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철 융릉 숲, 걸어만 가도 절로 힐링

 

융릉은 사도세자의 능침이다. 1762년 윤 521일 아버지 영조의 명으로 뒤주 속에 갇혀 숨진 사도세자는, 그해 723일 현재의 동대문구 휘경동인 양주 배봉산 아래 언덕에 안장되었다. 아들을 죽인 것을 후회한 영조는 세자의 죽음을 애도한다는 뜻에서 사도라는 시호를 내리고, 묘호를 수은묘라고 하였다.

 

7일 오후, 사도세자가 묻혀있는 융릉을 찾았다. 올해 수원화성문화재가 열리면 정조의 능행차를 서울서부터 시작해 화성 융건릉까지 이어간다고 한다. 그런 능행차를 융릉은 어떤 모습으로 맞이할 것인가 궁금해 미리 융릉을 찾아본 것이다. 장마철이라 그런지 습한 날씨로 인해 조그만 걸어도 온 몸이 끈적거린다.

 

 

정조는 1776년 자신이 왕으로 즉위하자 아버지 사도세자에게 장헌이라는 시호를 올리고 수은묘를 원으로 격상시켜 영우원으로 고쳐 부른다. 정조 13년인 1789년에는 무덤을 화성시 안녕동의 현재 위치로 옮기고 현륭원으로 격상하였다. 그 뒤 순조 15년인 18151215일 혜경궁 홍씨가 춘추 81세로 승하하자 순조 16년인 181633일 현륭원에 합장하였다.

 

그 뒤 고종은 황제로 즉위한지 3년이 되는 광무 3년인 18991112, 장헌세자를 왕으로 추존하여 묘호를 장종으로 올렸기에 융릉이라고 능호를 정하였으며, 곧이어 1219일에는 황제로 추존하여 장조의황제라 하였으며, 혜경궁 홍씨도 헌경의황후로 추존 되었다.

 

 

사도세자가 잠든 융릉을 걷다

 

융건릉 입구 매표소에서 2인용 표를 한 장 구해 안으로 들어섰다. 맨 먼저 찾아본 곳은 바로 재실이다. 재실은 융건릉 제향 때 제관 등이 미리 도착하여 몸과 마음을 정하게 하여 제를 준비하는 곳이다. 평소에는 능참봉 등 능을 관리하는 관리가 이곳에 묵으면서 능역을 돌보는 역할을 맡아한다. 이곳 융건릉의 재실에는 재실 외에도 향을 보관하는 안향청, 제례업부를 주관하는 진사청, 제기를 보관하는 제기고와 행랑채 등이 있다.

 

재실의 안마당에는 천연기념물 제 504호인 화성융릉 개비자나무가 자라고 있다. 개비자나무는 남해안의 따듯한 곳에서 자라는 비자나무보다 추운 중부지방까지 분포하고 있다. 개비자나무는 여러 포기가 한꺼번에 모여 자라며 머리빗 모양의 잎이 비()자 모양으로 뻗고 주홍빛 열매가 달린다.

 

재실을 벗어나 우측길로 들어서면 소나무들이 유난히 많은 숲길이 나타난다. 그 숲길은 자연적인 흙길로 조성되어 있으며 까치와 청솔모 등이 융릉을 찾은 나그네를 반긴다. 여기저기 마련되어 있는 의자는 쉬어가라며 손짓하고 있는데, 경사진 흙길을 내려가 좌측으로 난 길을 걸어 곤신지를 찾았다.

 

 

곤신방에 마련한 원형 연못 곤신지

 

곤신지는 원형 연못으로 융릉이 천장된 이듬해인 1790년에 조성된 연못이다. 곤신지는 융릉의 남서방향을 뜻하는 곤신방에 조성한 연못으로, 묘지에서 처음 보인다는 물을 뜻하는 생방으로, 이곳이 길지이기에 조성했다고 한다. 곤신지는 비가 내려서인가 물이 탁하다. 그 물 속에 유영을 하는 물고기들은 이 여름철을 꽤나 즐기는 듯하다. 온몸이 끈적거리는 날 유난히 물고기들의 활동이 활기차다.

