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요민속문화재 제231호로 지정이 된 홍성군 홍북면 노은리 29에 소재한 ‘엄찬 고택’은, 사육신의 한사람인 성삼문의 외손인 엄찬의 고택으로 알려진 집이다. 원래 이 집은 문간채가 있었지만 현재는 문간채는 사라지고, 사랑채와 중문을 들어서면 광채와 ㄷ자형의 안채가 광채와 연결되어 ㅁ자형의 집을 구성하고 있다.

 

 

 

사랑채와 사랑마루

 

넓은 마루가 시원한 사랑채

 

밖에서 본 엄찬 고택은 한 마디로 멋진 집이다. 녹음이 우거진 짙은 나뭇잎 사이로 모습을 드러낸 담장은, 한 폭의 아름다운 그림을 보는 듯하다. 현재 엄찬 고택은 사랑채와 행랑채가 연결된 중문을 사이로 출입이 가능하다. 사랑채는 3칸으로 되어 있는데, 그 중 두 칸은 넓은 툇마루를 놓아 시원한 느낌이 든다.

 

사랑마루에서 벗들과 앉아 술이라도 한 잔 햇다면, 세상 모든 정취가 시 한수로 대신했을 것만 같다. 이 집을 지었다는 성삼문의 외손 엄찬도, 예전에는 이 사랑마루에서 앞의 경치를 바라보며 글을 읽고는 했을 것이다. 중간에 한 칸은 좁은 툇마루를 놓았는데, 이어진 부분은 안채에서 드나들 수 있는 부엌이다.

 

밖에서 본 행랑채

 

마구간도 있었을 줄행랑

 

중문 밖으로는 한 칸의 행랑방과 광이 마련되어 있다. 이 광은 집의 구조로 보아 마구간으로 사용된 듯하다. 중문을 열고 들어서면 좌측으로는 -자형의 광채가 자리를 하고 있다. 광채는 행랑방을 합하여 모두 여덟 칸으로 마련이 되었는데, 그 중 좌측 세 칸은 문을 달아 놓았다.

 

ㄷ 자형의 안채는 겹 마루를 놓아

 

전체적으로 대지가 서쪽으로 기울어져 있는 것을 그대로 사용한 엄찬 고택은, 남쪽으로 중문을 두고 동쪽으로 본채를 두었는데 팔작지붕과 맞배지붕의 우진각으로 꾸몄다. 이 엄찬 고택의 특징은 안채의 대청마루다. 모두 세 칸으로 구성이 되어있는 대청은 겹 마루를 놓았다. 중간에 기둥을 두고, 그 밖으로 또 마루를 덧낸 형태이다.

 

 

안채의 마루는 기둥밖으로 또 마루를 덧낸 겹마루이다. 

 

마루를 중심으로 좌우에 방을 드렸는데, 대청을 바라보고 좌측에는 부엌과 다락, 그리고 연이어 방을 세 개를 놓았다. 안방과 윗방으로 구분이 되는 이 방은 그리 크지 않은 것이 특징이다. 이 안채에서 특이한 것은 바로 사랑채와 이어지는 부엌이다. 이 부엌은 중문과 연결이 되어 있는데, 아궁이가 이단으로 되어 있다. 즉 경사가 진 대지를 그대로 이용하다가 보니, 아궁이가 깊어서 아래쪽은 가마솥에 불을 때는 아궁이로 하고, 그 위에 방을 데우는 아궁이를 따로 두었다.

 

이중으로 난 아궁이. 비탈이 진 비형을 그대로 이용하기 위해 부엌의 아궁이를 층이지게 조성하였다. 위는 방에 불을 지피는 아궁이다.

 

그림 같은 고택의 아름다움, 보존에 신경 써야

 

성삼문의 외손집이라고 해서 그 집이 잘 보존이 되어야한다는 법은 없다. 하지만 이 엄찬 고택은 중요민속문화재로 지정이 될 만큼 그 문화재적 가치가 높은 집이다. 엄찬 고택을 찾았을 때 집이 퇴락해지고 있다는 점이 마음이 아프다. 마당에는 잡풀이 그득하고 주변은 어지럽게 널려 있다.

