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 이 글은 안양대 국문학과 경임교수인 김용국 교수가 쓴 기고입니다. 김용국 박사는 현재 동아시아전통문화연구원의 이사장이기도 합니다. 세월호의 희생자들을 추모하며 쓴 글임을 밝혀드립니다. 

 

4월을 잔인한 달(April is the cruellest month.)이라한 토마스 엘리어트의 시가 있다. 이 시의 시대적 배경과 의미는 뒤로하고 2014년 이 한 마디가 이렇게 공감된다는 것이 더더욱 슬프고 괴롭다. 내 생애 이토록 참담하고 먹먹한 4월이 있었던가? 이렇게 잔인한 4! 대한국민의 봄은 봄이 아니다. 희망의 계절이어야 할 봄이 절망의 계절이 되었다.

 

그런데 이러한 절망감과 비통함은 세월호의 침몰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사고를 수습하여가는 정부의 대처과정을 지켜보면서 온 국민이 비통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 ‘제발, 반드시, 설마하면서 가슴을 졸이었고 애간장이 녹았다. 전국민이 방관자가 되었고 방조자가 되었다는 트라우마(Trauma)로 괴로운 나날을 보내고 있다.

 

 

리더의 덕목

 

어버이는 자식의 잘못을 자신의 과오로 돌린다. 그러한 믿음이 엄격한 부모의 호된 꾸지람과 체벌을 자식이 달게 여기는 것이리라. 부모와 자식 간에도 이러한 역할은 엄연히 존재한다. 그와 마찬가지이다. 국가와 국민 사이에도 이러한 믿음이 존재해야한다. 대한민국이라는 선박의 선장은 나라의 수반인 대통령이다. 다시 말하여 세월호와 같은 사고의 원인이 그 전의 과정이 어떻게 진행되어왔던 그 책임은 대통령의 것이어야 한다. 그래야 국민이 어버이를 믿고 따라고 꾸지람을 듣더라도 달게 여길 것이다.

 

그런데 국민들은 국가를 믿지 못하게 되었다. 슬프고 슬프다. 작정하고 잘못을 저지르면 범죄다. 결코 예상치 못하였던 사고였다고 하더라도 그 비극의 씨앗은 어디에선가 싹트고 있었고 엄청난 속도로 웃자라 있었다. 이것이 대한민국이었던 것이다. 그러니 이제라도 그러한 사실을 목도하였다면 그 것이 내 부덕임을 인정하여야 했다.

 

 

책임은 내게 있다

 

태종 3(1403) 55(단오), 경상도의 조운선(漕運船) 34척이 바다에 침몰되어 천여 명이 익사하였다. 만호(萬戶)가 사람을 시켜 수색하니, []에 의지하여 살아난 한 사람이 이를 보고 도망하였다. 쫓아가서 붙잡아 그 까닭을 물으니 대답하기를 도망하여 머리를 깎고 이 고생스러운 일에서 떠나려고 한다.”하였다. 임금이 듣고 탄식하기를 책임은 내게 있다. 만 명의 사람을 몰아서 사지(死地)에 나가게 한 것이 아닌가? 닷샛날은 음양(陰陽)에 수사일(受死日)이고, 또 바람 기운이 대단히 심하여 행선(行船)할 날이 아닌데, 바람이 심한 것을 알면서 배를 출발시켰으니, 이것은 실로 백성을 몰아서 사지로 나가게 한 것이다.”

 

이것이 리더의 덕목이 아니겠는가? 군주제의 나라에서도 임금은 이렇듯 자신의 잘못이며 책임이 임금에게 있다고 인정하고 개선하려 노력하는 것, 이것이 자식의 허물을 끌어안고자 하는 어버이의 참 모습이 아니겠는가?

 

 

망양보뢰(亡羊補牢)

 

우리의 속담에 소 잃고 외양간 고친다.’는 말이 있다. 이는 이미 때가 늦어서 소용이 없음을 비꼬아 하는 말이다. 그런데 속담의 근거가 되었던 망양보뢰(亡羊補牢)’에는 우리가 사용하는 의미와는 사뭇 다른 뜻을 갖고 있다. 한 마디로 소를 잃은 뒤에라도 외양간은 고쳐야 한다는 말이다.

 

전국시대(戰國時代) , 초나라의 장신(莊辛)은 양왕(襄王)의 실정을 비판하였다. 양왕은 오히려 그러한 장신을 꾸짖었고, 이내 장신은 초나라를 등지고 떠나야 했다.

 

그런데 장신의 말과 같이 진()나라의 공격을 받은 초나라는 위기에 처하였고, 양왕은 피난을 가야만 하였다. 늦었지만 장신의 말이 옳았음을 깨달은 양왕은 장신을 불러 대책을 물었다. 이에 장신은 토끼를 발견하고 사냥개를 돌아보아도 아직 늦지 않은 것이며(見兎而顧犬 未爲晩也), 양을 잃고 외양간을 고쳐도 아직 늦지 않은 것입니다.(亡羊而補牢 未爲遲也)”라 답하였다. 망양보뢰란 그러니 이미 늦어 소용이 없다는 말이 아니라, 늦었다고 생각할 때라도 허물을 고쳐 훗날 똑같은 실수를 범하지 말아야 한다는 의미였던 것이다.

 

 

허물이 있음을 알았을 때 고쳐라

 

흔히 허물없는 사람이 없다고 한다. 그렇다면 허물을 누가 빨리 고치느냐가 세상살이의 성패를 좌우하는 관건이 되는 셈이다. 누구도 욕먹기를 즐기고 칭찬 받기를 싫어하는 사람은 없다. 그러니 스스로의 허물을 알았다면 재빠르게 고치고자 하여야 한다. 어리석음이란 동일한 잘못을 반복하는 것이지 한 번의 잘못이 어리석은 것은 아니라 여긴다.

 

자신의 허물로 인하여 사람들의 미움을 산 것이 소를 잃은 것이라고 한다면 그 허물을 고치고자 하는 것은 외양간을 고치는 일이 될 것이다. 허물을 고침으로 사람들의 신뢰를 회복할 수 있다면 어찌 허물 있음이 마냥 부끄럽기만 한 일이겠는가?

 

드와이트 D. 아이젠 하워(Dwight David Eisenhower) 대통령이 리더십에 대하여 이렇게 말하였다. “보스는 뒤에서 호령하지만, 리더는 앞에서 이끕니다. 보스는 가라고 말하지만, 리더는 가자고 말합니다. 보스는 겁을 주며 복종을 요구하지만, 리더는 희망을 주며 힘을 끌어냅니다.”

 

잔인하였던 4월을 보내고 아직도 괴로움의 나날을 보내고 있는 오늘, 덕목을 갖춘 리더가 절실히 그립기만 하다. 그 간절한 바람으로 5월을 맞았다. 참된 어버이가 되겠다고 다짐을 하면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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