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창에서 담양읍을 향해 가다가 보면, 읍 조금 못 미쳐 삼거리가 나온다. 이 삼거리 우측에는 ‘남산2구 동정자’라는 오석으로 된 마을 이정표가 있다. 그 옆에 보물 제505호인 ‘담양읍 석당간’ 1기가 서 있다. 전체 높이가 15m나 되는 이 석당간은, 지주의 높이가 2.5m에 달하며 곁에는 당간의 조성내력을 적은 비가 서 있다.

이 석당간은 절의 행사 때 사용하는 당을 다는 것으로, 단층 기단 위에 지대석을 겸하는 장방형의 지주를 두고 있다. 지주는 윗면이 약간 경사졌을 뿐, 측면에는 아무런 문양을 마련하지 않았다. 정면 중앙에는 장방형으로 1단의 받침을 마련하여, 당간대좌와 양 지주를 받치고 있다. 지주는 방형 석주로 약 80cm의 사이를 두고 남북으로 마주하고 있다.


바람으로 인해 나무로 세웠던 것을 다시 조성하다.

이 담양읍 석당간은 그 조성시기가 명확하다. 바람으로 인해 당간이 무어진 것을 나무로 우선 세웠다가, 다시 훼손이 되어 헌종 5년인 1839년에 중건하였음을 비석에 기록하고 있다. 담양읍 석당간은 가늘고 긴 8각 석주 3개를 연결하였으며, 그 위에 원형 당간을 올려 마디의 표식이 뚜렷하다.

석주의 연결방법은 통식으로 상하석이 만나는 부분을 반으로 깎고, 중간석의 양단을 또한 반으로 깎아 서로 밀접 시킨 후 각기 철제를 이용해 둥글게 만든 환으로 고정시키고 있다. 그리고 연결부분에는 또 상하에 원형의 구멍을 관통시켜 더욱 단단하게 조성을 하였다. 당간의 상단부에는 금속제의 보륜이 이중으로 장식되고, 풍향과 같은 장식이 부착되었으나 현재는 두 개만 남아있다.



비석에 새겨진 기록을 보면 석당간은 큰 바람으로 넘어진 것을, 다시 복원한 것이다. 그러나 양편의 지주는 그 양식이 고려시대 것으로 추측되며, 또한 인근 오층석탑이 고려시대의 조성한 석탑임을 감안할 때, 이 석당간도 고려시대에 오층석탑과 같은 시기에 처음으로 조성한 것으로 추정된다.

「석도를 세운 연대를 알 수 없지만 대개 읍을 처음 설치한 때부터이다. 갑인년에 큰바람으로 꺾여 나무로 대신 세웠다가 작년 봄에 또 훼손되어 중건한 것이 기해 3월이다. 숭정기원후 4기해 3월 일 부사 홍기섭 기록하다(石棹之立年不可攷 盖自設邑始幾, 年至甲寅爲大風折以木代立昨春 又頹今則如初重建歲己亥三月也, 崇禎紀元後四己亥三月日知府洪耆燮記)」라고 기록되었으며 후면에는 당시 유사(有司), 호장(戶長), 읍리(邑吏) 등 이 비석 건립의 관계자의 직책과 성명이 음각되어 있다.



석탑이 서 있는 곳이 대웅전 자리

삼거리에서 도로를 따라 조금 안으로 들어가면 좌측에 오층석탑 한 기가 서 있다. 탑의 형태는 1층 기단에 오층석탑으로 일반형과 약간 다른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탑이 서 있는 자리는 담양군 담양읍 남산리 342번지이며, 현재 이 탑은 보물 제506호로 지정이 되어있다. 이 오층석탑은 고려시대에 세운 것으로, 높이는 7m에 이른다.


이 탑은 백제탑인 정림사지 오층석탑을 모방하여 조성을 하였으며, 기단부는 여러 장의 석재를 이용하여 꾸몄다. 상층의 몸돌을 받치고 있는 지대석은 1석으로 구성하였고, 중석은 중앙에 탱주가 생략된 채, 양편에 양 우주만 조성하였다. 기단부의 높이는 다른 오층석탑에 비해 매우 낮게 조성되었음이 특이하다.

