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어느 한 분야에 푹 빠져 일생을 그 길로 가면서 앞뒤를 안돌아다 본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이런 프로 근성을 갖고있는 사람들을 보고 우리는 흔히 쟁이라는 표현을 한다. 쟁이는 장인(匠人)의 비속어다. 장인은 어느 분야에 우두머리인 사람을 일컫는 말이기도 하다. 이 시대를 살면서 명인(名人)이니 명장(明匠)이니 하는 말을 사용하기도 하지만 그것보다는 어쩐지 쟁이가 어울리는 사람도 있다. 김포 통진두레놀이 상쇠인 윤덕현옹(68, 김포시 통진면 옹정리)이 바로 그런 사람이다.

 

옹정리에서 태어난 윤덕현옹은 어려서부터 곡창지대로 유명한 김포의 소리를 듣고 자랐다. 통진은 여주, 이천과 함께 질 좋은 진상미를 생산하는 곳이다. 너른 평야에서 농사를 주로 짓던 마을에서 태어나 자연히 많은 소리와 두레 풍장 속에서 성장기를 거친 운덕현옹은 군 제대를 하고 나서 바로 마을의 풍장패를 규합해 옹정농악대를 창단했다. 이미 그때부터 쟁이의 길로 들어선 윤덕현옹은 집안을 돌보는 일은 모두 아내에게 맡겨버리고 자신은 당시 남사당의 마지막 잽이들로 구성된 남문영, 송순갑, 이돌천, 최승구 등이 함께 조직한 걸립패에 가담을 했다.

 

좋고도 또 좋구나 금실금실 잉어들아 오염의 감바위 어디다 두고/ 너만 홀로서 에루화 여기 왔느냐// 에헤 에헤이요 우이겨라 방아로구나/ 나니나 난실 나니로구나 방아가 좋소//

 

마을에서 듣고 자란 소리에 쇠가락까지 익힌 윤옹은 몸에 배인 끼를 주체할 수 없어 마을을 떠나 전문 잽이들과 한판 어우러져 전국을 유람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떠돌다가 집으로 돌아온 것이 1982. 1958년부터 돌아다니다 집으로 돌아와 정착을 한 것은 20여년이 훌쩍 넘어서였다.

 

 

걸립패에서는 소고를 치면서 버나를 돌렸다. 남사당패의 버나는 걸립패들의 기예 중에서도 고난이도를 자랑한다. 지금처럼 제작된 버나를 돌리는 것이 아니고 마을에 들어가 물을 한 대접 얻어 마신 대접을 그대로 담뱃대에 말아 올려 돌린다. 가히 그 재주가 지금에 비할 바가 아니다. 그렇게 유랑을 하다가 집에 들어오니 그나마 고향에 있던 농사도 다 사라졌다.

 

집을 나서 유랑을 하는 동안 집안은 점점 더 어려워졌고 큰아이는 21세 때 간경화로 목숨을 잃기도 했다. 지금도 그 여파가 가시지 않았다. 부인이 아들을 잃은 슬픔과 힘든 생활로 인해 중풍이 와서 현재도 수년째 거동을 못해 대소변을 받아내야 한다.

 

부인은 어렵게 일어나 앉아 취재에 응하고 있는 윤덕현옹을 보다가 정확치도 않은 말로 참견을 한다. “집은 아예 거들떠도 안보고 미쳤었어요. 아이는 오늘 내일 하는데 그 때도 학교에 가서 아이들 농악을 가르치고 있었으니아직도 그 서러움이 마음에 앙금 져 있어서인가 남편을 바라보는 눈이 곱지가 않다.

 

윤옹은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위해 오직 한 길로 달려 온 40년 넘는 세월이 참으로 많은 것을 빼앗아 갔다는 생각을 한다. 특히 오랜 동안 집안일을 소홀히 해서 아내에게 미안해 할말이 없다고 한다. 옹정2리 마을회관 옆에 붙어있는 살림집에서 생활을 하고 있는 윤옹은 그동안 자신의 발자취가 배인 사진이며 각종 물건들을 꺼내 놓는다. 한 짐은 될 것 같은 그 수많은 빛바랜 사진이며 상장 등이 한 인간이 한 분야에 온갖 정신을 쏟은 역사를 말해주고는 있지만 그로 인해 가족이 받은 대가가 너무 컸을 것 같다.

