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집에서 400년간이나 초당두부를 만들었다고
강릉시 운정동에 가면 초당두부집들이 줄지어 있다. 그 곳에는 보물 제183호로 지정되어 있는 정자인 ‘해운정’이 자리 잡고 있어, 정자의 풍취를 느끼게 해준다. 그 해운정과 낮은 담을 사이로 두고 집이 한 채 자리하고 있다. 바로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79호인 강릉 심상진 가옥이다. 이 집은 17세기에 건축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초당은 조선 광해군 때 강릉지역에 삼척부사로 역임한 허엽(1517~1580)의 호이다. 허엽은 허난설헌과 허균의 부친이다. 초당 허엽은 집 옆의 맛 좋은 샘물로 콩을 가공하고, 경포호의 깨끗한 바닷물로 간을 맞추어 두부를 만들었다고 한다. 이렇게 만든 두부의 맛이 좋기로 소문이 나자, 사람들은 앞을 다투어 두부를 만들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 때부터 허엽은 두부에 자신의 호인 ‘초당(草堂)’을 붙이도록 하였다는 것이다.
보물 해운정과 담 하나를 사이에 둔 가옥
초당 허엽이 초당두부를 처음 만든 것은 500년 전의 일이다. 그로부터 100여 년이 지난 뒤 운정동에 있는 심상진 가옥의 주인도 초당두부를 만들기 시작했다고 한다. 1월 30일 강릉지역을 답사하다가 오랜만에 해운정에 들렸다. 강릉을 갈 때마다 해운정에 들리는 이유는, 정자로서의 남다른 품위를 지키고 있기 때문이다.
해운정을 돌아보다가 시간을 보니 점심을 먹을 시간이 한참이나 지났다. 답사를 하다가보면 언제나 때를 놓치기 일쑤다. 그래도 이렇게 바로 옆에 끼니를 때울 수 있는 집이 있다는 것은 여간 반가운 일이 아니다. 초당두부야 언제나 입맛을 즐겁게 한다. 더욱 해운정 바로 옆 심상진 가옥에서 하는 초당두부는 딴 곳에서는 느낄 수 없는 깔끔한 맛이 일품이다.
그러니 어찌 이곳을 마다하고 길을 나설 것인가? 먹을 것을 앞에 두고 답사를 한다는 것은 여간 고역이 아니다. 더구나 밥 때를 앞에 두었다면 더할 것이다. 그래도 이왕 이것을 왔으니, 심상진 가옥부터 찬찬히 둘러보기로 마음을 먹는다.
담장이 없는 ㅁ 자 형태의 집
심상진 가옥은 담장이 없다. 아마도 이런 풍광에 집을 짓는다면, 굳이 담장을 둘러야 할 필요가 없을 것도 같다. 담장이 없는 ㅁ 자 형태의 집이면서도, 나름 고택의 정취를 잘 간직한 집이다. 집 앞에는 ‘400년 전통’ 운운하는 현수막이 높다랗게 걸려있다. 심상진 가옥 바로 옆에 초당두부집은 운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이 아직도 살고 있어, 온기를 느낄 수 있는 심상진 가옥. 앞으로는 세 칸의 사랑채가 장대석 축대 위에 자리한다. 이 사랑채는 바로 옆에 있는 해운정과 더불어 정자와 같은 느낌을 받게 만든다. 세 칸의 사랑은 바라보면서 좌측 두 칸은 방으로 드리고, 우측 한 칸은 대청으로 드렸다. 강릉 지방의 대청은 일반적으로 문을 달았는데, 그것은 아마 해풍을 막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앞으로 퇴청 마루를 놓고, 뒤편으로는 수직으로 두 칸의 온돌방을 드렸다. 사랑채는 ㄴ 자형의 평면 팔작집으로 구성이 되어 있다. 앞으로 보이는 풍광을 느낄 수 있도록 구성을 한 사랑채. 특별한 꾸밈은 없지만, 나름 넓게 펼쳐진 경포호를 감상하기에는 적격이라는 생각이 든다.