 

마을 밑에서 바라보는 엄찬 고택은 한 폭의 그림과 같았다. 두 그루의 커다란 은행나무가 행랑채 앞에 자리를 하고 있어, 운치가 있어 보인다. 모두 여덟 칸으로 되어있는 광채는 한 눈에 보아도 이 집이 예사롭지 않음을 잘 나타내고 있다. 그러나 정작 안으로 들어가 살펴본 집은 여기저기 손을 보아야 할 곳이 보인다.

 

 

 

1670년대에 지어졌다는 엄찬 고택. 그저 성삼문의 외손이 살고 있던 집이라고 장황하게 안내를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만큼 소중한 문화재로 지정을 했으면, 잘 보존이 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다. 사랑채 넓은 마루에 앉아 불볕 햇볕을 피해본다. 예전에는 꽤나 행세를 했을법한 집안인데, 손길 사라진 집에서 느끼는 한기가 불볕더위마저 서늘하게 만든다.

대문채에 마굿간과 방앗간, 그리고 다락이 있는 집. 제천시 수산면 지곡리 웃말에 있던 이집은, 지곡리 마을에서 볼 수 있는 일반적인 집이었다. 충주댐의 건설로 수몰이 되는 것을 1985년 제천 청풍문화재단지 안으로 옮겨 놓았다. 현재 충북 유형문화재 제89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이집은, 대문채와 행랑채, 헛간과 안채로 구분이 되어있다.

 

생활의 지혜가 엿보이는 대문채

 

수산 지곡리 고가의 대문채만큼 특색 있는 가옥도 드물다. 우선은 대문채가 초가로 되어있는 것이야 일반 가옥에서는 많이 볼 수가 있다. 하지만 지곡리 가옥의 대문은 싸리문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문을 열면 바람벽이 있고, 우측으로는 다락이 있다. 다락의 밑으로는 작은 문을 만들어 놓았다. 다락에는 각종 농기구들이 쌓여 있다. 대문채를 최대한으로 이용을 한 지곡리 가옥의 특징이다.

 

 

대문채를 나서 안채 쪽으로 들어가 보면 외양간과 방앗간이 대문채의 다락 밑으로 구성이 되어 있다. 대문채의 밑으로 난 문은 외양간으로 바로 출입을 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밖에 나가 농사일을 하고 들어 온 소를 안으로 돌아 들어오지 않고, 이 문을 통하여 바로 외양간으로 들어 올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생활의 지혜가 묻어나는 이러한 아름다운 집이 있어, 고택의 답사길은 늘 즐겁다.

 

초가로 된 행랑채

 

지곡리 고가의 대문 안을 들어서면 좌측으로 헛간채가 있고, 초가의 행랑채가 자리를 하고 있다. 행랑채는 사랑채로도 함께 사용을 하였다는 지곡리 고가를 찾았을 때, 한창 초가의 지붕을 새로 입히고 있었다. 초겨울이 되면 초가의 지붕을 덧입히는 것도 큰일이다. 일꾼들이 모여 짚단을 고르고, 그것을 잘 추려낸 다음 초가에 올릴 용마름을 틀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정리가 된 초가는 또 다른 모습으로 다시 태어난다.

 

 

 

맨위는 대문채의 문인 사립문. 가운데는 대문채 외양간 위에 조성한 다락. 농기구 등을 보관한다.

 

- 자형의 이 초가는 사랑채와 같이 사용을 했다고 하지만, 사실은 행랑채로 보아야 할 것이다. 판문을 달은 안채에 붙은 방이 사랑채 역할을 했을 가능성이 커 보인다. 행랑채와 마주하고 있는 판문 밖의 안채 방에 툇마루를 달아 놓은 것을 보면, 이 방을 사랑방으로 사용했다고 볼 수 있다.

 

판문으로 막은 안채

 

지곡리 고가의 또 다른 특징은 판문으로 만들어진 중문이다. 행랑채와 안채의 사이를 막고 있는 이 판문은 일각문 형태로 되어있다. 하지만 그 모습이 특이하다. 전체적으로 보면 솟을문으로도 보인다. 이 문을 판문이라고 부르는 것은 담벼락이 판자로 되어있기 때문이다. 판자로 담벼락을 만들고 그 위에 기와를 얹었다. 이런 형태의 모습이 지곡리 고가의 아름다움이기도 하다.