 

천천히 발걸음을 옮겨 융릉 방향으로 향한다. 까치 몇 마리가 앞장서 뛰어간다. 마치 경쟁이라도 하자는 것 같다. 한 무리의 아낙네들이 지나간다. 이런 날씨에도 융릉에는 꽤 많은 사람들이 찾아들고 있다. 홍전문을 지난다. 홍전문은 영혼이 출입하는 문으로 홍살문, 혹은 신문(神門)이라고도 한다.

 

 

정자각 뒤편 저만큼 장조의황제(사도세자)와 헌경의황후(혜경궁 홍씨)의 합장릉이 보인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 아름답다는 능침 가까이 갈 수 없다. 역대 왕들의 능침이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면서 능침을 돌아볼 수 있는 소로가 모두 폐쇄되었다. 먼발치에서만 볼 수 있는 융릉. 아버지에게 죽임을 당한 사도세자의 능이지만 아들 정조의 뜻에 따라 왕의 능침과 같은 모형으로 조성했다는 아름다운 능침.

 

빗방울이 후두둑 떨어지기 시작한다. 능침을 찾아 온 나그네에게 자신의 슬픈 사연을 하소연이라도 하는 것일까? 잔뜩 흐린 하늘에서는 금방이라도 굵은 빗줄기가 쏟아져 내릴 것만 같다.

 

왜구의 침입을 막기위해 쌓은 면천읍성

성(城)을 쌓는 형태는 일반적으로 세 가지로 구분한다. 첫째는 산성(山城)이다. 산의 봉우리를 감싸고 있는 산성은 적과의 전투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령하기 위해 산 위쪽에 축성하는 성으로 우리나라에는 많은 산성이 소재한다.

 

둘째는 평산성(平山城)이다. 평산성은 산과 평지에 연이어져 있는 성을 말한다. 사적 제3호인 수원 화성은 대표적인 평산성이다. 그리고 셋째는 읍성(邑城)이다. 읍성은 고을의 평지에 쌓는 성으로 읍치나 적의 방비를 위한 성이다. 이렇게 각기 특징있게 쌓은 성들은 그 성들이 자리하고 있는 곳의 행정이나 지역의 방어 등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지난 4일 당진시와 보령시를 답사하면서 가장 먼저 들린 곳은 면천읍성이다. 4일 오후 보령 대천해수욕장을 찾아가다가 들린 면천읍성. 충청남도 당진시 면천면 군자길 3 일원에 소재한 면천읍성은 충청남도 기념물 제91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세종 21년인 1439년 11월에 왜구의 침입을 막기 위해 쌓은 성이다.

 

이 면천읍성을 꼭 들려보아야겠다고 마음먹은 것은, 면천읍성이 1794년에 축성을 시작하여 1796년에 완성한 세계문화유산이요 사적 제3호인 수원화성과 무엇이 다른 점인가를 알아보기 위함이다. 수원화성보다 357년이나 앞서 쌓은 면천읍성과 수원화성이 얼마나 다른 모습을 하고 있을까? 하기에 면천읍성 중에서 최근에 복원한 읍성 남문을 택했다.

 

 

수원화성은 강한 국권의 상징

 

사적 제3호, 그리고 세계문화유산. 사적 안에 또 4기의 보물(팔달문, 화서문, 서북공심돈, 방화수류정)을 간직한 곳, 화성은 서쪽으로는 팔달산을 끼고, 동쪽으로는 낮은 구릉의 평지를 따라 쌓은 평산성이다. 정조는 그의 아버지 장헌세자(사도세자)에 대한 효심에서 화성으로 수도를 옮길 계획을 세우고, 정조 18년인 1794년에 성을 쌓기 시작하여 2년 뒤인 1796년에 완성하였다.