전통 건축미를 볼 수 있는 집
사랑채와 연결이 되어 있는 중문은 굴곡이 있는 문턱을 달아내었다. 넓지 않은 집이면서도 멋을 부릴 만큼 부린 집이다. 중문을 들어서면 우측으로 사랑의 아궁이가 있고, 바람벽을 판자로 달아내었다. 그러나 그 바람벽조차 꽁꽁 싸매지 않았다. 심상진 가옥의 여유는 이런 것에서 발견할 수가 있다.
안채는 정면 다섯 칸, 측면 두 칸이다. 바로 옆 해운정이 중종 25년인 1530년에 강원도 관찰사인 심언광이 지었다는 것을 볼 때, 이 집은 심언광의 후손이 뒤늦게 지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기에 옆 해운정의 풍취를 넘어서지 않도록 지었다는 느낌이다. 아마도 담을 두지 않은 것도, 해운정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이란 생각이다.
안채를 바라보면서 좌측으로 부엌과 두 칸의 방을 두고, 그 옆에는 대청을 두었다. 대청 옆에는 한 칸의 방을 마련했는데, 이 방은 툇마루에 난간을 둘렀다. 아마도 이 방을 안사랑으로 이용한 것이란 생각이다. 사랑채에서 꺾어진 방 사이에는 일각문을 두어, 바깥출입을 할 수 있도록 배려하였다.
주변 경관을 해하지 않는 겸손함이 배어 있어
안채에서 달아 낸 곳간채는 중문과 연결이 되어, 전체적으로는 막힌 ㅁ 자의 집이다. 안채와 달아낸 곳간채 사이에는 일각문을 내어, 집안에는 중문을 포함해 모두 3개의 문이 있다. 집안에 거주하는 사람들의 동선을 최대한 편리하도록 꾸민 집이다. 안채의 앞으로는 넓지 않은 툇마루를 연결한 것도, 동선의 구성을 가장 편리하게 만들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심상진 가옥은 안채를 먼저 짓고 난 후 사랑채를 지었다고 한다. 옆에 두부집을 운영하면서 이 집에서 사람들이 생활을 하고 있기 때문에, 집안에는 온기가 배어 있다. 집을 한 바퀴 돌아본 후 맛보는 초당순두부. 그 담백한 맛은 기분 좋게 집을 둘러보았기 때문이란 생각이다. 답사를 하면서 가장 좋을 때는 소중한 문화유산을 둘러 본 후, 입맛에 맞는 음식을 먹을 때가 아닐 런지. 그래서 난 아직도 속물이란 표현을 마다하지 않는다.
99칸 선교장, 둘러보면 이런 재미가 있다.
강릉시 운정동 431번지에 소재한 선교장은 중요민속자료 제5호로 지정이 되어있다. 이 선교장은 조선 후기의 전형적인 상류주택으로, 효령대군의 11대손인 전주사람 이내번이 1703년 이곳으로 이주하면서 지은 집이다. 99칸 집이라고 강릉사람들이 이야기를 하는 집을 ‘선교장(船橋莊)’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뱃머리와 같은 형태의 터에 자리를 잡았다고 붙인 이름이다. 선교장은 안채, 사랑채, 행랑채, 별당, 정자 등 상류민가의 전형적인 형태라고 한다.
현 선교장의 건물가운데 1700년대 초에 건립된 안채는 이내번이 지었으며, 이 안채는 선교장의 건물들이 비교적 화려한데 비해 가장 서민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 안채의 오른쪽으로 연결이 되어있는 바깥주인이 사용하는 별당건물인 동별당은, 이근우가 1920년에 지은 'ㄱ'자형 건물이다. 또한 담장 안에 자리한 열화당은 사랑채로, 순조 15년인 1815년에 이후가 지었다.
많은 사람들이 찾아드는 선교장
설을 며칠 앞둔 1월 30일에 찾아간 선교장. 연신 영하 10도 밑으로 내려간 날씨가 강원도는 그래도 나은 편이다. 그래서인가 선교장 안에는 많은 사람들이 찾아들었다. 10대 300년에 걸쳐 대를 이어 살아가고 있는 전통가옥. 선교장은 낮은 산기슭을 배경으로 각각의 건물들을 배치하고 있다. 각 건물들은 모두 떨어져 구성을 하였으며, 일각문이나 담 등으로 구분이 되었다. 안으로 들어가면 다 연결이 되어있는 듯하지만, 그 건물들은 각각 떨어져 있다는 점이 특이하다.
