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수원화성에는 공심돈 두 곳(동북공심돈, 서북공심돈)이 소재한다. 두 곳에 남아있는 공심돈은 모두 화성의 북쪽에 자리하고 있다. 팔달문을 보호하기 위한 남공심돈은 일제에 의해 파괴되어 아직도 복원이 되지 않고 있다. 1907'헤르만 산더'의 사진자료(국립민속박물관 소장)에 보면 남공심돈은 팔달문에서 동쪽으로 곧게 뻗어난 성곽이 북쪽을 향해 꺾일 때, 그곳에 자리하면서 남수문과 팔달문을 보호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남공심돈과 남수문 사이에 남암문이 있었다고 한다. 남암문은 화성 안에서 형벌을 받고 형을 당한 죄인이나 성안 백성이 죽으면 이 남암문을 통해 성 밖으로 내보냈다고 한다. 그런 역할을 하던 남암문도 사라진 채 복원이 되지 않고 있다. 팔달문 앙 편 끊어진 곳에 자리했던 남공심돈, 남암문, 은구와 팔달문 양편에 적대는 찾을 수가 없다.

 

공심돈은 성곽 주변을 감시하여 적의 접근 여부를 살피고, 적의 공격 시 방어시설로 활용되던 곳이다. 공심돈은 내부를 빈 공간으로 만든 것으로, 수원화성 시설물 중에서 높게 조성해 먼 곳을 관찰할 수 있고 적의 동태를 살피기 쉬운 지형에 세워져 있다. 공심돈의 내부는 여러 층으로 되어 있어 많은 병사들이 공심돈 안에서 적의 공격을 방어하기에 유리하고, 정면과 밑으로 뚫려 있는 총안과 현안 등을 통해 적을 공격할 수 있다.

 

 

남수문 옆 지장물 철거가 주는 의미

 

현재 남수문에서 팔달문 방향으로 약간 휘어진 곳에서 성이 끊겨있다. 남수문은 1846년 대홍수 때 부서진 것을 2년 후 다시 지었다. 그러나 1922년 대홍수 때 남수문이 다시 떠내려가는 아픔을 겪었다. 1910년대에 사진을 보면 부서지긴 했어도 그나마 남수문의 흔적이 남아있었다.

 

<화성성역의궤>에 나타난 남수문은 어떤 모양이었을까? 북수문인 화홍문이 일곱 개의 무지개형 수문을 가진데 비해, 남수문은 아홉 개의 무지개형태인 아치형 수문을 냈다. 가히 그 모습만으로도 장엄함을 느낄 수 있는 구간수문(九間水門)’이다.

 

 

세계문화유산이자 사적 제3호인 수원 화성의 둘레는 5744m로 동쪽지형은 평지를 이루고 서쪽은 팔달산에 걸쳐 있는 평산성의 형태다. 성의 시설물은 문루 4, 수문 2, 공심돈 3, 장대 2, 노대 2, ()5, ()5, 각루 4, 암문 5, 봉돈 1, 적대 4, 치성 9, 은구 2등 총 48개소의 시설물이 있었다. 이 중 수해와 전란으로 7개 시설물(수문 1, 공심돈 1, 암문 1, 적대 2, 은구 2)이 소멸되었다가 남수문이 복원되어 현재는 42개소의 시설물이 현존하고 있다.

 

2012년 수원시는 90년 만에 남수문을 복원하였다. 동남각루 경사진 곳에서부터 새로 성을 축성하고 남수문을 복원한 것이다. 홍수에 떠내려간 것을 감안해 수문 안쪽으로 장마에 떠내려 온 나무토막들을 걸러낼 수 있는 보호 장치를 만들었다. 이 장치는 물이 급격히 불어나도 많은 물이 수문에 영향을 주지 않고 빠져나갈 수 있도록 한 것이다.

 

2012년 남수문을 복원하고 나면 얼마 지나지 않아 남공심돈과 남암문 등이 복원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그러나 몇 년이 흘러도 그 이상의 공사 진척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또 다시 화성의 끊긴 부분을 공사할 것이라는 소문만 무성했다. 하지만 이미 화성의 자리에 들어서 있는 건물들을 정리하고 화성을 복원한다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이겠는가?