 

실학자인 유형원과 정약용이 성을 설계하고, 거중기 등의 신기재를 이용하여 과학적이고 실용적으로 쌓은 성이 바로 화성이다. 화성은 다른 성곽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동문인 창룡문, 북문인 장안문, 서문인 화서문, 남문인 팔달문의 4대문을 비롯한 각종 방어시설들과 조선에서 가장 무예가 뛰어난 장용외영의 군사들이 주둔하고 있는 돌과 벽돌을 혼합해 쌓은 난공불락의 성이다.

 

이 화성을 매일 바라보면서 살아온 나로서는 면천읍성이 궁금할 수밖에 없다. 성을 잘 안다는 지인에게서 “면천읍성을 찾아가면 화성의 원형을 보는 듯하다”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하기에 일부러 답사 여정을 당진시 면천을 거쳐 보령시를 찾아가는 길목을 택했다. 당진시는 2009년부터 면천읍성 복원사업을 시작해 2014년에 남문지와 원기루 등을 완공하였다고 한다.

 

화성의 옛 모습을 면천읍성에서 그려내다

 

수원화성은 규장각 문신인 정약용이 동서양의 기술서를 참고하여 1793년에 저술한 <성화주략>을 지침서로 하여 축성하였다. 재상을 지낸 영중추부사 채제공의 총괄아래, 조심태의 지휘로 1794년 1월에 착공하여 1796년 9월에 완공을 하였다. 화성의 모든 것은 <화성성역의궤>에 낱낱이 기록하고 있다.

 

세계문화유산이자 사적 제3호인 수원 화성의 둘레는 5744m, 면적은 130ha로 동쪽지형은 평지를 이루고 서쪽은 팔달산에 걸쳐 있는 평산성의 형태다. 성의 시설물은 문루 4, 수문 2, 공심돈 3, 장대 2, 노대 2, 포(鋪)루 5, 포(砲)루 5, 각루 4, 암문 5, 봉돈 1, 적대 4, 치성 9, 은구 2등 총 48개의 시설물이 있었으나, 이 중 수해와 전란으로 6개 시설물(남공심돈, 남암문, 적대 2, 은구 2)이 소멸되고 42개 시설물이 현존하고 있다.

 

 

4일 찾아간 면천읍성은 현재 성벽의 둘레가 1,336m인데 성을 쌓을 당시 치성과 옹성을 합하면 전체길이 1,564m 정도였을 것으로 추정한다. 면천읍성은 현재 옹성 1개소, 문지 4개소를 비롯하여 치성 3개소가 확인되었으나, 원래 치성이 7개소가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남문 옆으로는 수로가 나 있다.

 

면천읍성의 남문은 옹성형태로 되어있다. 남문인 원기루 앞으로 옹성을 쌓아 적의 침입에 대비하였다. 옹성은 한편을 터놓았으며 성문을 깨기 위해 문 앞으로 몰려든 적을 섬멸하는 기능을 갖고 있는 방어책이다. 수원화성은 4대문에 모두 옹성이 설치되어 있으며, 장안문(북문)과 팔달문(남문)은 중앙에 문을 내고 양편에 적대를 설치하였다.

 

그와는 달리 창룡문(동문)과 화서문(서문)은 면천읍성의 남문과 같이 한편을 터놓았다. 하지만 그 안으로 공성무기를 끌고 들어와 성문을 깨야하는데, 그것은 불가능하다. 옹성 안이 좁아 그 안에서 공성무기에 힘을 더할 수 없으며, 옹성 위에 있는 병사들의 공격으로 옹성 안에 들어간 적들은 몰살당하기 십상 때문이다.

 

벌써 다녀온 지 보름이 지났지만 아직도 면천읍성 남문 모습이 눈앞에 어른거린다. 올해는 가급적이면 더 많은 시간을 내어 그동안 보고 싶었던 문화재들을 찾아보아야겠다. 문화재란 늘 보듬고 바라다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12일 여행에서 만난 엣 읍성지

 

날이 풀리면서 진작 떠나고 싶었던 여행길을 재촉했다. 이번 여행은 3일과 412일로 충청남도 보령시를 돌아보기 위한 여정이다. 주말 아침 이른 시간에 수원을 출발해 오후 1시가 넘어 도착한 당진 면천읍성. 제대로 갔으면 더 이른 시간에 도착했겠지만 가는 길에 광천전통시장을 돌아보느라 예정시간보다 늦었다.

