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천군 대병면 회양리에는,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102호인 송호서원이 자리하고 있다. 이 서원은 고려 중기의 인물인 충숙공 문극겸 선생을 배향한 곳이다. 8월 20일 비가 내리는 날 다녀온 답사에서, 가장 애를 먹고도 제대로 사진조차 찍지 못한 곳이다. 관리인도 없고, 관리사는 텅 비어 금방이라도 무엇이 튀어나올 것만 같다,

일각문은 새로 보수를 한 듯한데, 배부른 고양이가 뛰쳐나가는 바람에 덩달아 놀랐다. 담장 밖에서 여기저기 사진을 찍으려니 답답하기만 하다. 그래도 서원만 겨우 몇 장 사진을 찍고, 뒤편 사당은 아예 오를지조차 못했다. 비가 왔는데 잡풀이 발목을 넘게 자라, 온통 신발 안으로 물이 쏟아져 들어온다.



합천군 대병면 회양리에 소재한,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102호인 송호서원. 계단에는 관리를 하지 않아 풀이 가득 자라나 있다.

문무를 겸비한 문극겸 선생

문극겸(1122 ~ 1189) 선생은 고려시대 중기의 문신으로, 자는 덕병, 본관은 남평이다. 여러 번 과거에 낙방을 한 선생은, 의종 때 문과에 급제하였다. 좌정언으로 있을 때 의종의 총애를 받던 내시 백선연 등의 잘못을 비판하는 상소를 했다가, 의종의 노여움을 사 좌천되었다.

드라마 무인시대로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진 문극겸 선생은, 의종이 선생의 상소가 정당한 것임을 알고 복관시킨 뒤 벼슬을 올려주기도 했다. 1170년 정중부 등 무신들이 정권을 잡아 명종을 왕위에 앉히고 문신들을 마구 처벌하였는데, 그는 무신정변의 주역인 이의방의 인척인 점으로 무사히 살아났다. 선생은 이의방과 가까운 점을 활용하여 이때 이공승 등 많은 문신들을 구해 주기도 했다.



비가 내리는 날 찾아갔는데 서원 앞마당에는 풀이 발목을 덮어 물이 신 안에 가득고였다(위) 문이 잠겨져 있어 담 밖에서 촬영을 하였다.

원래 문신인 선생은 무신들과도 원만한 관계를 가져, 문무의 주요 관직을 두루 거쳤다. 후에는 최세보 등과 함께 고려 『의종실록』을 편찬하였다. 이의방의 사돈인 선생은, 이의방의 동생인 이린, 이거의 장인이기도 하며 조선 태조 이성계의 7대 외조부이기도 하다.

두 번이나 퇴락한 송호서원, 아직도 끝나지 않았나?

비를 맞으며 여기저기를 돌아본다. 원래 송호서원은 1777년에 삼가현 역평에 세워졌던 것이다. 그러나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폐지가 되었다가, 1957년에 사우 등이 복원되었다. 그런 송호서원은 합천댐의 공사로 인해 수몰지역에 있던 것을, 현재의 자리로 옮겨 이건한 것이다.



일각문과 담장을 새로 보수를 하였다.(위) 그러나 관리동은 비어있고, 마루에는 말벌집이 떨어져 깨져 있다. 말벌이 즐비하게 죽어있다. 

두 번이나 새롭게 자리를 튼 송호서원. 계단을 올라 솟을삼문을 촬영하려고 하는데, 마당에는 풀이 가득하다. 계단을 올라가니 문은 굳게 닫혀있다. 비에 젖어가면서 옆으로 돌아가니 관리사인 듯한 집이 있다. 그러나 퇴락한 집은 금방이라도 무엇인가 튀어 나올 것만 같다. 마루에는 말벌집이 떨어져 으깨어져 있다.

죽어있는 말벌들을 보니, 누군가 약으로 말벌을 죽인 듯하다. 이왕 말벌 집을 떼었으면 청소라도 좀 해 놓던지. 질퍽거리는 땅, 그리고 자라난 잡풀들. 송호서원은 그렇게 또 한 번의 퇴락을 거듭하고 있었다. 뒤돌아 나오려는데 배부른 고양이 한 마리가 울어댄다. 아마도 갈 곳 없어 이곳에 묵는 녀석이지만, 녀석도 이렇게 퇴락해 가고만 있는 서원이 안타까운 모양이다.