 

 

'남공심돈과 남암문', 언제 만날 수 있을까?

 

27, 남수문 안쪽에 현수막이 한 장 걸려있다. ‘남수문 옆 소공원 지장물 철거공사를 한다는 내용이다. 그리고 남수문 안쪽 성벽이 끊어진 곳에 서 있는 건물에 공사용 가름막이 쳐져있다. 이제 공사를 시작한다는 것이다. 먼저 성터에 서 있는 건물들을 매입하고, 지장물을 철거한 후 성벽을 쌓기 시작해야 한다.

 

이번 화성사업소에서 하는 공사는 현재 그동안 남수문 옆에 자리하고 있던 상가건물들이다. 수원시 팔달구 팔달로 234~2, 33~6, 35, 32~2번지 등으로 현재 수원남문고객센터 건물만 남겨놓고 그 인근 건물이 모두 철거대상이다. 이 건물들이 철거돼야 끊어진 성벽과 잇대어 공사를 할 수 있고, 남암문과 남공심돈을 복원할 수 있다.

 

202013일까지 지장물 철거공사를 마치고나면 남수문 옆에서 끊어진 채로 놓여있던 화성의 일부분이 다시 이어지게 된다. 물론 그 공사를 마친다고 해도 화성전체가 연결되는 것은 아니다. 앞으로도 많은 공사가 이어져야 한다. 하지만 일부구간이라도 이렇게 연결을 노력하다보면 언젠가는 수원화성이 옛 모습을 간직할 수 있지 않을까? 지장물 철거공사 안내판을 보면서 벌써 남공심돈과 남암문의 모습이 그려진다.

 

28일 아침 일직 수원을 출발했다. 경남 양산 통도사로 향하는 버스 안에는 팔달구 지동에 소재한 경기안택굿보존회(회장 고성주) 회원 30여명이 승차했다. 이들은 양산 통도사로 2016년 정기 삼사순례를 떠난 길이다. 길을 떠난 지 두어 시간이 더 지나 추풍령 휴게소에 도착하니 눈이 쌓이고 상고대가 아름답게 햇살에 반짝인다.

 

그 전날 수원에도 첫눈이 내렸지만 날이 푹한 터에 모두 녹아버렸는데 지대가 높은 추풍령에는 눈이 남아 아름다운 설경을 보여주고 있다. 모처럼 떠난 여행에서 첫 눈이 아름다운 모습을 만난다는 것만 해도 즐거운 일이다. 그리고 몇 시간을 달렸을까? 양산 통도사 입구 주차장에 차를 대고 통도사를 향하는 무풍한송로(舞風寒松路)’로 접어들었다.

 

무풍한송로는 그야말로 걷기에 딱 좋은 길이다, 내를 건너 반대편에는 차를 이용해 통도사로 들어가는 길이 있지만 어찌 통도사까지 먼 길을 달려와 이 좋은 길을 놓아두고 차를 이용한다는 것일까? 그저 심호흡을 한 번씩 할 때마다 솔향이 폐부 깊숙이 들어오는 듯하다. 바쁠 것도 없다. 수백 년 넘은 소나무들이 자리하고 있는 이 소나무길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무풍한송로는 걸어서 20~30분 정도가 소요된다. 물론 걷는 속도에 따라 차이가 나겠지만 수많은 사람들이 이 길을 걸어 통도사로 향한다. 천천히 걷다보면 중간에 시원한 물도 마실 수 있고 정자도 있어 피곤한 발을 쉴 수도 있다. 또한 이곳 정서와는 어울리지 않지만 차와 커피를 마실 수 있는 공간도 있다. 맑은 통도사 계곡물과 노송, 그리고 차 한 잔 얼마나 어울리는 단어들인가?

 

                     

 

수원 노송지대 제대로 보존될 수 있을까?