 

 

 

 

안으로 들어가면 대청을 가운데 놓고 ㄱ 자형으로 구성된 안채가 있다. 안채는 좌측으로부터 사랑방과 한 칸 대청이 있고, 꺾이는 부분에 윗방과 안방, 부엌을 달았다. 전체적인 집안의 구조로 보아 안채가 협소하기는 하지만, 나름대로 공간 구성을 잘 활용한 것을 알 수 있다. 안방의 뒤로 비교적 넓은 툇마루를 놓은 것도 이러한 협소한 공간을 활용한 좋은 예이다.

 

판자 담벼락이 아름다운 부엌

 

지곡리 고가의 가장 아름다운 곳은 바로 부엌이다. 부엌을 비교적 크게 둔 지곡리 고가는 아래 위를 흙으로 막고, 가운데를 전체적으로 판자로 막았다. 부엌이 이렇게 넓거나, 행랑채가 안채에 비해 방을 많이 들였다는 것은, 지곡리 고가의 주인이 비교적 부농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외양간과 방앗간, 그리고 대문채의 다락 등도 이 집의 농사가 많았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부엌의 벽은 집 뒤편으로 난 곳을 돌출시켰다. 그리고 돌출된 부분을 까치구멍을 내어 그릇 등을 보관하게 하였다. 까치구멍을 통해 들어 온 바람이 그릇 등을 건조시키는데 일조를 한 셈이다. 지곡리 고가를 돌아보면서 느낀 것은 생활의 지혜가 묻어나는 집이라는 점이다.

 

좁은 공간을 활용을 한 다양한 연출이 뛰어나다. 이러한 우리 전통가옥의 아름다움이 사라지고 있다는 것이 아쉽다. 고택 답사를 하면서 늘 느끼는 것이지만, 우리 것이 역시 좋은 것이란 생각이 든다. 삶에 정취가 묻어있기 때문이다.

 

안회당은 고을의 수령이 업무를 보던 동한인데도 유일하게 동헌이라는 이름을 붙이지 않고 당이라는 명칭으로 불리고 있는 곳이다. 사적 제231호는 홍주성과 홍주아문, 그리고 안회당 등이 일괄 지정이 되어 있다. 그 중 안회당은 홍무목사가 집무를 보던 동헌으로 '안회(安懷)'란 '노인을 평안하게 모시고, 벗을 믿음으로 하여 아랫사람을 사랑으로 대해야 한다'는 뜻이 담겨 있다고 한다.  

 

일반 동헌과는 전혀 다른 안회당

 

안회당은 동헌이라고 하지만, 일반적으로 우리가 보아왔던 동헌과는 그 형태가 전혀 다르다. 동헌과 달리 위엄이 있어 보이는 높은 지붕에 넓은 대청이 보이지 않는다. 그저 어느 부유한 집의 사랑채 정도로 꾸며져 있다. 안회당이 처음부터 동헌은 아니었다. 안회당 뒤편서남쪽에 '근민당'이라는 동헌이 있었다. 근민당은 천주교 박해를 한 동헌으로 유명하다.

 

 

근민당이 어떻게 해서 유실되고 대신 안회당이 동헌이 되었는가는 정확지가 않다. 다만 안회당이 1977년 해체 복원시에 발견된 상량문에 의해 조선조 숙종 4년인 1678년에 처음으로 지어졌다고 하니, 그 이전에는 근민당이 동헌이었을 것이다. 홍주성은 처음 축조한 년대는 정확지가 않다. 그러나 고려시대 백월산 중턱에 위치했던 해풍현이 현재의 위치로 옮겨왔다는 기록으로 보아 이 때 성을 축조한 것으로 보인다.  

 


 
 



안회당은 모두 22칸으로 조성된 목조 팔작집이다. 숙종 4년에 처음으로 지어진 후에, 고종 7년인 1780년 목사 한응필이 개축하였다고 한다. 처음 안회당을 지었을 때, 안회당이라 쓴 편액을 대원군이 하사했다고 하나 전해지지 않는다.