경남 산청군 금서면 화계리 산16번지에는 가야 제10대 임금인 구형왕의 무덤으로 전해지고 있는 돌무덤 한 기가 자리하고 있다. 구형왕은 ‘구해(仇亥)’ 또는 ‘양왕(讓王)’이라고도 하는데, 김유신의 증조할아버지이기도 하다. 521년 가야의 왕이 되어, 532년 신라 법흥왕에게 영토를 넘겨줄 때까지 11년간 왕으로 있었다.

산청은 원래 돌이 많은 곳이다. 산청에서 나오는 수석을 제일로 치는 것도 이런 연유에서이다. 이 돌무덤은 그동안 석탑이라는 설과 왕릉이라는 두 사지 설이 분분했던 곳이다. 이곳을 석탑으로 보는 이유는 층계로 되어 있고, 그 중간에 감실이 있기 때문이란 생각이다. 또 하나 왕릉으로 보는 이유는 『동국여지승람』 <산음현 산천조>에 ‘현의 40리 산중에 돌로 쌓은 구룡이 있는데 4면에 모두 층급이 있고 세속에는 왕릉이라 전한다.’라는 기록이 있어서이다.


사적으로 지정된 산청의 구형왕릉 무덤과(위) 구형왕릉 입구 정경


한 유생에 의해 확인된 구형왕릉

이 외에도 여러가지 기록에 의하여 이 돌무더기를 왕릉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이 무덤에 왕명을 붙인 기록은 조선시대 문인인 홍의영의 『왕산심릉기』에 처음 보이는데, 무덤의 서쪽에 왕산사라는 절이 있어 절에 전해오는 『왕산사기』에 ‘구형왕릉’이라 기록되었다고 하였다.

조선조 정조 11년인 1798년 이 왕산사기를 읽은 산청유생 민경원이, 마을 사람들과 같이 왕산 기슭에서 기우제를 지내고 하산하던 중, 비를 만나 왕산사로 비를 피해 들어갔다가 나무상자 속에서 왕산사기 수정암기와 구형왕과 왕비의 영정, 녹슨 칼, 좀이 먹은 비단 옷, 활 등이 있어, 이 돌무덤이 수형왕릉으로 밝혀졌다고 한다.


능을 보호하는 사람들이 묵는 호능각을 들어가는 일각문과(위) 호능각


잡석을 이용해 쌓은 구형왕릉

현재 사적 제214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구형왕릉은 일반적인 봉토무덤이 아니다. 산청에서 많이 나는 돌을 이용해 비탈에 층단을 이용해 조성하였다. 석조무덤의 전체 높이는 7.15m로 비탈에 층단을 쌓고, 그 위에 둥글게 석조 봉분을 올린 형태이다.

이 구형왕의 릉 위로는 새가 날지 못하며, 나무뿌리와 심지어는 칡넝쿨도 뻗지 못한다고 한다. 8월 13일에 찾아간 구형왕릉. 관람객 몇 사람이 능에서 나온다. 능의 입구는 홍살문으로 하고 중간에 솟을삼문을 내었다. 그러나 그곳보다는 무지개다리를 건너 들어가는 것이 더 운치가 있다. 계곡으로 흐르는 물소리를 귓전에 들으며 두 개의 무지개다리를 지나면, 왕능을 지키는 ‘호능각’이 있다. 일각문을 들어서면 누각이 있고, 그 안으로 들어가면 왕릉을 만난다.


능 앞에 서 있는 문무인석(반대쪽에도 서 있다)과 석비


잡석으로 쌓은 석조 능침 앞에는 ‘가락국 양왕릉’이라 새긴 비석과 양편에 문무인석, 그리고 상석과 장명등, 사자석이 있다. 이는 1957년과 1970년에 조성한 것이다. ‘양왕’이라는 이름은, 구형왕 12년 가락국 개국 491년 만에 신라의 침공을 받았을 때, 백성을 지키기 위해서 싸우지 않고 나라를 선양한데서 붙여진 이름으로 보인다.

능 중간에 위치한 감실, 구형왕이 쉬어갔을까?