백제계 석탑을 모방한 오층석탑

갑석의 상면은 위편에 몸돌을 받을 수 있게 도드라지게 조성을 하였다. 탑신부는 몸돌과 옥개석이 각각 1석인데, 몸돌과 지붕돌인 옥개석 사이에 괴임을 별석으로 마련하여 몸돌을 받고 있다는 점이 특징이다. 1층의 몸돌에는 별다른 조각은 보이지 않는다. 양편에 모서리기둥인 우주만 나타냈을 뿐이다.



몸돌을 덮고 있는 옥개석은 두꺼운 편이며, 처마의 끝은 위로 솟구쳐 있다. 옥개석의 사방 끝에는 풍경을 달았던 흔적이 보인다. 처마의 밑은 수평으로 조성을 했으며, 옥개석의 밑면 받침은 3단으로 5층까지 동일하다. 2층 이상은 알맞게 체감이 되어있어, 오층석탑이기는 하지만 안정감을 준다. 고려 중기를 넘기지 않았을 것으로 보이는 이 오층석탑은, 상륜부는 모두 유실되었다.

이 담양읍의 석당간과 오층석탑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이곳에는 고려 때 절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아마도 석당간이 서 있는 곳 근처에 일주문이 있었을 테고, 현재 오층석탑이 있는 곳 주변에 대웅전이 있었을 것이다.



수많이 세월이 지나간 지금, 그 절의 존재는 알 수가 없다. 언제 지어진 것인지, 그리고 어떻게 소멸이 되었는지. 다만 이 석당간과 오층석탑만 남아, 한 때 이곳이 번창했던 절터였음을 추정할 뿐.


‘사지’란 옛 날에 절이 있던 곳을 말한다. 사지에는 많은 문화재가 지금까지 남아있는 곳도 있지만. 흔적조차 없이 기록에만 존재하는 곳도 상당히 많다. 지난 5월 20일에 찾아간 사지 두 곳은 바로 후자에 속하는 사지였다. 한 곳은 전라북도 무주군 안성면 죽전리에 소재한 전라북도 기념물 제67호인 ‘원통사지(圓通寺址)’ 였다.

또 한 곳은 경상남도 거창군 북상면 소정리에 소재한, 현재는 전통사찰 제57호인 송계사가 서 있는 ‘송계사지(松溪寺址)’이다. 현재 원통사지에는 원통사라는 절이 서 있으며, 송계사지에는 대한불교 조계종 해인사의 말사인 송계사가 서 있다. 그러나 두 곳 모두 옛 흔적은 찾아볼 길이 없어 안타깝다.


나라를 구한 의병의 요람 원통사

무주군 안성면 죽전리에 소재한 원통사지. 이 절은 1949년까지만 해도 원통사라는 절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여순사건 때 옛 건물은 모두 불에 타 없어지고, 현재의 건물은 1985년 이후에 지은 건물이라고 한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원통사는 신라 대 처음으로 짓고, 조선조 숙종 24년인 1698년에 고쳐지었다고 하는 유서 깊은 고찰이다.

덕유산 깊은 계곡에 자리한 원통사. 가파른 길을 돌아 오른 절 마당에서 앞을 바라다보면, 덕유산에서 뻗은 산자락이 아름답다. 이 산 중턱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나라를 걱정하다가 피를 흘린 것일까? 원통사지는 나라가 위급할 때마다 의병들이 이곳에 모여들어 싸웠다는 의병의 요람이라고 한다.



송계사 여기저기 널린 돌들이 옛 절터임을 알리는 것인지

원통사 주차장에 차를 대고 돌계단을 올라가니, 정면에 원통보전이 보인다. 우측으로는 명부전이 좌측으로는 요사가 있다. 이 세 전각은 모두 정면 세 칸씩이다. 그리고 원통보전 좌측 뒤편으로 한 칸의 산신각이 서 있다. 전각 모두를 다 합해도 열 칸 밖에 안되는 절이다. 옛 흔적은 찾을 길이 없는데, 여기저기 널려있는 돌에서 그나마 이곳에 옛 절터였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1905년의 을사보호조약과 1907년의 정미칠조약 때, 문태서. 신명선, 김동신 등의 의병장들이 이곳을 근거지로 항일투쟁을 벌였다고 하는 원통사. 이제는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돌들에게서 그 이야기를 듣는다.