 

면천읍성은 충청남도 기념물 제91호로 당진군 면천면 군자길 3 일원에 소재한다. 면천읍성은 세종 21년인 143911월에 왜구의 침입을 막기위해 쌓은 평지읍성이다. 성은 산성과, 평산성, 읍성 등으로 구분을 짓는데 면천읍성은 평지읍성이다.

 

조선후기까지 면천의 군사 및 행정의 중심지였던 면천읍성은 성벽은 자연석을 다듬어 쌓았으며 외부는 돌로, 내부는 돌을 채운 후 흙으로 덮어 쌓았다. 현재 성벽의 둘레는 1,336m인데 성을 쌓을 당시에는 치성과 옹성을 합해 1,564m정도로 추정한다. 현재 면천읍성은 옹성 1개소, 문지 4개소를 포함하여 치성 3개소가 확인되었으나 원래 치성은 모두 7개소가 있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최근 복원된 듯한 읍성의 남문

 

면천읍성을 꼭 들려보고 싶었던 것은 이 읍성의 복원된 남문을 보기 위함이다. 수원의 화성과 같은 형태로 축성된 남문은 옹성을 쌓고 한편을 터놓은 것이 마치 화성의 창룡문이나 화서문에서 보이는 듯한 축성방법을 택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 산재한 많은 성을 돌아보면서 비교하는 것은 화성과 얼마나 같은지, 혹 다른지를 알아보기 때문이다.

 

면천읍성의 남문은 옹성을 쌓아 왜구의 공성무기의 공격을 막아낼 수 있도록 하였으며, 남문 옆에는 상에서 밖으로 물이 흘러나가는 수로가 있다. 면천읍성은 18세기 이후 성의 기능을 상실한 성으로 누각은 다 부수어지고 옹성을 따라 집을 지었던 것을, 2009년 이후 면천읍성 정비사업으로 남문의 누각인 원기루 등을 복원하여 2014년에 완료한 것이다.

 

복원한 면천읍성의 남문을 돌아본다. 남문 안으로는 바로 집들이 들어차 있으며 성을 복원한 양편으로도 밭과 집들이 놓여 있다. 원기루를 비롯한 남문은 비교적 옛 형태를 따라 복원을 마쳤으며 옹성과 읍성 위에 여장도 옛 형태를 따랐다고 한다. 우리 수원 화성과는 견줄 바가 아니지만 그래도 이렇게 성의 일부분이 복원되었다는 것에 대해 감사할 따름이다.

 

 

보령성곽을 돌아보다

 

보령은 현 보령시 주포면 일대의 명칭이다. 이곳은 보령성곽과 보령향교 등이 소재한 것으로 보아 조선조 때는 이곳이 보령시의 중심이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현재 충남 문화재자료 제146호인 보령성곽은 고려 말 왜구의 침입에 대비해 쌓은 봉당성(혹은 고남산성)이 자리한 곳에서, 동쪽으로 400m 정도 떨어진 곳에 세종 12년인 1430년 이미 있던 성을 보강하여 새로 쌓은 성이다.

 

보령성곽은 현재 임진왜란과 한말 의병전쟁 등을 거치면서 모두 파손되고 남문인 해산루 옆으로 남쪽 성벽 70m와 북쪽 성벽 360m, 한 개소의 치성 등이 남아있다. 원래 보령성은 길이 630m에 높이 3.5m, 적대 8개소와 문루 3개소, 우물 3개소 등이 있었다고 한다.

 

 

여행길에 만난 성을 돌아보면서 항상 감사하다고 느끼는 것은 수원 화성과 같은 성을 보지 못한다는 점이다. 잘 다듬어진 돌로 쌓은 화성, 그 위에 수많은 구조물 등이 남아있는 화성을 돌아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할 따름이다. 문화재는 그 안에 내포된 사고가 있다. 어느 성이 되었거나 그 곳의 역사와 함께 존재하는 것이다.