 

뛰어난 목조건축의 미가 돋보여

 

안회당을 돌아보면 이런 아름다운 집에서 집무를 하는 목사는 절로 사람들을 위하는 위민정치를 할 것만 같은 느낌이 든다. 그만큼 이름답게 꾸며진 동헌이다. ㄱ자 형으로 된 안회당은 정면 7.5칸에 측면 2.5칸 정도로 되어있으며, 건물을 바라보고 좌측 끝에는 꺾이어 나온 누마루 방이 달려있다. 누마루 방은 모두 두 칸의 마루방으로 장초석 위에 기둥을 세워 정자처럼 꾸몄다.


 

 
 


 

측면 반 칸의 앞은 누마루를 깔았으며, 뒤편으로는 높다랗게 연도를 뺀 굴뚝을 올렸다. 누마루 방 뒤로는 개방마루를 놓아 뒤편 여하정을 바라볼 수 있도록 하였다. 아무리 둘러보아도 동헌이라는 느낌이 들지를 않는다. 거기다가 날렵하게 위로 솟은 처마는 한옥미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다.

 

사적 안에 주차를 하고 있는 사람들

 

홍주성과 안회당 등을 돌아보다가 이해가 가질 않는 부분이 있다. 차들이 여기저기 주차를 하고 있는데, 처음에는 그저 무심코 사진을 찍고 있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을 해보니 이곳은 사적 안이 아닌가. 더구나 안회당과 건물 앞에 있는 홍주아문 등은 모두 사적이다. 일반적으로 문화재를 보존하기 위해서는 문화재 바로 곁에 주차를 할 수가 없다. 그런데 이곳은 많은 차들이 문화재 안에 주차를 하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아무리 주차장이 부족하다고 해도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는 것인지 이해가 가질 않는다.

 

 



홍주성은 1978년 10월 7일 강도 5의 지진이 발생하여 성곽의 일부가 붕괴된 것을 계기로 성곽주변 가옥들을 매입하여 주변 정리를 하고, 홍주성곽의 옛 모습을 찾기 위해 지속적인 사업을 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도 먼저 홍주아문과 안회당 주변에 있는 건물부터 먼저 철거해야만 하지 않을까?

 

그것이 우선이란 생각이다. 그것이 많은 예산이 들어 불가능하다면, 그전에 주차문제라도 해결해야 할 것이다. 사적지 안에 버젓이 들어가 주차를 하고 있는 볼썽사나운 모습은, 아무리 생각해도 납득이 가질 않는 부분이다.

집안 여기저기 장작이 쌓여있다. 아궁이에는 불을 땐 흔적이 보인다. 아직도 과거의 생활모습 그대로를 찾아볼 수가 있는 초가집. 초가집이 '고래 등 같다'고 하면 이해가 가질 않을 것이다. 주로 기와집이 덩그렇게 높다는 뜻으로 사용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충청북도 제천시 금성면 월림리에 있는 중요민속문화재 제148호 정원태 가옥은 초가집이면서도 그런 느낌을 들게 한다.

 

정원태 가옥은 사랑채와 안채로 구분되어진다. 넓은 사랑채가 높이 앉아, 시원하게 펼쳐진 앞을 바라보고 있다. 초가로 만든 작고 소담한 담장에 붙은 일각문이 대문 역할을 하는 정원태 가옥의 안채 역시 초가로 운치 있는 집이다.

 

 

명당에 자리한 초가

 

제천 정원태 가옥은 19세기 초에 지어졌다. 마을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한 이 가옥은 전망이 좋다. 주변 경관이 아름다운 곳에 자리한 초가집은 전형적인 길지로 알려져 있다. 안채가 ㄱ자형으로 자리를 잡고 그 앞쪽으로 ㄴ자형의 사랑채가 자리해, 튼 ㅁ자형으로 꾸며져 있다. 사랑채의 날개 부분이 짧게 구성되어 있어, 서쪽이 트여져 있다.

 

안채는 작은 부엌과 안방, 윗방, 2칸 대청이 있고, 그 끝에 골방을 - 자 형으로 배치를 했다. 꺾어진 부분에는 건넌방과 부엌을 두어, 이 건넌방이 집안 살림의 중심 역할을 한다. 현재는 노부부가 집을 관리를 하고 있으며, 이 부부 역시 부엌에 달린 이 건넌방에서 생활을 하고 있다.

 

사랑채 서쪽은 시원한 2칸 대청이 있고, 한편에는 부엌방과 큰 사랑이 반대편에는 작은 사랑방을 드렸다.

