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유관순 열사를 보고 ‘유관순 누나’라고 호칭을 했다. 아마 당시 여자아이들이 줄넘기를 하면서 불러대던 유관순 열사의 노랫말 때문일 것으로 생각된다.

'삼월 하늘 가만히 우러러 보며 유관순 누나를 생각합니다.
옥 속에 갇혀서도 만세 부르다 푸른 하늘 그리며 숨이 졌대요.'

꽃다운 나이로 서대문 형무소에서 징역형을 받고 복역 중에도 만세운동을 주도해, 모진 고문 끝에 순국한 열사의 죽음이 모든 국민 전체가 마음이 아팠을 것이다. 그래서 그 죽음이 마음이 아파, 고무줄놀이를 하는 소녀들이 이 노래를 부르며 놀고는 했다.


사적 제 230호 생가지를 돌아보다.

열사의 생가지는 충남 천안시 병천면 용두리 338-1에 소재한다. 이곳은 현재 사적 제230호로 지정이 되어있다. 생가가 아닌 생가지라는 것은, 유관순 열사가 태어나고 자랐던 곳임을 의미한다. 집은 그 당시의 것으로 복원을 했지만, 당시의 집이 아니기 때문이다.

국지성 호우가 어지간히 퍼붓는 날 찾아간 유관순 열사의 생가지. 집 앞에는 커다란 나무가 초가 담장 밖에 서 있고, 사립문 안으로는 ㄱ 자형의 안채와 맞은편에 헛간채가 자리하고 있다. 안채는 광과 부엌, 안방이 있고 꺾인 부분에 대청과 건넌방이 있다. 집이라야 모두 5칸 남짓하다. 맞은편에는 2칸의 헛간채가 자리를 하고 있다.



이 집에서 어린 한 소녀가 나라를 위해 홀연히 떨치고 일어나, 아우내 장터에서 목청을 높여 독립만세를 외치다가 끝내 목숨을 잃은 곳이다. 비는 아직 그치지를 않았지만 차마 우산을 쓰기도 죄스럽다. 집을 한 바퀴 돌아보면서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가 점점 죄스럽기만 해, 고개를 떨어트리고 만다.


안채 광의 문짝은 떨어져 나간채로 방치가 되고 있다.

열사의 집은 독립만세운동의 중심에 서야

천안은 독립을 상징하는 고장이다. 그리고 그 상징의 한 가운데에 유관순이라는, 19세의 꽃다운 나이에 나라를 위해 숨져간 충혼이 있다. 1902년 12월 16일 이곳에서 태어난 열사는, 이화학당에 다니던 중 1919년 3월 1일 기미만세운동에 참여를 했다. 학교가 문을 닫자 고향으로 내려 온 열사는 유림들과 학교, 교회 등을 찾아다니면서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1919년 4월 1일, 아우내 장터에서는 3천여 명이 참가한 호서지방 최대의 만세운동이 벌어졌다. 그리고 그 날 가족들은 일경의 총칼에 무참히 살해가 되었고, 열사는 일경에 체포가 되어 경성복심법원 최종판결에서 3년형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옥중에서도 끊임없이 만세시위를 하다가 갖은 고문에 못 이겨, 1920년 9월 28일 순국하였다.


열사의 동생이 살면서 사적지를 관리하던 집. 지금은 비어있다(위) 아래는 매봉교회

우리는 열사를 몇 번이나 더 죽이려는가?

생가지를 돌아보는데 괜히 마음이 씁쓸해진다. 그래도 사적으로 지정이 되어있는 곳임에도, 관리가 썩 잘되는 것 같지가 않다. 물론 기념관이야 마련이 되어 있지만, 그래도 의미가 더 깊은 생가지임에도 달랑 초가 집 하나만이다.  어린 나이에 나라를 위래 숨져간 열사에게는 참으로 박한 대접을 하는 것 같은 생각이다.

집을 한 바퀴 돌아본다. 안채 끄트머리에 광문은 어디로 떨어져 나갔다. 뒤편으로 돌아가니 성의 없이 마련해 놓은 장독대가 눈에 거슬린다. 물론 그 당시 열사의 집 환경이 커다란 장독대를 가졌을 리는 없다. 하지만 그저 장식용으로 몇 개 진열한 독들이 고작이다. 뒤편에는 그 어느 곳에나 잘 만드는 배수로도 없다.


뒤편에는 독 몇개를 형식적으로 놓은 장독대가 마음을 아프게 한다. 배수로도 제대로 갖추지 않았다(아래)

열사는 1962년 3월 1일 대한민국 3등 공로건국훈장을 추서 받았다. 그러나 모 언론사의 사주는 일제의 징병, 학병을 독려하는 수편의 글을 쓰고도 2등 건국훈장을 받았다. 이것이 대한민국의 현실이라니 참담한 마음이다. 사적으로 지정을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기 보다는, 그곳을 잘 보존해 민족의 긍지를 심어주는데 더 노력하는 자세가 중요한 것이 아닐까? 열사의 생가지를 돌아보면서, 그저 목이 메어오기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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