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제41대 헌덕왕은 조카인 40대 애장왕을 폐위시키고 즉위했다. 당시 숨진 원혼을 달래며 왕의 참회를 돕고, 나아가 나라와 백성의 안녕을 위해서 창건한 사찰이 은해사의 시초가 되는 해안사이다. 운부암으로 가는 길 부근인 해안평이 당시 해안사 절터이다.

 

해안사 창건후 고려 원종 11년인 1270년에 홍진국사가 중창하였고, 1275년 충렬왕 때 원참스님이 중건하였다. 조선시대에도 성종 16년인 1485년에 죽청스님과 의찬스님이 묘봉암을 중창하였으나, 1545년 인종 원년에 큰 화재가 발생해 사찰이 전소되었다.

 

 

이듬해 명종 원년인 1546년에 나라에서 하사한 보조금으로 천교화상이 지금의 장소로 법당을 옮겨 새로 절을 지었다. 이 때 법당과 비석을 건립하여 인종의 태실을 봉하고 은해사라고 이름을 짓게 되었다. 1563년 화재로 소실된 것을 이듬해에 묘진 스님이 중건하였으며, 1589년 선조 22년에 법영대사가 법당을 현재의 자리에 크게 중창하고 사찰의 규모를 확장하였다.

 

임진왜란 때도 전화를 입지 않아

 

그 후 1592년 임진왜란이 있었지만 큰 피해는 입지 않은 듯하다. 숙종 38년인 1712년에는 은해사를 종친부에 귀속시켰고, 1714년에는 사찰 입구 일대의 땅을 매입하여 소나무를 심었다. 지금의 은해사 앞 금포정의 아름드리 소나무들이 그때에 심어진 것으로, 300년 가까운 세월동안 이 자리를 지키고 있는 소나무들이다.

 

그러나 헌종 13년인 1847년에 은해사 큰불이 나 극락전을 제외한 천여 칸의 전각이 모두 소실되었다. 인종의 태실 수호사찰이며 영조의 어제수호 완문을 보관하고 있는 사찰인 은해사를 중창하고자, 당시 영천 군수 김기철이 300궤미의 돈을 시주하였으며, 대구감영과 서울 왕실의 시주가 계속 답지하였다.

 

대한불교 조계종 제10교구 본사

 

그리하여 수만 냥의 재원을 확보하여 3년여 간의 불사 끝에 헌종 15년인 1849년에 중창불사를 마무리 지을 수 있었다. 이 때 지어진 건물이 대웅전, 향실, 고간, 심검당, 설선당, 청풍료, 보화루, 옹호문, 안양전, 동별당, 만월당, 향적각, 공객주 등인데 이 중에서 대웅전과 보화루, 불광의 삼대 편액이 김정희의 글씨로 채워졌다.

 

그후 현재에 이르기까지 은해사는 말사 39개소, 포교당 5개소, 부속암자 8개소를 관장하고 있는 대본사이다. 1943년까지만 하더라도 은해사에는 건물이 35245칸에 이르러 대사찰의 위용을 자랑했지만, 현재 은해사 본사내에는 19개 건물만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자료 은해사)

 

 

소나무가 하늘을 찌르는 금포정을 들어서다

 

은해사를 다녀온 지도 꽤 시간이 흘렀다. 금포정은 소나무와 금강송이 우거진 소나무 숲길이다. 2km나 되는 이 길은 1714년 조선조 숙종 때 일주문 일대의 땅을 매입하여 소나무를 심었다. 수령이 300년 정도에 10m가 넘는 송림이 우거져 있는 길이다. 2007년과 2008년도에는 금강송 1080주씩을 이곳에 식재하였다.

 

은해사에는 보물인 괘불탱을 비롯하여 지방문화재로 지정이 된 대웅전 등 많은 문화재들이 부속암자와 은해사에 소재하고 있다. 은해사 한편에 자리하고 있는 쌍거북바위는 팔공산 갓바위 부처님과 함께 쌍벽을 이루는 것으로, 일제강점기에 왜구들이 의해 훼손이 되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이 주변을 정비하던 중 목이 달린 한 마리를 발견하여 지역 주민들의 고증을 거쳐 현지에 마애삼존불과 함께 복원을 하였다. 은해사 거북바위는 무병장수와 가정의 안녕을 기도하면 좋은 결실을 맺는다고 전해지고 있다. 특히 과거에는 유생들이 이곳에서 기도를 한 후 과거시험을 보기 위해 길을 떠났다고 한다.

 

영천시 청통면 치일리 479에 소재한 천년고찰 은해사. 다녀온 지가 오래되어 기억조차 가물거린다. 답사란 항상 다녀온 후 바로 기록을 해야 하는 것은, 그 느낌을 잊지 않기 위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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