 

사랑채의 큰 사랑방. 부엌이 딸린 방은 앞으로 돌출이 되어 있다

 

안채에 거주하는 여인들을 보호한 사랑채

 

정원태 가옥의 특징은 바로 사랑채다. 그 규모는 안채보다도 충실하게 지어졌다. ㄴ자 형으로 지어진 사랑채는 부엌을 동쪽에 두고 부엌과 큰사랑, 대청, 작은사랑 순으로 꾸몄다. 이 사랑채의 특징은 시원하게 꾸며졌다는 것이다. 오른쪽에는 돌출된 방이 있고, 그 방 뒤로 부엌을 달았다. 안채에서 밖으로 나오지 않고, 사랑채의 부엌으로 드나들 수가 있도록 한 것이다.

 

행랑채 등이 없는 것으로 보아 집안에 부녀자들이 사랑채를 찾은 남의 눈에 뜨이지 않게, 사랑채를 드나들 수 있도록 배려를 한 것이다. 사랑채는 앞이 트여있어 전망이 좋다. 큰 사랑은 앞쪽과 대청 쪽에 문을 달아 바람이 잘 소통할 수 있도록 하였으며, 작은 사랑방 역시 같은 형태로 되어있다.

 

ㄴ 자로 지은 사랑채는 뒤편으로 돌아가면 서편쪽의 꺾인 부분을 짧게 처리를 하였다. 서쪽이 트여있어 안채의 답답한 점이 없게 꾸몄다.

 

안채는 ㄱ 자 형으로 꾸며 좌측부터 작은 부엌 사랑방, 대청, 골방을 - 자로 두고 꺾어진 부분에는 건넌방과 부엌을 드렸다.

 

사랑채의 앞쪽은 전체적으로 툇마루를 내달아 부엌방이 돌출된 곳까지 연결을 하였다. 사랑채는 원래 기와집이었다고 한다. 그 뒤 스레드로 지붕을 올렸다가, 현재는 초가로 하였다. 사랑채의 뒤편 서쪽 끝에 꺾어진 곳은 광으로 사용을 하고 있다. 전체적으로 보면 앞면은 -자로 되어있으며, 뒤편으로 돌아가면 ㄴ자형으로 지어졌다.

 

안채 툇마루 끝에 걸린 다락

 

정원태 가옥의 안채는 꺾어진 부분에 2칸 대청이 시원하게 자리를 잡고 있다. 앞쪽은 모두 툇마루를 두었다. 이 툇마루는 끝 작은 부엌의 위에는 다락을 만들었다. 다락은 방에서 출입을 하지 않고, 툇마루 끝에 문을 내어 그곳으로 출입을 하게 만들었다. 현재 살고 있는 분들의 이야기로는 잡동사니를 두는 곳이라는데, 방으로 들어가지 않고도 이용을 할 수 있어 편리하다고 한다.

 

툇마루 끝에 걸린 다락. 방안에서 출입을 하지 않고, 툇마루 끝에 문을 달았다. 다락의 밑에는 작은 부엌을 꾸몄다.

 

툇마루 끝에 달린 다락의 밑은 작은 부엌이다. 문이 달리지 않은 아궁이를 둔 이 작은 부엌은 고개를 숙여야만 드나들 수가 있지만, 휑한 곳에서 바람을 맞지 않도록 꾸며졌기 때문에 오히려 아늑함을 준다. 정원태 가옥을 둘러보면 부녀자들이 살림을 하는 데 있어, 가장 짧은 동선으로 움직일 수 있도록 하였다.

 

동쪽 밖의 담장과 안채의 사이에는 텃밭을 만들었다. 그런 것들이 이집을 지을 때 살림을 하는 사람들에게, 가장 편한 공간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투박한 굴뚝이 정감이 간다. 마치 거대한 함포와 같은 모습이다.

 

돌로 꾸며 놓은 배수로도 이 집을 아름답게 보이는데 일조를 하고 있다

 

함포와 같은 굴뚝, 투박하지만 정감이 있어

 

정원태 가옥을 들러보다가 뒤뜰로 갔다. 그곳에서 투박한 굴뚝을 보고 웃음을 터트렸다. 그 곳에 함포가 서 있기 때문이다. 황토로 옹기처럼 만들고 그 위에 굴뚝을 세웠다. 그리고 굴뚝을 모두 백회로 발라놓았는데, 그 모습이 흡사 거대한 함포처럼 보인다. 이렇게 투박한 굴뚝들이 더욱 정감이 가는 것은, 그 굴뚝과 초가와의 조화 때문인 듯하다.