능 앞으로 가니, 그곳에 더 이상 올라갈 수 없다는 안내판이 놓여있다. 문화재 답사를 하는 나로서는 남들이 보거나 보지 않거나, 이런 것을 지키려고 노력을 한다. 그런데 능 중간에 이상한 것이 보인다. 바로 커다란 돌을 이용해 만든 구멍이다. 이 구멍은 가로, 세로 40cm에 깊이가 68cm인 감실이라는 것이다.


잡석으로 비탈진 곳을 이용하여 층이지게 쌓은 구형왕능의 모습


이 감실의 용도는 신주를 모시거나, 등잔을 두기 위한 것으로 추정된다. 아마 이 등잔이 현재 능 앞에 조성된 장명등의 역할을 했을 것이다. 이곳을 후손들은 ‘양왕의 영혼이 쉬어가는 곳’이라 하여서 신성시 하고 있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양왕의 능을 찾은 김유신이, 이곳에서 7년 동안이나 능침 곁에서 시능살이를 하며 활쏘기 연습을 했다는 것이다. 아마도 증조부인 양왕의 서글픈 죽음을 누구보다도 마음 아파했을 것이다.


능 윗부분의 둥근 봉분과 중간에 나 있는 영혼이 쉬어간다는 감실


한 나라의 마지막 임금이 된 양왕. 그 슬픔을 아는지 모르는지, 곁으로 난 등산로를 오르는 사람들은 무엇이 그리 즐거운지 연신 웃음소리가 그치지가 않는다. 역사 속의 아픔은 그렇게 세월 속에 묻히는 것인가 보다.

상연대, 해발 1279m의 백운산 정상 밑에 자리한 곳이다. 오죽하면 윗 상자(=上)를 써서 상연대라고 이름을 붙였을까? 8월 7일, 몸이 말이 아니다. 모처럼 맞는 휴일인데 비는 어지간히 쏟아진다. 아마도 이런 빗속에서 답사를 나갔다고 하면, ‘정신병자’가 아닌 다음에야 이해가 가질 않을 것이다.

아우 부부가 그래도 함께 동행을 하겠다고 넌지시 이야기를 꺼낸다. 못 이기는 척 나가고도 싶지만, 도저히 답사를 할 기운이 나질 않는다. 그래도 마음 한 구석에서는, 한 곳이라도 글을 쓸 곳을 찾아 나섰으면 하고 바라는 마음이 간절하다. 비는 점점 세차게 쏟아지는데, 가까운 곳을 찾아가겠다고 길을 나섰다.

비가 쏟아지는 날 찾아간 상연대에서 바라다 본 정경 

빗길에 찾아간 상연대, 자칫 뒤돌아 설 뻔

지리산을 넘을 대쯤엔 장대비가 쏟아지기 시작한다. 아무래도 오늘 답사는 무리인 듯하다. 그래도 다만 한 곳이라도 찾아가겠다고 마음을 굳게 먹는다. 함양으로 접어들어 상연대를 찾아 길을 접어든다. 도로변의 숲길이 아름답다. 하지만 그 숲길의 아름다움을 느끼기보다는, 상연대에 대한 기대가 더 크다.

상연대는 경남 함양군 백전면 백운리에 소재한다. 백전면 소재지를 지나면 백운리 대방마을에 도착한다. 그곳에서 길이 양편으로 갈린다. 왼쪽 길로 가면 묵계암과 상연대가 있고, 오른쪽으로 가면 백운암이 자리한다. 차 한 대가 겨우 지나갈만한 산길로 접어들었다. 조금 올라가니 여기저기 길이 갈라진다. 어디로 가야할까?

가파른 계단 위에 자리하고 있는 상연대

우선은 이름이 상연대라고 했으니, 산 위로 오르는 길을 택했다. 한참이나 오르니 묵계암이 나타난다. 묵계암을 지나쳐 상연대를 오르는 숲길이 아름답다. 내려서 사진이라도 한 장 찍으려는데, 아우가 말린다. 한 번 서면 그만이라는 것이다. 차는 힘이 들어 헉헉대며 쉬지 않고 산길을 오른다. 길에 가득한 낙엽이 미끄러워 운전을 하면서도 힘이 드는가 보다.

한참이나 산으로 올랐다. 인터넷에서 찾아본 자료에는, 묵계암에서 걸어서 10분 정도라고 되어있다. 그러나 차를 몰고 올라가도 10여분이 걸리는 가파른 길이다. 걸어서 10분이라는 말을 그대로 믿고 올랐다면 큰 낭패를 당할 뻔 했다.