 

그런 점으로 볼 때 우리는 화성이라는 세계문화유산을 갖고 있지만 정작 그 소중함에 대해서 잘 모르는 듯하다. 전국 곳곳에 산재한 성을 돌아보면 화성이 얼마나 대단한 성인가를 알 수 있다. 화성을 온전히 보존한다는 것은 그래서 더 필요한 것이다. 여행길에서 만난 당진 면천읍성과 보령 주포면의 보령성곽. 올해는 시간이 날 때마다 전국의 성을 돌아볼 계획이다.

 

 

정조가 현릉원 참배 시 묵어간 ‘안산행궁’

 

날이 덥다. 6월 초의 날씨치고는 벌써 한 여름 무더위를 방불케 한다. 5일 이른 시간에 답사를 시작하려고 했으니 무슨 일이 그렇게 생기는 것인지, 12시가 다 되어서 안산으로 향했다. 안산시 상록구 수암동 산26-4 일대에 소재한 경기도기념물 제127호인 안산읍성 및 관아지를 돌아보기 위해서이다.

 

안산에 들려 몇 곳을 먼저 들려보고 난 후 찾아간 안산읍성 관아지. 햇볕이 따가워 조금만 움직여도 등에서 땀이 흐른다. 안산읍성은 수암봉의 능선을 이용하여 평지를 감싸도록 쌓은 전형적인 평산성이다. 평산성이란 평지와 산을 연결해 성을 쌓은 형태를 말한다. 안산읍성은 조선 초기 서해안으로 침범하는 왜구를 막기 위한 성으로 축성이 되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안산객사를 돌아보고 난 후 인신읍성 둘레길을 따라 걸어보기로 마음을 먹었다. 한 낮의 더위에 걷는다는 것이 무리겠지만 그래도 마음먹고 찾아온 곳이 아니던가? 안산읍성의 길이는 772m이고 서쪽과 북쪽은 바깥쪽이 매우 가파른 경사를 이루고 있다. 안산읍성 둘레길로 접어들기 전에 먼저 안산객사를 돌아보았다.

 

 

 

정조대왕이 묵어 간 안산객사

 

객사란 정청을 중앙에 마련하고 좌우에 공무를 보기 위해 길을 나선 관원들이 묵을 수 있는 좌우익사를 둔다. 정청은 임금을 상징하는 나무패인 전패를 모셔놓고 매달 초하루와 보름에 지방관이 충성을 맹세하는 곳이다. 객사의 정청은 고을의 수령이 집무를 보는 동헌보다 격이 높아 관아시설 중 가장 화려하게 꾸민다.

 

안산객사는 정조 21년인 1797년 8월 16일 정조대왕이 현릉원 참배시 이곳에서 하룻밤을 묵어갔기 때문에 ‘안산행궁’으로도 불린다. 안산객사의 정청은 맞배지붕으로 좌우익사보다 한 단 높게 조성하였으며 좌우익사는 팔작지붕으로 온돌과 마루를 놓았다. 좌우익사는 정면 3칸, 측면 3칸으로 조성하였다.

 

 

 

안산객사는 2010년에 복원하였으며 객사 앞에는 수령 500년의 커다란 느티나무가 자라고 있다. 안산읍성지 주변에는 오래된 나무들이 많이 자라고 있어 이곳이 역사적으로 오래 된 곳임을 알 수 있다. 객사 뒤편에는 보호수로 지정된 수령 680년 정도인 은행나무가 서 있다. 나무의 높이는 20m 정도에 둘레가 6m나 되는 거목이다.

 

이 은행나무는 연성군 김정경의 거처가 안산읍성 안에 있었으며 김정경 장군이 1,400년경에 자신이 살고 있던 주거지 주변에 은행나무 세 그루를 심었다는 기록이 있으나 현재는 한 그루만이 남아있다. 이 은행나무는 1970년 경 고사할 위기에 처했으나 외과수술 등을 시술해 잘 자라고 있다. 이 나무의 북서쪽에는 김정경의 시저터가 자리하고 있다.

