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물로 지정이 된 채제공의 초상화 3

 

아마 우리나라에서 역대 군왕을 제외하고 한 인물을 그린 초상화가 세 점이나 보물로 지정된 경우는, 조선 후기의 문신인 번암 채제공 한 사람뿐일 것이다. 채제공은 10여 년을 정조와 함께 했다. 홀로 재상의 지위에서 그 오랜 세월을 지낸 것이다. 영조가 사도세자를 폐위시키려 하자 채제공은 그에 반대를 했다. 아버지에 대한 효심이 지극한 정조임금이 채제공을 중용을 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지난 달 28일부터 20142월까지 수원시 팔달구 매향동 49에 소재한 화성박물관 특별전시실에서 개막을 한 번암 채제공전. 이곳에 가면 자신의 속한 정파의 주장을 충실히 지키면서, 정조의 탕평책을 추진한 핵심적 인물인 채제공의 초상화 3점을 만날 수가 있다. 이 초상화들은 3점 모두가 보물 제14771-3호로 지정이 되어있다.

 

 

부채와 행낭을 든 시복본

 

수원시 소장 시복본1792년에 그려진 것으로, 채제공이 73세에 그려진 초상화이다. 사모에 관대를 한 옅은 분홍색의 관복 차림에, 손부채와 향낭을 들고 화문석에 편하게 앉은 전신좌상을 그렸다. 초상화의 우측 상단에는 聖上 十五年 辛亥(1791) 御眞圖寫後 承 命摸像 內入 以其餘本 明年 壬子(1792) 이라고 쓰여 있고, 그 아래 그림을 그린 화가는 이명기임을 밝히고 있다.

 

이어서 우측 상단에 채제공이 직접 쓴 자찬문도 있다. 시의 내용을 보면 정조임금으로부터 부채와 향낭을 선물 받은 것을 기념하기 위한 것이다. 선물을 표시하기 위해서 손을 노출시켜 부채와 향낭을 들고 있는 모습으로 그려졌다. 이 시복본은 보물 제1477-1호로 지정이 되어있다. 시복본 초상화는 120x79.8cm이며, 전체 크기는 173x90cm이다.

 

 

사실적인 묘사가 뛰어난 금관조복본

 

보물 제1477-2호로 지정이 된 금관조복본1784년 작으로, 65세 때 그린 초상이다. 초상의 왼편에는 채제공의 자찬문을 이정운(1743- ?)이 썼다. 이 금관조복본은 서양화법을 따른 명암법을 적절히 구사하여 얼굴을 사실적으로 묘사했다. 금관조복을 금박과 선명한 채색, 명암법 등으로 화려하게 표현했다.

 

이 금관조복본은 사실성과 장식성을 어우러지게 하여, 조선 초상화의 뛰어난 수준을 잘 보여준다. 그림을 누가 그렸는지 화가는 밝혀지지 않았으나, 입체감이 두드러진 안면과 옷주름의 표현, 그리고 바닥의 화문석 표현기법으로 볼 때 이 금관조복본 역시 당대의 화공인 이명기가 그렸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금관조복본은 그림부분 145x78.5cm, 전체영정은 202.9x 91.6cm이다.

 

 

부여 도강영당에 모셔진 흑단령포본

 

보물 제1477-3호로 지정이 된 흑단령포본은 오사모에 쌍학흉배의 흑단령포를 입은 전신의좌상이다. 이 흑단령포본은 본래 부여 도강영당에 모셔져 있던 것이다. 그 안면의 기색으로 볼 때 부여본은 앞에 살펴본 73세상과 흡사하다. 안면과 옷주름의 입체감 표현, 투시도법에 의한 화문석과 족좌와 의자의 사선배치는 이명기의 초상화법으로 보인다. 흑단령포본은 그림 크기 155.5x81.9cm이고, 전체길이는 210x94cm이다.

 

이렇게 조선 후기에 그려진 번암 채제공의 초상화는, 조선후기 채제공이 차지하는 역사적 위상을 알 수 있다. 또한 초상화를 그린 화가 이명기의 회화적 수준이 당대 최고임도 알 수 있다. 채제공의 3점의 영정은 조선후기 문인 초상화의 각종 유형을 다 갖추고 있다는 점에서, 유지초본까지 전하여 조선시대 초상화 연구에 학술적 가치도 높다.

 

화성박물관 특별전시실에서 만날 수 있는 보물로 지정이 된 채제공 초상화. 정조시 10년간이나 재상의 위치에 있으면서, 강한 국권을 형성하기 위해 애쓴 정조를 도와 화성축성 등에 혁혁한 공을 세운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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