 

통도사 무풍한송로를 걸으며 우리 수원의 노송지대가 생각난다. 경기도 기념물 제19호로 1973710일에 지정된 파장동 노송지대. 이곳 노송지대에 식재되어 있는 소나무들은 정조의 효심을 가득 담고 있다. 파장동에서 길게 지지대비로 향하는 약 5km 정도의 이 길은 예전 정조대왕이 능침에 모신 아버지 장헌세자(사도세자)를 만나러 다니는 길목이었다.

 

정조대왕은 아버지 장헌세자의 원침인 현릉원 식목관에게 내탕금 1천량을 하사하여 이 길에 소나무 500주와 능수버들 40주를 심었다는 기록이 보인다. 수령 200여년을 넘는 소나무들이 줄을 지어 있는 노송지대는 정조대왕의 효행의 길이다. 2차선 도로를 따라 자라고 있는 소나무들은 하나같이 오랜 수령을 자랑하 듯 기묘한 형상을 하고 있다.

 

이 노송지대가 변했다. 노송지대 사이로 난 차도를 한편으로 옮겨 차량들의 매연으로부터 소나무를 보호하기 위한 보존방법을 택한 것이다. 많은 정조의 효를 상징하는 노송들이 이제는 차량의 매연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었다는 것만 해도 감지덕지할 따름이다. 얼마나 그 오랜 세월을 차량의 매연으로 인해 많은 피해를 당한 것일까?

 

 

노송지대통도사 무풍한송로와 같이 만들어야

 

통도사 무풍한송로는 내 건너편으로 차도를 내었다. 소나무들이 가장 싫어한다는 차량의 매연을 피하기 위함이다. 곳곳에는 부도탑이며 석등, 불자들이 세운 각각의 다양한 탑들이 즐비하다. 물론 이 탑들을 세울 수 있었던 것은 이곳이 사찰경내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 길을 걸으면서 곰곰 행각해본다. 우리 수원의 노송지대도 이렇게 사람이 걷기 좋은 숲길로 조성할 수 있을까?

 

노송지대 안에 무분별하게 난립된 무허가 건물들을 정리하고 곳곳에 정조대왕에 관한 글이며 시비를 세운다면 이 또한 아름다운 숲길이 되지 않을까? 모든 사람들이 낙엽을 밟으며 심호흡을 하면서 걸을 수 있는 곳. 그리고 전국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와 즐겨 걸어 다닐 수 있는 길을 만들 수는 없는 것일까?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그리고 노송지대는 또 다른 깊은 뜻을 갖고 있다. 즉 정조의 효심이 어린 길이기 때문이다. 만일 이 길을 통도사 무풍한송로와 같이 조성할 수만 있으면 수도권의 더 많은 사람들이 즐겨 찾을 수 있는 길이 될 수 있을 것이란 확신이다. 통도사 무풍한송로를 걸으면서 우리 수원의 노송지대도 많은 사람들이 즐겨 걸을 수 있는 노송 숲길이 될 수 있도록 조성을 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이제는 그 가치를 제대로 인정받아야 할 때

 

흡혈귀 드라큘라는 소설가 브램 스토커의 단편소설의 책 이름일 뿐이다. 하지만 그 흡혈귀 드라큘라는 수많은 소재로 발전하면서 TV드라마, 영화, 연극, 뮤지컬 등 다양한 장르에서 발전을 거듭하고 있다. 이제는 단순히 피를 빨아먹는 흡혈귀가 아니라, 좀 더 매력적이고 섹시한 모습으로 사람들을 만나고 있다.

 

중국 항저우의 송성가무쇼는 송나라 때의 전설과 역사를 표현한 공연으로 이제는 세계 3대 공연 중 하나로 자리잡고 있다. 이 쇼의 영어 제목은 ‘The Romance of the Song Dynasty’이다. 약 천 년 전 송조의 고도 항저우를 중심으로 한 신화와 전설, 자연 그리고 애틋한 사랑 이야기와 치열했던 전쟁 등을 4개의 단막극으로 연출한 작품이다. <宋城千古情>이란 이 가무쇼는 그 규모의 웅장함과 아름다움이 관객을 압도한다. 450명의 출연진이 한번에 3,000명이 관람할 수 있는 대형극장에서 일 년 내 공연하는데도 연일 좌석이 만석이라고 한다.