 

 

 

흔적만 남은 안산읍성 복원 서둘러야

 

안산읍성은 서해안으로 출몰하는 왜적을 막아내는 주요 방어 지역이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성의 남쪽에는 문터가 있고 객사 주변에도 옛 주추며 성돌인 듯한 돌들이 여기저기 눈에 띤다. 길을 따라 북쪽으로 걸어 오르니 북문지가 나온다. 다시 서쪽으로 난 오르막을 오르니 북서쪽 꼭대기 평평한 터에 주춧돌과 같은 돌이 놓여있는 것으로 보아 장대(주변보다 높게 쌓아올린 장수의 지휘대)가 있던 자리로 보인다.

 

읍성을 돌아보면서 성곽의 형태를 찾아보려고 했으나 풀이 워낙 무성하게 자라고 길을 찾을 수가 없다. 다만 군데군데 돌무더기들이 쌓여있어 안산읍성이 가파른 자연적인 조건을 이용해 석축과 토축을 겸한 평산성이었을 것이란 생각이다. 그리 넓지 않은 안산읍성 둘레길이지만 날이 워낙 무덥고 풀들이 많이 자라고 있어 한 바퀴를 꼼꼼히 돌아본다는 것은 무리일 듯하다.

 

 

 

서쪽방향을 여기저기 살피면서 돌아보았지만 딱히 석축산성의 형태라고 할 만한 곳을 찾을 수가 없다. 워낙 숲이 우거졌기 때문이다. 한 때는 행궁으로 이용되었을 정도였던 안산읍성. 그 중심에 있던 객사는 복원되었지만 뒤편 관아지를 비롯한 성곽의 복원이 하루빨리 이루어졌으면 한다. 우선은 토성이라도 알아볼 수 있도록 주변 정리부터 제대로 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남이장군 묘, 삶처럼 초라한 주변에 한숨만 나와

 

<부계기문>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한다.

일찍이 권남에게 딸이 있어 사위를 고르는데 남이가 청혼했다. 권남이 점쟁이에게 남이의 운을 점치게 했더니 점쟁이는 이 사람은 반드시 젊은 나이에 죽을 것이니 좋지 못하다라고 답했다. 권남은 자산의 딸의 수명을 보게 했다. 점장이는 이 여자도 명이 매우 짧고 또 자식도 없으니 그 복만 누리고 화는 보지 않을 것이므로 (남이를)사위로 삼아도 무방하다라고 대답했다. 권람은 그 말에 따라 두 사람을 결혼시켰다. 남이는 17세에 무과에 장원하여 임금의 사랑을 독차지 했으며 26(일설에는 28세라고도 한다)에 병조 판서로 있다가 사형을 당했는데, 권남의 딸은 벌써 수년 전에 먼저 죽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남이는 귀신도 두려워하는 존재였다는 것이다. 무속에서는 젊은 나이에 억울하게 죽은 그의 원혼이 크나큰 위력을 발휘한다고 생각하여 신령으로 받들기도 한다. 그것은 남이가 권남의 딸이 귀신의 조화로 인해 죽게 되었을 때 귀신을 몰아내고 권남의 딸을 살려 자신의 처로 삼았기 때문에 남이의 화분만 보아도 귀신들이 쫓겨 간다는 속설 때문이다.

 

 

 

젊은 나이에 역모에 몰려 능지처참 당해

 

이렇게 귀신까지도 두려워하는 남이(1443~1468)장군은 조선조 세조대의 인물로 의령남씨 의산군 남휘의 손자이자 권람의 사위로 세조 3년인 1457년 무과에 급제했다. 그의 나이 17세였다. 남이는 세조의 총애를 받아 여러 무직을 역임하였다. 평소 강직하고 굽힐 줄 모르는 성품을 지녔던 남이는 함경도에서 이시애의 난이 일어났을 때 난을 평정했다.