송계사에서 바라본 덕유산 자락이 아름답다

원효와 의상이 이룩한 송계사, 세월의 아픔만 남고

무주에서 도계(道界)를 넘어 경남 거창군으로 접어들었다. 덕유산 수리봉의 남쪽 기슭에 자리한 송계사. 절을 올라가는 입구에는 커다란 바위돌이 계곡을 덮고 있는데, 맑은 소리를 내며 물이 흐른다. 아마도 이러한 깊은 골에 찾아든 원효와 의상 두 분은, 이 맑은 물소리에 취했는가 보다.

 

송계사를 오르는 길에 만나는 약수터와 영취수를 해체하여 이루었다는 송계사 문각


신라 진덕여왕 6년인 652년에 원효와 의상 두 분의 고승이, 북상면 소정리에 영취사를 창건한 후 5개의 암자를 지었는데 그 중 하나가 송계암이라는 것이다. 그 뒤 영취사가 폐사가 되면서 송계사가 그 전통을 이어받았다는 것이다. 송계사는 조선조 1592년에 일어난 임진왜란 때, 5개의 암자가 모두 소실이 되었다고 한다.

폐허로 남아있던 송계사는 조선조 숙종 때 진명스님이 송계암을 복원했으나, 6.25 한국전쟁 때 또 다시 전소가 되고 말았다. 그 뒤 여러 번의 중창을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는 것이다.


문각에는 종루가 있다. 대웅전은 신축을 한 것이다

계곡 물소리를 뒤로하고 송계사로 올랐다. 기울어진 영취루를 해체하여 복원한 문각이 저만큼 보인다. 문각으로 향하는 흙길 좌우에는 커다란 노송들이 가지를 아래로 처트리고 있다. 약수 한 그릇으로 목을 축인 후 송계사 경내로 들어갔다. 공양주인 듯한 여자분 한 분만 보일뿐 인적이라고는 없다.

안으로 들어가 삼성각으로 오르는 가파른 계단을 오른다. 바람에 대나무 잎이 부딪치며 바스락거린다.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본다. 크지 않은 절집이 한 눈에 들어온다. 내려오다 보니 스님 한분이 나와 계신다. 송계암의 옛 흔적을 물으니 알 길이 없다는 대답이다. 하루에 두 곳의 사지를 돌았지만, 기록에만 전할 뿐, 옛 흔적을 찾을 길이 없다.


세월은 그렇게 많은 것을 우리에게서 빼앗아 가버렸다. 그 가슴 아픈 역사의 흔적이 두 곳 모두 마음에 멍울을 남겨놓는다. 그저 눈여겨 볼만한 것들만 돌아본 사지탐방. 어디 한 곳 흔적이라도 있지나 않을까 했지만, 남은 것은 바람소리와 물소리뿐. 가슴 한편이 허해져 온다.

다방리, 마을 입구를 들어서면서 마을 이름을 보고 한참이나 웃었다. 다방리라니, 참 별 마을이 다 있다는 생각에서다. 충청남도 연기군 전의면 다방리, 운주산에 소재한 신라 때의 절인 비암사. 비암사는 공주 마곡사의 말사로 창건연대는 확실치가 않다. 신라 말 도선국사가 창건했다고 전해지는 비암사는, 극락전 앞의 3층 석탑에서 소중한 문화재가 3점이 발견이 되어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중이다.

이 3층 석탑에서 나온 문화재는 국보 제106호인 비암사계유명전씨아미타불삼존비상과 보물 제367호인 비암사기축명아미타불삼존비상, 그리고 보물 제368호인 비암사석조비상반가사유상이다. 이 중 보물 제368호는 통일신라로 이어진 반가사유상의 조성과 미륵신앙을 알려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이곳 충남과 전북일대는 미륵신앙과 관련되는 문화재가 유난히 많은 곳이기도 하다.


이야기꺼리가 많은 절 비암사

돌축대를 쌓고 그 위에 전각을 벌려놓은 비암사. 돌계단을 오르다가 보면 우측으로 수령 840년이 지난 보호수인 느티나무가 한 그루 서 있다. 느티나무의 수령이 800년이 지났다는 것에 대해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높이 15m, 나무의 둘레가 7.5m나 되는 이 나무는, 흉년이 들면 잎이 밑에서부터 피어 위로 올라가고, 풍년이 들 해는 위에서 아래쪽으로 내려온다고 한다. 이 느티나무는 마을의 풍년과 흉년을 알려주는 나무로 유명하다.