 

수원에는 수원화성과 더불어 자랑스러운 무형의 문화유산인 무예24가 있다. 매일 신풍루 앞에서(우천 시나 월요일 제외) 오전 11시에 공연을 하는 무예24기 시범은 항상 많은 사람들이 관람을 한다. 이제는 무예24기가 수원을 상징하는 공연종목으로 수원화성과 함께 많은 사람들에게 수원을 알리는데 일조를 하고 있다.

 

 

무예24공연할 수 있는 전용극장 시급하다

 

지난 일요일(23) 신풍루 앞을 지나는데 어디서 대북소리가 난다. 그러더니 우렁찬 함성으로 장용영 군사들은 출전하라고 호령을 한다. 신풍루 위에 갑옷을 입은 군사 한명이 북을 울리더니 칼을 뽑아들고 장용영 군사들에게 출전명령을 내리는 것이다. 많은 외국인들은 연신 카메라에 그 모습을 담아내느라 정신이 없다.

 

외국에는 자신들의 문화콘텐츠를 이용해 많은 이득을 창출하고 있다. 문화콘텐츠는 무한한 자산이 될 수 있다는 특징이 있다. 중국의 경우 자신들의 역사적인 문화재 등을 갖고 그곳에서 이야기꺼리를 도출해 스토리텔링을 만들어 연극이나 영화로 제작 많은 돈을 벌어들이고 있다고 한다.

 

                 

 

그런 것에 비하면 수원은 적지 않은 문화콘텐츠를 갖고 있는 셈이다. 화성이야 세계문화유산이지만 그것만 갖고 관광객을 끌어들이기는 한계가 있다. 요즈음 관광객들은 전 세계를 누비며 다양한 공연을 접한다. 중국은 그런 점을 이용해 일개 항저우에서 수많은 관광객을 유치해 막대한 이득을 올리고 있는 것이다.

 

무예24기는 날이 춥거나 너무 덥거나 비가오거나 눈이 오면 공연을 할 수가 없다. 전용극장이 없기 때문이다. 하가에 무예24기 공연단이 가장 시급한 것은 바로 전용공연장이다. 이런 공연장을 조성해 사계절 공연을 할 수 있어야 한다. 안성남사당바우덕이 풍물단이 그 좋은 예이다. 그들은 아주 추운 계절에 관광객이 없을 때를 제외하면 언제나 주말공연을 한다. 공연 때마다 꽤 많은 관람객들이 공연장을 찾는다.

 

 

수준 높은 콘텐츠를 활용해 입장료 받을 수 있어야

 

이번 수원화성문화제 때 서울에서 출발한 정조대왕의 능행차가 서울을 출발해 수원에 도착할 때까지 거리에는 수십만의 인파가 모여들었다. 대단한 엣 임금의 능행차를 보기 위함이다. 수많은 외국 관광객들이 거리로 나와 능행차 시연단과 함께 걷는 모습도 보였다. 이런 것을 보면서 수원은 문화콘텐츠의 보고라는 생각이다.

 

하지만 수원은 이상하게 우리 전통에 대해서는 무관심한 것인지 냉대를 하는 것인지 이해할 수가 없다. 일례로 우리가 흔히 외래문물이라고 하는 문화의 축제에는 많은 예산을 쏟아 붓는다. 하지만 그렇게 예산을 들여 축제를 열어도 외지 관광객들이 얼마나 들어오는 것인지 그들이 수원에 와서 얼마나 많은 경비를 쓰고 갔는지 알 수가 없다. 거의 초청 인사들이 참관을 하기 때문이다.

 

이제는 수원만의 문화콘텐츠를 개발해야 한다. 국적도 알 수 없는 해괴망측한 내용을 스토리텔링 했다고 할 것이 아니라 우리 수원만의 무예24기나 옛 경기재인청의 공연 내용 등을 개발해야 한다. 다양한 문화콘텐츠를 개발해 공연을 할 수 있는 공연장을 건설하고 날마다 관객들이 편안하게 관람을 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결코 무리한 일이 아니다. 수원이기 때문에 얼마든지 가능하다고 본다. 문제는 자리에 앉아계신 분들이 의식을 바꿔야 한다는 생각한다. 얼마든지 항저우를 능가할 문화콘텐츠를 개발할 수 있는 자원이 있기 때문이다.

