된다. 치는 화성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 당시의 성곽에 보면 보편적으로 치가 보이지만 화성만큼 그렇게 조화롭게 치를 이용한 곳은 없는 것 같다.

 

치는 성과 같은 높이로 쌓았고 그 위에 여장을 둘러놓았다. 치는 성곽에서도 확연히 돌출된 모습을 볼 수 있다. 치 위에 오르면 좌우를 바라다 볼 수 있으며 성곽을 오르는 적이 한 눈에 들어온다. 가히 화성을 왜 성곽의 꽃이라는 대명사로 부르는지 알만하다.

 

화성의 치 위에 세운 포루에서 총안을 통해 바라다 본 성곽. 적이 성곽을 기어오르면 그 뒷부분을 볼 수 있다. 적은 등을 돌리고 있기 때문에 공격을 하지 못한다. 화성은 치 위에 적당히 포루 등을 배치해 화살이나 총을 쏘아도 그 사정거리 안에 적이 들도록 배치해 놓아 뛰어난 성곽 축조 기술을 엿 볼 수 있다.

 

지형이 높은 곳에는 치 위에 포루(鋪樓)를 세워 놓았다. 멀리서 움직이는 적도 모두 관찰할 수가 있어 적은 시야에서 벗어 날 수가 없다. 그리고 이곳에서 적을 공격할 때는 사방이 모두 막혀있어 적의 공격을 안전하게 피할 수 있다. 그야말로 꿩이 풀 속에 숨어 밖을 내다보는 그런 형태와 같다고 하겠다.

 

 

치 위에 세운 구조물들의 놀라운 효과

 

화성의 북문인 장안문의 양편에는 치를 만들고 그 위에 포를 배치했다. 바로 장안문 양편에 마련한 적대이다. 장안문은 북쪽에 있기 때문에 북에서 내려오는 적이 장안문으로 공격할 것을 대비하는 세심함을 보인 듯하다.

 

요소마다 밖으로 돌출되어 나온 치 위에 누각을 짓고 여장을 둘러놓은 포루와 적대 등이 있어 적은 어디에도 성곽을 기어오를 수 없도록 하였다. 가만히 들여다보면 단순히 적을 공격하고 최선의 방어만을 하기 위한 것이 아니고, 자연과 절묘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어 다시 한 번 감탄을 자아내게 한다.

 

봉화를 올리는 봉수대 역시 치 위에 올려놓았다. 봉수대는 성 동문인 창룡문과 남문인 팔달문 사이에 놓여있다. 자연과 완벽한 조화를 이룰 수 있도록 축조된 화성은 그야말로 자연 위에 세운 거대한 미술품을 연상하게 한다. 방화수류정이나 서장대 같은 아름다운 조형물이 있는 화성. 선조들의 뛰어난 미적감성과 나라사랑을 한 눈에 볼 수 있는 곳이다.

 

 

누구도 성벽을 탈 수 없다.

 

이렇게 완벽한 성은 없다. 이런 치의 용도로 인해 화성이 더욱 더 난공불락의 성이 되는 것이다. 그저 성벽을 쌓다가 돌출을 한 것이 아니고, 성의 방어하고 적을 섬멸하게 위해 만들어진 구조물이다. 이 치성을 한 곳 한 곳 돌아보면 화성의 동선이 그대로 들어난다. 꼭 있어야 할 곳에 치가 들어서 있기 때문이다.

 

전쟁은 죽음을 각오하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치가 있어 적어도 화성에서 전투를 한다고 하면, 성안의 군사들은 아무런 피해를 입지 않고 적을 공격할 수가 있다. 그래서 꿩이라고 하는 치성(雉城)’이라고 이름을 붙인 것인가 보다. 적에게 나를 들어 내놓지 않고, 적을 살피는 꿩과 같이.

 

열 곳의 치와 포루와 적대. 그 모든 것은 꼭 있어야 할 곳에 자리한다. 일정한 거리가 아닌, 있어야 할 곳에 자리한다. 화성이 제일의 성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이런 작은 구조물인 치성이 있기 때문이다.

최신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