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천군 지역을 답사하다가 답사하는 중에, 길가에 서 있는 아주 작은 전각이 하나 눈에 띤다. 앞에는 오래되어 바란 안내판 하나가 서 있다. 곁에 서 있는 소나무 몇 그루가 그래도 이 전각이 역사적인 것임을 알려주고 있다. 무슨 전각일까? 궁금한 것도 있으려니와, 이런 길가에 서 있는 전각에 우리가 모를 슬픔이라도 있을까보아 그냥 지나칠 수가 없다.


진천군 진천읍 사석리 775-1에 해당하는 작은 전각. 앞으로는 사석삼거리라는 이정표가 서 있다. 우측으로는 청주와 오창으로 향하는 17번 도로이고, 좌측으로는 진천읍과 진천IC로 나가는 21번 도로이다. 전각 앞으로 가니 ‘일문사충(一門四忠)’이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말 그대로 한 집에서 네 명의 충신을 배출했다는 뜻이다.



쇠스랑충신의 충혼을 배우다


사각형으로 마련한 전각에는 일문사충이란 현판이 걸려있고, 그 안에는 충신들의 정려가 걸려있다. 위와 아래로 두 개의 정려에 걸린 4명은 바로 이 지역에서 충혼을 불태운 분들이다. 조선조 영조 4년인 1728년에 이인좌가 난을 일으켰다. 이들은 청주와 진천을 함락시키고, 이지경이란 자가 자칭 진천현감이 되어 백성들을 괴롭혔다.


이때 사석리에 거주하던 김천주는 이들의 횡포를 참지 못하고, 동생 천장과 아들 성추, 그리고 조카 성옥 등이 마음을 합해, 이인좌의 무리들에게 대항할 것을 결심한다. 그리고 동지들을 규합하여 무기도 없이 이인좌의 무리들과 혈전을 벌였다. 맨손으로 싸울 수는 없는 일이라, 쇠스랑과 괭이 등으로 무장을 하고 진천을 탈환하기로 했다.





이인좌는 남인의 명문출신이다. 1694년 갑술환국 이후 남인들이 정계에서 소외된 것을 불만을 삼은 이인좌는 남인명문가들의 후광을 업고, 영조를 폐하고 밀풍군 탄을 추대하려는 음모를 꾸몄다. 1728년 3월 15일 이인좌는 스스로 대원수라 칭하고 반란을 일으켜 청주성을 함락하였다. 그리고 목천, 청안, 진천을 거쳐 안성에 이르러 도순문사 오명항이 지휘하는 관군에게 패하였다.


이 와중에 진천에서 이지경이란 자가 스스로 현감이라 칭하고 백성들을 괴롭히자, 동생과 아들, 숙질과 힘을 합하여 반란군을 섬멸하자고 뜻을 모은 것이다. 쇠스랑과 괭이 등으로 무장을 한 이들은 진천을 탈환하기 위해 혈전을 벌였으나, 중과부족으로 패배하여 모두 전사를 하였다.


네 분의 충혼 앞에 머리를 숙이다.


정려에는 위편 우측에는 <충신 가선대부 김천주 지려>라 쓰고, 그 옆으로는 <충신 증 가선대부 호조참판 겸 동지의금부사 김천장 지려>라고 적혀있다. 형제가 나란히 정려에 이름을 올린 것이다. 뒤 늦게 이들의 충심을 알게 된 나라에서 정려를 내리고 향제케 하였다. 그 뒤 고종 22년인 1885년에 아들 성추와 조카 성옥도 정려를 내려 함께 병정케 하였다.





밑의 정려에는 우측에 충신 김성추를, 좌측에는 김성옥을 배향하였다. 일문에서 네 명의 충신이 나라를 위해 몸을 바친 것을 알려주는 작은 전각이다. 이 전각은 안내판에 적혀있지 않은 것으로 보아, 문화재 지정은 되지 않은 듯하다. 하지만 세상 모든 것이 어디 문화재로 등록이 되어야만 소중한 것일까? 이 네 분의 나라사랑이야말로 우리가 본받아야 할 마음이란 생각이다.


길가에 서 있는 외로운 작은 전각하나. 쇠스랑과 괭이를 들고 무장을 한 반군들과 혈전을 벌이다가 장렬히 죽음을 당한 이분들의 그 충정이야말로, 지금 이 시대에 새롭게 조명을 해야 할 것이란 생각이다. 이 땅 한 귀퉁이 한 뼘이라도, 이런 충혼들의 뜨거운 피가 서려있기 때문이다.


최신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