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은 과거 선비들이 모여서 학문을 닦고, 서원의 뒤편에 모셔진 사당에서 제사를 지내던 곳이다. 서원 중 선액서원이란 임금이 친히 서원의 현판을 써서 하사한 곳을 말한다. 선액서원인 필암서원은 현재 사적 제242호로 지정이 되어 있으며, 전남 장성군 황룡면 필암리 377번지에 소재한다.

 

필암서원은 선조 23년인 1590년에, 하서 김인후(15101560)를 추모하기 위해서 그의 고향인 기산리에 세워졌다. 그 후 1597년 정유재란으로 불타 없어졌으나, 인조 24년인 1624년에 다시 지었다. 효종 10년인 1659년에 사액서원이 되었고, 현종 3년인 1662년에는 현종이 필암서원이라고 쓴 현판을 직접 하사해 선액서원이 되었으며, 1627년에 지금의 자리로 옮겨 세웠다.

 

 

 

 

동춘과 우암의 글씨가 걸린 곳

 

서원이나 향교 등은 공부하는 곳을 앞쪽에 두고, 제사지내는 곳을 뒤쪽에 배치한 전학후묘(前學後廟)’의 형태로 꾸며진다. 필암서원은 휴식처가 되는 확연루를 입구에 두고, 학습을 연마하던 청절당, 그 뒤에 학생들이 생활하는 공간인 동재와 서재가 자리하고 있다. 그리고 그 북쪽으로는 문과 담으로 별도의 공간을 만들어 사당을 두고 제사를 지냈다.

 

청절당의 처마 밑에는 윤봉구가 쓴 필암서원이란 현판이 걸려있고, 대청마루에는 동춘 송준길이 쓴 현판이 달려있다. 또한 확연루의 현판은 우암 송시열이 쓴 것이다. 사당의 동쪽에는 경장각이 있는데, 보물로 지정된 서책이나 문서 등이 보관되어 있다. 이들 자료는 주로 18세기20세기 초부터 전래된 것이다. 서책의 내용은 당시 지방교육과 제도 및 사회, 경제상, 그리고 학자들의 생활상 등을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

 

 

 

 

 

필암서원을 돌아보다

 

필암서원에는 많은 전각이 있다. 입구에 서 있는 수령 200년의 은행나무는 현재 보호수로 지정이 되어있다. 은행나무를 비켜서면 확연루가 보인다. 확연루는 필암서원 입구의 문루로, 귀퉁이에 조각된 귀공포는 엄숙하면서도 고졸한 맛을 풍긴다. 편액은 우암 송시열의 글씨이다. 강당인 청절당은 중앙은 세 칸 대청으로 꾸미고, 좌우에 협실을 두었다.

 

모두 다섯 칸인 청절당은 옛 진원현의 객사건물을 옮겨왔다고 한다. 청절당이란 말은 우암 송시열이 쓴 신도비문 중 청풍대절(淸風大節)’이라는 글을 인용하였으며, 편액은 동춘당 송준길의 글씨이다.

 

 

 

 

세 칸으로 지어진 경장각은 인종이 하사하신 묵죽도의 판각을 보관하고 있는 곳이다. 편액은 정조대왕의 어필이다. 필암서원의 사당인 우동사는 북쪽에 하서 김인후 선생, 동쪽에 고암 양자징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편액은 주자의 글씨를 집자하였다고 한다.

 

이 외에도 필암서원의 경내에 있는 옛 전각들은 제사를 지낼 때 사용하는 건물인 진사청을 비롯하여, 관리인이 살던 한장사, 동재유생이 기거하던 진덕재와 서재유생이 기거하던 숭의재 등이 있다.

 

 

 

 

찬찬히 살피다가 보면 30여분 정도가 소요가 되는 필암서원. 옛 흔적을 느낄 수 있는 필암서원은 입구에 서 있는 확연루를 들어서면서부터 여느 서원과는 분위기가 다르다. 중층 누각으로 지어진 확연루는 입구 오른쪽에 누각으로 오르는 계단이 있다. 누각 안에는 편액들이 걸려있으며, 누각에서 보면 안쪽의 서원 건물과 바깥의 시원한 정경이 한 눈에 들어온다.

 

지난 해 522일 장성을 찾았을 때 들렸던 필암서원. 아직도 그 당시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아마도 선액서원이기 때문인가 보다. 당시의 명필들이 글을 남기기를 즐겨했던 필암서원. 확연루 앞 은행나무가 노랗게 물을 들일 때 다시 한 번 찾아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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