 

이 집은 배수가 잘 된다고 한다. 높은 곳에 자리하고 있어 물이 차는 법은 없겠지만, 돌로 만들어 놓은 배수로가 집안에 드는 물을 빠르게 밖으로 빠져 나가게 하였다. 사랑채와 안채의 뒤에도 돌로 꾸민 배수로가 있다. 이렇게 돌로 꾸며 놓은 배수로가 이 집과는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다. 결국 이 모든 것 하나하나가 집을 더 아름답게 만들고 있다.

 

정원태 가옥의 문은 크지 않다. 담장에 일각문으로 만들어 놓은 초가지붕의 대문이 멋스럽다.

 

 이 집을 찾아갔을 때 사랑채 곁에 놓인 디딜방아도 정원태 가옥의 아름다운 모습을 연출하는데 일조를 하고 있었다.

 

정원태 가옥의 대문은 일각문이다. 아마 마을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하고 있고 주변이 훤히 트여있어, 대문으로 인한 무거움을 굳이 원하지 않았는가 보다. 담 장 사이에 붙어있는 일각문도 초가를 얹어 운치를 더하고 있다. 사랑채의 곁에 놓인 디딜방아 공이가 여유를 보이는 것도, 이 가옥의 또 다른 모양새가 아닐까 한다. 초가이면서도 품위를 잃지 않고 있는 정원태 가옥. 일생에 한 번 쯤은 살고 싶은 곳이기도 하다.

고택답사를 하면서 가장 기분 좋은 것은 역시 한 곳에 많은 고택이 몰려있는 곳을 방문했을 때다. 경주 양동마을이 그렇고 순천 낙안마을이 그랬다. 온양 민속마을도, 강원도 고성에 있는 마을도 그랬다. 그런 곳을 방문하면 내 눈빛이 달라진다는 것이 동행한 사람들의 이야기다.


내가 그렇게까지 고택답사에 열을 올리는 까닭은 그 안에 우리의 삶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손 때 묻은 우리의 역사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것들을 다 잊어버리고 사는 요즈음, 그 하나의 작은 것들이 새삼스럽게 소중하게 가슴에 와 닿기 때문이다. 벌써 전국에 있는 고택을 돌아본 것이 그동안 200여 채는 됨직하다.

 


특별환 날에 나선 답사, 수지맞았다


남들이 특별한 날이라고 하는 날도, 난 탑사를 떠났다. 그들이 말하는 생일이나 회갑이나 하는 날이, 나에게는 특별한 날은 아니라는 생각이다. 그저 내가 살아가는 일상의 연장일 뿐이다. 그런 날 오히려 문화재 답사 한 곳이라도 더 해야 한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이런 나를 두고 '이상한 사람'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그 이상함이 사실은 지극히 정상이다. 우리가 지켜야 할 우리 것을 찾아나서는 길이 '이상하다'는, 그 사람들이 오히려 내가 보기에는 이상할 뿐이다. 제천시에 있는 청풍문화재단지. 이곳을 몇 번이나 들렸지만, 그렇게 고가들이 있었는데도, 지금까지는 사진 몇 장으로 지나쳐버렸다.

 

뒷간

이번 답사에는 마음을 먹고 떠난 길이라, 세세한 것까지 보고 오리란 생각으로 들렸다. 오후 시간이라, 특별한 날 점심도 못 먹고 사진만 찍고 있는 나에게 '정신 차리라'는 일행. 그러나 난 정신을 놓은 것이 아니다. 오히려 배가 고픈 것을 잊을 만큼, 그 작은 아름다움에 빠져들었다.


시골의 양반집인 청풍 황석리 고가


청풍문화재 단지 안에는 모두 4채의 고가가 있다. 이 고가들은 충주 다목적댐의 건설로 인해 수몰이 된 문화재 중에서, 청풍면 일대에 있던 중요문화재를 1983년부터 옮겨 문화재단지를 조성한 곳이다. 황석리 고가는 청풍면 황석리에 있던 조선말기의 목조가옥이다. 수몰지역에 있던 것을 1985년 문화재단지로 이전하였다.

