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문화재를 답사하다가 보면, 우선은 그 다양함에 놀라게 된다. 시대적으로 또는 그것을 제작한 장인에 의해서도 다르다. 그런가하면 어느 지역에 있느냐에 따라서도 달라진다. 우리는 흔히 문화를 ‘백리부동풍(百里不同風)’이라 표현한다. 거리가 그만큼 만 떨어져 있어도 바람이 다르다는 이야기다.

이 말은 곧 그만큼의 거리가 있으면, 문화가 서로 다르다는 뜻으로도 사용한다. 결국 지역에 따라 특징적인 문화가 존재한다는 뜻이다. 남원에서 운봉을 향해 가다가 보면 남원을 벗어나는 곳이 주천면이다. 이곳 도로 좌측에 보면 용담사라는 절의 이정표가 보인다. 이정표에는 보물 제42호 용담사지 석불입상이 있다고 적혀있다.


용담사는 어느 시대 절이었을까?

설명에 ‘용담사지 석불입상’이라 쓰여 있는 것을 보면, 예전의 절은 사라지고 없다는 이야기이다. 결국 지금의 용담사는 예전 터에 자리를 잡고 있는 절이란 것을 알 수가 있다. 용담사가 언제 적 절이었는지는 정확하지가 않다. 다만 전하는 말에 의하면 백제 성왕 때 창건된 절이라는 설과, 통일신라 말 선각국사 도선이 창건했다는 설이 있다.

우리가 가장 아쉬운 것은 기록문화가 약했다는 것이다. 기록이 있었다고 해도 수많은 기록들이 찬탈을 당해 사라져 버렸다. 용담사의 경우에도 정확한 기록이 없다보니, 전해지는 전설이나 주변의 유물 등으로 추정을 할 수 밖에 없다. 그저 전하는 일화로 보아 통일신라 때 지어진 것으로 본다.


돌에 새겨진 머리와 몸을 보면 당당함이 엿보인다.

전하는 전설에 의하면 이곳에는 예부터 ‘용담’이라는 저수지가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저수지에는 ‘용 못된 이무기’ 한 마리가 살았다고 한다. 이 이무기는 밤이 되면 여우로 변해 사람들을 자주 해치고는 했단다. 그 이야기를 전해들은 도선국사가 이곳에 용담사라는 절을 짓고 나서, 그 이무기의 행패가 없어졌다는 것이다.

광배와 석불입상이 한 돌에 새겨진 특이한 형태

보물 제42호인 용담사지 석불입상은 광배와 입상이 일석(一石)으로 꾸며졌다. 일반적인 석불의 경우 석불과 뒤편을 빛을 상징하는 광배는 따로 제작을 하는 것이 보편적이다. 그런데 이 석불입상은 커다란 바위를 이용해 한꺼번에 조각을 하였다. 높이가 6m에 이르는 거대한 석불입상은 고려 시대에 흔히 보이는 거불(巨佛)형태의 석불이다.


빛을 상징하는 광배에도 조각의 흔적이 보인다. 받침돌은 자연석을 그대로 사용하였다(아래)
 
이 석불입상을 받치고 있는 받침돌 역시 자연석을 그대로 놓아 만든 것이다. 타원형으로 생긴 돌을 그대로 받침돌로 이용한 점도 색다르다. 이 석불입상의 형태는 거의 알아보기가 힘든 정도로 닮거나 깨어져 나갔다. 그러나 전체적인 형태를 살펴보면, 거불임에도 불구하고 꽤 잘된 작품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다.

당당한 체격에 무게가 있는 모습

이 석불입상은 고려 때에 이 지역에서 많이 보이고 있는 미륵의 형태이다. 머리의 윤곽은 비교적 뚜렷하고, 귀는 긴 편이다. 일반적으로 보이는 미륵입상의 형태와 동일하다. 목에는 삼도가 있으나 뚜렷하게 보이지는 않는다. 다만 어깨까지 늘어진 귀로 보아 삼도가 굵게 표현이 되었을 것이라는 점이다.


법의는 거칠게 표현을 하였으며, 두 손 등은 정확한 모습을 알아볼 수가 없다. 많은 훼손이 되어 있어서 그 형태만 추정이 가능할 뿐이다. 이러한 거불의 조성형태는 고려시대에 나타나는 석불입상의 특징이다. 넓은 어깨와 당당한 체구, 그리고 넓은 가슴과 두터운 표현 등, 강인함을 엿볼 수 있는 석불입상이다.

많은 문화재를 만나러 다니면서 늘 바라는 것이 하나 있다. 제발 이번에 만나게 되는 문화재는 온전한 모습이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하지만 우리 역사가, 그리고 우리의 문화재에 대한 마음가짐이 그렇지를 못했는데 무엇을 바랄 것인가. 그저 오랜 시간 수많은 문화재를 조성해 우리에게 전해 준 조상님들께, 정말로 무릎 꿇어 사죄라도 해야 할 것만 같다.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는 문화사대주의자들이 판치고 있는 나라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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