 

팔달산, 숙지산, 여기산 등을 돌아보며 쐐기흔적 찾아보기

 

가끔 지방에 거주하고 있는 지인들로부터 연락을 받을 때가 있다. 한 인터넷 언론에 몇 년 동안 1,500건이 넘는 문화재에 관한 기사를 송고하다보니 나름 그 방면에서 이름을 알고 있는 듯하다, 가끔은 사진 자료를 요청하기도 하고, 계절에 맞는 문화재 여행에 대해 좋은 곳을 안내해 달라고 부탁도 받는다. 수원을 찾아오는 관광객들이 부쩍 늘었다. 화성을 돌아보는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이어진다.

 

수원화성은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문화유산이자 국가지정 사적 제3호이다. 그만큼 문화재로서 가치를 높이 평가받고 있다. 하지만 난 수원을 찾아오는 많은 관광객들에게 꼭 한 가지 제안하는 것이 있다. 수원화성을 돌아보면서 화성을 느끼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화성을 쌓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들을 했는지, 또 성을 쌓은 돌은 어디서 가져온 것인지를 돌아보는 것이 더 의미가 있다고 설명한다.

 

흔히 성돌을 뜬 곳을 부석소라고 한다. 큰 바위를 나르기 좋게 잘라 화성축성의 현장까지 옮겨왔다. 수원 팔달산, 숙지산, 여기산 등을 찾아가보면 돌을 떴던 큰 바위에 쐐기자국이 남아있다. 바위를 잘라내기 위해서 홈을 파 그곳에 나무쐐기를 박고 물을 부어, 나무가 부풀어 올라 바위를 쪼개낸 현장이다. 그런 현장을 돌아보면 수원화성이 얼마나 많은 노력으로 축성이 되었는가를 알 수 있다.

 

 

팔달산 곳곳에 남아있는 돌 뜬 흔적

 

9일 오전, 수원을 찾아 온 지인들을 인내하여 지동순대타운에 들려 순대국밥을 한 그릇씩 먹은 후에 우선 화성을 돌아보는 것으로 돌을 뜬 곳을 찾아나섰다. 먼저 이들에게 알려줄 것은 바로 화성을 쌓은 돌에 남아있는 쐐기자국을 알려주기 위함이다. 억새가 피어 아름다운 동남각루를 지나 화성을 돌면서 성벽에 남아있는 쐐기자국에 대해 설명한다.

 

그리고 찾아간 곳은 팔달산에 있는 성돌을 뜬 흔적이다. 수원시 팔달구 팔달산로 318(교동) 팔달산 남쪽에 위치하고 있는 수원중앙도서관 옆으로 팔달산으로 오르는 소로가 있다. 이곳을 걸어 팔달산 위 수원화성 성벽을 보고 오르면 4기의 고인돌이 있다. 그리고 그 위에 성돌을 떠내느라 파 놓은 쐐기자국이 남아있다.

 

성을 쌓는데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석재이다. 화성 축성 시 사용한 석재는 모두 201403덩어리로, 이를 가격으로 환산하면 1369609전이었다고 한다. 이는 수년 전 진단학회와 경기문화재단이 공동으로 개최한 화성성역의궤의 종합적 검토라는 제목의 심포지엄에서 경기대 조병로 교수가 밝힌바 있다.

 

팔달산 위로 올라 화성 성벽을 따라 성 밖으로 걷다보면 여기저기 바위가 깨어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 깨진 돌을 찬찬히 살펴보면 쐐기자국을 찾을 수 있다. 나는 문화재 안내를 할 때 꼭 지키는 것이 하나 있다. 현장 입구까지만 안내하고 정작 현장은 스스로 찾게 만든다. 그래서 자신이 필요한 문화유적을 찾았다는 즐거움을 느끼게 되고 오래도록 문화재를 기억하기 때문이다.