 

 

대문채

청풍문화재단지를 들어서면 우측으로 4채의 고가가 자리를 잡고 있는데, 제일 먼저 만날 수 있는 집이 황석리 고가이다. 대문을 초가로 꾸민 황석리 고가는, 입구부터 옛 이야기가 물씬 풍길 것만 같다. 


황석리 고가는 조선시대 시골 어디서나 볼 수 있는 그러한 평범한 집이다. 초가로 지어진 대문채는 크고 작은 강돌을 이용해 아름다운 문양을 만들었다. 벽도 이중으로 된 심벽으로 되어있다. 대문을 들어서면 좌측으로 대문채의 방문이 있다. 적기는 해도 양반집이니 당연히 머슴이 있었을 터. 아마 이 방에서 밤새 새끼라도 꼬다가, 주인영감이 들어오면 문을 얼어주고는 했을 것이다. 그래서 방문이 대문 쪽으로도 나 있다. 비교적 원형을 잃지 않고, 방위까지 수몰되기 전 모습 그대로 옮겨왔다는 황석리 고가다.

 

 

안채

 

4칸의 일자형 양반집, 편의를 생각해 짓다


황석리 고가의 특징은 좁은 마당을 적절하게 잘 이용했다는데 있다. 4칸 규모의 일자형 안채는 부엌, 안방, 윗방, 사랑방으로 꾸몄다. 그런데 부엌을 들어가는 입구에 뒤주 간을 만들었다. 또한 안채의 앞에 놓은 마루에서 밖으로 신을 신고 나가지 않고, 바로 부엌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마루와 부엌이 연결되는 곳에 문을 내었다. 부녀자들이 어려운 살림살이에서 움직여야 하는 동선을, 최대한 줄이려고 노력한 흔적이 집안 곳곳에 배어있다.


황석리 고가의 또 하나의 특징은 사랑채와 안채가 붙어있다는 점이다. 일자형으로 길게 구성이 되어있는 황석리 고가는 안방과 윗방, 사랑방의 앞에 모두 마루를 깔았다. 사랑채와 안채의 구별이 되지 않는 일자형 집에서 흔히 보이는 형태이다.

 

 


오밀조밀한 부엌, 그래도 명색이 양반집인데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84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황석리 고가에는 흔한 헛간채나 광채가 없다. 그러다보니 여기저기 헛간을 대신할 공간을 꾸며 놓았다. 명색이 양반집인지라 함부로 밖에 늘어놓을 수는 없었는지, 부엌의 한편을 헛간으로 사용을 했다. 부엌문을 열고 들어서면 좌측 초입에 헛간에 둠직한 소쿠리며 농기구 등을 정리해 놓았다.


이런 것도 알고 보면 일석이조의 효과가 있다. 부엌은 불을 떼는 곳이므로, 늘 불기운이 있어서 건조가 잘된다. 농기구나 소쿠리 등을 부엌에 두면, 녹이 슬지도 않을 뿐더러 습기가 차지 않아서 좋다. 작은 집이라고 하지만 나름대로 이점도 있다. 황석리 고가는 이러한 점을 최대한 활용을 한 기능성 맞춤집이다.  

 

 


또 하나 황석리 고가에서 볼 수 있는 부엌의 특징이 깊은 부엌이다. 그래서인가 까치구멍을 나뭇조각으로 막지를 않고, 그냥 통으로 구멍을 냈다. 깊은 부엌이 위에서 부는 바람을 아래까지 들어오지 않도록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것들도 이 가옥의 특이한 건축법의 하나이다. 그저 평범한 고택인 듯하지만 꼼꼼히 따져보면 재미난 것이 많은 것도 황석리 고가가 주는 또 하나의 즐거움이다.


'이집은 잘 살던 집이 아닌가봐'라는 관광객의 말에 뒤를 돌아본다.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만, 이집 주인이 청렴한 양반이었다는 생각은 하지 못한 것일까? 그저 크기와 호화로움 만으로 가치를 따지려는, 요즈음의 사람들이 조금은 불쌍해 보이기도 한다. 자연과 더불어 살줄을 모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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