선교장은 여러 대에 걸쳐서 보수가 되고 새로 증축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그 모든 건물들은 처음부처 그 자리에 있던 것처럼 보인다. 그만큼 건물 하나를 지으면서도 기존의 건물을 염두에 두었다는 뜻이다.
“입장료 내고 들어왔는데 볼 것이 없네.”
“그러게 어디를 가나 다 볼 수 있잖아. 서울 가면 이런 집 천지인데”
선교장을 배경으로 연신 사진을 찍고 있던 사람들의 말이다. 볼게 없다는 말에 어이가 없다. 물론 서울에 가면 볼 수 있는 궁궐에 비교를 할 것인가? 하지만 우리 고택은 아무리 작은 집이라고 해도 그 집에서 느끼는 재미가 있다. 그런 점을 찾아내지 못한다면, 아무리 둘러보아도 재미를 느낄 수가 없다.
1703년 이내번이 제일먼저 지었다는 안채(위)와 공부장으로 사용한 서별당(가운데) 그리고 집안으로 들이는곡식을 받던 '받재마당'이 있는 연지당(아래)
‘이런 것을 모르면 재미없지’
‘문화재는 아는 만큼 보인다.’고 한다. 문화재를 볼 때는 미리 안내판을 찬찬히 둘러보는 것이 중요하다. 그렇지 못하면 무엇이 무엇인지 알 수가 없기 때문이다. 선교장을 가면 먼저 이런 것을 눈여겨보아야만 한다. 우선은 미로처럼 길이 나 있는 선교장의 일각문은 모두 몇 개인가를 세어보는 재미이다. 건물과 건물을 연결하는 일각문의 개수를 아이들과 함께 세어보는 것은 또 다른 재미이다.
선교장은 건물마다 그 쓰임새가 다르다. 그리고 선교장을 돌아보면 장대석으로 축대를 쌓고 그 위에 올린 건물과, 그 아래 있는 건물의 용도를 알아보는 것도 재미있다. 집 전체에 있는 굴뚝의 개수를 알아보는 것이나, 일각문을 사이로 각 건물들에 따른 아래채의 방의 개수, 그 방의 용도를 알아보는 것 등도 선교장의 둘러보는 재미를 더해준다.
선교장의 사랑채인 열화당(위)과 여운형 선생이 영어를 가르쳤던 영동지방 최초의 사립학교였던 동진학교로 사용이 되었던 곳간채
우리 문화재를 둘러보는 재미는, 그 어떤 것에도 비교를 할 수가 없다. 이런저런 것들을 알아가는 재미 또한 쏠쏠하다. 특히 고택 답사를 할 때는 그 집이 자리를 한 지형이나, 그 지역의 풍속 등을 알아보는 것도 중요하다. ‘어디를 가나 다 있다’라는 말처럼 우리 문화재에 대한 무시는 없다. 고택구경, 아이들에게 무엇을 알려줄 것인가를 미리 준비하는 마음이 중요하다.
오죽헌에 가면 무얼 보니? 난 나무를 본다.
강릉시 죽헌동 201번지에 소재한 오죽헌은 보물 제165호로 지정이 되어있다. 오죽헌은 신사임당(1504∼1551)과 아들 율곡 이이(1536∼1584)가 태어난 유서 깊은 집이다. 지금은 5만 원 권의 인물로 모든 사람들이 알고 있는 사임당 신씨는, 뛰어난 여류 예술가였다. 신사임당은 모든 여성들의 근본이 되는 여인으로, 현모양처의 본보기가 되는 인물이다. 사임당의 아들인 율곡 이이는, 조선시대 퇴계 이황과 쌍벽을 이루는 학자로 명성을 날렸다.
오죽헌은 조선시대 문신이었던 최치운(1390∼1440)이 지은 집이다. 규모는 정면 3칸에 측면 2칸이며, 지붕은 팔작지붕이다. 정면에서 오죽헌을 바라보면 왼쪽 두 칸은 대청마루로 사용했고, 오른쪽 한 칸은 온돌방으로 만들었다. 오죽헌은 우리나라 주택 건축물 중에서 비교적 오래된 건물 가운데 하나로 손꼽히며, 유서 깊은 역사를 가진 건물이다.