 

이어서 파저강 일대의 건주위 여진족 정벌에 참여하여 추장 이만주 부자를 사살함으로써 세조 12년에 26세의 젊은 나이로 병조판서에 올랐다. 그런 남이를 신진세력의 약진을 두려워한 한명회와 신숙주 등이 눈에 가시로 여길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세조가 승하하고 예종이 등극하자마자 남이는 병조 판서에서 겸사복장으로 좌천되는 수난을 당한다.

 

그로부터 불과 한 달이 채 지나기도 전에 남이는 유자광이 남이가 역모를 도모한다는 고변으로 26세에 능지처참 당해 가문은 멸문지화를 당한다. 너무나 뛰어났기에 억울하게 죽은 남이는 350여 년이 지난 순조 18년인 1818년에 남이의 후손인 우의정 남공철의 청으로 관직과 작위가 복구되었다.

 

 

 

한 맺힌 세상을 떠난 남이의 묘를 찾아가다

 

23일 아침 서둘러 길을 나섰다. 화성시에 소재한 몇 곳의 문화재를 돌아보기 위해서이다. 주말이라 가는 길이 막혀 일부러 차량의 통행이 뜸한 지방도를 택했다. 나뭇잎들이 연두색에서 초록색으로 변해가는 주변 경계가 마음을 차분하게 만든다. 화성시 비봉면 남전리 산 145에 소재한 경기도 기념물 제13호인 남이장군의 묘로 들어가는 입구는 좁은 농로를 지나야 한다.

 

입구에 서 있는 안내판을 따라 안으로 들어가니 동네 앞쪽에 남이장군 묘란 간판과 입구를 안내하는 석비가 서 있다. 그런데 그 석물 주변을 보는 순간 울화가 치민다. 문화재 진입로 앞에 검은 폐비닐이 가득 쌓여있다. 남이장군 묘로 들어가는 길 좌우편은 밭주인들이 세운 펜스로 막혀있고 좁은 통로만 겨우 남겨 놓았다.

 

정리가 안된 주변도 언짢은데 안으로 들어가 봉분으로 올라가는 길을 보니 난감하다. 도대체 명색이 문화재인데 이런 꼴로 찾아오는 사람들을 맞이하다니. 젊은 나이에 무고하게 역적으로 몰려 비명에 세상을 떠난 것도 억울한데 죽어서까지 이렇게 푸대접을 받고 있다는 것에 한숨부터 터져 나온다.

 

 

 

 

허술한 문화재 관리, 이대로 좋은가?

 

봉분을 행해 오르는 길은 더 엉망이다. 물길인지 계단인지 구별도 되지 않는 오르막길은 쓰러진 나뭇가지가 길을 막고 있다. 돌계단을 쌓은 것 같은 중간에 돌이 물에 쓸려 내려간 것인지 아니면 물길로 만들어 놓은 것인지 구별이 안되는 오르막길은 문화재 주변을 조성한 경관으로서는 한 마디로 너무 소홀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다.

 

남이장군과 부인의 묘가 나란히 서 있는 봉분은 뒤쪽을 둔덕(사성)으로 둘러쌓았으며 호석으로 잘 단장을 하였다. 석물은 월두형 묘비와 상석, 무덤을 수호하기 위해 세운 문인석 한 쌍과 망주석 한 쌍이 각각 서 있다. 조촐하게 마련되어 있는 남이장군 묘. 조선시대 9명의 충무공 중 한 명인 남이장군의 묘 앞에서 잠시 머리를 숙인다.

 

 

함께 동행한 아우가 주변에 난 꽃 한 가지를 꺾더니 상석 위에 올려놓고 머리를 숙인다. 한 때 역사의 인물이었던 남이장군의 죽음을 슬퍼하는 예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보다는 입구부터 엉망인 장군의 묘를 보고 있다는 것이 죄스럽기 때문이기도 하다. 언제쯤이면 이 남이장군 묘에 많은 사람들이 찾아올 수 있을까? 사람들로 북적이는 남이섬을 떠올리며 더욱 죄스런 마음을 금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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