 

 

가을이 짙어진 숙지산 부석소

 

수원시 팔달구 화서동에 소재하고 있는 숙지산은 화성을 축성하면서 가장 많은 돌을 뜬 곳이 숙지산이다. 숙지산이 있는 곳의 옛 지명은 공석면(空石面)’이었다. 그야말로 돌이 비었다는 뜻이다. 이곳에 돌이 많다는 채제공의 보고를 받은 정조는 1796124일 수원에서 환궁하는 길에 이렇게 말했다. “오늘 갑자기 단단한 돌이 셀 수 없이 발견되어 성 쌓는 용도로 사용됨으로써, 돌이 비워지게(空石) 될지 누가 알았겠는가? 암묵 중에 미리 정함이 있으니 기이하지 아니한가?”라고 했단다.

 

산에서 돌을 뜨는 자리를 부석소(浮石所)’라고 했으며, 각 부석소에서 캐낸 돌의 양을 보면 실로 어마어마하다. 그 양이 숙지산 81100덩어리, 여기산 62400덩어리, 권동 32천덩어리, 팔달산 13900덩어리 등 189400덩어리였다. 화성 축성에 사용된 돌들을 거의 모두 이 네 군데에서 떠냈다.

 

가을이 깊은 숙지산의 돌뜬 흔적은 여러 곳에 보인다. 그중 가장 쉽게 발견할 수 있는 곳이 화서다산도서관 뒤편에 있는 흔적이다. 여러 곳에서 돌을 뜬 후 수레를 이용해 돌을 화성 축성역장으로 날랐다. 돌은 소 40마리가 끄는 수레인 대거, 4~8마리가 끄는 수레인 평거, 소 한 마리가 끄는 수레인 발거와, 장정 4 사람이 끄는 수레인 동거 등이 있었다. 이렇게 수레를 이용해 축성현장까지 돌을 옮겼다.

 

 

선사유적지가 있는 여기산에서도 성돌을 떠내

 

서호를 내려다보는 구릉처럼 솟아있는 산, 바로 여기산이다. 여기산(麗岐山)은 수원시 권선구 서둔동 구 농촌 진흥청 내에 위치하고 있는 해발 104.8m의 산이다. '화성성역의궤'에는 '여기산(如岐山)'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산세가 크지 않고 산의 모습이 기생의 자태와 같이 아름다워서 '여기산(麗岐山)'으로 불렀다고 한다. 산의 정상부에는 토축산성이 조성되어 있는데, 해발 104.8m로부터 10m 아래에 쌓여 있는 것이 특색이다. 전형적인 머리띠 모양의 테뫼식으로 성 길이는 약 453m이다.

 

길 우측 아래로 거대한 바위가 보인다. 이곳은 정조대왕이 화성을 축성할 때 돌을 뜬 곳으로 기록되어있다. 조심스럽게 아래로 내려가 본다. 바위의 크기가 엄청나다. 어른 키의 몇 배가 되는 거대한 바위에 돌을 떠내기 위한 쐐기자국이 보인다. 절개된 바위 면에 선명하게 쐐기를 박기 위해 파 놓았던 구멍이 있다.

 

가을, 여행하기 좋은 계절이다. 이 계절에 수원을 찾아오는 관광객들에게 좀 더 스토리가 있는 야행을 하라고 당부하고 싶다. 단지 지나치면서 수원화성을 관람하는 것에 그치지 말고 좀 더 알차고 내실있는 여행을 할 수 있도록 말이다.

 

수령 250~380년의 보호수로 지정된 은행나무들 자리해

 

한때 인기리에 방영된 KBS드라마 <성균관 스캔들>을 촬영했던 전주향교는 어떤 곳일까? 이미 전주향교에서는 영화 김혜수, 송광호 주연의 야구단>을 촬영한 곳으로도 유명하다. 전주향교가 이렇게 영화나 드라마 등의 촬영지로 각광을 받고 있는 것은 사적으로 지정되어 있을 만큼 그 보존이 잘 되어 있고, 경내에는 수령 250~380년의 보호수로 지정된 은행나무들이 몇 그루가 자라고 있기 때문이다.