수령 840년인 보호수 비암사 느티나무

느티나무 계단을 오르면 바로 앞에 삼층석탑이 보인다. 충남 유형문화재 제119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이 3층 석탑은 화강암으로 조성이 되었으며, 고려 때 제작을 한 것으로 보인다. 전체적으로 안정된 느낌을 주는 이 석탑은 기단부가 없어진 것을, 1982년에 보완하여 현재의 자리에 세웠다. 이 3층 석탑에서 위에 열거한 문화재 3점이 발견되었다.


상륜부에서 국보와 보물 등이 발견 된 비암사 3층 석탑

3층 석탑 뒤편으로는 충남 유형문화재 제79호인 극락보전이 자리하고 있다. 극락보전은 자연석으로 쌓은 기단 위에 덤벙주초를 놓았다. 기둥은 배흘림이 뚜렷한 원형기둥을 사용했는데, 밑 부분을 보면 오랜 세월 보수를 한 흔적이 보인다. 정면 3칸 측면 2칸인 극락보전은 다포계 팔작지붕이다.



아미타좌상을 주불로 모신 극락보전과 소조아미타좌상

극락보전에 주불로 모신 아미타불은 영원한 수명과 무한한 광명을 보장해 준다는 부처님으로 서방극락의 아름다운 정토세계로 인도한다고 한다. 극락보전에 모셔진 아미타좌상은 소조로 제작이 되었으며, 현재 충남 유형문화재 제183호로 지정이 되어있다. 이 아미타불좌상은 전체 높이가 196cm로 좌상으로는 큰 편이다. 이 아미타불의 특징은 결가부좌를 한 무릎의 높이가 유난히 높다는데 있다.



이어붙인 기둥이 역사를 말하고 있다. 대웅전 현판 양옆에는 멋진 용이 조각되어 있다

이 외에도 비암사에는 충남 유형문화재 제182호인 영산회괘불탱화가 있다. 이렇게 소중한 문화재와 800년이 넘는 보호수인 느티나무가 있는 비암사. 가파른 비탈 위에 세워진 산신각으로 올라보니, 사람들이 정성들여 작은 돌을 쌓아올려 놓았다. 절집을 찾아 간절히 기원을 하는 사람들은 무엇을 간구하는 것일까? 아마 이렇게 오래된 고찰에서 수많은 시간을 빌고 간 사람들의 기운이 정성을 들어주는 것은 아닐까?



산신각에서 내려다보는 비암사의 전경이 한 폭의 그림과 같다. 저 멀리 떠가는 한 점 흰 구름은 어디로 가는 것일까? 혹 아미타불이 계시다는 극락정토를 가는 것은 아닌지. 그 구름을 따라 길을 나서고 싶다. 복잡하고 늘 머리가 아파야하는 이러한 세상을 왜 '고해'라고 했는지 이해가 간다. 살아가는 나날이 고통속에서 살고 있다는 인간들이다. 작은 고통 하나 없는 사람들이 있을까?

그저 가을 하늘처럼 저렇게 파아란 물살을 헤치고 고해를 벗어날 수 있는 길이 무엇이던가? 비암사 산신각 앞에서 내려다 본 절집의 지붕들이, 뒤집기만 한다면 고해를 벗어날 수 있는 곳을 찾아갈 수 있을 듯하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비암사를 찾는 것이나 아닌지. 

충북 진천군 진천읍 연곡리 483, 보련산 자락에 자리하고 있는 보탑사. 보탑사란 명칭은 이 곳에 3층 목탑으로 지어진 보탑이 있기 때문이다. 원래 이 보탑사 주변에는 절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연곡리에는 우리나라에서 단 3기 밖에 전하지 않는 비문을 새겨 넣지 않은, 보물 제404호인 백비가 있기 때문이다.

보탑사를 짓기 전에 실시한 지표조사에서는 와당 등이 출토되었으며, 보련산이나 연곡리 등 불교와 밀접한 관계가 지어지는 명칭이 보이는 것을 보아도 알 수가 있다. 진천읍에서 서북쪽으로 12km 정도 떨어져 있는 보탑사를 가는 길에는 김유신장군의 생가터가 있는데, 이곳에 있던 옛 절이 김유신의 사적지와 관계가 있는 것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장엄함이 느껴지는 보탑사의 3층 목조보탑

현대에 들어 가장 아름다운 목조 3층보탑

보련사를 들어가는 길은 차 한 대가 겨우 드나들만한 길이다. 보탑사를 향하던 중 몇 번이나 차를 물려야 하는 일이 벌어졌다. 마침 휴일에다가 버섯채취가 한창인 시기인지라, 여느 때보다 몇 배가 더 복잡하다고 한다. 겨우 보탑사 입구에 들어설 수가 있다. 주차장을 들어서면 우측으로는 보탑사의 일주문이 보이고, 좌측으로는 이 마을의 역사를 말해주 듯 수령 300년이 지난 느티나무 한 그루가 그늘을 만들어주고 있다.