보물 제165호로 지정이 된 강릉 오죽헌
조촐한 집에서 인물이 태어나다.
오죽헌은 조선 초기에 지어진 별당건물이다. 이 오죽헌의 오른쪽 방은 신사임당이 용이 문서리에 서려있는 꿈을 꾸고, 이율곡을 낳은 방이다. 방문 위에는 ‘몽룡실’이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꿈에 용을 보았다는 것이다. 왼편에 있는 마루방은 율곡 이이가 6살 때까지 공부를 하던 방이다.
오죽헌은 정면 세 칸으로 지어진 집이다. 이단의 장대석 기단을 놓고, 그 위에 덤벙주초를 사용해 기둥을 세웠다. 왼편 두 칸 마루방 안에는 오죽헌이라는 현판과 더불어, 수많은 편액들이 걸려있다. 그만큼 오죽헌에는 많은 사람들이 들려간 듯하다. 두 칸으로 된 측면을 돌아서면, 몽룡실 뒤편에는 마루가 놓여있다. 작은 별당이지만, 쓰임새를 생각해서 지은 집이다.
난 오죽헌에 가면 나무를 본다.
매년 한 번 이상은 들리는 오죽헌이다. 갈 때마다 그 분위기가 달라지는 오죽헌이 재미있기 때문이다. 오죽헌 안에는 세 그루의 나무가 서 있다. 백일홍이라고 부르는 ‘배롱나무’와 ‘소나무’ 그리고 천연기념물로 지정이 된 ‘홍매화’이다. 이상하게 오죽헌을 들리는 시기가 늦은 가을부터 초봄 사이였으니, 아직 한 번도 이 나무들이 실하게 꽃을 피운 것을 본 적이 없다. 아마도 인연이 닿지 않는 것은 아닐까?
항상 오죽헌에 들려 돌아보는 이 세 가지의 나무는 각각 의미가 남다르다. 돌계단을 올라 오죽헌으로 들어가는 문을 들어서면, 좌측에 배롱나무가 서 있다. ‘사임당 배롱나무’라고 명명하는 이 나무는 강릉시의 시화(市花)이기도 하다. 배롱나무는 백일홍이라고도 부르는데, 이는 100일간이나 꽃을 피우고 있기 때문이다.
신사임당 배롱나무라고 부르는 수령 600년의 백일홍과 율곡송(아래)
이 배롱나무의 원줄기는 고사했다. 현재의 나무는 원줄기에서 돋아 난 싹이 자란 것이다. 그 수령은 이미 600년이 넘었다고 한다. 이 나무의 수령을 보니, 신사임당과 율곡 이이가 이 나무를 바라보면서 살았을 것이다. 아마 봄 날 공부를 하다가 나른해지면 이 배롱나무를 쳐다보면 기지개라도 켜지 않았을까?
천연기념물인 홍매화인 율곡매
오죽헌의 옆에는 매화나무 한 그루가 자라고 있다. 천연기념물 제484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매화나무는 수령이 600년이 지났다. 1400년대 경에 이조참판을 지낸 최치운이 오죽헌을 건립하고 이 나무를 심었다고 한다. 이 율곡매는 신사임당과 율곡 이이가 직접 관리를 했다고 전해진다.
오죽헌을 짓고 난 후 최치운이 심었다는 매화나무. 이 나무는 천연기념물로 지정이 되어있으며, 신사임당과 율곡 이이선생이 관리를 했다고 한다.
신사임당은 매화나무를 잘 그렸다. 맏딸의 이름을 ‘매창(梅窓)’이라 지을 만큼 매화를 사랑했다. 이 매화나무는 높이 7m, 땅위의 줄기둘레는 2m 가까이 되는 고목이다. 이 매화나무를 돌아보고 난 후, 끝으로 찾아본 것은 바로 ‘율곡송’이다. 이 세 나무를 돌아보는 즐거움은 오죽헌이라야 누릴 수 있는 행복이다.