 

사적 제379호인 전주향교는 고려시대에 창건되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현재의 건물은 조선조 선조 때 건립되었다고 하며, 대성전 중앙에는 공자를 비롯하여 안자, 자사, 증자, 맹자 등 다섯 성인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전주향교의 건물 배치를 보면 중층누각으로 되어 있는 만화루를 지나면 일월문이 있다.

 

그리고 대성전을 중심으로 좌우에 동, 서무가 있고, 대성전 뒷담을 사이로 명륜당이 자리한다. 명륜당의 서쪽으로는 장서각, 계성사, 양사재 와 사마재, 그리고 주위에 교직사 등 여러 전각들이 자리하고 있다. 전주향교가 특히 유명한 것은 가을이 되면 노랗게 물이 드는 고목인 은행나무들이 은행을 주렁주렁 달고 있다는 것이다.

 

 

가을이 되면 꼭 방문하는 전주향교

 

우리는 흔히 <교동>이라는 지명이 붙은 곳은 <향교>가 있는 마을이라는 뜻으로 풀이한다. 전주시 교동에 자리한 전주향교는 고려시대에 창건되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명확한 기록은 없으나 전하는 말로는 원 위치는 경기전 북편에 있었다고 한다. 태조 이성계의 영정을 봉안한 경기전을 세웠는데, 향교 학동들의 글 읽는 소리가 시끄럽다 하여 태종 1년인 1410년에 현재의 중화산동으로 이전하였다고 한다. 그 뒤 순찰사 장만과 유림들이 합심하여 선조 36년인 1603년에 현 위치로 이전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나는 가을이 되면 꼭 전주향교를 찾아가 본다. 남들은 전주향교가 사적이고 또한 어느 땐가 김혜수, 송광호라는 배우가 주연을 한 'YMCA야구단'이라는 영화를 찍은 곳으로 더 유명한 곳이라서 찾는다고도 한다. 하지만 가을에 전주향교를 찾는 것은 보호수로 지정이 되어있는 몇 그루의 은행나무 때문이다.

 

전주향교 안에는 5그루의 은행나무가 보호수로 지정이 되어있다. 수령 250~400년의 나무들은 저마다 한 자리씩 차지하고 나름대로의 자태를 자랑한다. 향교 입구에 세운 만세루를 들어서면 우측에 한 그루의 보호수가 있다. 그리고 일월문을 들어가면 대성전을 마주하고 좌, 우에 한 그루씩 은행나무가 서 있다. 좌측의 은행나무는 수령이 400년 이상이 되었는데 온통 외과수술 자욱으로 그 연륜을 보여준다. 난 가을에 이 은행나무가 보여주는 위용에 늘 압도당하고는 한다.

 

 

물론 우리나라 전역에는 많은 은행나무가 있다. 그 중에는 은행나무들이 천연기념물로 지정이 되어 있기도 한다. 가장 유명한 은행나무는 역시 수령 1천년을 훌쩍 넘긴 양평 용문사 은행나무다. 그러나 몇 그루의 나무들이 모여있는 전주향교의 은행나무들은 또 다른 가을의 정취를 느끼게 해준다.

 

전주향교의 은행나무는 대성전 안으로 들어서면 대성전을 바라보고 우측에 또 한 그루가 있으며 대성전 좌측 쪽문을 들어서면 명륜당 앞쪽에 또 한 그루의 은행나무가 서 있다. 모두 다섯그루의 은행나무들이 저마다 자태를 자랑하고 있는 전주향교. 물론 그 중에 두 그루인가는 열매를 달지 않는다.

 

 

은행의 열매가 흐드러지게 달려있는 모습도 좋지만, 노란 은행잎이 나풀거리며 떨어지는 모습을 보면 가을을 만끽 할 수 있어서 더욱 좋다. 사람들은 냄새가 난다고도 하지만 무엇이 대수랴, 진정한 가을이 그곳에 있는데. 몇 그루의 보호수들이 모여 가을을 알려주는 전주향교. 나는 그래서 가을이 되면 전주향교로 발걸음을 돌린다. 이 가을 온통 노랗게 변한 전주향교를 찾아가보자. 진정한 가을이 그곳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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