깎아지른 비탈 위에 담장이 보인다. 그 밑에 주차장이 있다. 차 서너 대는 댈만한 공간이다. 차에서 내리니 바람까지 세차게 분다. 돌계단을 오르니 바람에 날아갈 듯하다. 그 위에 상연대가 자리를 하고 있는 것이다.


짐을 상연대로 나르기 위한 지게와 리프트

겨우 오른 상연대, 그러나 단청공사 중

주차장 한 편에 지게가 하나 덩그러니 서 있다. 아마도 이곳에서 짐을 지게에 지고 오르는가 보다. 축대 위에는 해우소 곁에 터진 담장사이로 오르는 리프트도 설치되어 있다. 그러나 풀이 가득한 것으로 보아, 사용한지가 오래인 듯하다. 계단을 오르는데 비바람이 더욱 거세진다. 백운산 정상 밑에 자리한 곳이라, 계곡을 치고 올라오는 바람의 세기가 장난이 아니다.

가파른 계단을 오르는데 다리가 후들거린다. 전날 음식을 잘못 먹어, 밤새 한 토사에 기운이 없기 때문이다. 겨우 우산에 이끌리다시피 상연대에 오른다. 그러나 이건 무슨 일인가? 온통 공사장이다. 단청공사 중이란다. 힘이 빠진 몸으로 이곳까지 겨우 올랐건만, 이런 낭패가 있나. 비바람이 세차서 사진조차 제대로 찍을 수가 없다.


상연대로 오르는 계단. 비바람이 거세 우산도 쓸 수가 없었다

구름도 비켜가는 상연대

상연대는 해인사의 말사로, 신라 말기인 경애왕 1년 924년에 세운 암자이다. 고운 최치원선생이 어머니의 기도처로 건립하여 관음기도를 하던 중에, 관세음보살이 나타나 ‘상연(上蓮)’이라고 하여 붙인 이름이라고 한다. 이곳은 신라 말의 구산선문 중 한 곳인 실상선문이 이곳으로 옮겨와 마지막 선문의 보루라고 전한다.

천여 년 동안 수많은 고승들을 배출했다는 상연대. 1950년 6,25 한국전쟁 때 불타버린 것을, 1953년경에 재건을 했다고 한다. 비는 더욱 거세진다. 바람소리까지 윙윙거릴 정도이니 더 이상은 서 있을 수가 없다. 법당 안은 구경도 못하고 돌아서는데, 빗속에 멀리 산들이 줄지어 선 광경이 시야에 들어온다.


단청 공사중인 상연대와, 상연대에서 내려다 본 주차장

날이 좋았더라면, 정말로 아름다운 경치를 보았을 것만 같다. 구름도 비켜간다는 상연대. 백두대간으로 연결되는 백운산 정상 밑에 서 있는 상연대는, 그렇게 비바람 속에서 숨을 죽이고 있다.

 사불산(四佛山) 대승사. 경상북도 문경시 신북면 전두리에 소재한 고찰이다. 대승사는 신라 진평왕 9년인 587년, 비단보자기에 쌓여 사면에 불상이 새겨진 바위가 공덕봉 꼭대기에 내려앉자, 임금이 바위 곁에 절을 세운 것이 창건 기원이다. 현재는 대한불교 조계종 제8교구 직지사의 말사로, 병풍처럼 둘러친 사불산의 자락 안에 자리한다.

『삼국유사』 권3 <사불산조>에 기록에 의하면 임금이 이 사면바위에 와서 절을 하고, ‘대승사’라 사액을 했다는 것이다. 이런 기록으로 보아 대승사라는 사명으로 전래한 것이, 벌써 1430년 정도나 된 고찰이다. 진평왕은 망명비구에게 사면석불에 공양을 올리게 하였는데, 망명비구가 입적을 한 후 무덤에서 한 쌍의 연꽃이 피어났다고 전한다.