 

 

소리를 하라고 하면 어려운 것이 집사람이 저렇게 되고나서 기억이 많이 없어졌어요. 저 사람만 생각하면 마음이 아프고 제가 항상 곁에 붙어있어야 하거든요. 걱정이 많다보니 예전에 그렇게 부르던 방아타령도 이젠 기억이 가물가물 합니다

 

중추절에 적막하야 다자춘에 넋이로다

불탄 자리에 에루화 새 속잎 난다

에헤 에헤요 우이겨라 방아로구나

나니나 난실 나니로구나 니나노 방아가 좋소

좋고도 또 좋구나 모가지 길쑥 황새들아

논길밭길 어데다 두고 너만 홀로서 에루화 여기 걷느냐

에헤 에헤요 우이겨라 방아로구나

나니나 난실 나니로구나 니나노 방아가 좋소

 

통진에서는 모를 한 움큼씩 찌면서 하는 소리와 모내기, 김매기 소리가 있다. 너른 평야에서 농사를 주로 짓는 이곳에서는 자연 그 소리도 환경적인 특징을 갖는다. 논배미가 좁은 곳에서는 소리가 유장하고 길게 끌며 나타난다. 그러나 너른 평야에서는 작업을 몰아 하다가 보니 소리가 흥겹고 빠르게 나타난다. 통진의 김매기는 그래서 흥겨움을 더하고 있다. 타령으로 흥을 더해 농사를 짓는 피로를 잊어가면서 풍년을 구가하는 소리다. 김매기에도 신바람을 낸다. 소리는 자진방아로 넘어간다.

 

여보시오 농부님네 이내 말을 들어보소/ 에헤널널 상사디여/ 한소리는 높이 받고 또한 소리는 가만히 살짝/ 에헤널널 상사디여/ 일심전력 상사하면 곁에 사람 보기 좋고/ 에헤널널 상사디여/ 먼데사람 듣기 좋아 엉덩춤이 절로 나네/ 에헤널널 상사디여/

 

그 소리가 좋아서 그 소리에 미쳐 장단을 익히다 보니 평생 업이 되었고, 그 업으로 인해 남들이 알아주지도 않는 일을 혼자 감당하며 집안 식구들에게까지 대접을 못받고 있지만 윤덕현옹은 그런 것에 개의치 않는다. 어차피 본인이 그 일이 좋아 그 길로 한 평생을 살아왔기에 자신이 그동안 닦은 기량을 전해주고 싶어서 견딜 수가 없다.

 

 

1982년도에 마을로 돌아온 윤옹은 그동안 경기도민속예술경연대회 및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 참가하여 개인상과 최우수상을 받아냈다. 그리고는 김포군의 각 학교를 다니면서 300명이 넘는 학생들에게 통진의 두레풍장과 소리를 전수했다. 1990년도에는 자신이 창단한 옹정농악대를 통진두레놀이로 개명, 1995년 경기도민속경연대회에서 최우수상을 수상했고, 2년 뒤인 1997년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 나가 대통령상을 수상했다. 40년이 넘는 세월을 남들이 뭐라고 하든 아랑곳하지 않고 오직 한 길로만 정진한 결과였다. 1998년에는 통진두레놀이가 경기도 무형문화재 제23호로 지정, 기능보유자로 인정이 되었다.

 

지금도 여러 학교를 다니면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지만 집사람이 저렇게 되고 부터는 소리를 할 수가 없어요. 집사람 때문에 놀란 뒤에 기억이 점점 떨어지고 마음이 편치가 않아서요

 

젊어서 유랑의 길로 집을 나서 제대로 간수를 못한 아내에게 늘 미안한 마음이 들어 그 곁을 한시도 떠나지 못하고 있는 윤덕현옹이 다시 짐을 꾸린다. 서울 놀이마당에 가서 정초 두레놀이를 한바탕 펼쳐야 해서 다음 날 일찍 서울로 올라가야 한단다. 한평생을 두레의 쇠가락에 미쳐서 모든 것을 그 곳에 쏟은 대가가 크기는 하지만 그래도 윤옹이 있었기에 급격히 변해가는 통진의 고층 빌딩 사이로 한가닥 흥겨운 소리가 남아있는 것이 아닐까?

200234일자 경기일보 게재. ·사진/ 하주성(민속연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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