보탑사 입구에서 그늘을 만들어 주는 수령 300년의 느티나무(위)와 보탑사 일주문(가운데) 보탑으로 오르는 계단

보탑사 일주문을 지나 돌계단 위로는 3층 목탑의 상륜부가 삐죽이 얼굴을 보인다. 계단 위 좌우에는 범종각과 법고각이 서 있다. 밑에서 보기에는 팔각으로 보였으나, 막상 오르고 보니 법고각은 9각으로 지었고 범종각은 7각으로 지어졌다. 앞으로 보이는 거대한 3층 목조보탑. 그 웅장함에 압도를 당한다.


사방불을 모신 장엄한 3층보탑

보련산 보탑사의 3층 보탑. 3층 보탑의 높이는 42.71m나 된다고 한다. 탑신인 1층부터 3층까지의 높이가 108자인 32.72m 이고, 상륜부가 33자인 9.99m이다. 이 보탑은 사방에 문을 내고 그 안에 주불을 모셨는데, 3층까지 올라갈 수 있도록 만들어진 보탑이다. 그저 놀라울 수밖에 없다. 머리를 숙여 예를 갖춘 후, 한편에 서서 고개를 딴 곳으로 돌리지를 못한다,


보탑의 상륜부와(위) 심주를 중심으로 사방불을 모신 보탑의 1층(아래)

예전 신라가 새로운 국가를 열기 위해 황룡사 9층탑을 세우듯, 고구려와 백제가 더 강한 국가를 염원한 많은 목탑을 세우 듯, 그런 마음으로 남북통일은 물론, 옛 고구려의 위용을 다시 한 번 떨쳐내기 위한 염원을 담고 있다고 한다. 그 모습만으로도 아름다운데, 그 안에 담긴 뜻이 깊어 더욱 장엄을 더하고 있다. 또한 황룡사 9층 탑 이후 최초로 3층까지 오를 수 있게 축조된 탑이기도 하다.

보탑을 한 바퀴 돌아본다. 행여 발자국 소리라도 들릴까보아 조심스럽다. 1층은 금당이다. 사방불을 모신 금당은 이 보탑의 심주를 중심으로 사방불을 모셔 놓았다. 동방에는 약사보전, 서방에는 극락보전, 남방에는 대웅보전, 북방에는 적광보전이란 현판이 걸려있다. 그 현판의 명호대로 그 안에 모셔진 주불과 협시불이 각각 다르다.



범종각과 법고각(가운데) 그리고 와불을 모신 적조전(아래)

2층은 법보전으로 팔만대장경을 모신 윤장대가 있으며, 3층은 미륵전으로 미륵 삼존불을 모셔 놓았다. 보탑주변을 한 바퀴 도는데, 적조전 앞 바위에 모셔진 석불이 빙그레 웃는 듯하다. 마치 ‘무엇을 깨달았는가?’를 묻는 것만 같다. 이 3층 보탑을 중심으로 그 주변에는 와불을 모신 적조전, 부처님의 제자와 나한을 모신 영산전, 지장전과 법고각, 범종각 등이 경내에 자리하고 있다.



산신각으로 오른다. 통나무 귀틀집으로 지어진 산신각은 너와지붕을 얹어 특이하다. 산신각 앞에 앉아 바라다보는 3층보탑. 그 상륜부 위로 저만큼 가을의 푸른 하늘이 보인다. 뜬구름 같은 인생을 어디서 머물 것이냐고 누군가 묻는다면, 난 이렇게 말할 것이다. ‘보련산 보탑사에서 영원한 발길을 머물고 싶다’고.