600년이라는 긴 시간을 그 자리에 서 있는 오죽헌. 그리고 수령 600년인 배롱나무와 매화나무. 그런 오랜 세월을 간직한 것들이 있어. 오죽헌의 나들이가 또 다른 즐거움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첩첩산중 너와집은 어떻게 생겼을까?
흔히 너와집이라고 하면, 먼 옛날이야기에 나오는 집이 생각난다. 그것은 그 집의 분위기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와가나 초가와는 사뭇 다르기 때문이다. 강원도 삼척시 도계읍 신리에 가면 너와집이 몇 채 중요민속자료로 지정이 되어있다. 그 중 김진호 가옥을 찾아 너와집의 이모저모를 알아본다.
우선 너와집이란 그 지붕의 재료가 나무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너와’란 널판으로 만든 기와로 풀이를 할 수 있다. 산간지역에서 흔히 구할 수 있는 소나무나 전나무 등을 길이 40~70cm, 혹은 80~110cm 정도로 자르고, 그것을 폭 30cm, 두께는 3~5cm 정더러 자른다. 그렇게 자른 널빤지 형태가 바로 너와가 되는 것이다.
150년 전에 지어진 김진호 가옥
정면과 측면이 각각 3칸 정도인 김진호 가옥은 150년 전에 지어진 집이다. 지금은 사람이 살고 있지 않지만, 집은 말끔하게 수리가 되었다.(올 초에 답사를 했을 때는 낡은 곳이 보였다) 너와집은 방의 담벼락을 뺀 나머지 벽은 모두가 나무로 만든 판벽이다. 아마 이곳의 땅들이 돌이 많다보니 흙보다는 오히려 나무를 채취하기가 수월하기 때문인 듯하다.
지붕은 안에서 보면 하늘이 드러나 보일 정도이다. 그러나 나무를 이리저리 맞물려 놓아 큰 비가 아니면 그렇게 새지는 않는다고 한다. 또한 굴피나무 껍질을 벗겨 그 안에 덥기 때문에 비가 새지 않는다는 것이다. 지붕은 너와를 이은 다음 긴 나무를 얹어 고정을 시킨다. 기와 아래는 역시 둥근 통나무로 서까래를 사용한다.
지붕을 올린 모습(위), 지붕 밑의 서까래(가운데) 그리고 집안에서 올려다 본 지붕
실내는 보기보다 온기가 돌아
밖으로는 대문 옆에 화장실이 있다. 돌출된 이 화장실 안으로는 외양간이 자리한다. 대문은 중앙에 자리하고 있는데, 문은 좁은 편이다. 바람을 막기 위해서 일부러 문을 작게 만든 듯하다. 안으로 들어가면 좌측에는 외양간이 있고, 우측으로는 부엌이 있다. 부엌은 별도의 문이 없으며, 대문을 들어서면 바로 부엌으로 출입을 할 수가 있다.
대문 옆에 자리한 화장싱(위) 대문, 그리고 집안에 있는 옛 기물(아래)
방은 모두 세 개로 들어서면서 좌측에는 사랑방이 있고, 별도의 판마루가 깔려있다. 가운데는 샛방이 있다. 부엌 뒤편으로 안방이 있으며, 그 앞에 마루를 놓았다. 판자벽에는 사방에 문을 내어 습기가 차는 것을 막았다. 이 집에는 과거에 사용을 하던 싸리로 역은 후 방충효과를 위해 쇠똥을 발라 곡식을 저장하는 채독이 있다. 그리고 그 옆에는 피나무 속을 파내 나무통을 만들어 무나 배추를 저장하는 김치통이 있다.
실내에 들어가면 밖에서 보는 것과는 또 다른 아늑함이 있다. 아마 불씨를 보관하는 ‘화터’기 아궁이 옆에 있기 때문인가 보다. 밖으로 나 있는 문은 대개 조그맣게 내었는데, 이것은 산간지방의 매서운 겨울 추위를 피할 수 있도록 한 것으로 보인다.
요즈음에는 일부러 너와집을 찾아 민박을 하고, 너와집의 체험도 한다고 한다. 하지만 예전 이곳에서 실생활을 하던 분들은 불편했을 것도 같다. 우리의 전통가옥의 한 형태인 너와집. 중요민속자료 제33호로 지정이 되어 있는 너와집의 또 다른 모습을 찾아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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