자장으로 점심공양을 마치고 선방으로 돌아가시는 스님들

묵언수행’을 하는 대승사

7월 22일 금요일. 아침 일찍 대승사로 향했다. 3시간 30분을 달려 도착한 대승사. 몇 번이고 주변까지 찾아가 보았지만, 정작 대승사 일주문을 들어선 것은 처음이다. 작은 일주문 앞에는 ‘사불산 대승사’라고 적혀있고, 안쪽에는 ‘불이문(不貳門)’이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불이문을 지나니 넓은 주차장이 나타난다. 대승사의 살림을 맡아하는 원주스님이 마중을 나오셨다. 공양간 한편에서는 아궁이에 커다란 솥을 걸고 불을 끓이고 있다. 오랜만에 보는 아궁이다. 장작에 불이 붙어 활활 타오른다. 이 복중에 아궁이에 불을 때 공양을 지어야 한다니. 그래도 옛 정취가 있어 좋다는 생각이다.



대승사 일주문인 불이문과 주차장 위에 놓인 장독대

대승사에는 보물 제991호인 금동보살좌상과 보물 제575호인 목각탱부관계문서, 경북 유형문화재 제239호인 마애여래좌상과 유형문화재 제300호인 목조아미타여래좌상 등이 있다. 이 중 금동보살좌상은 공개를 하지 않고 있으며, 대웅전에 모셔진 후불탱화인 목각탱화는 전국에 있는 목각탱화 중 가장 섬세한 아름다움을 지닌 것으로 평가받는다.

이 목각후불탱화는 나무를 깎아 돋을새김을 하고, 중앙에는 광배와 연꽃을 새겨 넣었다. 그리고 별도의 나무로 깎은 아미타불이 안치되어 있다.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바라다만 보아도 대단한 작품이라는 느낌이다.




대승사 대웅전과 보물 목각탱화, 그리고 대웅전의 꽃창상과 대웅전 앞에 서 있는 향나무

이 목각탱화는 길이 3.6m, 폭 2.7m이다. 원래는 영주 부석사에 있던 것을 옮겨왓다고 한다. 아미타불을 중앙에 배치한 이 목각탱화는 좌우로 5단에 걸쳐 협시상을 배치하고 있는데, 좌우에 3구씩 4열에 맞추어 좌우대칭으로 배열하였다. 시간이 없어 사면바위와 마애불을 오르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쉽다. 다음번에 대승사를 방문했을 때는 그곳부터 들려보아야겠다.




대승사 꽃밭에서 만나 나비와 응진전, 그리고 응진전에 모셔진 나한상과 스님들이 수행을 하는 공간

짜장 한 그릇에 만족하는 스님들

공양간 앞에 놓인 동판을 친다. 나무망치로 치는 동판은 둔탁한 소리를 낸다. 여기저기서 스님들이 공양간으로 모여든다. 그리고 발우에 면과 짜장을 받아 섞는다. 한 그릇을 다 드시고 조금 부족하신 듯하다. 면을 더 넣어 드신 후 선원으로 돌아가는 스님들. 그 뒷모습이 참으로 한가해 보인다.



한 여름에 아궁이에 불을 때서 면을 삶아낸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수행이란 생각입니다

“잘 먹었습니다. 역시 스님이 만드신 것이라 그런가, 맛이 더 있는 것 같네요”

선원에 계신 스님들은 묵언 수행중이라 ‘맛있다’라는 말씀도 못하신다. 일을 보시는 스님이 오셔서 대신 말씀을 전하신다. 아마도 묵언 중이 아니시라면 꽤 많은 칭찬을 받았을 것을. 그렇게 공양을 하기 위해 찾아간 문경 대승사. 언젠가는 스님들의 생활을 소개할 수 있는 날이 올 수가 있을까? 점점 멀어져 가는 스님들의 뒷모습이 아른거린다.


공양을 준비하는데 곁에서 떠나지를 않는 대승사 견보살 백구. 스님들의 공양시간을 알릴 때 치는 동판. 그리고 스님들의 신발 

문경 봉암사. 일 년에 단 하루 ‘부처님오신 날’을 제외하고는 산문이 굳게 닫혀 열리지 않는 곳. 일반인은 들어갈 수 없는 유일한 절이기도 하다. 봉암사는 신라 헌강왕 때인 879년 지증도헌 국사가 창건하였다. 당시 심층거사가 대사의 명성을 듣고 희양산 일대를 희사하여 수행도량으로 만들 것을 간청하였다.

지증대사는 처음에 거절하다가 이곳의 지세를 둘러보고 "산이 병풍처럼 사방에 둘러쳐져 있어 봉황이 날개를 쳐 구름을 흩는 것 같고, 강물이 멀리 둘러 흐르니 뿔 없는 용의 허리가 돌을 덮은 것과 같다."며 경탄하며 "이 땅을 얻게 된 것이 어찌 하늘이 준 것이 아니겠는가. 이곳이 스님들의 거처가 되지못하면 도적의 소굴이 될 것이다." 라고 절을 지었다.