통나무 귀틀집으로 지어진 산신각


한 곳에 보물이 가장 많은 곳은 어디일까? 강원도 홍천군 내촌면 물걸리에 가면 사지 한 곳에 보물 5점이 있는 곳이 있다. 강원도 기념물 제47호로 지정이 된 홍천 물걸리 사지가 바로 그곳이다. 이 사지에는 보물 제541호 석조여래좌상을 비롯하여, 보물 제542호 석조비로자나불좌상, 보물 제543호인 불대좌, 보물 제544호 불대좌 및 광배, 보물 제545호인 3층 석탑이 있어 강원도 내에서는 한 곳에 보물이 가장 많은 절터이다.

이곳에 어떤 절이 있었는가는 모른다. 다만 절은 흔적이 없고, 보물 5점이 남아있을 뿐이다. 전하는 말에는 ‘홍양사터’라고 하지만 그것도 정확한 것은 아니다. 1967년 4월에 이 절터를 발굴하면서, 통일신라시대에 조성된 금동여래입상 1구를 비롯하여, 철불 조각, 청자편, 수막새와 암막새 기와, 토기조각, 청자조각, 백자조각 등이 발견되었다. 이는 이 절터가 통일신라 때부터 조선조까지 절이 있었음을 알게 해준다.



보호각 안에 자리한 보물

1982년에 보호각을 짓고, 3층 석탑을 제외한 4구의 보물을 보호각안으로 모셔 놓았다. 절터에서는 그 외에도 여러 가지 석조물 들이 발견이 된 것과, 한 곳에 4기의 대형 석불이 있었던 것으로 보아 절집의 규모가 상당히 컸던 것으로 보인다. 어떻게 이렇게 많은 보물들이 이곳에 있었던 것일까? 물론 그 문화재의 가치를 보아 보물로 지정을 했다고 하지만, 석불과 불대좌, 광배 등을 보면 많은 전각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물걸리를 찾아 나선 길은 정말 한 낮 더위가 30도를 웃도는 날이다. 홍천에서 44번 도로를 이용해 인제로 가다가 보면 철정검문소가 나온다. 그곳에서 우측 다리를 건너 내촌면 소재지를 향하다가 보면 경치가 그만이다. 내를 끼고 여기저기 전원주택들이 보인다. 물걸리는 학교를 지나 좌측으로 꺾어 마을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좁은 길은 겨우 차가 드나들만하다. 안으로 들어가니 보호각이 한 동 서 있고, 마당에는 석탑 한 기가 보인다.


흔적없이 사라진 절

안내판을 보니 물걸리사지라고 적혀있다. 보물이 다섯 점이나 있다니, 어찌하여 이리 큰 절이 흔적도 없이 석불과 불대좌, 석탑과 석물들만 남기고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을까? 마당 한편을 보니 석물이 놓여있다. 그 규모를 보아도 이곳이 상당히 번성했던 절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어찌 절집 이름마저 전하지 않는 것일까? 통일신라 때부터 조선조까지 이곳에 절이 있었다고 친다면 어디엔가 사지(寺誌)라도 있지 않을까? 궁금한 것이 하나, 둘이 아니다.

보호각 안으로 들어가니 석불 2기와 불대좌 2기가 있다. 모두 보물로 지정이 되어있는데 통일 신라 후기의 것이라고 한다. 석물들이지만 그 조각 수법이 정교하다. 하나하나 찬찬히 살펴보니 그 아름다움에 찬사를 보낼만하다. 천년 넘게 온갖 비바람에 마모가 되었을 텐데 저리도 그 형상이 남아있다니. 참으로 우리 문화재 하나하나가 왜 소중한 것인지 알 것만 같다. 석불 앞에 누군가 절을 할 수 있도록 해놓았다.





위로부터 보물 제541호 석조여래좌상, 보물 제542호 석조비로자나불좌상, 보물 제543호인 불대좌, 보물 제544호 불대좌 및 광배, 보물 제545호인 3층 석탑

어찌 그 오랜 풍상 이렇게 온전히 보존이 될 수 있었을까? 그런데도 이 절터에 있던 절이 무엇인지, 그 규모가 어떠했는지 모른다고 하니, 우리의 기록문화가 왜 그토록 허술했는지 답답하기만 하다. 수많은 문화재가 잇는 나라, 그리고 스스로 문화대국임을 자랑하는 나라. 그러나 정작 자신의 소중한 문화재를 제대로 관리조차 못하는 나라. 물걸리사지를 떠나면서 마음만 아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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