절의 창건을 마친 지증대사가 봉암사를 개산하여 선풍을 크게 떨치니, 이것이 신라 후기에 새로운 사상흐름을 창출한 구산선문 중 하나인 희양산문이다.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여러번 소실과 중건을 반복 한 봉암사는 1982년 6월 조계종단은 봉암사를 조계종 특별 수도원으로 지정하였다. 1982년 7월 문경군에서는 사찰 경내지를 확정 고시하고, 희양산 봉암사 지역을 특별 수도원으로 일반인의 출입을 막아 동방제일 수행 도량의 분위기를 조성하였다.



절집 안 땅을 밟기도 송구스럽다

아침 일찍 출발을 하여 문경으로 향했다. 문경 봉암사 입구에 도착한 시간이 오전 10시 30분경. 들어가는 입구부터 만만치가 않다. 그래도 안거 중인 스님들께 ‘스님짜장’보시를 하러 왔으니 어찌하랴. 닫힌 산문이 열렸다. 버스로 구불거리는 길을 들어간다.

경내로 들어가니 절 입구에는 통행금지 푯말이 여기저기 붙어있다. 100여명이 넘는 스님들이 안거 중인데도 소리하나 없이 조용하다. 마당을 둘러본다. 조그만 풀 한 포기 없이 말끔하다. 세속에 묻힌 때를 갖고 이곳 땅을 밟기조차 송구스럽다.



버스에서 짐을 내려 공양간으로 옮겨 놓고 절 경내를 돌아본다. 여기저기 아무렇게나 놓여진 널찍한 돌들. 그저 앉으면 자리가 된다. 계곡을 흐르는 물은 맑다 못해 푸르다. 한 여름의 더위를 식혀주기 위한 물소리가 암반 위를 흐르면서 경쾌한 소리를 낸다. 길가에 놓인 이끼가 가득한 돌. 그대로 자연이다.

돌아다니기조차 죄스럽다. 정말 조심스럽게 절 경내를 돌아본다. 어디 하나 군더더기가 없다. 깨끗하기가 이를 데 없다. 아마도 선원에 계신 스님들의 수행으로 인해서 인가보다. 봉암사 안에는 몇 점의 문화재가 있다.




봉암사 삼층석탑, 지증대사 적조탑, 지증대사 적조탑비와 극락전이 보물로 지정이 되어있다. 사진 한 장을 찍으면서도 죄스럽다. 오늘따라 셔텨 소리가 유난히 크게만 들린다. 금색전 쪽으로 지나다가 보니 입구 한편에 기와조각, 돌들이 모여져 있다. 돌 하나도 허투루 놓아두지 않는 곳이다.

경내를 한 바퀴 돌아 나오다가 피식 웃고 만다. 이 빈틈없는 봉암사 경내에서 돌절구 하나가 마당에 쓰러져 있다. 그 모습이 정감이 간다. 아마도 마음에 한 점 여유를 느끼고 싶으셨을까? 나중에 안 일이지만 비가 오면 물이 고여 썩으니, 일부러 쓰러트려 놓았다는 것이다. 수행자와 속인의 느낌의 차이인지. 봉사도 정해진 시간 안에 산문을 나가야 된다는 봉암사. 3시간의 짧은 머무름 속에서 그래도 볼 것은 다 보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정작 깊숙한 곳은 발도 들여 보지 못했는데.



이끼가 가득 낀 바위가 길가에 놓여있다. 바위 하나도 자연이 되기싶은 곳이다. 전각 입구에 놓여있는 돌들. 돌맹이 하나도 돌아다니지 않는 경내이다. 돌절구 하나가 쓰러져 있다. 봉암사에서 본 마음의 한자락 여유이다.  




봉암사의 전각들. 많은 전각들이 있지만 외부인의 출입이 통제되어 있다. 맨 아래 극락전은 보물로 지정이 되어있다. 


보물로 지정이 되어있는 봉암사 삼층석탑과 보물 지증대사 적조탑과 탑비를 모셔놓은 전각(문화재에 대한 글을 다시 쓰도록 하겠습니다. 하나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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